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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파발, 진관동 봄나들이 (금성당, 금암기적비, 숙용심씨묘표 등)


' 구파발 금성당, 진관동 봄나들이 '

진관동 숙용심씨묘표
▲  숙용심씨묘표와 네모난 제단

금암기적비 금성당 샤머니즘박물관

▲  금암기적비

▲  금성당 샤머니즘박물관

 


봄이 힘겹게 겨울 제국(帝國)을 몰아내고 하늘 아래 세상을 따스하고 곱게 어루만지던 4
월 한복판의 어느 볕 좋은 날, 서울 서북부 끝자락에 자리한 구파발(舊把撥)을 찾았다.
예전 주말에 구파발 금성당을 찾은 적이 있었는데, 금성당 건물은 살펴봤으나 건물 안에
담긴 샤머니즘박물관 유물은 구경하지 못했다. 일주일에 딱 이틀(목/금)만 문을 열기 때
문이다. 그렇게 60% 이상 부족한 상태로 금성당과 첫 인연을 지은 후, 다시금 기회를 찾
다가 이번에 다시 그곳을 찾았다.


♠  조선 후기 굿당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구파발 금성당(錦城堂)
- 국가 민속문화유산 258호

▲  활짝 열린 금성당(샤머니즘박물관) 본채와 행랑채

이말산 남쪽 자락이자 은평뉴타운 우물골2단지 한복판에 기와집 일색의 금성당이 있다. 회색
피부의 밋밋한 아파트 숲에서 홀로 고고한 한옥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그는 거의 새집처럼 보
이지만 이래 봬도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늙은 무속용 기와집으로 그 성격에 걸맞게 샤머니즘
박물관까지 겸하고 있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금성당은 세종의 6번째 아들인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을 주신(主
神)으로 봉안한 당집이다. 그래서 집 이름도 금성당을 칭하고 있다.
그는 2째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이 조카인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한 것에 잔뜩 불
만을 품고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걸려서 순흥부(順興府, 경북 영주시 순흥면)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거기서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단종 복위를 작당하다가 또 발각되어 형이 보낸 쓰디쓴 사
약 1사발을 들이키고 죽게 된다. 그때 이보흠도 처단되었으며, 순흥 백성들까지 복위에 가담
했다는 이유로 대부분 학살을 당하면서 순흥 지역은 완전히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순흥 고
을도 강제 폐쇄되어 풍기, 영주에 임시 통합됨)

이후 백성들 사이에서 금성대군과 단종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생겨났고 제와 굿을 지내 그들
의 넋을 달래주었다. (강원도 남부 지역은 단종을 산신으로 추앙하고 있음) 그러다 보니 자연
히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무당들은 영업 차원에서 금성대군을 영험한
신으로 영입하기에 이른다. 하여 서울에는 진관동과 망원동(望遠洞), 월계동(月溪洞) 각심절
마을에 그를 위한 금성당이 지어지면서 서울 토속신의 하나로 굳게 자리를 잡았다.
허나 20세기 중반 이후 무속신앙의 쇠퇴와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1970년대에 망원동과 월계동
금성당이 사라졌으며, 진관동은 개발제한구역에 묶인 탓에 살아남아 계속 굿당의 역할을 수행
했다. 허나 2000년대 중반 구파발 지역에 은평뉴타운이 닦이면서 퇴락된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철밥통 행정당국과 개발업자의 의해 가루가 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다행히 양종승 박사
와 뜻있는 이들이 금성당 구명에 발 벗고 나서면서 간신히 목숨을 이어나갔고 금성당의 가치
를 뒤늦게 깨달은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이 2008년 중요민속자료(국가 민속문화유산)로 지
정하면서 개발의 칼질로부터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된다.

