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힘겹게 겨울 제국을 몰아내고 오랜 추위로 놀란 천하를 한참 안정시키던 4월의 첫 무
렵, 대구(大邱) 동남쪽 끝에 자리한 달성군 우록리(友鹿里)를 찾았다.
우록리는 서쪽으로 우미산(736m), 남쪽으로 삼성산(668m), 북쪽과 동북쪽으로 최정산(905m
)과 삼정산(566m)에 꽁꽁 감싸인 산골로 신천(新川)이 흐르는 동쪽만
가늘게 길이 있어 그
곳으로 사람과 차량이 오간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시절 항왜(降倭)로 유명한 김충선의 유적(김충선 묘, 녹동서원)이 전하
고 있는데, 사슴과 벗한다는 뜻의 우록리란 마을 이름도 그가 지었다고 전한다. 그 김충선
이란 사람과 그의 유적에 크게 갈증이 생겨 아침 일찍 경부선(京釜線) 무궁화호 열차에 나
를 실어 부랴부랴 대구로 보냈다.
대구역에서 내려서 동인동으로 15분을 걸어 동인찜갈비골목건너 정류장에서 우록리로 가는
대구 가창2번에 나를 담았다. 이 노선은 대구 도심인 칠성시장에서 가창면 외곽 동네를 잇
는 노선으로 종점이 무려 3개(우록리, 단산리, 정대리)라 행선지를 꼭 확인하고 타야만 뒷
탈이 없다. 그리고 우록리가 산골 구석이긴 하나 대구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고 버스 운행
횟수도 20회가
넘어 접근성도 생각 외로 괜찮다. (30~50분 간격으로 운행)
버스는 신천 옆구리를 따라 신천동로와 파동, 가창면행정복지센터, 냉천리, 삼산리를 거쳐
우록리
밑부분에 자리한 녹동서원에 나를 내려놓는다. 신천은 우록리에서 발원해 대구시내
를 거쳐
낙동강으로 흐르는 하천으로 그는 넓은 세상을 향해 북쪽으로 가고 나는 우록리란
작은 세상을 보고자 신천을 거슬러 우록리 산골로 들어왔다.
우록리에 들어서 김충선<金忠善, 사야가(沙也加, 沙也可)>을 배향한 녹동서원(鹿洞書院)과 김
충선 묘역을 먼저 둘러보고 다음 메뉴인 남지장사로 길을 향했다. 김충선 유적이 이번 나들이
의 핵심이나 남지장사의 비중도 결코 낮지가 않다. (녹동서원과 김충선 묘역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음)
녹동서원은 바깥 세상에서 우록리 속살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으나 남지장사는 우록리에서 가
장 구석이자 북쪽 끝으로 우록리 종점(가창2번 종점)에서 3km를 더 들어가야 된다.
절까지 1
~1.5차선 크기의 길(우록길, 남지장사길)이 잘 닦여져 있고 중간에 백록마을과 많은 가옥들이
존재하나 시내버스는 우록리 종점에서 더 이상 바퀴를 들이지 않으며, 오르막길이 꾸준히 이
어지나 그리 각박한
수준은 아니라서 두 다리만 멀쩡하면 삼척동자도 능히 접근이 가능하다.
남지장사까지 차량이 오가는 포장길(우록길)이 별로라면 산길과 숲길이 주류를 이루는 남지장
사 옛길(우록마을 등산로1코스 동쪽 구간)을 추천한다. 나는 그 길의 존재를 몰라서 평범하게
우록길과 남지장사길을 따라 남지장사로 이동했고 거기서 옛길을 따라 우록리 종점으로 내려
왔는데, 우록마을 등산로1코스는 '녹동서원~우록리 종점~우록길(백록마을)~남지장사~청련암~
소나무군락지~낙엽송군락지~목니미정자나무~우록리 종점'으로 이어지는 6.4km의 순환형 코스
로 나는
그 코스를 완전히 1바퀴 돌았다.
그리고 우록마을 등산로2코스도 준비되어 있는데 '백록마을회관~헬기장~억새군락지~청련암~남
지장사~백록마을회관'을 순환하는 7.6km의 코스이다.
▲ 남지장사로 인도하는 숲길 (남지장사 직전)
▲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남지장사
▲ 옥계수를 가득 머금은 연꽃 석조
산사(山寺)에 왔다면 목마름도 단죄할 겸, 그곳 샘물을 마셔봐야 되겠지.
