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이자 자문 밖 경승지인 부암동(付岩洞)에는 상큼한 옛 명소들이
많이 깃들여져 있다. 그중에는 백사실계곡(백석동천)도 있고 2012년에
빗장이 열린 석파
정도 있는데, 둘의 공통점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사대부(士大夫)의 별서라는 것이고, 다
른 점은 백사실(백석동천)은 언제든 안길 수 있는
무료의 공간이나 석파정은 서울미술관
을 끼고 들어가야 되는 유료의 제한적 공간이란 것이다.
석파정을 옆구리에 낀 서울미술관은 입장료가 다소 야박한 편이라 석파정만 본다고 해도
깎아주는 건 일절 없다. 물론 석파정 정도라면 그 정도의 값을 치루어도 썩 아깝지는
않
겠으나 주머니 사정에 늘 고통을 받는 가련한 서민으로써 그 가격이 무지 만만치가 않다.
하지만
한달에 하루 꼴로 그 입장료의 콧대가 꺾이는 날이 있다. 바로 '문화가 있는 날'
로 지정된
매월 마지막 수요일이다.
이때는 입장료를 받는 부동산 문화유산(경복궁, 헌인릉,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등)과 미
술관, 박물관, 수목원, 영화관, 공연 등의 입장료가 50%에서 최대 100%까지 깎인다. 석
파정 같은 경우는 50%를 깎아주는데, 바로 그날을 이용해 석파정으로
발을 들였다. (석
파정은 예전 겨울에 이미 인연을
지은 적이 있음)
서울미술관 남쪽에는
삼계동(三溪洞) 현판을 지닌 기와집 문이 있다. 그가 바로 석파정의 정
문(대문)이다. 삼계동은 석파정 일대의 옛 지명으로 인왕산이 베푼 3개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이라 하여 유래된 이름이다.
석파정이 오랫동안 개인 소유로 꽁꽁 닫히면서 정문 또한 굳게 닫혀져 열려있는 꼴을 못보았
는데, 이곳이 개방된 이후에도 여전히 열릴 줄 모른다. 문이란 자고로 열고 닫으라고 있는 것
이지만 너무 입만 닫고 살다 보니 그새 여는 법을 까먹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럼 석파정은 어디로 들어가야 될까? 바로 석파정 동쪽에 지어진 서울미술관을 강제로
거쳐
야 된다. 그러다 보니 정문은 여전히 그 자격을 회복하지 못한 것이다. 정문 옆에는 차량을
위한 문이 있으나 그건 석파정(석파문화원, 서울미술관)
관계자만 이용이 가능해 일반인들은
어림도 없다. 이곳을 소유하고 있는 석파문화원도 생각이 있다면 삼계동 대문을 개방하고 문
앞이나 뒤쪽에 매표소를 두는 것이 어떨까 싶다.
▲ 3층석탑에서 바라본 서울미술관 옥상과 북악산(오른쪽 산)
자하문로와 맞닿은
석파정 동쪽에는 서울미술관이 독특한 건축 스타일을 드러내며 자리해 있
다.
미술관은 지상 4층 규모로 맨 아래층인 L층에 까페가 있고, 1층은 매표소와 제1전시실이
, 2층은
제2전시실, 3층은 특별전시실과 매점(뮤지엄샵), 석파정 출입구가 있다.
매표소에서 기분 좋게 50% 깎인 입장권을 사들고 엘리베이터로 3층으로 오르면 뮤지엄샵 옆으
로 석파정 출입구가 손짓을 한다. 입장권으로 석파정과 미술관 모두 둘러볼 수
있으니
취향에
따라 움직이면 되며 나는 석파정에 정신이 몽땅 팔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바로 석
파정으로 이동했다. (미술관은 그 다음임)
▲ 상큼하게 꾸며진 서울미술관 옥상정원
▲ 옥상정원 입구에 심어진 석등(石燈)
고색이 크게 와닿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후기 것으로 여겨진다. 석파문화원에서
수습하여 갖다둔 것으로 그의 고향과 정보는 안내문이 없어서
모르겠다.
