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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맞이 광주 대촌동, 칠석동 나들이 ~~~


▲  칠석동 은행나무


 

울 제국이 드디어 무너지고 봄이 천하 평정에 열을 올리던 3월의 끝 무렵, 남도의 중심
지 광주(光州)를 찾았다. 광주 지인의 초청으로 간만에 가게 되었는데, 그는 자연과 문화
유산에 두루 정통하고 숲과 자연을 강의하는 교수로 꽤 저명한 분이다. 그런 이의 초청을
받았으니 본인 입장에서는 그저 영광스러울 뿐이다.

아침 일찍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4시간 여를 총알처럼 달려 광주역에 발을 내린다.
거기서 지인분 부부를 만나 전남대와 중외공원으로 이동하여 남도 매화(梅花)와 산수유를
구경하고 전남대 북쪽에서 남도 정식으로 며칠을 굶어도 끄떡없을 정도로 가득 배를 채웠
다. 그렇게 점심을 먹자 그들은 광주 답사를 시켜주겠다며 내가 희망하는 곳의 하나인 대
촌동으로 흔쾌히 인도해주었다.

대촌동(大村洞)은 광주 남구(南區)의 일원으로 도심과 가깝지만 동네 전체가 전형적인 시
골로 평야 등의 경작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또한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아가던 시절부터
많은 문인들이 집이나 정자를 짓고 살면서 포충사와 괘고정수, 양과동정, 고씨삼강문, 칠
석동 은행나무, 부용정, 고원희가옥 등 고색의 명소를 무수히 간직하고 있다.
이중 제일 먼저 포충사를 찾았는데 이곳은 별도의 글에서 소개하도록 하겠으며, 여기서는
괘고정수와 고씨삼강문, 고원희가옥, 칠석동 은행나무, 부용정 등을 다루도록 하겠다.


 

♠  광산이씨 이선제(李先齊)의 후손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600년 묵은
왕버들, 괘고정수(掛鼓亭樹) - 광주 지방기념물 24호

충사 북쪽 만산마을 입구에는 괘고정수라 불리는 거대한 나무가 있다. 남부 지방은 산수유
와 매화꽃, 벚꽃 등이 이미 만발을 넘어서고 있는데, 나무들은 아직도 다 쓰러져가는 겨울의
눈치를 보며 벌거숭이 모습으로 완연한 봄을 열망한다.
처음에는 느티나무나 은행나무인줄 알았는데 안내문을 보니 왕버들이라고 한다. 버들 중의 왕
이라는 왕버들이 저렇게까지 자랄 수가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인데, 잎이 어느 정도 붙으면
나무 구분이 가능하나 한결같이 벌거숭이 상태에서는 일반인들은 이게 느티나무인지 버들인지
구분이 쉽지 않다.

이 왕버들은 조선 초기 문신으로 광주 원산동이 고향인 이선제(1389~1454)가 심었다고 전한다
. 나무의 나이는 550~600년 정도로 여겨지며, 높이는 15.4m, 가슴 높이 둘레가 1.7m, 수관(樹
冠) 너비는 13m 정도이다. 
이선제는 광산이씨 집안으로 자는 가부(家父), 호는 필문(
畢門)이다. 권근(權近)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419년
증광시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1423년 고려사(高麗史)를 개수할 때 사관(
史官)으로서 정도전(鄭道傳) 등이 편찬한 고려사가 당시 이색(李穡), 이인복(李仁復)의 금경
록(金鏡錄)를 바탕으로 작성해 사실과 다른 것이 많음을 지적하며 원전(原典)을 따르자고 주
장했다.
1431년 집현전 부교리로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이 되어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병조참의
(兵曹參議)와 강원도관찰사, 예조참의 등을 거쳐 1448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이후 정창손(鄭昌孫), 김종서(金宗瑞) 등과 '고려사'를 개찬(改撰)했으며 예문관(藝文
館) 제학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선제는 이 나무를 심으면서 나무가 죽으면 가문도 망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과거에 붙으면 이 나무에 북을 걸고 축하 잔치를 벌였는데, 그 연유로 괘고정
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곳에 괘고정이란 정자(亭子)가 있었던 것은 아니며,
그의 이름이 괘고정이다. (나중에 혼란을 막고자 나무를 뜻하는 '樹'를 붙임)