그래서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목구멍에 들이키니
몸속의 체증과 근심이 싹 가신 듯, 속이 시원하다.
▲ 남지장사 경내로 인도하는 연등 계단길
부처님오신날(석가탄신일)이 한달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라 계단길과 경내에
오색 연등을 가득 달아 벌써부터 초파일 분위기를 자아낸다.
남지장사는 우록리를 감싸고 있는 최정산(最頂山, 905m) 남쪽 자락이자 삼정산 서쪽 자락에
자리한 산사이다. 동/서/북이 산으로 막힌 산골이자 우록리에서 가장 북쪽 구석으로 694년에
양개대사<良价大師, 또는 양한(良漢)>가
왕명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왕이 토지와 노비를 내리고 지역 유지들이 두둑히 지원하여 사세가 매우 컸다고 전하는데, 8
개의 암자와 종각, 천왕문이 있었다고 하며 수도하는 승려만 3,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
만
아쉽게도 관련 유물과 기록은 부족한 실정이며, 10세기 초에 마진(摩震, 후고구려)을 세운
궁예(弓裔)가 이 지역을 공격하면서 폐사되었다가 1263년에 일연(一然)이 중창했다고 전한다.
물론 이 역시 근거가 많이 부족한 실정이다.
고려 말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거쳐갔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이곳을
승병(僧兵) 훈련장으로 사용했다. 그때 승병들과 의병장 우배순이 이끄는 의병이 같이 훈련을
했는데, 그 인원은 3,000명에 달했다고 하며, 이곳을 탐지한 왜군의 공격으로 절은 그만 불타
고 말았다.
이후
1653년에 인혜(印惠)가 중건했고, 1767년 모계(慕溪)와 풍흡(豊洽)이 중창했다. 모계는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북지장사(北地藏寺)와 대칭되는 곳에 있다고 해서 남지장사로 이름을
갈았는데, 그 이전의 절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1940년대에 신원(信元)이 중수했고, 1970년대에 백련암과 청련암, 요사, 대웅전을 보수해 지
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극락전과 광명루, 요사 등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
며, 비구니 암자인 백련암과 백련암(白蓮庵)을 부속암자로 두고 있다. (백련암은 경내 서쪽,
청련암은 동쪽에 있음)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조지장보살좌상과 석조석
가여래삼존좌상, 청련암이 있으며, 조선 후기 부도(승탑)도 여럿 있어 고색의 내음을 한껏
드
러낸다. 그리고 경내 동쪽에 망자들을 위한 수목장 공간을 두어 절 살림에 크게 보태고 있다.
오색연등이 짙게 깔린 계단길을 오르면 절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광명루가 마중을 한다. 맞
배지붕을 지닌 3칸짜리 건물로 비록 누(樓)를 칭하고 있지만 완전 문(門)에 가까운
건물이라
그 명칭에 심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가운데 칸은 통로로 쓰이고 있고, 좌측에는 범종이 걸려있으며, 우측에는 작은 방이 있다.
▲ 안쪽에서 바라본 광명루
▲ 오색연등이 새로운 허공을 이루는 대웅전 뜨락
광명루에서 대웅전 앞까지 오색연등이 허공을 가득 채우며 참한 풍경을 그려낸다. 연등이 대
웅전 뜨락을 구름처럼 뒤덮고 있어 이곳만큼은 하늘이 움푹 낮아진 기분인데 연등 밑은 어둡
기 그지 없어 각박한 속세를 상징하는 듯 하다.
▲ 삼성각(三聖閣)
1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산신과 독성,
칠성의 공간이다.
▲ 삼성각 식구들
왼쪽부터 산신탱, 칠성탱, 독성탱
▲ 극락보전(極樂寶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아미타불의 거처이다.
▲ 대웅전(大雄殿)
연등
구름을 늘어트리고 있는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이곳의 법당이
다. 바로 이곳에 남지장사의 늙은 보물이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가여래삼존좌상과 석조지
장보살좌상이 깃들여져 있으니 꼭 챙겨보기 바란다.
▲ 남지장사 석가여래삼존좌상 - 대구 유형문화유산
포근하고
귀여운 인상으로 중생을 맞고 있는 이들은 대웅전의 주인장이다. 돌로 다져 도금을
입힌 것으로 커다란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관(寶冠)을 눌러쓴 작은 문수보살과 보
현보살이 자리해 삼존좌상을 이루는데, 그들 모두 고개를 약간 내민 자세로 결가부좌(結跏趺
坐)를 하고 있다.