(간단한 안내문이라도 설치해주었으면 좋겠음)
석파정 출입구를
나오면 봄에 물씬 잠겨있는 석파정 일대가 감동의 물결처럼 펼쳐진다. 단지
미술관에서 3층 바깥으로 나왔을 뿐인데 풍경은 21세기에서 대원군 할배가 튀어나올 것 같은
조선 후기로 확 바뀌어져 있으니 그 짧은 출입구가 마치 150년 이상의 시간을 이어주는 시간
의 통로 같다.
이곳은 미술관의 야외공원 역할을 하고 있는데,
출입구에서 서북쪽에 석파정 사랑채가 보이고
, 북쪽은 옥상정원, 서쪽에는 하얀 피부의 반석이 깔린 삼계동계곡이 있다. 우선 옥상정원과
석등을 살펴보고 계곡으로 다가서니 90도 직각으로
선 바위에 살포시 깃들여진 소수운렴암 바
위글씨가 뜨겁게 광선을 보낸다.
▲ 하얀 반석이 일품인 삼계동계곡 (가운데 부분에 소수운렴암
바위글씨가 있음)
▲ 소수운렴암(巢水雲簾庵) 바위글씨
석파정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서(別墅, 별장)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허나 원
래는 안동김씨
세력가였던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이 지은 것으로 그 이전의 상황을 바로
소수운렴암 바위글씨가 아련하게 알려주고 있다.
소수운렴암이란 무엇일까? 바로 '물로 둥지를 틀고 구름으로 발을 삼은 집(구름으로 발을 친
집)'이란 뜻이다. 그 옆에는 '寒水翁書贈 友人定而時 辛丑歲也'라 쓰여 있는데 이는 '한수옹
이 친구 정이에게 선사한다. 때는 신축년이다'란 의미이다. 여기서 한수옹은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이고 정이는 임천조씨 집안인 조정만(趙正萬)이며 신축년은 권상하 인생의 마지막
해였던 1721년이다.
하여 조정만의 작은 별서나 정자가 있던 것으로 여겨지며 이를 통하여 18세기 초나 그 이전부
터
별서 같은 것이 있었음을 살짝 속삭여준다. 이곳은 북악산(백악산)이 훤히 조망되고 작은
계곡과 숲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으며 잘생긴 바위와 암반이 즐비해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던
시절부터 자문(자하문) 밖 경승지로 명성을 누렸다. 그러니 이렇게 기가 막힌 곳에 김흥근의
별서부터
있던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 삼계동계곡 (소수운렴암 서쪽)
▲ 바위에 구멍을 내어 돌을 뗀 흔적들
석파정을 촉촉히
어루만지는 삼계동계곡은 인왕산이 베푼 계곡의 일원이자 인왕산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계곡이다.
겉으로 보면 견고한 바위산인 인왕산에 변변한 계곡이 거의 없을 듯
싶지만 실제로는 매우 많다.
허나 개발의 칼질로 상당수의 계곡이 썰리거나 아작이 나버려 눈에 띄는 건 별로 없으며 겨우
수성동계곡(水聲洞溪谷, ☞
관련글
보기), 백운동천(白雲洞天, ☞
관련글
보기), 환희사계곡(
歡喜寺溪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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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삼계동 정도만 명맥을 유지한다.
삼계동계곡은 너럭바위 남쪽에서 발원하여 석파정 대문 직전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홍제천
(弘濟川)으로 흘러가며, 석파정 구간은 옛 모습으로 잘 남아있다. 그리고
소수운렴암 바위글
씨 주변 암반에 작은 구멍들이 여럿 있는데 이는 돌을 떼고자 낸 흔적들로
석파정 조성에 계
곡 암반들이 조금이나마 동원되었음을 귀띔해준다.
▲ 마치 장갑이나 야구 글로브처럼 생긴 누런 피부의 바위
바위
피부에 세월의 주름선이 가득하다.
▲ 삼계동계곡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의 위엄
▲ 밑에서 바라본 석파정 사랑채와 안채
안동김씨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김흥근은 삼계동에 단단히 군침을 흘리며 이곳을 차지하여 큰
별서를 지었다. 그리고 이곳 이름을 따서 '삼계동정사(精舍)'라 하였는데 언제 지어졌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안동김씨가 한참 세도를 부리며 나라를 말아먹던 1837~1858년 사이로
여겨진다.
이곳이 워낙 좋은 터라 고종(高宗)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도 김흥근 못지
않
게 군침을 흘렸다. 하여 김흥근에게 자신에게 팔 것을 여러 차례 요구했으나 거절을 당했다.