한때 서울시는 그를 은평뉴타운 밖으로 내보내 복원하려고 했으나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인 그
를 옮기는 것은 영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여 제자리에 2010년 복원/정비하고 주변에 작은 공
원을 닦아서 세상에 내놓았다.
비록 복원되어 개방은 되었으나 굿당의 역할은 이미 상실된 상태라 민속촌 한옥처럼 거의 무
늬만 남은 한가한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2016년 5월, 그런 금성당에게 활력을 주는 일이 생
겼다. 바로 양종승 박사가 세운 샤머니즘박물관이 이곳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양종승은 2013년 5월 사재를 털어 정릉동 국민대 남쪽에 샤머니즘박물관을 세웠다. 그는 우리
나라와 우리의 옛땅인 중원대륙, 그리고 히말리야와 몽골의 무속 유물 2만여 점을 수집/보유
하고 있었고, 샤머니즘 관련 서적과 영상/음향자료도 넉넉히 가지고 있었다. 또한 금성당을
없애려던 철밥통과 개발업자들을 참교육시켜 금성당 보존에 크게 공헌을 한 이력이 있어 은평
구청에서 그에게 금성당으로 옮길 것을 제안, 그에 따라 박물관을 이곳으로 가져와 금성당의
완전한 지킴이가 된 것이다.

무속신앙의 현장과 그 신앙을 다루는 전시/교육 공간까지 그에 걸맞는 두 얼굴을 지닌 의미깊
은 현장으로 보유한 유물은 많지만 공간이 좁아서 극히 일부만 꺼내 본채, 행랑, 안채, 본채
뜨락 등에 전시하고 있다.

▲  온갖 무속 그림과 제사, 굿에 쓰이는
제기(祭器), 도구 등으로 정신이 없는
본채 내부

▲  본채에 걸린 풍경물고기
절 이외의 장소에서 그를 보는 것은
참 오랜만인 것 같다.


금성당은 인왕산(仁王山), 평창동(平倉洞) 보현산신각과 더불어 서울 무속신앙의 성지로 1880
년대 이전에 지어졌다. 지역 주민과 무당들이 무속신앙을 벌이고자 지은 공간으로 조선 때 무
악재에서 구파발까지 많은 무속 당집이 있었는데 서울로 들어오는 명/청나라 사신이나 반대로
중원대륙으로 가는 조선 사신의 안녕을 빌고 악의 기운을 없애는 의미에서 굿을 지냈다. 그러
다 보니 금성당은 나라에서 많은 지원을 받았다.
금성대군의 생일인 음력 3월 24일에 마을의 대동단결과 나라의 안녕을 위한 당굿을 열어 그의
넋을 기렸으며 왕년에는 서대문과 왕십리 등 서울에 유명한 무속인과 악사들이 문턱이 마르고
닳도록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뉴타운 개발 이전까지 당지기가 집을 지켰고 굿판도 계
속 이루어졌다.

금성당의 구조는 본채와 안채, 아래채, 대문채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는 금성대군과 여러 신
이 봉안되어 있고, 동쪽에 'ㄱ'자의 안채를 두어 금성당을 관리하는 당지기나 시봉자(侍奉者)
가 생활했다. 안채는 중부지방의 흔한 기와집 형태이나 동쪽 방을 '田'자 형태로 크게 지은
것은 금성당만의 특징이다.
본채에 있던 무신도<巫信圖, 금성도(금성대군의 영정)>와 무구(巫具)류, 제사도구 등은 보존
처리를 위해 대부분 서울역사박물관에 가 있으며 불화(佛畵)의 명가로 유명한 만봉(萬奉)의
제자 조영희가 그린 금성도의 복사본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  금성당 본채와 행랑채

대문채를 들어서면 왼쪽(북쪽)에 본채와 행랑이 있다. 본채는 마루로 이루어져 있어 굿과 제
를 지내기 좋게 최적화되어 있으며 대청 뒤쪽에는 벽감(壁龕)을 두어 금성대군(금성님) 등을
봉안했다.
현재 금성도(금성님) 등 이곳의 오랜 유물들은 서울역사박물관에 가 있으며, 샤머니즘박물관
유물과 금성도 사본이 본채와 행랑채에 담겨져 있다. 허나 그들 내부는 매주 목/금에만 문이
열리며 전시 유물은 때에 따라 다르다. 단 금성당 건물과 뜨락, 안채 서쪽과 마루에 놓인 유
물들은 요일에 상관없이 관람이 가능하다. 본글에서는 무속 유물 일부만 간단히 소개한다.