1589년 이선제의 5대손인
이발(李潑)이 정여립(鄭汝立) 사건에 연루되어 본인과 가족들이 처
단되자 나무가 비실비실 말라죽기 시작했다고 하며, 그때 이선제의 관직도 삭탈당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자 이발의 억울함이 밝혀졌고, 나무도 그 한을 풀었는지 이발이 죽고 300
여 년이 흐른 19세기 후반에 다시금 정신을 차리며 살아났다고 전한다. 이렇게 광신이씨 집안
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나무로 그 집안에서 애지중지 관리하고 있으며, 여기서 서북쪽으로 조
금 들어가면 이선제의 부조묘(不祖廟)와 묘역이 있어 이 일대가 이선제 집안의 성지(聖地)나
다름이 없다.

* 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579-3


▲  옆에서 바라본 괘고정수의 위엄

▲  슬슬 기지개를 켜는 원산들
영산강의 지류인 대촌천의 물을 먹으며 올해도 풍년 예감을 꿈꾼다.


 

♠  고경명(高敬命) 집안의 충절을 기리고자 세운
고씨삼강문(高氏三綱門) - 광주 지방기념물 12호

제봉산(霽俸山, 164m) 서쪽에 자리한 압촌동(鴨村洞)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제대
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한 제봉 고경명(霽俸 高敬命, 1533~1592)이 살던 곳이다. 그의 집터에
는 그 후손이 왜정(倭政) 초기에 지은 기와집(고원희 가옥)이 있으며, 마을 입구에는 고경명
일가의 충절을 기리고자 나라에서 세운 고씨삼강문이 자리한다.
또한 마을을 서쪽에 품은 제봉산은 고경명의 호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경명이 어린 시절 뛰어
다니던 산이라 동네와 산 일대에 온통 고경명의 체취가 진동을 한다. 근래에는 고원희 가옥의
일부를 손질해 닦은 광주콩종합센터가 호남 지역 콩의 성지(聖地)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으며,
마을 북쪽에는 광주국제영어마을이 들어서 이 땅의 아주 몹쓸 전염병인 영어 사대주의(事大主
義)에 쓸데없이 일조하고 있다.

압촌제(鴨村堤)를 바라보며 자리한 고씨삼강문은 이 땅에 흔한 정려각의 하나로 고경명과 그
의 일가의 충절을 뼛속 깊이 기리고자 만든 것이다. 1충(忠), 3효(孝), 2열(烈), 1절의(節義)
등 7명의 정려(旌閭)가 봉안되어 있는데, 여기서 1충은 고경명, 3효는 그의 아들인 고종후(高
從厚), 고인후(高因厚), 손자 고부금(高傅金)이며, 2열은 고경명의 딸인 노상룡(盧尙龍)의 부
인, 질부인 고거후(高居厚)의 처 광산정씨(光山鄭氏), 1절은 고경명의 동생인 고경형(高敬兄)
이다.

고경명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남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북쪽으로 가다가 충남 금산
(錦山)에서 무모한 전술로 의병을 다 말아먹고 전사했다. 그의 맏아들인 고인후는 금산 전투
에서 살아남아 귀향했으며, 1593년 다시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晉州城) 전투에 참여했으나 성
이 함락되자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2째 아들인 고종후는 금산에서 아버지와 함께 전사했으며, 고경명의 손자인 고부금은 효자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2열에 해당되는 고경명의 딸과 고거후의 처 광산정씨는 정유재란(丁酉再
亂) 때 왜군에게 잡히자 자결했으며, 1절에 해당되는 고경형은 진주성 싸움 때 성이 함락되자
조카인 고인후와 함께 남강에 뛰어들었다.