안그래도 흥선대원군과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에 의해 안동김씨 세력이 크게 주저앉은 상황
이라 기분도 썩 좋지가 않은데 이곳까지 달라고 하니 이건 정말 자존심 문제였다.
맹랑하게 나오는 김흥근에게 발끈한 대원군은 잔머리를 굴렸다. 하여 어느 날 갑자기 고종과
함께 석파정을 찾아와 하룻밤을 머물고 환궁했는데, 이에 김흥근은 임금이 묵고 간 곳에 신하
가
살 수 없다며 부들거리는 마음을 애써 감춘 채, 이곳을 더 이상 찾지 않았다. 즉 이곳의
소유권을
포기한 것이다. 이 사건은 60여 년 동안 세도정치를 부렸던 안동김씨 패거리가 대원
군에게 완전히 두 손을 들었음을 상징한다.
이곳을 싱겁게 차지한 대원군은 앞산이 거의 바위 언덕이므로 자신의 호를 석파(石坡)라 했으
며,
별서 이름도 석파정으로 갈았다. 1864년 2월 고종이 다녀가 '석파산장(石坡山莊)'이란
현
판을 남겨 '석파산장'이란 별칭도 있었음을 보여주며, 고종의 행궁(行宮)으로도 종종
사용되
었다.
▲ 석파정 사랑채
석파정에는 안태각(安泰閣), 낙안당(樂安堂), 망원정(望遠亭) 등 7채 이상의 집이 있었다. 허
나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지금은 사랑채, 안채, 별채, 정자(석파정)만 남아있으며, 그
외에 별당(別堂)도 있었으나 1958년 소전 손재형(孫在馨)이 매입해 자신의 별서(석파랑)로
가
져가 버렸다. (석파정이 그 시절 관리가 너무 부실하여 언제 망가질지 몰라서 가져갔다고 함)
1898년 대원군이 골로 가자 그의 큰아들이자 고종의 형인 흥친왕(興親王) 이재면(李載冕)에게
상속되었다. <고종이 1897년 황제를 칭하면서 아버지와 형제를 친왕(親王)에 봉했음> 친일매
국노인 이재면이 1912년 지옥으로 떨어지자 그의 아들 이준용(李埈鎔)이 상속을 받았는데, 그
역시 아비를 닮아 친일매국노로 악명을 떨쳤다. 그가 자체 폐기되자 아들인 이우가 받았으나
이곳을 관리할 능력이 되지 못해 6.25 이후 천주교 단체에 팔아버렸다.
천주교는 이곳을 콜롬비아 고아원과 결핵요양원으로 사용해 전쟁 고아와 결핵환자를 보호하고
관리했으나 그로 인해 석파정 건물이 적지 않게 망가졌다. 다행히 1974년 서울 지방유형문화
재 26호로 지정되면서 더 이상의 큰
훼손은 면하게 되었다. 만약
지방문화재의 지위 조차 얻
지 못했다면 이곳은 크게 변형되거나 완전히 아작이 났을지도 모른다.
허나 소유주 입장에서는 문화재 지정으로 인해 마음대로 건물을 부시거나 신축 등 재산권 행
사가 어렵게 되었다. 하여 다른 이에게
팔아버렸고, 새 주인도 막대한 부채로 쓰러지자 2004
년 법원에서
이곳을 경매에 부쳤다.
이후 2번의 유찰 끝에 새 주인이 나타났으나 이곳을 활용하지 못했으며 석파문화원이 인수하
여 서울미술관을 짓고 석파정을 손질해 드디어 2012년 가을, 유료의 공간으로 천하에 공개되
었다. 그 이전에는 속세에 꽁꽁 문을 닫아 걸어 관람이 거의 불가능했었다.
▲ 나무색이 잘 살아난 사랑채 툇마루
사랑채는 대원군이
머물던 공간으로 평소에는 자택인 운현궁(雲峴宮)에 있다가 종종 이곳으로
마실을 나왔다. 6칸짜리 팔작지붕 집으로 툇마루에 앉을 수 있으나 방에는 들어갈
수 없다.