▲  19세기에 그려진 창부광대씨(왼쪽)와 맹인신장 (본채 서쪽 칸)

창부씨<昌夫氏, 창부대신(昌夫大神)>는 안채 서광대신(廣大神)으로 인기가 높은 광대가 죽어
서 창부씨가 된다고 한다. 풍류와 예능을 관리하는 신으로 광대와 딴따라들이 좋아하는 존재
이다. (창부씨를 모시는 창부거리 굿거리가 수도권에 있음)
맹인신장(盲人神將)은 맹인 점쟁이들과 무당이 모시는 신으로 자손의 번영과 집안 대통, 무병
장수를 도와주는 존재이다. <점쟁이 중 맹인이 많다 보니 자연히 점복신(占卜神)이 됨>


▲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칠성신(七星神, 오른쪽) <본채 가운데 칸>

일월성신(일월신장)은 일신(日神)과 월신(月神)으로 이루어져 있다. 낮과 밤을 상징하는 존재
로 일신은 붉은 동그라미가 있는 관(冠)을, 월신은 하얀 동그라미의 관을 쓰고 있는데 사람들
에게 행운과 수명을 내려준다.
칠성신(북두칠성)은 불교 뿐 아니라 민간신앙에서도 인기가 아주 높은 존재들이다. 인간의 무
병장수와 수명을 관장하기 때문이다. <이것 외에 녹색 두광(頭光)을 지닌 칠성도와 승려 모습
의 칠성도가 따로 있음>


▲  산왕대신(山王大神, 왼쪽)과 삼불제석(三佛帝釋) <본채 가운데 칸>

산왕대신은 천하 명산의 산신령을 일컫는다. 무속 신앙의 가장 중심적인 존재이자 신의 으뜸
으로 굿에서 산신령이 노는 거리를 '큰거리'라고 부른다.
삼불제석은 무속신앙의 일원이 된 불교의 삼존불(三尊佛)로 무속에 걸맞게 고깔을 쓴 승려로
묘사되었는데, 우리 고유의 삼신상이 불교와 무속이 어우러지면서 삼존불로 바뀐 것으로 여겨
진다.


▲  단군왕검(가운데)과 무신, 칠성신(오른쪽) <본채 동쪽 칸>
단군왕검은 옛 조선을 건국한 천하의 시조이다. 정치와 종교를 모두 관장했던
제왕으로 무당들이 애지중지 섬기고 있다.

  ◀  단군왕검 바깥 벽에 자리한 관우(關羽)
관우는 중원대륙의 개허접 소설로 너무 쓸데없
이 권장 도서가 되어 낭비가 큰 삼국지(三國志
)의 주요 인물이다.
문(文)에 공자면, 무(武)에는 관우라고 할 정
도로 중원대륙 애들의 인기가 대단한 무신(武
神)으로 그것들은 관우나 관운장이라 부르지
않고 관공(關公)이라 높여 부른다.

관우신앙은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온 명나라군
에 의해 이 땅에 전파되었는데 점차 전국에 퍼
져나가 무당들이 취급하는 주요 무신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보니 그가 이 땅의 무
신인지 오랑캐 무신인지 무지하게 햇갈릴 정도
로 한국화가 되어버렸다.


▲  집호랑이상과 부적들
나무로 지어진 집호랑이상은 보통 대청마루 밑에 두어 집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비록 호랑이라고 하지만 이 땅의 사람들은 호랑이를 고양이처럼 순하게
만드는 전통이 있어서 귀엽고 특이하게 만들거나 그렸다.

▲  종이로 만든 지화(紙花)로 가득한 부엌
지화는 굿청을 곱게 수식하는 장식물로 신령(神靈)을 상징하기도 한다. 신령이 꽃을
보고 그 위에 좌정해 꽃과 함께 놀기 때문이다. 하여 신령의 모습은 꽃으로
설명되며 그 영험력도 꽃을 통해 인식된다. 하여 신당(神堂)과 굿청에는
항시 꽃이 존재한다. (이 세상에 꽃을 싫어하는 존재는 없음)

▲  부엌에는 종이로 빚어 곱게 색을 들인 지화와 부엌을 지키는
조왕(竈王)이 봉안되어 있다.

