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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숭례사 내삼문

숭례사는 돈암서원 존재의 가장 큰 이유를 주는 곳으로 이곳의 사당이다. 서원이나 향교의 중심 건

물 앞에는 내삼문을 두기 마련인데, 보통 내삼문은 가운데 문은 높게, 좌우 문은 키를 낮게 한다. 그

리고 이들 문은 기둥 하나를 두고 붙어있다. 그런데 이곳은 문 사이에 벽을 둬서 완전 남남 같은 특

이함을 주었다.

 

돈암서원이 아무리 속세에 열린 공간이라고 해도 숭례사는 제향일 등 극히 일부날에만 문이 열린다.

하여 그 외에는 이렇게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된다.

 

2. 꽃담장 밖에서 까치발로 바라본 숭례사(유경사)

숭례사는 돈암서원의 중심 건물이자 사당으로 사계 김장생과 김집, 송시열, 송준길이 봉안되어 있다.

숭례사란 이름은 예를 숭상한다는 의미로 군자가 열심히 덕을 닦고 학문을 이루는 곳이란 뜻이다. 별

칭으로 유경사란 이름도 지니고 있는데, 보통은 숭례사로 통한다.

이곳은 4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터를 닦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전면 1열은

툇간으로, 후면 2열은 내부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측면 3칸의 가운데 전면 1칸은 툇간으로 쓰이며,

띠살문 형태의 문을 달았다. 지붕(맞배지붕) 옆면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판을 달았는데, 조성된

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처마 기와에 '숭정육년계유이월일서원'이란 명문이 있어 응도당과 같은 1633

년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숭정은 명나라를 거하게 말아먹은 명나라의 마지막 제왕 의종(

숭정제)의 연호이다.

 

사당 규모는 그리 크지는 않으나 공간의 짜임새가 큰 건물에 못지 않으며, 세부 조각에 장식성이 강한

요소를 응용한 것은 사당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로 보인다.

 

3. 내삼문 앞 (정면에 보이는 집은 전사청, 오른쪽에 뒷통수를 보인 집은 양성당)

 

4. 돈암서원 꽃담장

무지하게 딱딱하고 지루함이 느껴지는 서원에서 이런 꽃담장은 참 신선하다. 그만큼 돈암서원의 위엄

이 대단했고, 서원에 봉안된 4인의 위엄 또한 쩔어서 서원 사당과 그 돌담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5. 장판각

장판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돈암서원의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이곳에는 김장생

의 문집인 '사계전서'를 비롯해 김계휘(김장생의 부친) 시절의 사실을 적은 '황강실기', 김집의 문집인

'신독재전서' 등과 '경서변의','가례집람','상례비요'의 목판이 들어있다.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습기와 벌레의 공격에 대비해 건물과 바닥을 약간 띄워놓았다.

 

6. 돈암서원 향나무(논산시 보호수)

장판각과 정회당 사이에 솟은 향나무는 310년 남짓 묵은 것으로(2019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300살) 높이 8.5, 나무둘레 0.52m의 덩치를 지녔다. 향나무는 보통 제향에 쓰일 향을 충당할

목적으로 서원, 향교에서 많이들 심었다.

 

7. 정회당

정회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집이다. '정회'는 유생들의 수행 방법의 하나로 고

요함을 몸소 실천하며 수행한다는 뜻인데, 김장생의 부친인 김계휘가 후학을 양성하던 집으로 원래

는 이곳이 아닌 대둔산 자락 고운사터에 있었다. 그러다가 1954년 이곳으로 가져와 돈암서원의 몸집

을 한층 살찌워주었다. 건물 가운데 2칸에는 마루방을 두었으며, 우물마루를 깔았다.

 

8. 속세와 서원의 경계를 긋는 돈암서원 뒷쪽 담장

 

9. 의연한 필체의 정회당 현판의 위엄

 

10. 응도당

응도당은 돈암서원의 백미이자 상징 같은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이다. 이곳에서

가장 큰 건물로 강당 역할을 했는데, 여기서는 주로 장수강학(유생들이 심신을 수양하는 것을 장수라

하고 스승과 문답을 주고 받으며 공부하는 것을 강학이라고 함)을 했다.

예를 실천하는 건축 제도의 모델로 제시된 건축 양식에 따라 지어졌다고 하며, 돈암서원의 건물 배치

와 규모는 사계 김장생이 쓴 '의례'와 '주자대전'을 고증해 논산 강경에 있는 죽림서원의 법도를 따라

지었다고 한다.

 

건물 내부는 모두 마루를 깔았고, 옆면에는 비바람을 막는 풍판을 달았는데, 풍판 밑에는 눈썹지붕을

두었다. 처마의 암막새 기와에 '숭정육년계유이월일서원'이란 글이 있어 1633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

이며, 우리나라 서원 건축물에서 가장 큰 편에 속하는 건물로 두고두고 추앙을 받고 있다. 그로 인해

서원 건물 중 별도로 국가 보물의 큰 지위를 누리고 있다. (돈암서원은 국가 사적의 지위를 누리고 있

음)

 

11. 응도당 내부에 걸린 응도당 현판의 위엄

현판 글씨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마치 저 글씨에 깔리면 완전 골로 갈 정도로 말이다. 돈암서원은

원래 인근 숲말에 있었으나 1880년 홍수로 서원 앞뜨락이 침수 피해를 받으면서 1880년과 1881년

사이에 현재 자리로 둥지를 옮겼다. 허나 응도당은 건물이 워낙 커서 감히 옮길 엄두를 못내어 그 자

리에 두어 옛터를 계속 지키게 하다가 1971년에 비로소 이곳으로 가져왔다.

 

응도당이 옛터에서 따로 놀던 시절에는 양성당이 돈암서원의 강당 역할을 했다. 하여 응도당을 이곳

으로 가져올 때 강당 자리에 두지 못하고 부득불 공간이 넉넉한 현재 자리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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