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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성당 나들이, 약현성당, 원효로성당


' 서울 도심 성당 나들이 '
(약현성당, 원효로 예수성심성당, 용강동 동막큰우물터)

중림동 약현성당

▲  중림동 약현성당

원효로 예수성심성당 원효로 용산신학교

▲  원효로 예수성심성당

▲  원효로 용산신학교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에는 약현성당과 명동성당(명동대성당), 원효로
성당(원효로 예수성심성당), 성공회(聖公會) 서울성당 등 오래된 성당들이 여럿 전하고
있다. 이중 명동성당과 약현성당, 성공회 서울성당은 서울의 대표적인 성당(聖堂) 명소
로 바쁘게 살고 있는데, 성공회 서울성당(☞ 관련글 보기) 같은 경우 성당 내부는 물론
지하묘지까지 모두 둘러보았으나 그보다 명성이 높은 약현성당과 명동성당은 제대로 둘
러본 적이 없다. 그들이 나와 멀리 있으면 모르겠지만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어
서 언제든 오갈 수 있다.
그럼에도 오랜 세월 인연이 없던 것은 내가 천주교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하여 고색
의 존재를 좋아함에도 지정문화재(국가 사적, 국가 등록문화유산, 지방문화재 등)의 지
위를 지닌 늙은 성당과 관련 유적들을 거의 등한시했고, 그러다 보니 인연을 지은 천주
교 성당과 유적은 두 손에 꼽는다.
그러다가 초가을 한복판에 서울 장안에 몇 남지 않은 미답처(未踏處)도 흔쾌히 지울 겸,
약현성당과 원효로성당을 찾았다.


♠  이 땅 최초의 서양식 교회 건물, 중림동 약현성당(藥峴聖堂)
-
가 사적

▲  서북쪽에서 바라본 약현성당의 뒷모습

약현성당은 천하 철도 교통의 중심지인 서울역 북서쪽이자 염천교 서쪽 언덕 정상부에 자리해
있다.
성당이 자리한 언덕은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약초가 많이 자라서 약현, 약고개라
불렸는데, 서소문과 서대문(돈의문)에서 만리동, 마포(麻浦)로 가는 길목이다. 고개 동쪽에는
그 악명 높은 서소문(西小門) 형장이 있어 망나니의 칼춤 소리와 강제로 목숨이 끊어진 죄인
들의 비명 소리, 죄인 가족들의 통곡 소리, 목과 몸에서 솟구치는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으며,
19세기에는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단되었다.


▲  서남쪽에서 바라본 약현성당

1886년 조선과 프랑스가 조약을 맺으면서 100
년 이상 진행된 조선 조정의 천주교 탄압은 중
단되고 비로소 이 땅 천주교에 봄이 찾아왔다.
남대문(숭례문)과 서대문 밖에는 천주교 신자
들이 많이 살았는데, 제7대 조선대목구장(代牧
區長)이던 블랑 주교(主敎)가 그들을 수용하고
자 1887년 서소문 밖 수렛골에 한옥 1채를 마
련하여 예배당으로 삼으니 그것이 약현성당의
전신인 약현공소(藥峴公所)이다.
이후 공소의 신자가 종현본당(명동성당)을 능
가할 정도로 늘자 종현본당의 정두세(Doucet)
신부는 제8대 조선교구장인 뮈텔 주교의 허가
를 받아 1891년 새로운 성당을 추진하게 된다.
하여 부근에 있는 약현고개 언덕을 매입해 자
리를 마련하고 그해 10월 27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설립 기념일에 성당 정초식(定礎式)을
가졌다.

▲  약현성당의 앞 모습

그리고 11월 9일 정두세 신부가 이곳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약현공소는 종현본당에서 완
전히 분리되어 약현본당(本堂)으로 승격되었다. 하여 서울에서는 2번째, 전국에서는 9번째로
설립된 본당이 되었다.

성당 건립은 명동성당을 설계했던 코스트 신부가 담당했는데, 1891년 10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892년 9월 완성을 보았으며, 1893년에 축성(祝聖)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 땅 최초의 서양
식 벽돌 교회 건축물인 약현성당이 태어나게 된다. 명동성당의 명성이 워낙 대단하여 그곳을
가장 늙은 성당으로 오해하기 쉬우나 약현성당이 가장 늙은 성당이며, 명동성당은 그보다 6년
이나 늦은 1898년에 지어졌다.