▲  황해도(黃海道) 무속을 모아놓은 방

황해도 무속은 신령의 화본(畵本)과 동경(銅鏡), 명두, 대신발, 방울, 부채, 신화(神花), 개(
盖), 신복(神服) 등을 신당에 장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령이 올 수 있도록 만장발과 깃발을
띄운다. 굿판에서는 '만세바지' 굿소리를 하고 황해도 특유의 굿춤을 추며 연극적 재담과 짓
거리를 한다. 그리고 영험한 공수를 내린다.


▲  제주도(濟州島) 무속과 무신도

제주도에는 남자 무당이 유난히 많다. 그들을 '심방','슨방'이라 부르며 경륜이 많은 큰 심방
을 '수심방'이라 하는데, 수심방 문하에는 스승을 도우며 굿을 배우는 '소미'들이 있다. 제주
의 큰굿은 심방 집에서 하는 '신굿'과 민가에서 하는 '큰굿'으로 구분되며, 큰굿에는 우주 모
형의 '당클'을 만들어 신령 세계를 상징화하고 대양 설쉐, 북, 장구, 바라 등의 악기와 신칼,
산판, 요령 등을 사용해 굿소리를 낸다. 그리고 신들을 불러들이는 초감제(初監祭)를 한다.

뒤쪽에 자리한 10폭짜리 병풍은 무신도로 제주 내왓당 신당에 있던 것이다. 원래 12폭이었으
나 남신상 6폭, 여신상 4폭 등 10폭만 남아있으며 원본은 제주대 박물관에 있고, 이곳에 있는
것은 그 모조품이다. 진짜인 줄 알고 멀리서도 왔구나 설레었건만 잠시 허탈감이 나를 진하게
스쳐간다.


▲  충청도 무속을 모아놓은 방

충청도 무속은 의례를 주관하는 사람은 경문(經文)을 구송하는 소리가 구성져야 되고, 고장(
鼓腸)치는 기법이 좋아야 되며, 읊는 경문 사설이 좋아야 된다. 그래서 경청(經廳)을 꾸미는
것은 그 어느 것보다 설경(說經)을 으뜸으로 친다.
설경은 설위설경(設位說經)이라 하는데 이는 무신 역할과 부적의 기능도 한다. 설경에 표현되
는 문양은 신령 얼굴이나 몸체를 상징하는 추상적인 형체들이다. 하여 설경은 신령이 좌정하
는 곳으로 여기며 바람직하지 않은 잡귀나 잡신을 가두거나 침범을 막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  서울 무속을 모아놓은 방

서울 무속은 신당 정면 벽에 여러 족탱화나 무신도를 건다. 그 상단에 신령과 교신한다는 명
두를 매달고 아래쪽 신단에는 단골 손님 자손들의 수명장수를 비는 명다리를 올리고 향과 초
를 피운다. 신당 천정에 종을 매달아 단골이 오면 3번 종을 쳐 신령에게 알리고 명복을 축원
한다.


▲  금성당 안채

본채 맞은편에는 아래채가 있다. 현재 관리사무실로 쓰이고 있는데 그 옆구리를 지나 동쪽으
로 가면 안채 뜨락과 안채 정면이 모습을 보인다.
안채는 금성당을 관리하는 당지기와 시봉자가 머물던 공간으로 지금은 박물관 사무실과 자료
실(교육실), 박물관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  금성당 아래채(왼쪽)와 대문채

▲  도자기와 여러 민속유물이 놓인
안채 마루 (왼쪽이 박물관 사무실)


금성당 주변은 아늑하게 공원이 닦여져 있다. 그 좌우로 은평뉴타운 우물골2단지가 꽉차게 들
어앉아 아파트 속의 이색 공간을 자아내고 있는데 다른 아파트단지와 달리 녹지 공간이 많고
바로 뒤에 이말산이 있어 주변이 그리 번잡해 보이지는 않는다.

