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 보루의 정석,
아차산4보루(堡壘)
- 사적 455호

▲ 아차산4보루 남쪽 2중치와 동남쪽 성곽 |
아차산4보루는 용마산과 망우산을 제외한 아차산 보루 식구 중 가장 북쪽에 자리해 있다. 잃
어버린 땅을 제외한 우리나라의 고구려 성곽 유적 중 건물터와 성벽의 구조가 제대로 밝혀진
최초의 현장으로 의미가 아주 남다른 곳인데,
아차산~용마산~망우산 보루 중 거의 유일하게
성벽의 흔적이 다소 남아있었다.
복원 이전 성벽의
최대 잔존 높이는 1.8m로 남벽과 동벽은 잘 다듬은 성돌을 이용한 탓에 그
런데로 남아있었으나 북벽과
서벽은 훼손이 심해 남아있는 높이가 0.8m를 넘지 못했으며, 부
정형의 석재를 사용해 조잡하게
축조되었다. |

▲ 들여쌓기의 정석을 보여주는 4보루 남쪽 2중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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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시가 4보루에 숨겨진 옛날 이야기를 풀고자 1997년부터 문화재청과 경기도의 도움을 받아
1998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하여 온돌과 배수로, 저수조 등을 갖춘 건물터를 확인했으며,
'後部○兄'이라 쓰인 토기가 나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반에 닦여진 보루임이 명백해졌다. 여기서 후부(後部)는 고구려 5부의 하나이며, '○兄'은
고구려 관등의 하나로 여겨진다.
고구려에는 '형(兄)'자가
들어가는 관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2007년에 다시 조사를 벌여 숨겨진 치성을 발견했고, 보루 형태와 성벽 축성 방식을 확
인하면서 복원 가능성이 높아졌다. 4보루 한복판으로 서울시와 구리시의 경계선이 지나가 절
반은
서울시, 나머지 절반은 구리시 영역인데, 구리사가 2008년부터 복원을 적극 추진하여 2
년의
공사 끝에 2010년 12월 24일에 복원 준공식을 가졌다. 아차산일대
보루 중 처음으로 복
원된
행운의 보루인 것이다. (나중에 시루봉 보루도 복원되었음)
보루 복원을 위해 보루터에서 나온 늙은 성돌을 주로 사용했으나 수량이 적어서 부득이 새
성
돌로 모자란 부분을 때웠다. 그러다보니 고색이 짙은 옛 돌과 하얀 피부의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를 이룬다. 허나 이는 어쩔 도리가 없다. 발굴조사를 토대로 고구려 축성 양식에 맞춰
왕
년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했고, 건물터와 온돌 유구 등은 보존을 위해 모두 땅으로 덮었다.
그리고
보루 중앙에 탐방로를 내고 건물터 쪽에는 금줄을 쳤으며, 보루 북쪽과 남쪽에 보루로
오르는
계단을 냈다.
보루의 둘레는 약 249m, 성벽 높이는 최소 4m 이상이다. 허나 탐방객의 안전을 고려하여 2.5~
3.1m 높이로 축소 재현하여 마치 역사 왜곡의 현장 같은 아쉬움을 준다. 지형의 경사면을 이
용해 바깥 쪽에 성벽을 쌓고, 안쪽 경사면에는 뒷채움돌과 흙으로 다졌는데, 방어력을
높이고
자 동/서/남/북에 5개의 치성(雉城, 치)을
두었다.
치성(치)은 성곽 방어를 위해 앞쪽으로 다소 튀어나온 성벽으로 고구려표 축성 양식의 하나이
다. 그 양식은 백제와 신라, 고려, 조선은 물론 왜열도와 서토(중원대륙)까지 전해져 절찬리
에 쓰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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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보루로 올라가는 남쪽 계단