성당을 지을 때 궁궐의 기와를 굽던 용산 와서현에서 흙을 충당했는데, 그곳에는 새남터에서
처단된 김대건(金大建) 신부와 서소문에서 처단된 남종삼(南鍾三)의 시신이 43년이나 묻혀있
었다. 그곳의 흙이 좋기도 했지만 그들의 순교를 기리고자 그곳 흙을 썼으며, 약현고개에 성
당을 닦은 것은 바로 동쪽에 있는 서소문 형장에서 죽어간 천주교 신자들을 기리고자 함이다.

약현성당의 등장으로 명동성당은 담당 구역을 줄여서 서울 도성(都城) 내부의 선교와 신자 관
리를 담당했으며, 약현성당은 도성 바깥과 경기도, 황해도 지역의 선교와 신자 관리를 담당했
다.

▲  약현성당의 뒷모습

▲  성당 주변에 있는 성모 마리아상

1896년 4월 26일 이 땅에서 최초로 사제 서품식(敍品式)이 진행되어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등 여러 명이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초대 주임인 정두세는 교육에도 크게 관심을 보여 1895년
약현서당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1901년 가명학교(可明學校, 가명은 정두세 신부
의 본명인 '가밀로'를 한자로 표기한 것)를 세워 여자 아이들의 교육까지 벌였으며, 1906년에
건물을 새로 지어 남자 아이들을 위한 약명학교(藥明學校)를 세웠다. 그리고 1909년에 교사를
증축하여 이들을 가명학교로 통합했다.

정두세 후임으로 들어온 비예모 신부는 성당 내부의 남녀 칸막이를 없애고 벽돌기둥을 돌기둥
으로 바꾸는 등 보수공사를 벌였다. 허나 6.25 전쟁 때 무심한 총탄에 성당이 적지 않게 상처
를 입었으며, 가명학교 등의 건물은 파괴되었다.
1954년 3월 서울대목구와 가톨릭자선회의 지원으로 성당을 보수하고 사라진 가명학교 자리에
병상 62개 규모의 성요셉의원(가톨릭대 성모병원의 전신)을 개원했으며, 그해 5월 성요셉 간
호고등기술학교(가톨릭대 의학부의 전신)를 세웠다.
1974년 8월 크게 보수공사를 벌여 1976년 4월 복원식을 가졌으며, 1977년 11월 명동성당과 함
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는 기쁨을 누린다.

1998년 2월 11일, 불의의 방화를 당해 성당 내부가 완전히 소실되고 종탑 일부가 손상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다행히 무너지는 정도는 면했으나 상처가 매우 깊어 2년 동안 손질을 하여 옛
모습과 가깝게 복원해 2000년 9월 17일, 복원 봉헌식을 가졌으며, 2007년 중림동성당(약현성
당)의 이름을 중림동약현성당으로 갈았고, 2009년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을 열어 지금에 이
른다.

▲  약현성당 옆문

▲  기도동산 순교자현양탑

약현성당은 폭 12m, 길이 32m, 종탑 높이 26m 규모로 고즈넉하고 아담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지붕은 검은색, 벽은 붉은 피부의 벽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명동성당의 축소판이자 시험작으
로 성당 내부는 좌우 열주에 의해 3개열로 구분된 삼랑식(三廊式) 평면 구성이며, 창은 반원
아치형이고, 중앙 천장은 갈빗대 모양의 뼈대가 있는 뾰족 궁륭천장을 지닌 고딕풍 건축양식
이다.
이곳 양식은 우리나라 성당, 교회 건축의 중심 모델이 되었으며, 20세기 초기 서양식 근대 건
축물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등, 우리나라 근대 건축사에 크게 획을 그었다. 다만 1998년 방화
로 인해 적지 않게 손상되어 복원을 했고, 그러다 보니 130년 묵은 성당임에도 그보다 후배인
명동성당, 원효로성당, 전주(全州) 전동성당에 비해 고색의 기운이 다소 녹아내려 마치 그들
을 참조해서 지은 20세기 중반 성당 정도로 젊게 보인다.


