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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돈암서원 정회당

정회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집이다. '정회'는 유생들의 수행 방법의 하나로 고

요함을 몸소 실천하며 수행한다는 뜻인데, 김장생의 부친인 김계휘가 후학을 양성하던 집으로 원래

는 이곳이 아닌 대둔산 자락 고운사터에 있었다.

1954년 이곳으로 가져와 돈암서원의 몸집을 한층 살찌워주었으며, 건물 가운데 2칸에는 마루방을 두

고 우물마루를 깔았다.

 

2. 양성당

양성당은 유생들이 공부를 하던 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중앙 3칸은 전후에

툇마루를 둔 대청이며, 좌우로 온돌방 1칸을 두었다.

1881년 숲말에서 이곳으로 서원을 옮겼을 때 이곳의 중심 강당인 응도당을 가져오지 못하고 양성당

을 가져와 중심 강당으로 사용했다.

 

3. 돈암서원원정비

돈암서원 원정비는 돈암서원의 일기장 같은 존재로 1669년에 양성당 앞에 세웠다. 돈암서원의 창건

이유와 서원 구조, 사계 김장생 부자의 성품과 학문적 업적에 대한 칭송 등이 적혀 있는데, 비문은 송

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옆면에 전서체로 된 제목은 김장생의 증손인 김만기가 썼다.

비석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비좌 위에 대리석으로 된 비신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힌 단출한 형태이다.

 

4. 경회당

경회당은 서원 관리사무소로 살아가고 있다. 문화유산해설사와 서원 관리인이 머물고 있으며, 서원

관련 설명이 필요할 경우 문을 두드리면 된다.

 

5. 돈암서원 응도당

응도당은 돈암서원의 상징 같은 존재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이다. 돈암서원에서 가장 큰

건물로 강당 역할을 했는데, 건물 내부는 모두 마루를 깔았으며, 옆면에는 비바람을 막는 풍판을 달았

는데, 풍판 밑에는 눈썹지붕을 두었다.

처마의 암막새 기와에 '숭정육년계유이월일서원'이란 글이 있어 1633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우

리나라 서원 건축물에서 가장 큰 측에 속하는 건물로 두고두고 추앙을 받고 있다. 그로 인해 서원 건

물 중 별도로 국가 보물의 큰 지위를 누리고 있다. (돈암서원은 국가 사적의 지위를 누리고 있음)

 

6. 돈암서원 외삼문(입덕문)의 안쪽 모습

입덕문은 돈암서원으로 인도하는 외삼문이다. 입덕문이란 이름 그대로 덕으로 들어서는 문이란 의미

를 지니고 있는데, 문은 삼문 형태를 띄고 있으나 가운데만 뚫어서 문을 달았으며, 좌우는 벽으로 막

고 그 안쪽에 작은 방을 두었다.

 

7. 담장에 감싸인 전사청과 그 왼쪽에 잠깐 모습을 드러낸 양성당

 

8. 서원 바깥에 자리한 서원 관련 비석들 (지붕돌 비석부터 이수 비석, 조그만 비석까지)

 

9. 돈암서원을 뒤로 하며

왼쪽에 보이는 큰 맞배지붕 집이 응도당이다.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맞배지붕 2층 누각은 산양루로

2006년에 마련되었는데, 돈암서원에 딸린 기와집 중에서 가장 어린 건물이다.

 

10. 겨울을 맞이하여 휴업상태에 들어간 돈암서원 북쪽 녹지대

 

11. 시커먼 피부의 하마비

하마비는 하마서식지를 알리는 비석이 아닌 여기서부터 무조건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뜻을 담은 비

석이다. 보통 권력과 유학과 관련된 곳에 많이 세우는데, 서원도 그중의 하나라 이렇게 홍살문 옆에

그를 두어 말과 가마를 탄 사람들을 귀찮게 만든다.

허나 세상이 여러 번 엎어지면서 하마비의 위엄은 땅바닥으로 떨어졌으며, 이제는 그의 눈치를 볼 필

요가 없다. 오히려 차에 깔려 쓰러지거나 해코지를 안받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답사객, 관람객들은 홍

살문 전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가게끔 해놓았기 때문에 그의 명은 부분적으로 아직 유효하다.

 

12. 돈암서원의 정문인 홍살문, 그리고 그 옆에 있는 키 작은 하마비

이렇게 하여 돈암서원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10분이면 다 보고 나가지만 나는 구

석구석을 살피느라 1시간은 머물렀다. 서원을 1바퀴 돌고, 다시 복습 차원에서 그리고 빼놓은 것은 없

나 또 돌고, 그렇게 또 돌고 돌다가 이제서야 서원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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