이들이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은 것은 1595년부터로 고경명과 고경형 형제, 고종후/인후 형
제가 제일 먼저 정려되었고, 고경명의 딸이자 노상룡의 처는 1597년, 고부금은 1655년, 고거
후의 처 광산정씨는 1844년에 정려되어 바로 그해에 정려각이 지어졌다.
정려각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사방에 홍살을 설치해 내부를 지키고 있고,
앞뒤 2열로 7명의 정려 현판을 달았다. 건물 밖은 돌담을 둘렀고, 바로 옆에는 고씨 집안의
제각(祭閣)인 추원각(追遠閣)이 자리해 그 집안의 자랑이자 보물인 삼강문을 지킨다.

* 고씨삼강문 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 산14 (압촌길66)

▲  태극마크가 그려진 고씨삼강문 정문

▲  조촐한 모습의 고씨삼강문

▲  고경형의 정려

▲  고부금의 정려

▲  고인후의 정려

▲  고종후의 정려

▲  고경명의 딸이자 노상룡의 처 정려

▲  고거후의 처 광산정씨의 정려


▲  고씨삼강문의 주인으로 추증 관직이 제일 많은 고경명 정려

▲  고씨삼강문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추원각
장흥고씨 집안의 제각(祭閣)이다.

▲  평화로운 전원 분위기의 압촌동 - 고씨삼강문과 고원희가옥, 제봉산,
광주콩종합센터 등의 명소를 간직하고 있는 시골 마을이다.

▲  고원희 가옥(광주 지방문화재자료 8호) 외경

고씨삼강문에서 동쪽으로 2분 남짓 들어가면 그 골목의 끝에 고원희가옥이란 기와집이 소나무
숲을 병풍으로 두르며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 집은 이름 그대로 고원희란 사람의 주택으로 고경명의 옛 집터이기도 하다. 그의 후손들은
계속 이곳에 살았는데, 옛집이 낡아서 무너질 지경에 이르자 1917년에 고원희의 아버지인 고
종석(高琮錫)이 지금의 집을 지으면서 300년 넘게 숙성된 고색의 때는 싹 날라가고 만다. 허
나 사람도 살아야 되니 그건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다. 비록 집은 새로 갈았으나 고경명이
살던 옛 터전을 계속 지키고 있으니 그것으로도 의미는 충분하다.

새집 이전에는 이 지방의 유서 깊은 고택(古宅)답게 건물이 꽤 많았으나 지금은 대문과 사랑
채, 안채, 곳간채, 사당 등이 남아있어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2012년 가옥의 서쪽
부분을 광주광역시와 저절로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 같이 만든 광주콩종합센터에 떼어주면서 면
적이 더 줄었다.

현재 집은 고원희씨 일가가 살고 있다. 결과는 완전 시궁창이나 임진왜란 때 호남 최초의 의
병이란 타이틀을 쥐고 있는 고경명의 후손이지만 왜정과 해방, 현대(現代)라는 임진왜란보다
훨씬 험난한 세월의 흐름을 거치면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왜정 때는 집안에서 뜻밖에 친
일파가 나와 형제 간의 다툼이 생겼고 해방 이후에는 우익과 좌익의 대립으로 집안이 쪼개졌
다.
지금까지도 집안은 안정되지 못하여 다른 일가들은 모두 외지로 나가고 고원희 일가만 선조의
터전을 지키고 있다. 가옥 내부를 둘러보려면 그에게 허가를 받아야 되나 우리는 굳이 내부는
들어가지 않았다.