▲ 아차산4보루의 독특한 구조물, 남쪽 2중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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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보루 남쪽에는 2중 구조를 지닌 특이한 치가 남쪽으로 길게 나와있다. 그는 전체 길이 13.2m
로 중간에 목책(木柵)이 둘러진 2.5m 정도 들어간 공간이 있는데, 그것을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 치로 구분된다.
뚫린 공간에는 치의 성벽에 잇대어 4개의 후대 석축단이 축조되었고, 그 좌우로 목책을 세웠
는데, 보루의 출입구로 여겨진다. 이런 구조는 용마산2보루와 개발의 칼질로 무자비하게 사라
진 구의동보루에서도 일부 확인이 되고 있으나 사실상 아차산4보루가 유일하며, 고구려 보루
의 독특한 구조를 보여줌과 동시에
보루의
끝이 들여쌓기로 차곡차곡 닦여져 안정감을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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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보루 서남쪽 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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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루 내부에서는 건물터 7곳, 온돌 유구 2기, 배수로, 저수조 흔적, 치성 5곳이 발견되었다.
여기서는 항아리와
글씨가 새겨진 토기, 시루, 투구, 찰갑(가벼운 갑옷), 창, 도끼, 화살촉,
낫,
쇠스랑, 말에 물리는 재갈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와 아차산3보루와 함께 아차산 일
대 병참기지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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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을 향해 약간 튀어나온 4보루 동쪽 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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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보루로 올라서니 그런데로 너른 보루 내부가 펼쳐진다. 이곳에는 군사들이
머물던 숙소와 창
고, 방어시설 등이 들어서 있었는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 형님의 꾸준한 괴롭
힘 앞에 모두 사라지고 터만 황량이 남아 사람들의 상상력을 살찌워준다.
이곳을 재현한 모형이 서울대박물관에 있으나 이 역시 100% 정답은 아니니 고구려 건축 양식
에
맞춰서 적당하게 4보루의 모습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이것이 4보루가 우리에게 주는 숙제
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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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보루 1호 건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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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보루의 7개 건물터 중 남쪽에 있는 1호 건물터가 가장 높다. 여기서는 온돌 유구 2기와 주춧
돌이 나왔으며, 온돌 아궁이 주변에서는 글씨가 새겨진 토기, 철제투구 등이 나와 4보루를 관
리하던 높은 장수나 지휘관의 숙소로 여겨진다.
1호 건물터 주변에는 6호 건물터와 7호 건물터, 2호 건물터 등이 있으며, 3호 건물터 밑에서
는 'ㅡ'자형 온돌유구 2기가 나왔는데, 층위(層位)로 보아 건물터보다 먼저 조성되었음이 밝
혀져 4보루 내부 구조물이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이 결코 아님을 보여준다. 보루를 먼저 쌓고
나중에 온돌과 내부 시설을 닦았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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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보루 내부 (북쪽 방향)

▲ 4보루 내부 (남쪽 방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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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로 좌우로 잔디와
흙이 두툼히 덮여진 건물터와 저수시설 유적이 있고, 키가 작은 금줄을
둘러놓아 고구려의 거룩한 흔적을 지키고 있다. 금줄의 의미처럼 줄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되나
지키는 사람이 딱히 없어서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펴고 쉬거나 음식을 처묵처묵하는 골 빈 작
자들이 적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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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보루 저수시설 |
4보루에서는 물을 저장하는 2개의 저수조(貯水槽) 흔적이 나왔다. 이들은 깊이 3.5m 정도 수
직으로 암반 흙을 파내고 바닥과
벽에 입자가 고운 회색 뻘흙을 발라 물이 새지 않도록
방수
처리를 한 것으로 규모는
'430x300x깊이230cm','350x310x깊이240cm'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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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보루 동북쪽 치
치 너머로 한강과 구리, 남양주, 하남, 강동구 지역이 두 망막에 들어온다.

▲ 한강을 향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4보루 동북쪽 치 |
4보루는 북쪽을 제외하고 동/서/남이 확 트여있어 조망이 아주 예술이다. 여기서는 광진구와
성동구, 동대문구, 종로구, 중구, 송파구, 강동구, 한강은 물론 하남시와 구리시, 남양주시
지역까지 시야에 들어오며, 해돋이와 일몰을 모두 맞이할 수 있어 해돋이 수요와 일몰 수요,
야간 등산
수요가 많다. (1월 1일에는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완전히 미어터짐)
게다가
아차산과 용마~망우산을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위치라 아차산 주능선의 목구멍 같은
곳이다.
그러니 고구려가 이곳에 큰 보루를 쌓아 무척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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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보루 동북쪽 치에서 바라본 천하
한강과 강동구, 하남시, 남한산성 등

▲ 아차산4보루에서 바라본 북쪽 방향 (아차산 주능선과 용마산)

▲ 4보루 북쪽 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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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보루 서쪽 성곽 |
▲ 4보루 북쪽 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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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보루 바깥에는 우회 산길이 있다. 4보루의 속살로 들어가기 싫다면 그 우회길을 이용하면 되
는데, 아차산에 왔다면 4보루는 무조건 찍고 가는 것이 이곳의 관례처럼 되어있다. 그러다보
니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람이 많으며,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먹는 이들도 적지 않
다. (특히 저녁에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단체로 먹거리를 섭취하는 등산 동호회 사람들이 많
음) 휴식과 음식 섭취는 좋으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금줄을 넘어가는 행위는 하지 말자.
아차산4보루를 비롯한 아차산 보루 6식구, 용마산 보루 7식구, 망우산1보루, 홍련봉 보루 2식
구, 시루봉보루는 한 덩어리로 묶어 '아차산일대 보루군'이란 이름으로 사적 455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마무리를 짓는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 아차산4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4동,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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