사랑채 옆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품격이 높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건물 뒤쪽에는 꽃계단을
두어 봄꽃들이 한참 봄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툇마루에 앉아 인왕산이 베푼 산바람과 솔내음에
오각과 마음을 맡기니 정말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대원군도 아마 그랬겠지? 바로 정면에는 삼계동계곡과 싱그러운 숲이 보이고 시선을 동
으로 하면 뾰족 솟은 북악산(백악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 석파정 소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6호
사랑채 옆구리에는
좌우로 넓게 퍼진 소나무가 있다. 높이 5m, 그늘의 넓이는 67㎡ 정도로 그
의 정확한 나이는 인왕산 산신도 모르나 대략 500~600년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까 석
파정 훨씬 이전부터 이 자리를 지켰던 터줏대감이다.
이런 종류의 소나무를 반송(盤松)이라 부르는데 대원군도 이 나무를 옆구리에 끼며 꽤 애지중
지했다고 한다. 김흥근도 아마 그랬을 것이고, 그 이전 이곳을 찾았던 사대부들도 이
나무를
찬양했을 것이다. 하긴 생김새가 아름답고 범상치 않으니 자연히 사랑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그늘 맛도 얼마나 좋던지
그의 밑도리에 있으면 산바람과 계곡 바람, 거기에 솔내음까
지 어우러져 무더위를 제대로 참교육시킨다.
서울에 흔치 않은 수백 년 묵은 반송이라 국가 천연기념물로 삼아도 손색이 없으나
아직까지
서울시 보호수란 말단 등급에 머물러 있다. (예전에는 서울시 지정보호수 60호였음)
하긴 석
파정도 국가 명승이나 국가 보물의 자격이 충분함에도 아직까지 지방문화재에 머물러 있으니
그 기준이 참 아리송하다.
석파정이 개방되기 이전에는 나무 주변이 흙판이었으나 주변을 정비하면서 옛 모습을 조금 잃
었다. 늙은 나무 가지를 지탱하고자 철기둥을 여럿 설치했지만 아직까지는 건재하여 석파정의
오랜 상징이자 백미(白眉)로 추앙을 받는다.
▲
서쪽에서 바라본 석파정 소나무와
푸른 봄하늘
▲
소나무 밑에서 그늘 맛을 누리고 있는
맷돌 (대원군 시절 유물로 여겨짐)
▲ 봄향기가 짙게 묻어난 사랑채 뒤쪽 꽃계단
대원군 시절에 닦여진 꽃계단으로 궁궐 후원(後苑)의 축소판 같은 모습이다.
제왕의 아비로 막강한 위엄을 부렸던 대원군의 별서라 가능했을 것이다.
▲ 물이 고인 사랑채 앞 삼계동계곡
인왕산이 베푼 물이 이곳에서 모임을 벌이고 있다. 봄가뭄이 심하여 그나마
이곳에나
물이 제대로 있을 뿐, 상류와 소수운렴암 앞은 거의 타들어가고 있다.
▲ 사랑채 옆 안채
안채는 여인들의 공간으로 그 전통을 이어받은 탓인지 거의 통제구역으로
묶여있다. (안채 문이
모두 닫혀져 있음)
▲ 굳게 입을 닫은 궁궐 스타일의 별채 협문 (사랑채와 안채
사이)
♠ 석파정만의 특별함 ① 별채와 구름길
▲ 석파정 별채
안채 뒤쪽에는 별채가
있다. 석파정 건물 중 가장 하늘과 가까운 집으로 보통 별서는
사랑채
와 안채 위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곳처럼 별채까지 챙긴 경우는 없다. (인근 백석동천 별서
터도 사랑채와 안채, 정자로 이루어져 있음~) 위치가 높다 보니 석파정 경내가 훤히 바라보여
그야말로 전망이 좋은 집이며, 건물의 위치도 그렇고 품격이 느껴지는 협문과 꽃담까지 지닌
것으로 보아 고종의 행궁 역할을 했던 공간으로 여겨진다. 아무래도 석파정이 고종의 아비의
별서라
문안차 종종 찾았을 것은 뻔했을 것이니 제왕인 아들을 위해 특별히 별채를 두어
대접
했던 것이다.
별채 역시 안채처럼 금지된 구역으로 묶여 있어 내부 접근이 불가능하며, 담장 너머로 까치발
로 바라봐야 된다. 석파정이 비록 해방되긴 했으나 안채와 별채는 여전히 속세의 발길을
거부
하고
있다.
