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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덕궁 칠분서, 삼삼와, 승화루 (왼쪽부터)

후원입구와 함양문 남쪽에는 칠분서와 삼삼와, 승화루라 불리는 기와집이 한 덩어리로 몰려있
다. 이들은 별도의 이름을 지니고 있으나 하나로 연결된 건물로 이들과 주변 숲, 상량정에서 접
근하는 문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하여 후원입구 앞 탐방로에서 그림의 떡처럼 바라보는 것으
로 만족해야 된다. (이들은 늘 금지구역으로 묶여있었음)

 

칠분서와 삼삼와, 승화루는 오래전에 사라진 중희당의 부속 건물로 중희당은 왕세자(황태자)가
살던 동궁의 중심 건물이다. 왕세자의 공간인 동궁은 중희당을 중심으로 칠분서, 삼삼와, 승화루,
그리고 세월이 잡아간 유덕당, 석유실, 자선재 등을 지니고 있었는데, 중희당은 함양문/후원입구
앞 탐방로에 있었다.

동궁의 중심을 이루던 중희당은 1782년에 정조가 동궁용으로 지은 것이다. 그해 그의 장남인 이
양(문효세자, 1782~1786)이 태어났는데, 창덕궁과 창경궁은 18세기 중~후기에 화마가 여러 번
다녀가면서 동궁 역할을 하던 건물이 싹 사라진 상태였다. 하여 문효세자를 위해 중희당을 지었
으며, 바로 여기서 그를 왕세자로 책봉했다.
허나 1786년 문효세자가 불과 4살이란 나이에 요절을 했으며,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성씨 또한 여기서 병사를 했으니 중희당은 시작부터 영 좋지 않은 일들이 연거푸 생
긴 꼴이 되었다.

이후 정조는 이곳을 신하 접견 및 국정을 살피는 곳으로 활용했으며, 순조(재위 1800~1831)는 여
기서 부마의 삼간택을 벌였다.

1827년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부왕을 대신해 국정을 살피면서 중희당을 임시 정당으로 사용
했는데, 그는 여기서 조회를 열고 국정을 보았다고 전한다.

 

1849년 헌종이 중희당에서 승하했으며, 1863년에 고종이 여기서 간단히 즉위식을 가졌다. 또한
명성황후 민씨의 간택과 황태자(순종)의 관례 등 왕실의 여러 행사가 열렸으며, 외국 외교관 접견
장소로 종종 활용했다.

1891년에 고종은 중희당을 옮길 것을 지시했는데, 이후로 그의 행방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경

복궁으로 넘어갔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으며, 창덕궁 또는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왜
정이 쥐도새도 모르게 밀어버린듯 싶다. (왜정이 망국 조선을 엿먹이고자 그런 식으로 무식하게
밀어버린 궁궐 건물과 조선시대 관청, 성곽이 꽤 많음)

 

중희당은 팔작지붕 집으로 동궐도에는 정면 9칸, 동궐도형에는 정면 8칸, 측면 4칸으로 나오는데,
서쪽 끝방은 책을 보관하는 서주로 삼았다. 그리고 그 동쪽 칸에는 마루를 놓았고, 그 다음 방은
온돌, 그 다음 4칸은 대청, 그 다음 칸은 온돌이며, 서쪽 2칸을 제외한 7칸은 툇마루를 지녔다.

중희당 뜨락은 꽤 넓게 다졌는데, 그 뜨락에 측우기와 해시계, 풍기대, 소간의 등 여러 기구를 설
치했으며. 중희당 본채 서쪽에는 소양문이 있었고, 그 서쪽에는 구여문이 있었다.

 

칠분서는 중희당과 삼삼와를 이어주는 'ㄱ' 구조의 복도용 6칸 건물이다. 복합문과 난간을 지니고
있으며, 처마는 홑처마에 공포는 초익공 양식으로 중희당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동쪽으로 2칸을
가면 길이 남쪽으로 꺾이고 거기서 4칸을 더 가면 삼삼와이다. 허나 중심 건물인 중희당이 사라지
고 복도인 칠분서와 삼삼와만 덩그러니 남아있으니 조금은 허전한 모습이다.