▲  고원희가옥 돌담과 대문

▲  광주콩종합센터에서 바라본 고원희가옥

집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곳간채가 나타난다. 대문 옆에는 차량을 위해 담장을 트고 완전
히 개방된 문을 냈으며, 안마당을 사이에 두며 안채가 있고 그 오른쪽에 부조묘(不祧廟)라 불
리는 사당을 두었다. 현재 가옥은 1917년에 싹 갈았지만 부조묘는 이전 것을 그대로 쓰고 있
어 여기서 그나마 오래된 건물인데, 고경명과 고종후, 고인후를 봉안하고 있다.
여기서 부조묘란 나라의 공이 있는 사람의 신위(神位)를 봉안한 특별한 사당으로 보통 조상의
신위는 4대가 지나면 무조건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된다. 허나 부조묘는 그럴 필요가 없는 불
천지위(不遷之位)의 특권을 누린다. 이런 사당은 제왕의 허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17년에 지어졌음을 알리는 상량문(上樑文)
이 있다. 근데 골 때리는 것은 조성 시기에 대한 표현인데, '숭정기원후 오갑정사 윤이월초
구일(崇 禎紀元後 五甲丁巳 閏二月初 九日)'이라 쓰여있다. 여기서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제왕인 의종<毅宗, 숭정제(崇禎帝)>의 연호이다.
명(明)에 대한 지극한 사대주의를 벌이며 아시아의 호구 약소국으로 온갖 개망신을 당하며 살
아온 조선, 단군(檀君)이 세운 조선(고조선)은 대륙까지 호령했던 큰 나라였으나 1392년에 세
워진 조선은 그 반대였다.
1644년 명나라가 망한 이후, 청나라 제왕의 연호 대신 숭정이란 연호를 계속 우려먹으며 명나
라를 쓸데없이 그리워했는데, 심지어 17세기 중반 명나라의 재건을 꿈꾸며 중원대륙 남부에서
난을 일으키다 청나라에게 개털린 남명(南明)의 제왕 영력(永歷, 1646년부터 시작됨)의 연호
까지 썼다. 물론 청나라에 반감도 명과 남명의 연호를 쓰게 하는데 한몫했다.

고종이 황제 위에 오른 1897년 이후로는 더 이상 숭정이란 이름을 쓰지 않은 줄 알았더만 왜
정 때도 그 쾌쾌묵은 숭정으로 연대(年代)를 표시한 것이다. 개화기 이후 양력(陽曆)이 들어
와 그 아니꼬운 왜왕의 연호 대신 양력이나 육십갑자(六十甲子)로 표시하면 될 것을 어찌하여
그 염병할 명나라 사대주의의 더러운 산물인 숭정 기원후~~~를 써야 했는가..? 집을 새로 지
었다는 고종석도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대주의가 팽배했던 조선 후기의 그 흔한 우둔한 유생
의 하나였던 모양이다. 아니 왜정 때까지 명나라의 썩어빠진 연호를 꼭 써야 했는가? 그것을
들으니 이 집에 대한 정덜미가 싹 떨어지다 못해 칵~ 침이 뱉고 싶어진다.

* 고원희가옥 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 99 (압촌1길 12)

▲  차량 출입문에서 바라본 가옥 내부

▲  고원희가옥 앞쪽 돌담길과 정자


▲  담장 너머로 바라본 부조묘
고경명과 고종후, 고인후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단청을 곱게 입혀서 그런지 새 건물처럼 보인다.

▲  고원희가옥 뒤쪽 제봉산 소나무숲

고원희가옥 뒤쪽에는 소나무숲이 우거져 솔내음을 진하게 우려내고 있다. 이곳에는 의자와 평
상이 여럿 설치되어 있고 나무 그늘이 햇살을 막아주고 있어 소풍이나 나들이 쉼터로도 아주
좋은 곳인데, 유치원과 초등학생들의 숲/자연 학습 공간으로도 쓰이고 있으며, 여기서 산길을
따라 제봉산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  바람의 차디찬 소리만이 살포시 적막을 깨뜨리는 소나무숲

▲  고원희가옥 앞쪽에 자리한 연못

▲  광주콩종합센터 정문

고원희가옥 앞쪽에는 근래 지어진 네모난 정자와 키가 큰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다. 정자 옆에
는 동그란 연못이 봄을 품고 있는데, 이 연못은 가옥을 새롭게 갈던 1917년 이후에 판 거라고
한다. 연못이긴 하나 수심이 얕으며, 개구리들이 늦잠을 자고 있는지 보이지는 않는다.