* 금성당(샤머니즘박물관)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175-836 (진관2로 57-23, ☎ 02
  -389-6522)


♠  진관동 느티나무와 숙용심씨묘표

▲  진관동 느티나무 4형제 (4월)

▲  진관동 느티나무 4형제 (5월)

금성당을 살펴보고 햇님의 퇴근시간까지 시간이 좀 있어서 숙용심씨묘표와 금암기적비 등 진
관동(津寬洞)의 여러 명소를 덤으로 복습했다.

북한산둘레길 마실길이 신세를 지는 연서로48길과 진관사입구 교차로에서 진관사로 인도하는
진관길이 만나는 3거리에 제법 나이가 익은 느티나무 4형제가 자리해 있다. 이곳은 은평한옥
마을 동부로 2006년 이전에는 밭/논두렁이 펼쳐진 시골이었다. 느티나무 동쪽에 기자촌 입구
에서 진관사로 이어지는 1차선 농로가 있었고, 이들 나무는 진관사를 찾는 사람과 마을 사람
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아낌없이 베풀던 정자나무였다. 허나 개발의 칼질에 주변은 거의 강제
성형을 당했으나 보호수란 신분 덕에 다행히 살아남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들의 나이는 약 260년(1), 260년(2), 140년, 130년 정도로 키는 260년(1)이 16m, 나머지는
13~15m이다. 둘레는 130년 묵은 막내가 3.45m로 제일 굵고 나머지는 2.9~3.1m이다. 진관동의
오랜 명물로 서울시 보호수 12-1호, 12-2호, 12-16호, 12-15호이다. 서울에서 이처럼 오래된
느티나무가 줄지어있는 경우는 거의 없어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높여도 손색은 없어 보인다.

오랜만에 그들 느티나무를 찾으니 주변 수풀과 습지는 거의 푸른 빛을 띄고 있는 반면, 그들
은 4월 말임에도 아직도 겨울 제국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다. 아마도 겨울
잠이 너무 달콤하여 깨어날 시간조차 잊은 모양이다.


▲  느티나무 그늘에 닦여진 곤충호텔(Insect Hotel)

곤충호텔이란 무분별한 농약 사용에 고통 받는 곤충을 위해 지은 대피소이다. 바로 옆이 습지
라 곤충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들의 생활편의와 어린이들의 자연학습을 위해 저렇게 5층 집
을 지어주었다. 하여 개미와 거미 등이 무상 입주해 있으며, 5~9월에는 더 많은 곤충 식구들
이 몰려와 방이 모자를 지경이다.

느티나무 서쪽에는 작은 습지가 있다. 이곳과 진관사계곡 하류, 진관사 주변은 자연생태가 양
호하여 북방산개구리와 도룡뇽, 줄장지뱀, 맹꽁이 등 희귀동물이 의지하고 있다.
인간이 저지른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그들은 이 구석까지 몰리게 되었는데, 북방산개구리와
도룡뇽, 줄장지뱀은 서울시 보호야생동물이며, 맹꽁이는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2
급에 비싼 몸이다. 그러니 그들을 위해 지정된 길로만 움직여야 되며 습지와 계곡, 수풀을 뒤
집거나 괴롭히는 행동은 제발 하지 말자.

* 진관동 느티나무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125-24, 25


▲  은평한옥마을과 진관동 느티나무에서 진관사로 인도하는 길(진관길)

▲  숙용심씨묘표가 은거하고 있는 소나무 언덕

진관동 느티나무 3거리에서 진관사입구 교차로 방면(서쪽)으로 몇 걸음 가면 오른쪽에 '셋이
서문학관'이란 2층 한옥이 있다. 거기서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낮은 철책이 둘러진 야트
막한 동산이 있고 그곳으로 인도하는 오르막길이 손을 내민다. 그 손에 이끌려 그 길을 오르
면 그 정상에 숙용심씨묘표와 제단이 있다.

숙용심씨(淑容沈氏, 1465~1515)는 성종(成宗)의 여러 후궁 중의 하나로 세조(世祖) 즉위에 큰
공을 세웠던 원종공신(原從功臣) 심말동(沈末同)의 딸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영산군을
비롯한 이성군(利城君), 경순옹주(慶順翁主), 숙혜옹주(淑惠翁主)등 2남 2녀를 두었으며, 내
명부(內命婦)의 4품인 숙원(淑媛)까지 올랐다.
1515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나중에 3품인 '숙용(淑容)'으로 추봉(追封)되었다.