▲  녹음이 짙은 약현성당 기도동산 숲길

약현성당은 열린 공간으로 답사와 출사, 산책 수요가 많다. 혼인 장소로도 바쁘게 살고 있으
며, 예배가 있는 일요일과 부활절, 크리스마스에는 성당 내부 관람이 가능하나 성당 사정에
따라 어려울 수도 있다. (내가 간 날은 공휴일 오후라 내부 관람은 하지 못했음)

성당 바로 정면(동쪽)에는 나무가 우거진 산비탈이 있는데, 그곳은 기도동산이다. 비록 작은
공간이나 수풀이 무성하여 그늘의 질감이 좋으며, 기도나 명상, 망중한에 잠기기 아주 좋은
곳이다. 그 숲속에는 순교자현양탑과 예수의 고행 장면이 담긴 돌조각, 약현성당전망대 등이
자리하여 조촐한 볼거리가 되어준다.


▲  약현성당전망대에서 바라본 작은 천하 (남대문, 염천교 방향)
도심이 있는 동쪽을 향해 고개를 내민 곳으로 비록 전망대를 칭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과 높이가 비슷하거나 높은 건물이 즐비한 도심이 코앞이라
두 눈에 보이는 것은 염천교와 칠패로, 남대문 주변이 전부이다.

▲  약현성당 기도동산 안쪽 (순교자현양탑에서 바라본 모습)
숲 안쪽에 포근히 깃든 이곳이 기도동산의 중심부로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상과
순교자현양탑 등을 지니고 있다.


▲  기도동산 순교자현양탑(殉敎者顯揚塔)

순교자현양탑은 1984년 12월에 세운 것으로 서소문 형장에서 처단된 순교자 44명의 이름과 그
들의 내력, 순교 장면을 머금은 7개의 조각품을 머금은 병풍석 스타일의 석물이다. 이것 외에
도 높이 18m의 순교자현양비도 있는데, 1997년 서소문공원 재개발로 순교자현양탑을 이곳으로
옮겨와 기도동산의 명물로 애지중지하고 있다.

* 약현성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중림동 149-2 (청파로 447-1, ☎ 02-362-1891)
* 약현성당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원효로 예수성심성당과 용산신학교

▲  원효로 예수성심성당(聖心聖堂) - 국가 사적

용산구(龍山區)의 서남쪽 끝 동네인 원효로2동 한복판에는 성심학원 소속의 성심여중과 성심
여고가 있다. 이곳은 약현성당에서 남쪽으로 약 4km 거리로 그 교내에는 원효로(元曉路) 예수
성심성당과 용산신학교라 불리는 100년 이상 묵은 근대 건축물이 2동 있다.
고색이 창연한 이들은 학교 내부에 있어 수업이 있는 평일에는 접근이 거의 어렵다. 하여 예
배가 있는 일요일이나 크리스마스에 찾는 것이 좋으며, 성당 내부도 그때를 이용하면 들어갈
수 있다. 단 학교 사정으로 답사꾼과 나들이꾼의 학교 교정 및 성당 내부 접근이 통제될 수
있으며, 용산신학교 건물은 사무 공간이라 주말, 휴일에도 내부 관람이 어렵다.

▲  남쪽에서 바라본 예수성심성당

▲  동쪽에서 바라본 예수성심성당

예수성심성당은 파리외방전교회가 세운 예수성심신학교(용산신학교)의 부속 성당으로 지어진
것으로 1899년 5월에 짓기 시작해 1902년 4월 14일 축성되었다. 지금은
성심여중과 성심여고,
성심수녀회의 성당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건축면적은 175.21㎡, 연면적 264.47㎡ 규모로 언덕
지형을 이용해서 지었기 때문에 자연히 3층 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하여 남쪽에서 보면 3층,
언덕에서 보면 2층으로 보이며, 2층에 예배당이 있다.