여기서 연못 너머 북쪽을 보면 고원희가옥과는 조금 다른 기와집의 무리와 장독의 행렬이 두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들은 2011년 9월에 결성된 '저절로소비자생활협동조합'에서 광주 남구
청과 고원희 일가의 도움을 받아서 2012년 7월에 문을 연 광주콩종합센터이다. 이곳도 엄연히
고원희가옥에 딸린 토지였는데, 가옥 집주인이 흔쾌히 땅을 제공하여 기존의 기와집을 손질해
콩센터가 들어선 것이다.

이곳은 이름 그대로 콩과 그를 빚어서 만든 장류에 모든 것을 담고 있는데, 장류(된장, 간장)
제조 및 보관/숙성, 판매와 장독대 설치 및 제공, 콩재배와 가공 관련 교육과 훈련,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그 외에 두부만들기, 천연염색체험, 인절미/화전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도 있
어 가족 단위나 교육을 겯드린 어린이 소풍/견학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센터 동쪽에는 요즘에는 보기가 힘든 장독대들이 하나도 아니고 수백 개가 길게 늘어서 정겨
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는데, 다들 콩 장류나 음식들이 담겨져 있어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다.
광주콩종합센터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해당 홈페이지로 이동됨)


▲  광주콩종합센터 장독대의 행렬 ▼


 

♠  칠석동(漆石洞)에서 만난 명소들

▲  부용정(芙蓉亭) - 광주 지방문화재자료 13호

대촌동 남쪽에 자리한 칠석동은 옻돌마을이라 불린다. 이 땅에 흔한 시골 마을의 하나로 이곳
에는 무려 3가지의 오래된 명물이 전하고 있다. 그 명물이란 은행나무와 부용정, 고싸움놀이
로 이중 은행나무는 광주에서 가장 늙은 나무이며, 부용정은 광주에서 가장 먼저 향약이 시행
된 곳이다. 그리고 고싸움은 남도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 명성이 자자하다.
이들 명소는 하칠석마을에 있는 고싸움놀이테마파크(공원)에 몰려있어 속 편하게 한 덩어리로
둘러보면 되며, 부용정과 은행나무 외에 고싸움놀이와 관련된 고싸움놀이전수관, 고싸움놀이
4D영상체험관 등이 있어 남도 고싸움의 성지(聖地) 역할도 겸한다.


▲  옆에서 본 부용정과 부용정석비

고싸움놀이테마파크(이하 고싸움공원) 동쪽에 자리한 부용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
붕 건물이다. 보통 오래된 정자들이 팔작지붕을 취한데 반해 여기는 맞배지붕을 지녀 정자보
다는 누각이나 당(堂)을 칭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인데, 특이하게도 공포 덩어리가
없는 민도리식으로 12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다. 2단의 석축 위에 자리해 자못 웅장해
보이며, 내부를 가리는 벽이 없어 사방이 뻥 뚫려있다.

