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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봄내음이 가득한 연경당 대문(장락문) 앞

애련정 구역 서쪽 숲에는 연경당이란 너른 기와집이 있다. 사랑채와 안채, 선향재, 행랑채, 농수
정, 반빗간 등을 지니고 있어 궁궐 속의 사대부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1827년(또는 1828
년)에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부왕인 순조와 모후인 순원왕후 김씨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식
과 진작례를 위해 진장각 옛터에 세운 것으로 그 시절 부왕(순조)을 대신해 국정을 살피면서 왕
권 강화를 추구했던 그의 숨은 의지가 담겨져 있다.

조선 궁궐에서 거의 흔치 않은 양반사대부가로 99칸을 넘는 120칸(지금은 109칸 반만 남음) 규
모를 자랑해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큰 집이다. 이렇게 지은 것에 대해서는 효명세자가 사대부가
체험을 하려고 지었다는 설, 순조가 유유자적 지내고 싶어서 지었다는 설, 왕자나 공주의 사저
를 모방해서 지었다는 설 등 말들이 많으나 처음에는 'ㄷ'자 건물과 너른 월대만 지니고 있었다.
이런 구조는 연회나 행사를 하기에 딱 좋다.

 

순조가 효명세자 사망 이후, 여기서 말년을 보냈으며, 헌종 이후에는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
의 어진과 모훈 자료를 보관했다. 1857년 터가 서늘하고 습하여 익종의 어진을 다른 곳으로 옮
기면서 잠시 빈 건물로 버려지기도 했다.

1865년에 크게 증축을 했는데, 이때 사대부가 스타일로 손질된 것으로 여겨진다. 허나 경복궁이
완성되면서 고종은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로 인해 연경당은 바로 진 집으로 버려진다.

 

1884년 갑신정변 때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개화파가 청나라군에게 쫓겨 창덕궁 후원으로 도망을
치면서 고종을 호위해 여기서 잠시 머물렀으며, 이후 고종과 순종이 외국 공사와 사절을 접견하
고 연회를 베푸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왜정 때는 순종이 여기서 오찬을 열고 다과회를 열었으며, 1917년 창덕궁 대화재로 대조전, 희
정당이 소실되자 순종과 순정효황후 윤씨가 잠시 이곳에 거처하기도 했다.

 

120칸에서 11칸 정도가 사라졌지만 건물 대부분이 잘 남아있으며, 왜정 때 순종 내외의 이동 편
의를 위해 애련지 남쪽 의두합 앞쪽을 깎고, 금마문을 넓혀 자동차 통행로를 만들었다. 현재 후
원입구에서 애련정 구역까지 이어지는 너른 길은 바로 이때 확장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연경당의 이름은 '경사스러운 행사를 연행한다'는 뜻이다. 사대부가 스타일로 지어졌기 때문에
궁궐 건물에 그 흔한 단청이 없으며, 농수정을 제외하고는 기둥 위에 공포가 얹혀지지 않은 민도
리 형식을 취하고 있다. 허나 이곳도 엄연한 궁궐 건축물이라 문과 창문, 담장, 벽 무늬 등은 모두
화려하고 섬세하게 꾸몄다.

 

연경당 구조를 보면 솟을대문인 장락문이 대문 역할을 하고 있고, 대문 좌우로 대문간채가 있으
며,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가 나오는데, 동쪽에 솟을대문 스타일의 문은 장양문, 서쪽 부분에
평대문 스타일의 수인문을 두었다. 장양문을 들어서면 사랑채로 쓰이는 연경당 중심 건물과 선
향재, 농수정이 있으며, 수인문을 들어서면 안채로 남녀 공간을 구분하고자 안채와 사랑채 안마
당 사이로 낮은 돌담을 둘렀지만 건물 자체는 이어져 있어서 실내에서 드나들 수 있다.

그리고 안채 뒷쪽에 음식을 만드는 반빗간이 있는데, 안채와 반빗간문은 통벽문으로 이어진다.