 

칠분서 남쪽에 있는 삼삼와는 특이하게 6각형 건물이다. 그 모습처럼 이름과 칭호 또한 독특한데,
정확한 뜻은 딱히 전하는 것은 없다. 다만 건물 이름인 3을 뜻하고 그것이 연이어 있어 6각형 건물
을 '삼삼'으로 표현한듯 싶다. 그리고 건물의 칭호인 '와'는 움집, 굴, 별장, 창고 등을 의미해 서재
나 서고, 휴식 공간으로 삼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동궐도에는 건물을 받치는 석조 기단이 1층
높이 정도로 높았으나 이후 개조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삼삼와와 연결된 승화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2층 누각이다. 원래 1층은 세자의 서고
인 의신각, 2층은 독서와 휴식 공간인 소주합루로 쓰였는데, 헌종 때 부근에 낙선재를 지으면서 승
화루로 이름을 갈았다. '승화'는 '정화를 잇는다는 뜻'으로 많은 서적과 그림을 수집해 그 빼어난 정
화를 이어받는다는 의미이다.

 

승화루서목에 따르면 이곳에 깃든 보관 서적은 3,742권, 글과 그림은 665점에 이르렀다. 허나 왜
정 때 서고의 기능을 잃었으며, 왜정은 순종과 조선 황실의 경호(감시의 목적도 있음)를 이유로 이
곳에 창덕궁경찰서를 설치했다.

1층은 문과 벽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왜정 때 다 뜯겨 오픈된 모습이 되었고, 승화루 앞 기단에는
괴석 3개가 있었으나 그 또한 왜정 때 사라졌다. 낮은 담과 조그만 벽돌문이 자리해 있고, 승화루
뜨락에는 '향천연지'란 작은 연못이 있는데, 큰 돌을 움푹 파서 만든 것으로 '향기나는 샘과 벼루
같은 연못’이란 뜻이다. 이는 맑은 정신으로 학문에 힘쓰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2. 창덕궁 낙선재 (서쪽에서 바라본 낙선재의 외경)

창덕궁 동남쪽 구석에는 낙선재 구역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창덕궁에서 가장 동남쪽 끝이자
창경궁과 맞닿은 곳으로 헌종 때는 창덕궁 궁역, 고종 때는 창경궁 궁역으로 살다가 20세기 이후
에 다시 창덕궁 영역으로 돌아왔다.

 

낙선재는 1847년에 헌종이 그의 후궁인 경빈김씨의 거주 공간으로 지었다. 이곳에는 중희당을 중
심으로 한 동궁 영역인 낙선당이 있었으나 1752년에 화마로 쓰러져 터만 있었다. 이후 헌종 때 그
자리에 집을 짓고 낙선재라 했는데, 낙선재 본채에는 헌종이 종종 머물렀고, 그 옆에 딸린 석복헌
에 경빈김씨가 살았다. 그리고 석복헌 동쪽에 있던 수강재를 낙선재 영역으로 넣어 낙선재 구역을
넓혔다.

 

1849년 헌종이 승하하면서 경빈김씨는 창덕궁을 나왔고, 이후 40년 가까이 빈 집이 되었다. 그러

다가 1884년 이후 고종이 창덕궁에 잠시 머물면서 여기서 신하와 외국 공사/사절단을 접견했으며,

고종의 아들인 영친왕이 왜열도로 넘어가기 전까지 여기서 살았다.

왜정 때는 순종이 이곳에 가끔 머물면서 왜정과 왜국 인사들을 접견했으며, 1917년 창덕궁 대화재

로 이곳과 연경당에서 잠시 머물기도 했다.

 

1926년 순종이 붕어하자 그의 어진을 이곳에 봉안했으며, 그의 계비인 순정효황후 윤씨는 대조전

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허나 공간이 좁아서 1929년 3월 서행각 등 건물 일부를 증축했다.

