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진 답사기/서울 도심(북촌, 서촌, 인왕산, 중구)

남산골한옥마을, 남산골공원 늦가을 나들이 <천우각,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 관훈동 민씨가옥, 서울천년타임캡슐광장, 남산북측순환로>

도봉산고양이 2025. 11. 16. 11:02
남산골공원, 남산골한옥마을


' 남산골공원, 남산골한옥마을 늦가을 나들이 '

남산골한옥마을 돌담길
▲  남산골한옥마을 돌담길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 가옥 관훈동 민씨가옥

▲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 가옥

▲  관훈동 민씨가옥

 


늦가을이 막바지에 이르던 11월 한복판의 어느 볕 좋은 날, 일행들과 남산골한옥마을을
찾았다.
남산<南山, 목멱산(木覓山)>은 해발 270.9m의 뫼로 서울 도심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
이자 남쪽 뒷동산이다. 그의 그늘에서 살던 꼬마 시절부터 1,000번이 넘게 안겼던 나의
첫 즐겨찾기 명소로 남산 구석구석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으며, 남산골
한옥마을 역시 여러 번 인연을 지었다.

이번 남산 나들이는 남산골한옥마을(남산골공원)을 중심으로 복습을 했는데, 자고로 우
리네 인생에서 복습은 예습 못지 않게 아주 중요하다. 하여 자주 하는 것이 좋으며, 즐
겨찾기 명소 또한 사골이 되도록 두고두고 우려먹는 법이다.


♠  남산골한옥마을, 남산골공원 입문

▲  남산골공원 정문

지하철 3/4호선 충무로역 3/4번 출구에서 남쪽으로 2분 남짓 들어가면 남산골공원 정문이 활
짝 열린 모습으로 마중을 나온다. 그는 맞배지붕을 지닌 3칸짜리 문으로 그를 들어서면 남산
을 뒷배경으로 삼은 남산골공원이 상큼하게 펼쳐진다.

남산 북쪽 끝자락에 자리한 남산골공원은 79,934㎡의 덩치를 지닌 너른 공원으로 남산골한옥
마을을 중심으로 남산골전통정원, 서울남산국악당, 서울천년타임캡슐광장을 지니고 있다. 공
원 동북쪽 모퉁이에 한옥들이 풍요롭게 모여있는 7,934㎡의 공간을 남산골한옥마을이라 부르
며, 이들을 포함한 공원 일대를 통틀어 남산골공원이라 부른다.

이곳에는 원래 서울을 지키던 수도방위사령부 군부대가 있었는데, 서울시에서 남산 제모습찾
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1989년 9월 이곳 일대를 매입했다. 1990년 그 사업의 기본방침을 확정
하고 100인의 시민위원회를 구성했으며, 1993년 11월 남산골 조성사업 기본과 실시설계를 완
료하여 그해 11월 16일 남산골 조성사업을 '남산골 제모습찾기'로 이름을 바꾸었다.

1993년 12월 28일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 군부대 시절 망가진 지형을 복원하고 전통정원 조
성을 진행했으며, 1994년 1월 사업지구 내에 서울민속문화재로 지정된 한옥 4채와 20세기 초
기 한옥(옥인동 윤씨가옥) 1채 등 5채를 이전하기로 결정, 1995년 11월 28일 남산골한옥마을
조성 공사에 들어갔다. 하여 1998년 1월 24일 마무리가 되었으며, 1998년 4월 18일 남산골한
옥마을이란 이름으로 속세에 개방되었다.

남산골한옥마을은 한옥 5채와 전통공예관, 전통체험 공간을 지니고 있으며, 남산골공원 상당
수의 야외 공간에는 대자연과 어우러진 전통정원을 닦았다. 이곳 지형을 최대한 되살려 남산
에 많이 뿌리를 내린 전통 수목을 심었으며, 계곡을 만들고 천우각과 관어정, 청류정, 망북루
등의 여러 정자와 청학지, 관어지(觀魚池) 등의 연못, 그리고 산책로를 달달하게 입혔다.
공원 남쪽 끝에는 서울 정도(定都) 600주년 기념사업으로 특별히 마련된 서울천년타임캡슐광
장이 자리해 있는데, 이곳 지하 15m에 보신각종 모양의 타임캡슐이 고이 묻혀있다. 그 캡슐에
는 1994년 당시 서울의 모습과 시민 생활, 사회문화를 대표하는 각종 문물 600점이 들어있으
며, 캡슐을 묻은 날(1994년 11월 29일)로부터 400년 후인 2394년 11월 29일에 개방될 예정이
다.