고개를 내민 자세, 짧은 신체 비례와 높은 무릎, 네모난 얼굴, 옷 착의법 등에서 조선 말 불
석제(佛石製) 불상의 특징을 보이고 있으며, 부드러운 얼굴 표현과 옷주름, 보살상 옷의 옷주
름과 띠매듭 등이 주목된다. 이런 양식을 통해 17세기 말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경상도
에서 활동하며 불상을 만든 승일 계보의 조각승이 만든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17세기 중,후
반 경상도에서 활동했던 조각승들과 차별되는 조형성을 지니고 있어 조선 후기 불교 조각 연
구와 불석제 불상, 조각승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 남지장사 석조지장보살좌상 - 대구 유형문화유산
대웅전 한쪽에 자리한 푸른 머리의 지장보살좌상은 동자승이 지장보살 복장을 하고 앉아있는
듯한 작고 귀여운 모습이다. 보살상이 작아서 특별히 유리막에 넣어 보호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조금은 답답한 모습이다.
이 보살상은 1659년에 조각승 승호(勝湖)가 만들었다. 왼손을 무릎을 대고 오른손에는 붉은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데, 고개를 내민 자세와 네모난 얼굴, 변형통견식 착의법 등에서 조선
말 불상/보상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짧은 신체 비례와 눈꼬리가 긴 눈매가 돋보인다.
승호는 17세기 말에 경상도 지역에서 불석제 불상을 조성했던 조각승으로 남지장사 석조지장
보살좌상은 그가 처음 수조각승이 되어 만든 작품이다. 지금까지 승호는 1640년 차화승(次畵
僧)으로 등장한 이래 1670∼80년대에 이르러 수화승으로 활동한 것으로 밝혀졌으나 남지장사
보살상을 통해 약 20년 정도 앞당겨졌다.
이 보살상은 제작 시기와 제작자, 조성 사찰이 명확하여 조선 후기 불교 조각과 조각승 승호
계보 연구에 귀중한 가치가 있다.
▲ 법당 지킴이 신중탱
붉은 채색의 탱화로 여백이 거의 보이질 않을 정도로 등장인물이 많아
그야말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 우록리 마무리 (청련암, 남지장사 옛길)
▲ 남지장사 승탑<僧塔, 부도(浮屠)>
남지장사에서 청련암으로 인도하는 동쪽 숲길(남지장사 옛길)로 들어서면 석종형 승탑 2기가
반갑게 마중을 나온다.
소나무숲 그늘에 자리하여 솔내음을 마음껏 즐기고 있는 이들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왼쪽 것은 앙련(仰蓮)이 새겨진 기단 위에 동그란 탑신과 8각의 지붕돌, 머리장식을 갖추고
있고, 오른쪽 것은 바닥돌에 둥근 탑신을 두고 그 위에 네모난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힌 단
출한 모습들이다.
▲ 청련암(靑蓮庵)
- 대구 유형문화유산
청련암은
남지장사의 부속암자로 남지장사에서 동쪽으로 300m 정도 떨어져 있다. 산중암자란
말이 딱 어울리는 아주 작고 고즈넉한 암자로 694년에 양개대사<良价大師, 또는 양한(良漢)>
가 남지장사를 세우면서 함께 지었다고 전하나 관련 유물과 기록은 부실한 실정이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남지장사와 청련암을 승병들 훈련장으로 사용했으나 왜군의 공격으로
소실되었으며, 1653년부터 1714년까지 여러 차례 중건했다. 그리고 1806년 화재로 다시 무너
진 것을
1808년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석축으로 자리를 닦은 경내에는 '乙' 모양의 법당을 중심으로 삼성각과 창고 등 3~4동 정도의
건물이 있는데, 19세기에 지어진 법당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건물로 청련암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이 법당에 대청과 많은 방이 들어있어 생활공간의 기능도 겸했으며, 법당 가운데에 정
면 3칸, 측면 2칸의 법당을 두고 앞뒤로 툇마루를 두었는데, 이는 승려의 생활공간인 요사와
법당의 기능을 같이 하는 인법당(因法堂) 양식을 따른 것이다.