약현성당과 명동성당, 용산신학교를 설계했던 코스트 신부가 설계했다고 하나 그는 1896년에
사망했으므로 사망 전에 설계를 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회색 벽
돌과 붉은 벽돌을 섞어서 다진 외벽에 부축기둥을 세웠는데, 성당 좌측면에 1층과 2층으로 들
어가는 출입구를 내었고, 우측면에도 제단부로 들어가는 문을 두었다. 허나 성당으로 들어서
는 중심 출입구가 다른 성당과 달리 정면 중앙이 아닌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비대칭의 모습을
보인다.
성당 내부는 신자들의 좌석(신자석)만 있는 강당형 성당(hall church) 스타일이며, 뾰족아치
로 된 창문과 지붕 위의 작은 뾰족탑은 전체적으로 약식화된 고딕풍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  북쪽에서 바라본 예수성심성당의 넉넉한 모습

이곳은 어디까지나 신학교의 부속 성당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일반 성당과는 평면 형식이 조금
다르다. 정면입구에 배랑이 없으며, 출입구는 제대 쪽 양측면에 있고 제의실(祭衣室)이 제대
반대측 입구에 있다. 그리고 신자석 바닥도 중앙축을 향해 좌우에서 아레나(arena) 형식으로
단을 지어 내렸다. 지금은 평평한 마루바닥으로 바뀌었고 제의실은 벽을 터서 신자석으로 쓰
이고 있으며, 한때 제의실이 좌측 외부에 추가되어 복도로 연결되기도 했으나 복원공사로 철
거되고 1층방이 제의실(예전 신부방)로 쓰이고 있다.
정면 지붕은 가파른 맞배지붕이며, 후면의 앱스는 5각으로 꺾여 있다. 규모에 비해 다소 육중
한 버트레스가 각 베이마다 설치되어 있고 버트레스 꼭대기에는 피나클로 장식을 했다.

강당 형식의 작은 성당이나 고딕적인 비례와 첨두 아치, 리브 보울트(ribvault), 원화창(圓華
窓), 피너클(pinacle) 등 디테일이 뛰어난 건물로 독창적인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여러
번 보수공사가 있었지만 초기 원형은 물론 고색의 기운도 철철 넘쳐 흐른다. 하여 유럽의 어
느 늙은 성당 앞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이곳은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50여 년 동안 안치된 현장이기도 한데, 1902년 6월 23일부
터 1960년 7월 5일까지 이곳에 있었으며, 이후 혜화동성당으로 이장되었다. 하여 성당 출입구
안쪽 윗쪽에 김대건의 이니셜 A. K. 및 그의 생존기간이 로마자로 표기되어 있다. 허나 나는
이 부분은 지나치고 말았다.


▲  예수성심성당의 날씬한 북쪽 끝 모습

▲  성당 2층 현관문
성당 예배공간은 이곳으로 들어서면 된다.

▲  성당 2층의 또 다른 문


▲  경건함을 불러일으키는 예수성심성당 내부
명동성당과 전주 전동성당, 대구 계산동성당 등 크고 오래된 성당과
달리 규모가 작고 조촐하다.

▲  예수성심성당 내부 제단석(앱스부)

▲  제단석(앱스부)에서 바라본 성당 내부
일요일 오후에 찾은 탓에 성당 내부도 무난하게 둘러보았다.
(윗층 3층은 접근이 통제됨)