▲  숙용심씨묘표(淑容沈氏墓表) - 서울 지방기념물 25호

심씨의 묘역은 우리집(도봉동)에서 가까운 도봉산(道峯山) 무수골에 있었다. 하지만 도봉산
산신도
'내 영역에 그런 무덤이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거릴 정도로 너무 감쪽 같이 사라진
터라 그 정확한 위치는 전하지 않는다. 하여 조선시대 왕족의 무덤 중 거의 흔치 않게 무덤이
날라간 우울한 케이스이다.
산사태나 홍수 등의 천재지변이나 임진왜란이나 왜정 시절에 파괴되어 실전(失傳)된 것으로
보이며, 무덤 앞에 세웠던 묘표(묘비) 역시 500년 가까이 행방이 묘연했다.

이후 한참의 세월이 덧없이 흘러 1999년 6월, 부산일보 동경지사장이자 한일역사공동연구학회
장으로 있던 최성규(崔性圭)가 우연히 왜열도 동경(東京) 미나토구(區)에 있는 '다카하시 고
레키요(高橋是淸) 기념공원'에서 이 묘비를 발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영산군과 이성군파 후손들은 즉각 '묘비환원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왜국 정부
와 동경시에 묘비 반환을 요구했고, 주일(主日) 한국문화원과 한국대사관에서도 적극 그들을
도왔다. 그렇게 1년의 협상 끝에 동경시가 반환에 협조하면서 2000년 6월 16일 비석이 있는
공원에서 후손들과 미나토구청장이 반환 기념행사를 가졌으며, 7월 3일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
왔다.

허나 이 비석이 언제 어떤 경로로 왜열도로 넘어갔는지, 어찌하여 동경의 조그만 공원에 있게
되었는지는 전혀 전하는 것이 없다. 그 진실은 오직 비석만이 알 것인데, 전혀 입을 열지를
않으니 그저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왜군이 훔쳐가거나 왜정 때 넘어간 것으로 여
겨진다.
그렇게 비석을 되찾아 무한 감격에 잠긴 영산군과 이성군 후손들은 영산군 묘역 맞은편 북한
산(삼각산)이 잘 바라보이는 언덕에 자리를 닦아 사라진 묘역을 대신하여 제사를 지낼 제단(
祭壇)을 쌓고 그 위에 이 묘비를 안착시켰다. 그리고 상석과 향로석 등 제사에 필요한 시설을
세워 매년 제사를 지내며 늘 주변을 정화하는 등 각별하게 관리를 하고 있다.


▲  옆에서 바라본 숙용심씨묘표 제단

심씨의 무덤은 거의 영구적으로 사라졌고 묘표에도 그 위치가 나와있지 않다. 그 묘표마저도
다른 나라로 넘어가 자칫 공원의 미아로 그렇게 썩을 뻔했다. 다행히 뒤늦게나마 발견되어 고
국으로 돌아와 아들의 묘역을 마주보고 있는 곳에 둥지를 틀었으니 심씨도 이제 그 한을 풀고
지하에서 편하게 눈을 감았을 것이다.

숙용심씨묘표는 이런 우울한 사연으로 망향의 묘비란 별명을 지니고 있는데, 그와 함께 2005
년 겨울, 동경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서 우리나라를 통해 고향인 함경북도로 돌아간 정문
부(鄭文孚) 장군의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도 다시 되찾기까지 그 과정은 가히 한 편의 영
화와 같았다. 다른 나라로 빼돌려진 문화유산을 되찾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얼마나 많
은 노력과 정성을 쏟아야 되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귀중한 유물이라 하겠다.
이들은 그래도 고국으로 돌아와 거의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일 뿐이
다. 그런 케이스는 아직 흔치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의 수많은 문화유산이 고국을 꿈
꾸며 타국살이를 전전하고 있다. 그들이 우리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음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될 것이며 언젠가는 그들을 싹 되찾아와야 된다. 제일 좋은 방법은 국력을 증강시켜
돈으로 밀어버리거나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 되찾아오는 것이지만 우리 국력에 그것도 쉽지가
않다.
나중에 우리가 지구의 평화와 고토(故土) 수복을 위해 왜열도와 중원대륙, 동남아, 만주를 공
격하여 그들을 점유하게 된다면 그곳에 있는 우리의 문화유산 외에 그들의 문화유산과 보물도
싹 긁어왔으면 좋겠다.