▲ 담장 너머로 바라본 석파정 별채
제왕의 공간이라 그런지 사랑채, 안채와 달리 건물이 높직하게 닦여져 있다.
▲
굳게 닫힌 별채 서쪽 협문
▲
뒷쪽에서 바라본 안채의 뒷통수
▲ 안채 동쪽 돌담
별채 뒤쪽으로도
상큼하게 산책로가 닦여져 있다. 옥상정원 입구에서 북쪽 길로 가면 돌담이
나오면서 별채 뒷길이 펼쳐지는데 사랑채 뒤쪽을 거쳐 너럭바위까지 이어진다. 미술관에서는
이 산책로에 '구름길'이란 이름을 달아주었는데 구름에 닿을 정도로 석파정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지붕길이다.
또한 별채 뒤쪽으로 들어서면 길 북쪽으로 철책과 담장이 높게 둘러져 속세와 석파정의
경계
를 긋는다. 지붕길 외에 경계선의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철책 바로 너머에도
석파
정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기와집이 여럿 보여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삼계동에 석파정 외
에 다른 늙은 한옥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여 석파정의 옛 일원이 아닐까
싶
은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석파정의 주인이 계속 바뀌는 과정에서 집과 토지
일부가 다른
이에게 넘어가 남남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음)
▲ 벼루를 크게 확대한 듯한 커다란 석조(石槽)
옥상정원 입구에 예사롭지 않은 모습의 큰 석조가 누워있다. 대원군 시절의 것으로
석조에는
수분이 가득 고여있고 온갖 꽃잎들이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고 있으니 석조는 그들의
인생을
마무리시키는 일종의 블랙홀인 모양이다.
▲ 석조 앞에서 바라본 안채와 별채 옆구리
▲ 돌담을 따라 이어진 별채 뒷쪽 구름길
▲ 별채 동쪽 부속 건물의 바깥 모습
▲ 너럭바위로 이어지는 구름길
(오른쪽에 경계선 철조망이 있음)
▲ 삼계동 바위글씨가 깃든 사랑채 서쪽 바위
▲ 삼계동 바위글씨의 위엄
석파정에는 '소수운렴암'과
'삼계동' 등 2개의 바위글씨가 전해 이곳의 높은 정취를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 서쪽 바위에 진하게
깃든 '삼계동' 바위글씨는 이곳의 옛 이름을 어렴풋이 알려
주는 존재로 19세기에 새겨졌다.
(김흥근 시절에 새겨진 것으로 여겨짐)
▲ 삼계동 바위글씨에서 바라본 소나무와 사랑채, 그리고 북악산(백악산)
석파정은 어디에서든 북악산(백악산)이 조망된다. 제주도 어디에서든
한라산(漢拏山)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 물이 바짝 마른 삼계동계곡 (소나무 앞)
▲ 삼계동계곡에서 바라본 미술관 옥상정원과 북악산(백악산)
▲ 석파정 서쪽 숲속으로
석파정은 크게 사랑채,
안채, 별채가 있는 별서 부분과 서쪽 숲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숲속
에 석파정이란 정자가 있어 별서와 구분하고자 별서 부분을 '흥선대원군 별서'라 부르기도 한
다. 숲길은 '구름길'과 '물을 품은 길' 등 2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구름길'은 별서 북쪽에, '
물을 품은 길'은 삼계동계곡 남쪽 숲에 닦여져 있다.
이들 길은 너럭바위에서 서로 간판을 바꾸어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 별서로 이어지는 순환형으
로 숲이 매우 짙고 길이 정갈하게 닦여져 있어 속세와 회색빛 도시를 잠시 잊은 채, 사색하기
에 아주 그만이다. 아쉬운 건 그 산책로의 길이가 우리네 인생만큼이나 짧다는 것이며 체감거
리는 그보다 더 짧다. 그만큼 산책과 사색에 집중하기 좋은 길이란 뜻이다.