1950년 6.25로 순정효황후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1953년 휴전 이후 돌아왔는데, 이승만 전대

통령은 창덕궁과 덕수궁 등 조선 궁궐을 모두 국유재산으로 삼으면서 낙선재로 돌아오는 것을 막

았다. 그래서 정릉동 인수재에서 잠시 머물다가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나면서 비로
소 낙선재로 돌아오게 된다.

허나 조선 궁궐에서 그들에게 허용된 공간은 오직 낙선재 뿐이었으며, 그러다보니 나라를 말아먹
은 몰락한 대한제국의 황족들이 여기서 말년을 보냈다. 즉 조선~대한제국 황족들의 마지막 공간이
었다.

 

순정효황후 외에 고종의 막내 딸인 덕혜옹주가 1962년에 들어왔고, 1963년에는 영친왕(의민태자)

과 이방자 부부가 들어왔는데, 낙선재 본채는 영친왕 부부, 석복헌은 순정효황후, 그리고 수강재는
덕혜옹주가 머물렀다.

순정효황후는 1966년, 영친왕은 1970년에 사망했으며, 덕혜옹주와 이방자도 1989년에 차례로 가
면서 낙선재는 사람 냄새가 사라진 빈 집이 된다.

이후 1990년대에 낙선재의 증축 부분을 철거하여 조선 후기 모습으로 복원했으며, 2005년 7월 영
친왕의 아들인 이구가 사망하자 그의 빈소를 이곳에 설치하면서 잠시 사람들로 북적거리기도 했다.


낙선재의 '낙선'은 '선을 즐긴다'는 뜻으로 맹자에 '인의와 충신으로 선을 즐겨 게으르지 않는 것을
천작이라고 한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3. 서쪽에서 바라본 낙선재의 외경

낙선재는 후원에 있는 연경당과 비슷한 양반사대부가의 모습으로 궁궐 침전의 기능도 지니고 있
다. 헌종은 이곳에 머물면서 경빈김씨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종종 추사 김정희를 불러 그와 학
문을 교류하기도 했다.

이곳은 오랫동안 금지구역으로 꽁꽁 묶여있다가 근래에 속세에 해방되었는데, 낙선재 구역이 모
두 해방된 것은 아니며 낙선재와 석복헌, 수강재, 그리고 그 남쪽의 너른 공간만 개방되었다. 그리
고 나머지 상량정과 한정당, 취운정, 낙선재~석복헌~수강재 꽃계단 윗쪽은 금지구역으로 묶여있
어 크게 아쉬움을 준다.

 

4. 창덕궁 중심부에서 낙선재로 인도하는 산책로 (서쪽 방향)

진달래가 강인한 협동심으로 화사하게 연분홍 피부를 드러내며 봄의 감성을 크게 돋군다.

 

5. 낙선재의 외경

낙선재 뒷쪽 언덕에 보이는 6각형 건물은 상량정이다. 상량정과 그 동쪽에 자리한 한정당, 그리고
서쪽에 있는 승화루, 삼삼와, 칠분서 식구들은 모두 금지된 공간이다.

 

6. 꽃계단(화계) 언덕 위에 자리한 짙은 숲과 상량정 (저 숲속에 승화루와 삼삼와가 있음)

 

7. 낙선재 (낙선재 본채)

낙선재 구역의 중심 건물인 낙선재 본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겹처마 이익공 양식의 팔작지붕
집이다. 서쪽 누마루가 남쪽으로 1칸, 동쪽 방이 북쪽으로 2칸이 더 있어 총 15칸을 이루고 있는데,
집 서쪽과 남쪽으로 계단을 두었다.

누마루 하단은 주초석을 놓았고, 장귀틀 하부에 낙양 모양을 내었으며 누마루가 끝나는 부분의 하
단은 얼음조각무늬로 장식했다. 그리고 용마루과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기와로 마감했으며, 양반
가 스타일로 지었기 때문에 궁궐에 그 흔한 잡상과 단청을 하지 않았다.

 

서쪽 끝에 누마루가 정면 1칸, 측면 2칸 등 2칸 규모로 있고, 그 뒤로 온돌방이 있으며 마루와 온돌
방 사이에는 둥근 모양의 문을 내었다. 그리고 그 동쪽으로 대청 2칸, 온돌방 2칸, 마루방, 창고가
있으며 대청과 온돌방 전면에는 툇마루가 있다. 동쪽 온돌방과 마루방 북쪽에는 온돌방이 2칸 더
있었는데, 이곳을 통해 석복헌과 실내로 연결되었으나 지금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없다.