이 정자는 1418년에 이 동네 출신인 김문발(金文發, 1359∼1418)이 세웠다. 그는 광산(광주)
김씨로 증참판을 지낸 김거안(金巨安)의 아들이며, 호는 부용이다. 그래서 정자 이름도 부용
정이 되었다.
고려 우왕 때는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를 지냈는데, 전라도에 침투한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돌산만호(突山萬戶)가 되었으며, 조선으로 세상이 바뀌면서 1394년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
使) 김빈길(金賓吉), 만호 김윤검(金允劒) 등과 왜선 3척을 잡은 공으로 태조 이성계에게 활
과 화살, 은기(銀器) 등을 하사 받았다. 1406년에는 전라도수군단련사(全羅道水軍團撫使)로서
왜선 1척을 잡았고, 1407년에는 상호군(上護軍)이 되어 이추(李推)와 대호군(大護軍) 강원길
(姜元吉)과 함께 요동에서 넘어온 피난민을 압송해 돌려보냈다.
이후 경기수군도절제사와 충청전라도수군도체찰추포사(忠淸全羅道水軍都體察追捕使)를 역임했
으며, 1411년 충청도수군절제사로 승진했으나 병으로 인해 벼슬을 사양했다. 이듬해에는 전라
도수군절제사가 되었고, 1418년 황해도관찰사를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는 고향인 칠석동에서 부용정을 짓고 여씨(呂氏)의 남전향약(南田鄕約)과 주자(朱子)의 백
록동규약(白鹿洞規約)을 참조하여 향약을 만들어 고향의 풍속을 단속했는데, 이는 광주 향약
좌목(鄕約座目)의 유래가 되었다. 즉 광주에서 가장 먼저 향약이 시작된 곳인 셈이다. 고향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는 한편, 이시원(李始元), 노자정(盧自亭) 등과 학문을 논하며 아주 한
가롭게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부용정은 김문발이 세상을 뜬 이후에도 이 지역의 이름있는 명소로 남아서 양응정(梁應鼎)과
고경명(高敬命), 이안눌(李安訥), 박제형(朴濟珩) 등 지역의 명사들이 찾아왔다. 그들이 남긴
편액이 무수히 장식되어 있으며, 정자 옆에는 부용정의 내력이 소상히 담긴 부용정석비가 자
리해 있는데, 이는 1984년에 세워진 것이다.
막힘이 하나도 없이 사방이 뚫려 있고,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마루 형태라 여름 제국 시절에
는 완전 극락과 같은 곳이다. 바람도 솔솔 불어오니 이곳에서 책을 보거나 낮잠을 자거나 바
둑을 두면 정말 꿀맛이 따로 없을 것이다. 다만 겨울 제국 시절에는 지옥이다.

▲  고싸움놀이테마파크(공원) 표석

▲  돌담 안에 담긴 널뛰기


▲  칠석동 은행나무 - 광주 지방기념물 10호

고싸움공원 남쪽에는 앞서 괘고정수를 능가하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자리해 있다. 덩치가 얼마
나 크던지 그의 앞에서는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저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다. 대자
연 형님의 위대한 힘과 철도 녹여 먹을 정도의 장대한 세월이 그를 산만한 덩치로 만든 것이
다.

나무의 나이는 65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예전에는 80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알려졌
다. 그러다가 요즘은 650년 정도로 자리를 잡은 듯 싶다. 이 땅에 널린 은행나무는 다른 나무
와 달리 태반이 사람이 심은 것으로 부용정의 주인인 김문발이 심었다는 이야기가 한 토막 전
해오기 때문이다. 그는 14세기 중반에서 15세기 초반 걸쳐 살던 사람이니 그가 심은 것이 맞
다면 600년~650년 정도가 된다.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는 세월을 수백 년이나 꾸역꾸역 섭취하여 그의 키는 26m에 이르며, 7m
높이에서 가지가 무수히 갈라져 나와 큰 나무의 위엄을 제대로 과시한다. 그의 전체 둘레는
13.3m, 수관의 너비는 동서 30m, 남북 26m로 광주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나무로 꼽힌다.

예로부터 칠석동 옻돌마을 사람들이 서낭나무로 받들어 정월 대보름날 밤에 당산제(堂山祭)를
지낸다. 이 나무는 할머니당산, 그리고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들판에 할아버지 당산이라 불리
는 소나무가 있는데, 보통은 같은 종류의 나무를 노부부나 부부로 삼지만 여기는 서로 다른
나무를 노부부로 삼은 것이 특징이다. 나이와 덩치, 명성이 할머니 당산인 은행나무가 압도적
으로 우세해 할아버지 당산 소나무는 당산제 외에는 관심도 거의 못받는 우울한 실정이다. (
우리도 할아버지 당산은 안갔음)
은행나무는 귀신이 좋아하는 나무의 하나라 옛 사람들은 늙어보이는 나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고려 후기부터 마을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 고마운 존재로
이곳 사람들의 은행나무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대보름날 당산제가 끝나면 다음날 16일부터 마을을 동서로 상촌(上村)과 하촌(下村)으로 나누
어 고싸움놀이를 벌인다. 현재 칠석동은 상칠석, 하칠석으로 구분되어 있으니 바로 여기서 비
롯되었다. 이때 고싸움에 쓰이는 고는 제일 먼저 이 나무를 돌아야 된다. 그러니까 칠석동 고
싸움놀이는 은행나무에서 그 서막을 여는 것이다.
이 마을은 전주이씨와 김문발의 광산김씨가 오랫동안 터를 일군 마을로 평야지대에 자리해 있
는데, 풍수지리적으로 이곳은 와우(蝸牛) 형국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소가 매우 사나워 이리
저리 날뛰므로 고삐를 매어두고자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하여 풍수상 부실한 부분을 커
버해주는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  꽤나 굵직해진 은행나무 밑도리의 위엄
1그루가 아니라 여러 그루가 한 지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무 앞에는 상석이 놓여져 있으며, 여기서 당산제를 지낸다.