20세기 코앞에 닦여진 남산의 젊은 명소이자 서울 도심의 1급 명소로 평일과 휴일 가리지 않
고 온갖 나들이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설과 한가위(추석)에는 한옥마을을 중심으로 다양한
전통 체험이 펼쳐지며, 서울남산국악당에서는 국악의 흥겨운 음악 소리가 거의 마를 날이 없
다. 또한 사계절이 고루고루 아름다워 매력 또한 다양하다.

남산골한옥마을은 관람시간에 제한이 있어 9~21시까지(11~3월은 20시까지)만 문을 열며 매주
월요일은 문을 닫아걸고 쉰다. (입장료는 없음) 다만 한옥마을을 제외한 공원 일대는 24시간
개방이다.

* 남산골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2가 110-10 (퇴계로36가길 50-8, ☎ 02-2261-05
  00)
* 남산골한옥마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2가 84-1 (퇴계로34길 28, ☎ 02-6358-5533)


▲  청학지(靑鶴池) 남쪽 부분 (오른쪽 건물이 천우각)

남산골공원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청학지와 천우각이 마중을 나온다. 공원의 북쪽 끝을 잡고
있는 이들은 공원 수식용으로 지어진 것으로 전통 방식으로 조성되었는데, 비록 근래 지어진
것들이라 고색은 채 익지 못했으나 그들에게 붙여진 이름은 이곳에 전하는 옛 이름과 명소의
이름을 취했다.

옛날 남산골공원과 청학지 일대를 청학동(靑鶴洞)이라 불렀다. 청학이 알아서 찾아와 노닐만
큼 상큼한 곳이라 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왕년에는 삼청동(三淸洞)과 인왕동(仁
王洞), 쌍계동(雙溪洞), 백운동(白雲洞)과 더불어 한양(서울) 5동의 일원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던 도심 명승지였다. 또한 이곳에는 천우각과 관어정(觀魚亭) 등 많은 정자들이 뿌리를 내
려 이곳의 풍경을 윤기나게 해주었다.

그 경치 좋던 청학동과 천우각은 자기 애미도 몰라본다는 무심한 세월이 모두 잡아가 흔적도
없지만 남산골공원을 닦으면서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진 그들의 이름을 소환해 청학동의 이름
을 딴 청학지 연못과 이름만 같은 천우각을 지어 그들을 추억하게 했다.

청학지를 굽어보고 선 천우각은 정면 5칸, 측
면 2칸의 팔작지붕 누각이다. 옛날에 사라진
천우각의 이름을 취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예
전의 천우각을 그대로 재현한 것은 아니다.
누각 내부는 자유롭게 두 발을 들일 수 있으며
, 청학지의 연못 바람과 남산의 산바람이 교차
하는 달달한 쉼터이다.

              ◀  천우각(泉雨閣)


▲  청학지와 연못에 뜬 작은 섬

청학지는 북쪽이 동그랗고, 천우각이 있는 남쪽은 네모난 모습으로 연못 한복판에 작은 섬을
두둥실 띄워놓아 운치를 크게 돋군다.
섬은 동그란 모습으로 반송(盤松) 스타일의 푸른 소나무가 그 섬을 독차지해 그만의 작은 세
상을 일구었는데, 천우각과 주변 나무들, 그리고 지나가는 햇님과 달님, 구름이 청학지를 거
울로 삼으며 매뭇새를 다듬는다.