▲  유리막에 소중히 감싸인 숙용심씨묘표
비석이 작고 이곳이 바깥이라 도난의 위험이 늘 도사린다. 하여 두껍게 유리막을
씌워 그를 보호하고 있다. 비석 입장에서는 좀 답답하겠지만 그의 안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으니 이런 걸 두고 필요악이라 하는 모양이다.
(현재는 제단 옆에 맞배지붕 비각을 마련하여 그곳에 비석을 봉안했음)



숙용심씨묘표는 비신(碑身)과 머릿돌(이수)이 하나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졌다. 즉 같은 몸이다.
비신에는 해서(楷書)로 '숙용심씨지묘(淑容沈氏之墓)'라 쓰여 있는데, 글씨의 크기가 깨알 같
이 작아서 눈을 크게 뜨고 봐야 보일 것이다.
비석을 꽂은 비좌(碑座)는 특이하게 2단으로 이루어져 통비(通碑)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2단으로 된 비좌는 이 땅에서 이 묘표가 거의 유일하다. 그러니 그의 가치와 의미는 꽤 남다
른 것이다. 비좌 밑에는 연꽃잎이, 위로는 복련(覆蓮)이 새겨져 있으며 그 측면에는 안상(眼
象)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비석 뒷부분에는 앞면과 달리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다.


▲  숙용심씨묘표 이수(螭首) 앞부분

이수에는 화려해 보이는 무늬들이 잔뜩 새겨져 속세에서 오염된 두 눈을 호강시킨다. 그 무늬
는 꽃잎이나 소용돌이처럼 생긴 구름무늬로 그 무늬 사이로 뿔과 수염이 달린 이무기(반룡)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얼핏 보면 좀 복잡해 보여서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마음을 비우고
천천히 살펴보면 하나, 둘 보일 것이다. 구름 사이를 날아다니는 그의 모습이...

비석의 머릿돌(이수)에 구름무늬가 나타난 것은 조선 초부터로 이곳처럼 구름무늬와 용이 함
께 새겨진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하니 그만의 매력을 가진 개성이 넘치는 비석이다. 이건 지방
기념물에 둘 것이 아니라 국가 보물로 삼아도 손색이 없는 보물이다. 고국으로 돌아온 흔치
않은 사연에 2단으로 된 비좌, 그리고 구름무늬와 용이 같이 새겨진 이수까지, 겉은 조그만
비석이지만 대충 넘기기에는 그의 존재는 너무나 크다.


▲  구름무늬로 가득하여 눈을 빙빙 돌게 만드는 이수 뒷부분
구름무늬가 내소사(來蘇寺) 대웅전의 꽃창살과 많이 닮은 것 같다.

▲  2001년에 마련된 숙용심씨묘표 환원기념비
파리가 능히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를 지녔다. 허나 거의 한자 투성이에
줄 간격도 각박하여 읽기가 좀 고통스럽다. (오늘도 고통받는 나의 두 눈)


* 숙용심씨묘표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126


♠  영조 임금의 옛 미담이 깃든 조선 후기 비석
금암기적비(黔巖紀蹟碑) - 서울 유형문화유산 38호

▲  금암기적비를 품은 비각(碑閣)

구파발역에서 북쪽으로 가면 두 아파트단지(은평뉴타운 9단지, 10단지) 사이로 크게 가림막이
설치된 부분이 있다. 바로 지하철 3호선이 땅속에서 바깥으로 용틀임을 하는 곳으로 3호선 고
가 방음벽 양쪽에는 '진관3로' 도로가 닦여져 있는데 그 길을 쭉 들어가면 '북한산로'와 만나
기 직전 서쪽에 '금암문화공원'이 있고 그 한복판에 나를 여기로 부른 금암기적비가 있다.