▲ 석축 위에 들어앉은 청련암
▲ 법당 가운데 공간
▲ 청련암 법당의 서쪽 공간
서쪽 공간에는 방과 대청이 여럿 들어있고, 건물 밖에는 흙으로 다진 굴뚝과
법당을 따스하게 대펴줄 장작이 가득 널려있어 산사의 운치를 더한다.
▲ 청련암 정문
청련암은 일주문이나 천왕문 같은 문을 두지 않고 특이하게 삼문(三門)을
지어 이곳의 정문으로 삼았다.
▲ 청련암에서 우록리로 내려가는 호젓한 숲길
(우록마을 등산로1코스, 남지장사 옛길)
청련암을 간단히
둘러보고 남쪽 숲길로 내려갔다. (법당 내부는 살피지 않았음) 이 숲길은 우
록리 등밑마을로 질러가는 길로 신작로(우록길, 남지장사길)가 닦이기 전에는 이 길로 남지장
사와 청련암으로 접근했다. 즉 남지장사로 인도하는 옛길인 것이다.
현재 '우록마을 등산로1코스'란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숲이 짙고 길이 고우며, 소나무군락지
, 낙엽송군락지, 목니미정자나무, 당산목 등의 자연산 볼거리들이 있다. 비록 인지도는 낮으
나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길이며, 차량이 오가는 딱딱한 콘크리트길보
다는 이런 잔잔한 흙길이 더 좋다. 사람이 비록 자연과 지구에 도움은커녕 해만 주고 있지만
사람 또한 엄연한 자연의 일부이니 산과 자연을 좋아하는 본능은 숨길 수 없다.
▲ 겨울과 봄 사이를 헤매는 남지장사 옛길
4월 초에 따스한 남쪽임에도 이곳의 적지 않은 나무들이 겨울 제국의
망령에서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상큼하게 펼쳐진 남지장사 옛길
▲ 빽빽하게 우거진 낙엽송군락지 (남지장사
옛길)
▲ 목니미 정자나무
남지장사 옛길 중간
정도에 있는 목니미 정자나무는 300년 정도 묵은 서어나무(서나무)로 높
이 약 30m, 나무둘레 3.3m의 단단한 덩치를 지녔다.
우록리에서 남지장사와 청련암으로 인도하는 이정표 역할을 했던 존재로 그 연유로 목니미정
자나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신작로(우록길, 남지장사길)가 닦이기 전에는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절의 입구로 여겼으며, 부처님오신날과 동지날에 신도들이 이곳에 이르면 절에
다
왔다고 여겨 나무에 절과 기도를 하였고, 마을 사람들도 예를 표하며 잠시 쉬어갔다.
▲ 봄 감성을 가득 불러일으키는 연분홍 진달래들
▲ 등밑마을 당산목
등밑마을에 다다르면
300년 정도 묵은 등밑마을 당산목이 마중을 한다. 그는 높이가 무려 50m
, 나무둘레 3m에 이르는 크고 단단한 참나무로 등밑마을 사람들이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며 당
산제를 지내던 마을의 성역이다.
약 250년 전(18세기)부터 매년 정월대보름에 20가구의 마을 사람들이 여기에 모여 마을의
안
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정성스럽게 제를 올렸고, 제사가 끝나면 음식을 나눠먹으며 화합했다.
당산제는 약 30~40년 전까지(1970년대) 유지되었으나 1970년대 이후 아쉽게도 사라져 한낱
옛
날 이야기로 흩어졌으며, 당산제를 오랫동안 받고 지켜왔던 당산나무만이 그 현장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등밑마을에 이르면 지금까지 이어진 흙 숲길은 끝난다. 여기서부터 신작로가 펼쳐지고, 그 길
을 조금 가면 우록리 종점에 이른다. 녹동서원부터 남지장사, 청련암 등 그날 메뉴를 모두 둘
러보았고 거기에 남지장사옛길과 목니미정자나무, 등밑마을 당산목 등 생각지도 못한 덤까지
누리니 완전 배가 터질 지경이다.
우록리에서의 일정을 뿌듯하게 마무리 지으니 어느덧 17시, 우록리 종점에서 두 다리를 쉬며
10여 분 기다리니 대구 가창2번이 나타나 활짝 입을 연다. 나와 마을 사람들을 태운 버스는
출발시간이 되자 적막한 우록리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대구시내를 향해 육중한 바퀴를
움직였다.
이렇게 하여 봄맞이 달성 우록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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