◀  남산골한옥마을 정문
삼문(三門) 형태의 맞배지붕 문으로 바깥과
한옥마을을 유일하게 이어주고 있다.
(북쪽에 후문이 있지만 늘 굳게 닫혀 있음)

남산골한옥마을은 남산골공원 동북쪽 구석에 높이 자리를 다져 닦은 것으로 서울 도심에 있던
늙은 한옥 5채와 삼문(정문), 전통공예관, 까페(까페1890)로 쓰이는 한옥을 지니고 있다. 면
적 7,934㎡의 공간으로 비록 한옥마을을 칭하고 있지만 사람은 살지 않으며, 거의 민속촌 같
은 모습이라 생기는 다소 떨어진다.
허나 전통 체험과 혼례, 공연, 야외행사 등이 심심치 않게 열려 그런데로 바쁘게 살고 있으며
, 남산골공원 식구 중에서 유일하게 관람시간에 제한이 있는 콧대가 높은 노천 공간이라 9~21
시까지만 발을 들일 수 있다. (11~3월은 20시까지, 매주 월요일은 휴관)


▲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 - 서울 민속문화유산

남산골한옥마을로 들어서면 바로 정면(동쪽)에 관훈동 민씨가옥이 있고, 오른쪽(남쪽)에 도편
수 이승업 가옥, 왼쪽(북쪽)에 전통공예관과 까페, 옥인동 윤씨가옥, 동북쪽에 해풍부원군 윤
택영 재실, 그리고 동남쪽에 김춘영가옥이 자리해 서로 이곳으로 오라며 눈빛을 보낸다. 그들
의 눈빛이 다들 뜨거워 내 침침한 망막이 부담이 될 정도인데, 우선 가까이에 있는 이승업 기
옥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삼각동(三角洞) 도편수(都片手) 이승업(李承業) 가옥은 1860년대에 도편수 이승업이 지은 것
으로 이곳 한옥마을 5형제 중 가장 늙은 집이다.
이승업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경복궁(景福宮) 중건 공사에 참여했던 인물로 그 공사에
동원되어 남은 자재 중 괜찮은 것들을 가져와 자신의 솜씨를 듬뿍 넣어 크게 지었다. 원래는
중구 삼각동 36-2번지에 있었는데, 1889년 이후 막대한 빚으로 부득이 이규상(1837~1917)에서
넘기고 말았다.

이규상은 평안도 벽동군수(碧潼郡守)를 지낸 인물로 그가 이곳에 들어앉은 이후 서울 장안에
서 '남문안 홍문섯골 이벽동댁'이라 널리 불렸다. 우편에 주소도 필요 없이 그렇게만 써도 바
로 배달이 되었다고 하며, 덕수궁(경운궁)에서도 이곳이 뻔히 바라보여 고종(高宗)이
'저 집 대문은 왜 저리 높은가?' 물었다고 한다. 황제의 지적에 집 솟을대문의 높이를 낮추고
자 땅을 파냈는데, 오히려 대문 너머로 집채(사랑채, 안채)가 더 크게 바라보였다고 한다.

이규상과 그의 자손(경주이씨)들이 4대에 걸쳐
75년을 살았으나 1960년대 이후, 주변에 식당,
여관, 요정 등이 마구 들어서자 집을 팔고 나
갔다. 그때 이곳을 매입한 이가 조흥은행(현
신한은행)이었다.
조흥은행은 이 집을 은행 사료관(史料館)으로
사용했는데, 1970년대 후반에 서울시가 매입해
서울 지방문화재로 삼아 관리했으며, 1998년에
남산골한옥마을로 가져와 이곳 한옥마을 5형제
의 맏이가 되었다.

▲  사랑채 뒷쪽 굴뚝

이곳에 붙여진 문화유산 지정 명칭은 이규상의
4대손인 이상억이 제안했다. 자신의 조상을 제
안해 '이규상 가옥','홍문섯골 이벽동댁'이라
할 수도 있었지만 처음 지은 이를 존중하고자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이라 한 것이다.
왕년에는 황제도 부러워했던 집으로 문간채와
앞행랑채, 뒤행랑채, 사랑뒤채, 사랑채, 안채,
중문 등 8채의 집을 지닌 고래등 한옥이었으
나 집 매각과 관리소홀로 인해 사랑채와 안채,
중문 등 절반 남짓만 남아있어 많이 초췌해졌
다.

▲  이승업 가옥 안채 앞 뜨락

안채와 사랑채는 모두 몸채와 그에 직각으로 붙어있는 날개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채가 날
개채보다 더 크며 지붕 또한 더 높고 웅장하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로 낮은 담장이 있었으나
사라졌으며, 사랑채 부엌문도 안채 쪽으로 나 있어 사랑채 영역과 구분을 지었다.