정면 동쪽 끝에는 작은 문이 있으며, 그 문을 지나면 서편에 또 문이 있는데 양쪽 기둥을 전벽돌로
쌓고 거기에 판장문을 달았다. 이 문을 들어서면 낙선재와 석복헌 뒷뜰과 꽃계단(화계)이 나온다.
낙선재 꽃계단은 꽤 아름답기로 명성이 자자한데, 특히 봄풍경이 일품이다.

꽃계단 앞에는 전돌로 다진 문과 담장, 굴뚝, 괴석, 석지 등을 두어 아기자기하게 꾸몄으며, 낙선재
동남쪽으로 작은 문이 있어 그 문을 지나면 행랑채이고, 그 행랑에 난 문을 지나면 석복헌으로 이
어진다.

 

8. 빛바랜 낙선재 현판

청나라 문인인 섭지선(1779~1863)의 글씨이다.

 

9. 보소당 현판 (낙선재 본채 내부)

보소당은 낙선재 본채의 별칭으로 헌종의 당호이기도 하다. '보소'란 송나라 시인인 소식(소동파)
을 보배처럼 여긴다는 뜻으로 헌종은 그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던 모양이다.

 

10. 낙선재, 석복헌 뒷뜰 꽃계단과 그 위에 들어앉은 한정당

낙선재과 석복헌 뒷뜰 꽃계단은 4단으로 싹둑 다듬어져 있다. 그 꽃계단에 온갖 화초와 굴뚝, 괴석
등을 두어 화사하게 꾸몄는데, 그 꽃계단 윗쪽에 한정당이 높이 자리해 낙선재 중심부를 굽어본다.

 

한정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으로 딱히 기록은 없으나 1917년 이후에 지어
진 것으로 여겨진다. '한정'이란 '한가롭고 고요하다'는 뜻으로 문은 창호지가 아닌 유리로 되어 있
으며, 기단의 바닥은 독특하게 서양식 타일이 입혀져 있어 20세기 초기 궁궐 건축물의 변화된 모습
을 보여준다.

 

낙선재~석복헌 꽃계단과 한정당은 금지된 공간이라 이렇게 밑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되
며, 한정당과 그 옆에 있는 상량정은 낙선재 구역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낙선재는 물론 돌담 너머로
창경궁까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11. 석복헌~수강재 꽃계단과 굳게 잠긴 취운정

낙선재~석복헌~수강재 뒷쪽으로 꽃계단이 달달하게 닦여져 있는데, 수강재 뒷쪽 꽃계단 위쪽에는 취운정이

문을 굳게 걸어잠구며 혼자만의 사색을 즐긴다.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에 자리한 취운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으로 1686년에 지어졌다.

낙선재 구역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원래부터 낙선재와 관련이 있는 집은 아니었으며, 건물 현판은 사라지고

없지만 기록을 통해 그를 취운정으로 보고 있다.

 

숙종이 즐겨찾기 했던 곳으로 다른 정자와 달리 겨울에도 머물 수 있도록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정자 동/

서/북쪽에 담장이 둘러져 있고, 서쪽과 동쪽, 동남쪽에 작은 일각문이 있는데, 서쪽 문은 한정당, 동남쪽 문

은 수강재, 그리고 동쪽 문은 창경궁 함인정으로 이어진다.

 

'취운'이란 '푸른 구름'을 뜻하는데, 낙선재 방향인 서쪽으로 돌담이 둘러져 있어 창덕궁, 낙선재와 철저히

구분된 다른 공간처럼 보인다. 한때는 창경궁의 변방으로 있기도 했으나 지금은 창덕궁의 변방으로 살아가

고 있으며, 위치가 딱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선이라 창경궁 구역으로 봐도 딱히 이상할 것은 없다.

(취운정과 석복헌~수강재 꽃계단은 금지구역으로 묶여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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