▲  나무에 칭칭 감겨진 금줄

나무가 아직은 정정하다고 해도 늙은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600년 이상의 노구를 지탱하기
힘들어 기둥을 여러 개 세워 지구의 중력에 힘겹게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세월보다 무거운 것은 천하에 아무 것도 없다. 손으로 만질 수가 없을 따름이지 세월의
무게는 무한대(∞)이기 때문이다,


▲  고싸움놀이4D영상체험관에 재현된 고싸움놀이의 위엄

은행나무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고싸움놀이4D영상체험관(이하 영상체험관)에 잠시 발을 들
였다.
이곳은 남도의 명물 고싸움놀이에 대한 온갖 자료와 영상, 디오라마 등을 담고 있는데, 단순
한 보여주기를 떠나 4D영상관과 4D입체게임 등 최첨단의 신선한 아이템을 준비해 민속놀이에
대한 관심이 적은 어린이와 젊은층을 겨낭한 점이 눈에 띈다. 그냥 이 땅에 흔한 박물관이나
체험관처럼 만들면 주목도 못받고 묻힐 우려가 크니 광주시에서 아주 통 크게 체험관을 지른
것이다.
 
영상관에서는 4D영상으로 고싸움 놀이를 아주 실감나게 시청할 수 있으며, 칠석마을 사람들이
이곳 풍수의 허한 부분을 커버하고자 은행나무를 심고 고싸움놀이를 하는 내용도 소상히 나온
다. 영상체험관은 관람, 입장은 공짜이나 영상관만큼은 입장료를 받고 있는데, 시청 시간은
20분 정도이다. (상영시간은 문의 요망)
그리고 4D입체게임은 우리나라 최초의 리얼타임 입체 영상게임으로 2팀으로 나누어 승패를 가
른다. (자세한 것은 안해봐서 모름) 또한 고라이더라는 코너는 고싸움 관련 O,X 퀴즈를 풀어
90점 이상이면 고라이더를 공짜로 태워준다. 고라이더는 고의 제일 높은 부분에 올라타는 것
이다.

2층은 일반적인 전시실로 '고싸움놀이 현장체험' 코너에서는 고싸움놀이를 재현한 거대한 디
오라마가 있으며, 여기서 퍼즐게임을 통해 고싸움에 등장하는 인물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
속의 고싸움 놀이'는 우리의 옛 땅인 왜열도와 중원대륙, 그리고 인도 등 다른 나라의 고싸움
놀이를 집대성했고, '당산제는 어떻게 지내나요?' 코너는 고싸움 캐릭터인 고동이와 고순이와
함께 고싸움놀이 당산제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 외에 '고싸움놀이 노래시설'에서는 고싸움놀이에 등장하는 소리(원음)를 들을 수 있다. 그
렇다면 고싸움 놀이는 무엇일까?