19세기 후반 서울의 주거 문화와 한옥 건축 기술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각 공간의 중요도에
따라 지붕의 높낮이와 모양을 달리했다. 또한 안채 곳곳에 난간과 툇마루가 적절히 설치되어
있다.


▲  이승업 가옥 사랑채

반듯하게 닦여진 석축 위에 'ㄴ'구조의 사랑채가 팔작지붕을 펄럭이며 자리해 있다. 이곳 사
랑채는 대청과 방 2개, 부엌을 지니고 있는데, 옆에는 굴뚝을 두어 부엌과 온돌에서 쓰인 연
기를 하늘로 뽑아냈다.

▲  주인이 가고 없는 사랑채 방

▲  이승업 가옥 안채의 뒷모습


▲  이승업 가옥 안채

이곳 안채는 '丁' 구조를 취하고 있다. 부엌과 안방 쪽은 반오량(半五樑)으로 꾸며 전/후면의
지붕 길이를 다르게 했으며, 대청과 건넌방 쪽은 일고주오량가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청과 방
3개, 협실(夾室) 2개, 부엌을 지니고 있다.

▲  안채 대청

▲  안채 부엌


♠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 가옥, 관훈동 민씨가옥

▲  삼청동(三淸洞) 오위장(五衛將) 김춘영(金春營) 가옥 -
서울 민속문화유산


남산골한옥마을 남쪽 끝에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 가옥이 있다. 서쪽으로 도편수 이승업 가옥
과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며 기와돌담길을 이루고 있고, 북쪽으로 관훈동 민씨가옥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집의 이름처럼 오위장을 지낸 김춘영이 1890년에 지은 것으로 원래는 삼
청동 125-1번지에 있었다.
이곳 한옥 5형제 중 2번째로 늙은 집으로 김춘영과 그의 아들, 손자(김흥기)까지 이곳에 살았
으며, 서울시가 매입하여 1998년 이곳으로 고이 가져왔다.

이 한옥은 안채와 사랑채를 지니고 있는데, 이들은 각각 독립된 문을 가지고 있다. 안채 영역
은 'ㄱ'자 모양의 안채와 그에 직각으로 붙어있는 'ㅡ'자형 문간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으
며, 남쪽 사랑채는 'ㅡ'자형 건물로 문간채와 이어져 있고, 작지만 독립된 사랑마당을 지니고
있다.
안채의 서쪽 외벽은 골목길에 직접 닿기 때문에 벽 상부에 높은 창을 내고, 아래쪽은 돌과 벽
돌로 단단하게 담벼락을 만들었다. 안채 서쪽 벽이 골목에 직접 닿는다는 것과 대문간이 바로
보이지 않게 꺾어 들어가게 한 것, 그리고 대지의 모양에 맞춰 'ㄱ'자와 'ㅡ'자 모양의 건물
을 조합해 닦은 점은 대한제국 시절 도시 상황에 맞게 변화된 서울 한옥의 특징을 보여준다.

▲  김춘영 가옥 대문과 굴뚝,
안채와 연결된 문간채

▲  김춘영 가옥 사랑채와 기와문
이곳이 남산골한옥마을에서 가장
남쪽 끝이다.


▲  김춘영 가옥 안채와 그 너머로 바라보이는 남산서울타워
판대공을 사용하고 홑처마로 꾸미는 등 전체적으로 평민 주택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골목길에 접한 안방 뒤쪽 벽을 사괴석(四塊石)과 전돌로
화방벽(火防壁)을 닦아 집의 품격을 높였다.

▲  늦가을이 깃든 김춘영 가옥 안채 뜨락

주둥이가 꽉 닫힌 우물과 조그만 석조, 장독대, 괴석, 그리고 수목들이 강인한 협동심으로 늦
가을 정취를 크게 돋군다. 우물은 가옥과 함께 가져온 것으로 수원(水源)이 없어 무늬만 있는
죽은 우물이며, 장독대는 한옥 수식용으로 새로 달아놓은 것들이다.