▲ 별채 서쪽 협문 산책로와 쉼터
♠ 석파정만의 특별함 ② 석파정(관풍루), 너럭바위, 3층석탑
▲ 청나라 스타일로 지어진 석파정<관풍루(觀風樓)>
숲이 무성한 삼계동계곡 상류에 이국적으로 지어진 정자, 석파정이 숨어있다. 지금은 별서 일
대를 통틀어 석파정이라 하지만 원래 석파정은 이곳을 일컬었다. '관풍루','수각(水閣)' 등의
별칭도 가지고 있으며 김흥근이 청나라에서 장인을 소환하여 만들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이 땅의 거의 유일한 청나라 스타일의 옛 정자로 계곡 한복판에 자리해 있는데 땅에서 그곳까
지
짧게 돌다리인 곡교(曲橋)가 놓여져 있으며 정자 역시 다리 위에 있어 허공에
떠있는 모습
이다. 청나라 풍의 문살 문양을 지니고 있으며 바닥은 화강암으로 처리했다. 이런
양식의 정
자는 우리의 옛 땅인 중원대륙에 많이 있으며, 김흥근(또는 대원군)이 그 양식을 별서에 도입
하여 팔자 좋게 풍류를 즐겼다.
▲ 가까이서 본 석파정의 위엄
▲ 석파정 정자로 인도하는 오솔길
석파정 주변 계곡도 약간의 인공이 가해졌다. 멀쩡한 바위를 파서 홈을 내어 대(臺)를 다지고
돌을 뚫어 도랑을 내어서 정자 밑으로 흐르게 했던 것이다. 이 역시 막강한 재력과 권력이 없
이는 어려운 일로 비록 인공이 더해졌다고 하나 그렇게 티는 나지 않는다.
이곳은 막다른 곳이라 왔던 길로 다시 돌아나가야 된다.
◀ 너럭바위 방면 구름길
▲ 석파정과 속세의 경계를 긋는 경계벽과 구름길
별서 서북쪽에는 마치 교도소 벽이나 군부대 벽처럼 꽤 무겁고 차가운 경계벽이 있다. 그들의
장대한
모습에 미술관이나 석파정 담장이 맞는지 고개가 갸우뚱거릴 정도로 그 차가움을 풀고
자 벽화를 여럿 그려놓아 조금이나마 따스함을 건네준다.
▲ 경계벽 벽화들 (오른쪽은 봉황 같음)
▲ '조용한 증식'이란 이름의 현대작품
(김병호, 2014년)
▲ 세상을 완전 막아선듯한 너럭바위
석파정 경내 서쪽 끝에는 너럭바위라 불리는 큰 벼랑이 있다. 바위의 모습이 코끼리를
닮았다
고 하여 코끼리바위라 불리기도 하며, 그 위쪽에는 인왕산의 탕춘대능선이 살짝 흘러간다. 바
위가 앞을 막고 있어 마치 세상 끝에 다다른 기분인데 여기서 바위를 올라가는 길은 사실상
없다. (인왕산과 맞닿은 서쪽 숲에도 철책이 꽁꽁 둘러져 있어 철저히 무료와 유료의 공간을
나눠놓고
있음)
바위가 꽤 우람하게 생긴 탓에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소원을 들어주는 영험한 바
위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다 보니 치성 장소로 바쁜 시간을 보냈는데, 아이가 없던 노부부가
여기서 치성을 올려 아들을 얻었다는 이야기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로 아들이 과거에 붙었다
는 이야기 등 귀에 솔깃한 다양한 체험담이 전한다. 그로 인해 소원바위, 행운바위란 별명까
지 덩달아 지니고 있다.
허나 지체 높은 작자가 이곳에 침을 바른 이후에는 자연히 백성들의 접근은 통제되었을 것이
다. 이후 개인 사유지로 인해 오랫동안 속세와 등을 졌고 그렇게 그의 존재감은 완전 잊혀졌
다. 그러다가 2012년 이후 이곳이 해방되면서 다시 세상을 향해 그 장대한 기골을 보여준다.
이제는 미술관 영역이라 예전처럼 촛불을 키고 치성을 할 수는 없으며 소망이나 고충을 살짝
들이미는 선에서 가볍게 기도를 하고 가기 바란다.
▲ 너럭바위 돌계단 (통제구역)
어차피 올라가봐야 길은 막혀있다.
▲ 너럭바위 앞 공터(쉼터)
그늘에 감싸여 있어 은근히 시원한 곳이다.