'광주 칠석 고싸움놀이'는 국가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된 남도의 주요 민속놀이로 광주 칠
석동이 그 중심이다. 매년 음력 정월 10일경부터 2월 초하루까지 20일 정도 펼쳐지는데, 은행
나무와 할아버지 당산 소나무에 당산제를 지내는 정월 대보름날이 절정이다.
고싸움의 고는 옷고름, 고맺음, 고풀이란 뜻으로 노끈 한 가닥을 길게 늘여 둥그런 모양으로
맺은 것이다. 그래서 고싸움이란 놀이에서 사용하는 고가 서로 싸움을 벌인다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싸움의 유래에 대해서는 딱히 전하는 기록은 없으며, 믿거나 말거나 속설에 따르면 땅의 거
센 기운을 누르고자 사람들을 동원해 땅을 밟는 놀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매우 가
까운 나주 남평(南平) 지방에서는 1950년대까지 활발하게 놀이를 진행했으며, 장흥과 강진,
영암 지방에서도 줄다리기 이전에 고싸움을 벌인 것으로 보아 줄다리기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
다. 줄다리기와 고싸움은 놀이의 시기가 같고, 칠석의 상촌은 남자, 하촌은 여자를 상징해 여
자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여기는 것은 다른 줄다리기나 남녀 성대결 민속 놀이와 비슷하다.
허나 고싸움은 지휘자가 고 위에 올라가 게임을 지휘하며 하루도 아닌 20일 정도 격렬하게 진
행되는 점은 기존 줄다리기와는 다르다.

고싸움놀이의 구성은 상촌인 우대미와 하촌인 아랫대미가 너비 2m 이상의 골목길을 경계선으
로 나뉜다. 편단은 줄을 타고 싸우는 우두머리인 '줄패장', 고를 메는 '몰꾼', 고의 몸과 꼬
리를 잡는 꼬리줄잡이이며, 응원단으로 농악대, 깃발잡이, 횃불잡이 등이 있다.
승부는 상대방의 고를 어떤 방법으로든지 땅에 닿게 함으로써 결정이 나는데 이때 농악과 함
께 기수(旗手)와 횃불이 동원되어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한다. 만약 승부가 나지 않으면 고를
풀어 그 줄로 2월 초하룻날에 줄다리기로 최종 결판을 내기도 한다. 고싸움은 우리나라 민속
놀이 중 가장 패기가 높고 격렬한 남성적인 놀이로 강인한 협동심과 줄패장의 지휘력이 중요
하다. 고 위에 탄 줄패장의 지휘로 이리저리 움직이고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화끈한 민속놀이로 인기를 누렸던 고싸움은 왜정 이후 시들시들해지다가 1945년을 전
후해서 잠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가 동네에 뜻 있는 이들의 노력으로 다시 재현되었으며,
1969년 10월 대구에서 열린 제10회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고싸움의 위
엄을 천하에 드러냈다. 이후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도 선보여 대단한 관심을 받았으며, 광주
시의 든든한 지원에 힘입어 고싸움의 성지인 칠석동에 고싸움전수회관과 영상체험관, 테마공
원을 만들어 고싸움을 천하에 알리고 보존하는데 힘쓰고 있다.
처음 칠석동에 왔을 때 단순히 은행나무와 부용정만 생각했지 고싸움놀이는 크게 생각을 안했
는데, 이렇게 영상체험관을 살펴보고 본글을 작성하면서 고싸움에 대한 관심에 조금 불이 짚
여졌다. 고싸움놀이는 정월대보름에 주로 열린다고 하니 그때를 노려 고싸움의 실감나는 현장
을 구경하러 가야겠다.

* 고싸움놀이테마공원 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 619, 996일대 (☎ 062-607-2340,46)



고싸움놀이 영상체험관을 끝으로 광주 대촌동 투어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때 시간은 16시, 햇

님이 퇴근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지만 오늘 너무 많은 곳을 둘러봐서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질 지경이다. 게다가 투어를 시켜준 이들도 피곤한 상태, 여기서 더 본다면 이건 과식이다.
하여 미련 없이 그들이 사는 봉선동으로 넘어와 커피집에서 커피 1잔의 여유를 누린 다음, 인
근 지하철역인 소태역(광주1호선)에서 그들과 작별을 고하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봄맞이 광주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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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3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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