▲  김춘영 가옥 뜨락에 있는 괴석들

뜨락 화단에 있는 주름진 괴석들도 가옥과 함께 넘어온 것이다. 괴석 앞에 조그만 석조가 있
어 하늘을 향해 자신을 채워줄 수분을 애타게 요구하고 있으며, 괴석 주변으로 키 작은 수풀
들이 우거져 있다. 그리고 담장 너머로 은행나무가 은행잎을 뜨락 화단에 우수수 털어놓으며
장차 다가올 겨울을 준비한다.

▲  살림도구가 가득한 안채 방

▲  안채에 걸린 늙은 그림
호박과 나비가 그려진 조선 후기 그림으로
가옥 주인이 기증한 것으로 보인다.


▲  이승업 가옥과 김춘영 가옥 사이의 돌담길
(북쪽 방향, 정면에 보이는 집이 관훈동 민씨가옥)

▲  관훈동(寬訓洞) 민씨가옥 - 서울 민속문화유산
(민씨가옥의 대문과 대문간채)


남산골한옥마을에는 크나큰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바로 한옥 5형제 중, 무려 3채가 친일매국
노의 집이라는 것이다.

김춘영 가옥 북쪽에 있는 관훈동 민씨가옥은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민영휘(閔泳徽, 1852~
1935)란 작자가 지었다. 지어진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1900~1910년 사이로 여겨지는데, 그
작자는 종로구 한복판인 관훈동에 집을 여러 채씩 짓고 가족들과 아까운 공기를 축내며 서식
했으며, 이곳 한옥은 관훈동 30-1번지에 있었다.
안채와 사랑채 외에도 별당채와 대문간채, 중문간채, 행랑채를 지닌 고래등 한옥이었으나 소
유자가 바뀌는 과정에서 축소되어 안채와 중문간채만 겨우 남았다.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로
옮기면서 예전에 사라진 안채 건넌방을 되살렸고, 사랑채와 별당채도 새로 채워넣었는데, 전
체 배치는 사랑채 뒤로 안채와 별당채가 있으며, 담장과 문으로 적절하게 공간을 나눴다.

서울 지역 한옥의 안채는 보통 안방 앞쪽에 부엌을 둬 'ㄱ'자형' 구조를 보이기 마련이나 이
집은 부엌과 안방을 나란하게 놓았으며, 고주 2개를 세워서 만든 큰 목조 구조와 6칸에 달하
는 부엌, 그리고 마루 밑에 있는 벽돌 통기구 등은 당시 일반 가옥과 다른 최상류층 한옥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즉 친일 매국 짓거리로 배때기를 떵떵 두드리며 살았다는 소리이다.

더러운 친일파의 집이라 기분이 그리 좋지는 못하나 20세기 초반 서울 한옥의 특징과 변화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해서 지방문화재의 지위까지 얻었다. 하여 섣불리 집을 밀어버리
거나 불을 지르기도 참 애매하게 되었다. 허나 죄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집까지 죄를 묻기
는 애매하며 소유자 또한 여러 번 바뀌면서 집도 조금씩 변형되었다.


▲  누마루까지 갖춘 관훈동 민씨가옥 사랑채

▲  민씨가옥 사랑채 뒤쪽 뜨락

더러운 친일매국노의 집에서 만난 늦가을의 향연, 늦가을 누님도 참 눈치가 없다. 집을 가려
가면서 향연을 베풀어야지 왜 이곳까지 알록달록 물들였단 말인가. 풍경이 고운 만큼 친일매
국의 잔재가 뿌리 깊게 박힌 이 땅의 더러운 현실에 더욱 울분을 치솟게 한다.
늦가을의 향연은 11월 중/하순에 모두 끝나기나 하지 친일매국 버러지들의 향연은 좀처럼 끝
날 줄을 모른다. 오히려 그 잡것들의 향연이 점점 호화로워지는 기분이다. 이 나라가 살려면
그것들의 향연을 완전히 끝내야만 되는데, 그 길이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첫 단추부터 잘못
된 이 나라의 비극, 그 휴유증이 속절없이 오래도 간다. 그 더러운 현실을 바로 남산골한옥마
을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  사랑채와 안채를 잇는 기와문

▲  민씨가옥 사랑채와 돌담


▲  민씨가옥 별당채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사랑채와 함께 1998년에 새로 지었다.