2. 연경당 장락문 앞에 깃든 달달한 봄 풍경

연경당은 장락문이라 불리는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된다. 장락문 동남쪽이자 애련지 서쪽에는
연경당에 딸린 네모난 연못이 있으며, 연경당 서쪽으로 취규정, 옥류천 구역으로 이어지는 숲길
이 있다. (이 숲길은 통제되는 경우가 종종 있음)

3. 연경당의 대문인 장락문

대문간채를 좌우에 거느리며 고개를 높이 들고 있는 장락문은 연경당의 대문이다. 장락이란 '오랫
동안 즐거움을 누리라'는 뜻으로 한비자의 공명 편에서 가져온 것인데, 문은 솟을대문 스타일로 문
천정에는 꽤 늙어보이는 장락문 현판이 걸려있으니 이것은 흥선대원군이 쓴 것이다.

4. 솟을대문인 장락문과 대문간채

5. 장락문과 대문간채 안쪽 모습

6. 연경당 사랑채

연경당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홑처마 건물로 5량가 구조를 지니고 있다. 제일
동쪽에 마루 1칸이 있고 그 서쪽으로 대청 2칸과 사랑방 2칸, 마루 1칸이 나란히 이어져 있는데,
서북쪽에 침방 2칸을 두었다.

방과 대청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고, 서쪽 온돌방의 툇마루 앞에는 문이 덧대어져 있으며 대청과
동쪽 온돌방 앞은 막혀있지 않다. 동쪽 마루는 누마루 형태라 아랫쪽에 화강암 돌기둥이 받쳐져
있으며, 서쪽 마루는 기단 위에 바짝 붙어있다.

 

대청에서 온돌방으로 가는 문과 동쪽 누마루로 가는 창문은 가운데에 팔각형 창을 낸 불발기 형
식으로 지었다. 대청 천장은 반자를 설치하지 않아 서까래가 훤히 드러나 보이며 마루 바닥은 우
물마루로 꾸몄다. 서쪽으로 안채와 이어지며, 사랑채 건물 서쪽 끝에 안채와 구역을 나누는 작은
담을 앞/뒤로 설치했다.

뒷마당의 담은 남북축으로 되어있고 문은 1개가 있는데 이름은 우신문이다. 앞마당 담장은 남쪽
으로 내려오다 사랑채 출입문인 장양문 근처에서 서쪽으로 꺾이는데, 그 부분에 안채와 연결되는
정추문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고, 거기서 담은 다시 남북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건물 기단 위로
안채로 가는 나무 쪽문을 두었다.

건물과 연결된 앞마당 담장 앞에는 괴석(수석) 4개를, 서쪽으로 틀어진 정추문 쪽 담장 앞에도 괴
석 1개를 두었으며. 건물의 창호는 띠살이나 누마루 쪽 창호는 화려한 만(卍)자 살이다.

7. 연경당 선향재

사랑채 동쪽에는 선향재가 자리하고 있다. 특이한 모습을 보이며 사랑채가 있는 서쪽을 애타게 바
라보는 그는 고종 시절(1865년으로 여겨짐)에 지어진 것으로 집 이름인 선향은 '좋은 향기가 서린
집'이란 뜻이다.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로 청나라 건축 양식을 가져와서 지었는데, 가운데에 대청 3칸이 있고, 대

청 좌/우로 온돌 2칸을 두었다. 건물 양쪽 끝은 붉은 벽돌로 담장처럼 채웠으며, 벽 중앙에는 회색
벽돌로 만든 동그란 틀 안에 화려한 문양을 넣었다. 그리고 벽 아래로 아궁이를 두었다.

건물 앞쪽에는 오후 햇살 차단용인 차양을 길게 설치했다. 삼끈과 도르래를 달아 위치를 조정할 수
있는데, 차양의 지붕은 특이하게 구리판으로 지어졌다. 차양 안쪽은 나무 판으로 댓대고 나무로 십
자틀을 엮은 형태이며, 건물 위치가 습기가 많아서 수시로 온돌을 달궈서 습기를 단죄해야 했다.
그리고 선향재 뒷쪽(동쪽)에는 4단의 화계를 닦아 꽃과 나무로 화사하게 꾸몄다.

8. 연경당 사랑채(왼쪽 건물)와 선향재

9. 청수정사를 칭하고 있는 행랑채(행각) 동쪽 부분 (사랑채 남쪽)

10. 연경당 사랑채 천정에 크게 깃든 연경당 현판의 위엄

 

11. 청수정사 현판

연경당 사랑채 남쪽 행랑채(행각)에 걸린 현판이다. 청수정사는 맑은 물처럼 정신을 닦는 곳이라는
의미로 연경당 행각의 별칭으로 쓰였다.

 

12. 선향재 현판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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