▲  성심기념관으로 살아가고 있는 용산신학교(龍山神學校) - 국가 사적

예수성심성당 동쪽에는 붉은 벽돌로 된 용산신학교(성심기념관)가 있다. 이 건물은 건축면적
312.82㎡, 연면적 907.86㎡에 지상 2층, 반지하 1층 규모의 조오지안 양식의 벽돌 건물로 예
수성심성당과 함께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지은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는 19세기 말에 이 땅에 진출해 1885년 경기도 여주군(현 여주시) 강천면 등평
리에 예수성심신학교를 세웠다. 그때는 한옥을 신학교로 사용해 기숙 교육을 벌였으며, 1886
년 조선과 프랑스가 조약을 맺은 이후, 1887년 서울로 진출해 이곳 일대를 매입했는데, 현 신
학교 자리에는 함벽정(函碧亭)이란 오래된 정자가 있었고, 예수성심성당 자리에는 '삼호정'이
있었다.
여기에 터를 잡은 것은 가까이에 천주교 신자들이 무더기로 처단된 새남터와 당고개가 있기
때문으로 신학교와 성당 외에 신부들의 묘역까지 만들 계획을 세웠다. 하여 함벽정과 삼호정
을 밀어버리고 신학교를 세웠는데, 학생들이 계속 늘면서 기존 건물로는 한계가 있자 신학교
신부들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건물을 짓기로 했다.
하여 1891년 5월 6일 서울의 모든 신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초식을 열었으며, 코스트가 설
계 감독하고 청나라 사람들을 잡아와 시공을 하여 1892년 6월 25일 축성식을 가졌다. 이 건물
이 바로 용산신학교로 앞서 약현성당이 이 땅 최초의 서양식 성당 건물이라면 이곳은 이 땅
최초의 천주교 신학교 건물이다.


▲  옆에서 바라본 용산신학교(성심기념관)

1928년 신학교가 혜화동(惠化洞)으로 이전되면서 성직자들의 휴양소로 쓰였으며, 잠시 주교관
의 역할도 했었다. 허나 1942년 왜정(倭政)의 고약한 태클로 폐쇄되었고, 1944년 성모병원 분
원을 이곳에 개설했는데, 그 덕분에 왜정의 건물 수탈을 피할 수 있었다.
1956년 성심수녀회가 이곳을 접수하면서 그곳 소유가 되었으며, 수녀원과 학교법인 사무소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법인 사무실과 성심기념관으로 살아가고 있다. 건물이 세월을 타면서 약간
증축이 되었으나 근래에 원래 모습으로 되살려 예수성심성당처럼 고색의 기운이 넘쳐 흐른다.


▲  용산신학교(성심기념관)의 뒷모습

용산신학교 내부는 장방형 평면에 편복도를 전면에 두고 안쪽에 교실을 배치했는데, 1층 평면
중앙에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외부 계단을 두고 좌우 끝단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두었다.
정면은 중앙 현관부를 중심으로 좌우 3칸씩 벽기둥(pilaster)을 쌓아 모두 7칸으로 구획했으
며, 각 칸에는 결원아치(segmentalarch)의 창을 두었다. 바닥은 목재마루이며, 동판가락잇기
의 경사지붕에는 환기용 도머창을 두었다.
건물 벽체는 적벽돌을 이용했으나 기둥과 처마 및 수평돌림띠, 창둘레 등 선적 요소에는 회색
벽돌을 사용하여 의장적 효과를 구사했다.

예전에는 예수성심성당과 한 덩어리로 '서울 원효로성당과 신학교'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 255
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 이들을 구별하여 재지정했으며, 사무 공간으로 쓰이는 곳이라 내부
접근은 어려워 이렇게 밖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 원효로 예수성심성당, 용산신학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4가 1-1 (원효로19길
  49)


♠  마포 용강동(龍江洞)에서 만난 소소한 명소들

▲  용강동 동막큰우물터

원효로 예수성심성당과 용산신학교 세트를 둘러보고 아직 햇님의 퇴근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
서 여로(旅路)를 조금 살찌우기로 했다. 하여 찾은 곳은 이곳에서 가까운 용강동 지역의 미답
처들로 성당과 천주교하고는 100% 관련이 없는 곳들이다.

원효로에서 서쪽으로 넘어가면 마포구(麻浦區) 마포로 여기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큰우물로를
따라 가면 대흥동 태영아파트와 래미안 용강아파트 직전 4거리에 보호난간이 둘러진 나무가
약간 있는 공간이 있다. 바로 그곳이 이 지역의 오랜 우물이었던 동막큰우물터이다.