▲  별당채의 뒷모습과 뒷쪽 화단

▲  민씨가옥 안채


▲  고래등 한옥의 진수를 보여주는 민씨가옥 안채

이 한옥은 예전에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었으나 친일파로 더러운 뒷끝을 남긴 박영효(
朴泳孝)의 집으로 알려졌다. 허나 확인 결과 민영휘의 집으로 밝혀졌는데, 이미 주인이 여러
번 변경된 상태라 지방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예전 민씨의 집이었다는 뜻에서 관훈동 민씨가
옥이라 이름을 붙였다.


▲  민씨가옥 안채 뒷쪽 (죽은 우물과 장독대, 김치광, 굴뚝 등)

▲  안채 방

▲  안채 대청


♠  친일매국노 윤씨 형제의 한옥들

▲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齋室) - 서울 민속문화유산
(민씨가옥에서 바라본 윤택영 재실 사랑채)


관훈동 민씨가옥 북쪽에는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 윤택영(尹澤榮) 재실이란 이름을 지닌 한
옥이 자리잡고 있다.
이 한옥은 순종(純宗)의 장인이자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부친인 윤택영(1876~1935)이 지
은 것으로 건립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1907년경으로 여겨진다. 순종은 첫 부인인 순명효황
후(純明孝皇后, 1872~1904) 민씨가 세상을 뜨자 무려 20살 연하인 윤택영의 딸을 새 부인으로
맞아들였는데, 장인인 윤택영은 순종보다 2살이 어렸다.

1907년 순종이 제위에 오르고 자신의 딸이 황후에 책봉되자 해풍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910년
까지는 그런데로 우국충정의 모습을 보였으나 1910년 이후 안면을 180도 바꾸며 그의 형인 윤
덕영과 함께 친일파로 악명을 떨쳤다.
그 작자는 낭비벽과 사치가 상당해 많은 재산을 지녔음에도 모조리 말아먹었는데, 그러다 보
니 주변에서 빌린 돈이 상당했다. 문제는 그 돈도 제대로 갚지도 않고 자꾸 돈을 빌려 낭비벽
을 계속 키웠다는 것이다. 하여 '채무왕','차금대왕(借金大王)'이란 별명까지 얻으며 빚의 대
잔치를 벌여나갔다.
그의 빚은 고종이 일부 갚아주기도 했으나 빚은 여전했으며, 순종과 윤덕영에게도 도움을 요
구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그래서 왜국 조정에도 빚을 갚아달라며 압박을 가해 지원금을 넉
넉히 받았지만 그마저도 모두 날려먹었다.


▲  윤택영 재실의 솟을대문

윤택영은 순종이 모후<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을 찾을 때 홍릉 제사 및 제왕
의 숙식 편의를 위해 홍릉에서 아주 가까운 제기동 224번지(안암5거리 동쪽)에 이 집을 지었
다. 그러다 보니 일반 주택이 아닌 재실로 지어졌다.
왜정 이후, 빚 때문에 이곳을 처분했으며, 그 엄청난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중원대륙으로 도
망쳤다. 허나 거기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빚잔치를 벌이며 호의호식하다가 1935년 상해(
上海)에서 골로 갔다고 전한다. 중원대륙에서 도피 생활을 할 때도 종종 서울로 기어들어 왔
는데, 빚쟁이들이 그가 머무는 곳으로 우루루 몰려와 빚청산을 요구했다.

건물 배치는 전체적으로 '元'자 모양으로 집에서 가장 높은 곳에 'ㅡ' 자형 모습의 사당을 두
었다. 사당은 1960년 4.19혁명 시절에 소실되었으며, 재실을 남산골한옥마을로 옮기면서 다시
지었다. 그리고 사당 남쪽에는
'π' 모습의 재실 중심 건물(몸채)을 두었다.

