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내를 가리고 선 제월루 앞에 이르면 사적비와 수초(水草)를 머금은 아기자기한 연못이 마중
을
한다.
고색의 내음이 아낌없이 서린 사적비는 1731년에 세워진 것으로 왕실과 가까운 절의 위상을
보여주듯, 공조판서(工曹參判) 이덕수(李德壽)가 글을 짓고, 승정원(承政院) 부승지(副承旨)
인 조명교(曹命敎)가 썼다.
불암사의 창건과 중건을 다룬 사적(事蹟)을 비롯해 1728년에 거사
각신(覺信)과 정인(淨仁)이 맹세 발원하여 보시한 돈으로
근기(近畿, 수도권) 지역에 전토를
마련해 절이 피폐하지 않도록 하였음을 다룬 내용도 적혀있다.
비신(碑身)과 지붕돌로 이루어진 단촐한 모습으로 지붕돌에는 세월이 달아준 검은 주근깨가
역력해 고색의 멋을 진하게 풍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불암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서울 근교 4대 명찰의 하나, 불암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불암사
불암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의 말사(末寺)이다.
824년에 지증대
사(智證大師)가 창건했다고 하며,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을 연 지
선(智詵)이 창건했다고도 하나 관련 자료와 유물이 전혀 없어 신빙성은 거의 없다. 이후
9세
기 말에 도선대사(道詵大師)가 중건했다고 하며, 조선 초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수했다고
전한다.
세조(재위 1455~1468)는 서울 주변 동서남북에 왕실의 안녕을 비는 절을 하나씩 선정했는데,
서쪽에 진관사(津寬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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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글 보기),
남쪽에
삼
성산 삼막사(三幕寺), 그리고 동쪽에 불암사를 선택했다. 그로 인해 동불암(東佛巖)이라
불리
기도 했으며, 서울 근교 4대 명찰(名刹)의 하나로 널리 존재를 알렸다.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시절에 중건을 했고, 영조(英祖) 말년에 거의 망하기 직전에 이
른
것을
승려 명관(明瓘)이 크게 중수했다. 1731년에 왕실의 지원으로 사적비를 세워 불암사
의 내력을 기록했으며, 1782년 보광명전과 관음전을 중수하고 제월루를 세웠다.
1844년에 중수를 했고, 춘봉(春峯)이 향로전을 다시 지었으며, 1855년에 혜월(慧月) 등이 중
수했다. 그리고 1910년에는 독성각과 산신각, 동축당(東竺堂)을 세웠다.
6.25때는 다행히 총탄이 비켜가 별 피해를 없었으며, 1959년에 만허(滿虛)가 칠성각을 중수하
고, 낡거나 협소한
건물을 죄다 다시 지으면서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1989년 타이(태
국)와 스리랑카에서 부처의
사리를 기증받아 5층 진신사리탑을 세웠으며, 1991년에 화재로 관
음전이 무너지자 1992년에 다시 지었고, 1996년에 협소하던 동축당을 부시고 그
목재를 포천
보문사(普門寺)에 선물하여 그곳 대웅전 불사에 쓰게 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해 관음전, 약사전, 제월루, 지장전, 칠성각, 요사 등 10여 동의 건물
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 보물 591호로 지정된 석씨원류응화사적 목판(釋氏源流應化事蹟
木板)이
있으나<여기서 석씨(釋氏)는 석가모니를 뜻함> 현재는 연구와 보호를 위해 서울 불교
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그리고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53호로 지정된
'불암사 경판'이 전하고
있는데, 이 경판은 1635년부터 1795년까지 간행된 것으로
관람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밖에 보물로 지정된 목조관음보살좌상과 1895년에 제작된 괘불도(掛佛圖, 경기도
지방유형
문화재 315호), 석가삼존십육나한도, 목조석가여래좌상 등의 지방문화재가 있으며, 사적비와
지장시왕탱, 칠성탱 등
오래된 비지정 문화유산이 있다.
속세와 가깝긴 하나
깊은 산골에 푹 묻혀있어 산사의 내음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고색
의 내음은 거의 말라버렸지만 사적비와 여러 늙은 문화유산을 통해 절의 오랜 내력을 충분히
가늠케 해준다.
끝으로 불암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6.25시절에 활약했던 '호랑이' 유격
대이다.
1950년 6.25가 터지자 육사 1,2기 생도들은 포천(抱川)과 서울 노원구 지역에서 북한군과 싸
웠으나 패하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했다. 그중 육사 생도 13명(1기 10명, 2기 3명)은 후퇴하지
않고 국군 7명과 의기투합하여 불암산 정상과 석천암 주변 바위 동굴에 은신했다.
그들은 암
호명
'호랑이'란 유격대를 결성했는데, 불암사 주지승 윤응문과 석천암(石泉庵) 주지승 김한
구가 그들을 크게 도와주었다.
허나 호랑이 유격대는 겨우 20명이고 서울과 경기도 지역이 북한군에게 새카맣게
점령된 상태
이다. 하여 산에 은둔하여 치밀하게 기회를 노려 총 4차례에 기습전을 전개했는데, 7월 11일
불암산과 가까운 퇴계원 보급소를 습격해 적 30여 명을 죽이고 기름 50드럼을 폭파하면서
그
들의 첫 작품을 근사하게 치루었다.
7월 31일, 창동(倉洞) 수송부대를 습격해 6명을 죽이고, 보급차량 다수를 폭파했으며, 8월 15
일에는 북한군 훈련소를 기습해 50여 명을 사상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전투인 9월 21일에 북
한군에게 끌려가는 주민 100여 명을 남양주 내곡리에서 구출하고 적 수십 명을 죽였다. 하지
만 적들의
반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만 19명이 장렬히 전사했으며, 강원기 생도(육사 1기)는
중상을 입고 피신해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며칠 안가서 결국 눈을 감고 만다.
딱 7일만 더 버텼다면 서울 수복의 기쁨을 누렸을텐데. 하늘도 참 야속했다. 그러고보면 이
땅의 하늘은 정의로운 사람에게만 화를 주고,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만 주로 복을 주니 참 하
늘값을 제대로 못한다. 그런 하늘은 우리에게는 전혀 필요가 없다.
* 불암사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797 (불암산로 190 ☎ 031-527-8345)
* 불암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