▲ '물을 품은 길' 산책로
너럭바위에서 3층석탑까지 이어지는 호젓한 산책로로 삼계동계곡 최상류를
지나므로
'물을 품은 길'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숲이 매우 울창하여
짧게나마 산림욕과
사색 즐기기에는 아주 그만이다.
▲ 구부러짐의 미학을 보여주는 '물을 품은 길' 산책로
'물을 품은 길'은 석파정 경내 산책로 중 가장 아름다운 길이 아닐까 싶다. 물론 '구름길'도
좋고, 석파정 직전 짧은 오솔길도 좋지만 구름길은 철책과 적절치 못한 큰 담장, 그리고
금지
된 구역인 안채와 별채 뒤쪽을 지나므로 그들을 담장 너머로 까치발로 봐야되는 고통과
비공
개 구역을 들어갈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한 쓰라린 마음이 크다.
허나 물을 품은 길은 오로지 숲과 장애물이 없는 잘 닦여진 산책로가 전부라 나의 정처 없는
마음을 크게 쥐어흔든다. 봄에 와도 감동이 큰데 만약 늦가을에 왔다면 그 환희는 실로
대단
했을 것이다. (늦가을 환희와 더불어 연말이란 우울증도 같이)
▲ '물을 품은 길'에서 만난 키 작은 장승 1쌍
▲ 삼계동계곡 최상류 (석파정 윗쪽)
'물을 품은 길'을 거닐면 삼계동계곡 최상류 부분을 만나게 된다. 개울은 작지만 바위들이 거
의 직각을 이루며 들어서 있고 조촐하게 폭포도 빚어져 있어 이런 곳은 아름다운 풍경에 부여
되는 동천(洞天) 대접을 받기 마련이다. 하여 '~~동천'이라 불렸을 법도 하지만 관련 기록은
없다. 다만 이곳이 삼계동이라 불렸으니 '삼계동천'이란 숨겨진 이름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물이 좀 흘렀으면 이곳의 아름다움이 더욱 마음에 와닿았을 것인데 자연의 심술과 인간의 욕
심에
봄비가 말라가면서 바짝 마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곳은 비가 한바탕 쏟아부은 직후에
오면
그 위엄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 (소수운렴암 바위글씨 주변 계곡도 마찬가지임)
▲ 숲속을 가르는 '물을 품은 길'
▲ '물을 품은 길'에서 바라본 별서 일대
(왼쪽이 사랑채, 그 오른쪽이 안채, 그 뒤쪽 높은 곳이 별채)
▲ 신라시대 3층석탑
'물을 품은 길'의 동쪽 끝에는 신라시대 3층석탑이 있다.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
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으로 마무리를 지은 신라 후기 탑으로 맵시가 아주 좋다. 뜬금없는 3층
석탑의 등장에 '이곳에 절터가 있었나?' 여길 수 있지만 그런 흔적은 없으며 석파문화원이 경
주(慶州)의 어느 경작지에서 쓰러진 채 방치된 탑을 업어와 복원하여 2012년 6월에
지금의 위
치에 두었다.
이곳 바로 밑에는 소수운렴암과 삼계동계곡이 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소수운렴암 윗쪽 언덕
의 지세가 적지 않게 변했다. 하여 지세가 약해진 것을 보완하고자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탑을
여기에 세운 것이다.
비록 제자리는 아니지만 석파정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그 옆에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으며, 그 길로 가면 바로 소수운렴암이다. 즉 원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 신라시대 3층석탑
▲ 계곡에서 바라본 3층석탑(가운데)
소수운렴암을 거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으나 이곳에 마음이 퐁당퐁당 빠진 탓에 그냥 나가기
가 아쉬워 석파정 경내를 다시 1바퀴 복습했다. 마음 같아서는 더 머물고 싶었지만 야외공원
폐장 시간이 임박해 아쉬운 마음을 접고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미술관 부분은 생략)
이렇게 하여 석파정 봄나들이는 늦가을의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석파정, 서울미술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202-4. 산16-1 일대 (자하문로
231
, ☎ 02-395-0100)
* 서울미술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소수운렴암에서 바라본 삼계동계곡 하류
매끌매끌한 하얀 피부의 계곡 반석이 삼계동 대문 직전까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원래는 속살을 보이며 홍제천까지 흘러갔으나 자하문로 개설로 대문 직전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어둠의 경로로 흘러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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