지금은 아파트 사이에 자리한 평범한 공원이 되었지만 뉴타운이 들어서기 이전에는 이 일대가
온통 밭과 비닐하우스 천지였다. 금암기적비는 비닐하우스 사이에 좁게 자리해 있었고 비각도
없이 비석과 하마비만 달랑 있었다. 허나 5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주변이 180도 변해버려 이
곳이 2000년 이전에 찾던 그곳이 맞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정말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따로 없다. 비석은 그새 비각이 씌워져 있었고 3호선 고가 구간도 전철 소음을 막고자 방음벽
이 설치되었다.
 
비석이 있던 곳은 조선시대 때 금암발참(黔巖發站)이란 역참(驛站)이 있었다. 조선 22대 군주
인 정조(正祖)가 1781년 서오릉(西五陵)의 일원인 명릉(明陵,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을 참배
하고 돌아오던 길에 금암발참에 들렸다. 그때 친할아버지인 영조(英祖)의 옛 미담을 회상하면
서 그 내용을 글로 적었고 그해 8월 비석을 세웠는데 영조의 미담이란 대략 이렇다.

영조가 연잉군(延礽君)으로 있던 1721년, 부왕인 숙종(肅宗)의 탄신일을 맞이해 명릉을 참배
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오던 중 날이 어두워 금암발참에 잠시 들렸다. 그때 금암발참을 관
리하던 참장(站將) 이성신(李聖臣)에게 민가에서 소를 훔친 도둑을 잡았다는 말을 듣고는 참
장을 불러
'필시 흉년에 춥고 배가 고파서 도둑질을 했을 것이오. 그러니 선처하기 바라오!' 명을 내렸
다. 하여 소도둑은 방면되었고 이튿날 새벽 서울로 돌아가니 세제(世弟, 제왕의 동생으로 왕
위 계승자)로 책봉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후 이 사건은 영조가 재위 52년 동안 선정을
베푸는 징조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  금암기적비의 앞 모습

네모난 비좌(碑座) 위에 검은 오석(烏石)으로 된 비신(碑身)을 세우고 지붕돌로 마무리한 조
선 후기에 흔한 비석 양식으로 높이 약 148cm, 폭 68cm, 둘레 26cm이다. 건강 상태가 양호하
며, 제왕의 어제(御題)와 어필(御筆)이 담긴 비석으로 문학사와 서예사에서 꽤 중요한 자료이
다. 그리고 비석 서남쪽에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어 이곳이 조촐한 성역임을 알려준다. 제왕이
쓰고 내린 비석이 있기 때문이다.

▲  금암기적비의 뒷모습
뒤쪽은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다.

▲  하마비(下馬碑)


하마비는 18세기 후반에 세워진 것으로 그의 꺼무잡잡한 피부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
皆下馬)' 7자가 또렷하게 쓰여있다. 이는 하마 서식지가 아닌 높고 낮은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가란 뜻으로 제왕이 세운 비석이 있는 곳이라 그를 세워 예의와 엄숙함을 강요하고
있다.
허나 시대가 바뀌면서 더 이상 그의 강요를 따를 필요는 없다. 다만 이곳이 공원이라 차량 접
근은 불가능하여 걸어서 지나가야 된다. (아니면 자전거로 지나가던지) 그러니 그의 추상같은
명령은 부분적으로 아직 유효하여 그런데로 체면은 세우고 있다.


▲  슬슬 땅꺼미가 짙어지는 금암문화공원 (오른쪽이 하마비)

정면에 보이는 커다란 가림막(방음벽)이 3호선 고가 구간이다. 전철의 소음을 덜고자 양쪽에
벽을 설치했지만 열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렁찬 소리가 두 귀를 때려대는 건 여전하다. 예전에
18년 살았던 도봉동(道峰洞) 단독주택도 1호선 지상 구간 옆이라 열차 소음이 적지 않은 편이
었는데, 자꾸 듣다 보니 아름다운 멜로디의 자장가처럼 들려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소리가
안들리면 '지하철 고장났나? 내 귀가 망가졌나?' 걱정이 들 정도이다.

금암기적비를 끝으로 진관동 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금암기적비(금암문화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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