지금은 한낱 전설이 되어 사라진 이곳 우물은 18세기에 지역 주민들이 만든 것으로 극심한 가
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상수도 보급 전까지 약 1,000여 세대가 이 우물의 신세를
졌는데, 상수도 보급 이후에도 민방위 비상 급수용, 소방용수로 가끔씩 쓰였다. 그러다가 대
흥구역 재개발 사업으로 1999년 11월 20일 무심하게 매몰되어 사라지는 비운을 겪는다.
이후 세월의 저편으로 강제로 사라진 그를 추억하고자 우물터를 알리는 표석을 세웠고, 주변
에 나무와 수풀을 심어 우물터를 보존하고 있으나 지나친 개발의 난도질에 지역의 오랜 명물
이 허무하게 사라진 것은 실로 개탄스럽기 그지 없다. 비록 우물의 물이 끊기더라도 서울에
몇 남지 않은 늙은 우물 유적이라 껍데기라도 남겨놨어야 했다.


▲  동막큰우물터 표석

▲  용강동 정구중 가옥(鄭求中 家屋) - 서울 민속문화유산

동막큰우물터에서 서남쪽으로 난 큰우물로2길을 2분 정도 들어가면 언덕배기에 고즈넉한 기와
집 하나가 마중을 하는데, 그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용강동 정구중 가옥이다.
키다리 회색빛 아파트에 포위되어 외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 이곳은 용강동 지역의 부농(富農)
이던 이씨가 외동딸에게 주고자 1920년대에 지은 개량한옥이다. 당시 서울 장안에서 꽤 유명
한 목수 안영달을 섭외하여 지었다고 하는데, 집에 쓰일 목재는 압록강(鴨綠江) 유역의 홍송(
紅松)과 백송(白松)을 구입해 뗏목으로 한강으로 가져와 2년을 푹 묵혔다가 다시 1년을 건조
했으며, 집을 지을 때는 못을 1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만큼 막대한 돈을 들여 지은 아주 특별
한 한옥으로 그의 딸 사랑이 실로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한옥의 대지는 241평, 건평 17평 규모의 'ㅁ' 구조 집으로 안채와 별채, 창고, 대문채를 지니
고 있으며, 안채는 팔작지붕 5량 구조로 창호는 대부분 현대식으로 갈았다. 대문을 들어서면
대문채가 있고, 그 안쪽 대문을 지나야 비로소 안채가 나오는데, 대문간 행랑채는 다른 한옥
의 '一'자형 평면과 다르게 휘어지게 지었으며, 대문 남쪽으로 방 2칸, 광 2칸을 두었으나 나
중에 광 1칸을 방으로 바꾸었다.
대문채와 별당채는 맞배지붕이며, 별로 넓지 않은 공간에 별당채까지 둔 특이한 예로 현재 후
손들이 살고 있어 내부 관람은 어렵고 그저 집의 외경만 봐야 된다. 예전에는 집 주변이 기와
집과 키 작은 주택들이 가득했으나 재개발로 싹 사라지고 이곳만 남았으며, 주변이 아파트 일
색이라 다소 어색한 조화를 보인다. 그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으니 망정이니 그
렇지 못했다면 아마 개발의 칼질에 사라졌을 것이다.

* 용강동 정구중가옥 소재지 : 서울특별시 마포구 용강동 335 (큰우물로2길 22)


▲  굳게 닫힌 정구중가옥 대문
대문채 벽과 집을 받쳐들고 있는 석축에 세월이 무심하게 달아준
시커먼 때가 역력하여 고색의 멋을 넉넉히 풍겨준다.

▲  동쪽에서 바라본 정구중가옥
가옥 남쪽에는 쿤우물로2길이 지나고 있고, 가옥 북/서/동쪽은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다. 이들 나무는 가옥 북쪽과 서쪽에 가득 들어앉은
래미안용강아파트와 이곳의 경계선 역할을 해준다.

▲  청암동(淸岩洞)에서 만난 독서당(讀書堂)터 표석

마포대교 북단 동쪽이자 원효로와 강변북로가 만나는 청암동 길가에 독서당터를 알리는 표석
이 나그네들의 관심을 호소하고 있다.
독서당은 조선 때 관리들에게 휴가를 주어 강제 독서를 하게 했던 곳으로 옥수동(玉水洞) 등
한강 북쪽에 경치 좋은 곳에 여러 곳 설치했다. 청암동 독서당은 남호당(南湖堂)이라 불리기
도 했는데, 다른 독서당과 마찬가지로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그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그
저 그의 옛 자리에 그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작은 표석을 세워 그를 작게 추억할 따름이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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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5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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