재실 몸채는 안채와 사랑채가 한 건물로 이어져 '一' 자형을 이루고, 그 앞에 동서로 행랑채
가 연결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좌우대칭을 이룬다. 왼쪽은 안채, 오른쪽은 사랑채 영역으로
남녀 공간이 구분되어 있으며, 집 한복판에는 가운데 마당과 대청으로 통하는 문이 있고, 집
에 쓰인 목재와 벽면, 창호, 장식도 고급지게 닦여져 대한제국 시절 상류층 한옥에 건축기술
을 살펴볼 수 있다. 바로 그런 점이 인정되어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윤택영 재실 몸채의 바깥 쪽 (북쪽 방향)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채를 지닌 몸채 옆구리가 나온다. 여기서 안쪽으로 들어가려
면 북쪽 기와문을 통해 사랑채로 접근하거나 몸채 바깥 쪽 가운데에 있는 기와문을 통해 몸채
마당으로 들어서야 된다.


▲  윤택영 재실 몸채의 바깥 쪽 (남쪽 방향)

▲  윤택영 재실 사랑채
몸채 남쪽 부분은 사랑채, 북쪽 부분은 안채이다.

▲  사랑채의 방들 ▲

사랑채에 들어있는 가재도구와 장식물, 그림들 대부분은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닌 바깥에
서 마련하여 한옥 수식용으로 채워놓은 것들이다. 이곳을 포함한 한옥마을 5형제는 사랑채와
안채, 재실 내부는 들어갈 수 없으며, 이렇게 창 바깥, 마루 밖에서 금지된 속살을 바라보듯
대해야 된다.


▲  윤택영 재실 사당

재실 가장 뒷쪽에 자리한 사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이다. 1960년 4.19시절에
불에 타서 진작에 사라진 것을 1998년 윤택영 재실을 이곳으로 가져오면서 다시 채운 것으로
사당 앞에 석축을 쌓고 화단을 닦았다.

◀  제사상이 차려진 재실 사당 내부
제사상에 그럴싸하게 음식들이 차려져 있어
은근히 침을 고이게 하지만 저들은 모두
그림의 떡들인 모조품이다.


▲  윤택영 재실 사당 주변
주둥이가 봉해진 죽은 우물과 속이 비어있는 김치광이 있고, 그 주변으로
나무와 수풀이 적당히 자리해 늦가을 분위기를 그려낸다.

▲  옥인동(玉仁洞) 윤씨가옥 안채

윤택영 재실 서쪽에는 옥인동에서 넘어온 윤씨가옥이 있다. 이 한옥은 윤택영의 친형이자 친
일매국노 1급 쓰레기로 더러운 이름을 날렸던 윤덕영(尹德榮, 1873~1940)이 1910년대에 지은
것인데, 그의 매국 짓거리가 얼마나 더러웠던지 같은 친일파인 윤치호(尹致昊) 조차도 비열한
작자라며 손가락질을 했을 정도였다.

윤덕영은 인왕산 자락인 옥인동47번지 일대(옥인동의 거의 절반 크기)을 차지하여 20여 채의
집을 짓고 가족, 첩들과 모여 살며 인왕산의 공기를 축냈는데, 그 작자가 지은 집 중에는 프
랑스식으로 지어진 벽수산장(碧樹山莊)이 유명했다.
허나 그 작자는 친아우인 윤택영 못지 않게 사치가 대단했고, 결국 막대한 부채를 지면서 벽
수산장과 주변 집들을 모두 팔아먹었다. 그로 인해 그가 지은 집은 대부분 사라졌고, 딸에게
지어준 2층 양옥인 박노수 가옥<현재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과 옥인동 47-133번지의 한옥 일
부만 겨우 전하고 있다.

2층 양옥은 화가 박노수(朴魯壽)가 매입해 살았으며, 옥인동 47-133번지 한옥은 서민들이 들
어와 1칸씩 차지하여 살면서 많이 손상되었다. 그래서 집으로 오르는 계단과 대문간채, 안채
일부만 남아있는데, 그냥 버리기에는 좀 아쉬운 잘 지어진 20세기 초기 한옥이라 남산골한옥
마을을 조성하면서 이곳으로 가져오려고 했다.
허나 부재가 너무 낡고 손상이 심해 옮기는 것이 불가능하자 그 건물을 그대로 본을 떠서 새
로 지었다. 이때 세밀하게 고증하여 지으면서 집의 높낮이 차이까지 최대한 살렸으며, 집 이
름은 윤덕영이란 더러운 이름 3자 대신 그냥 윤씨가옥이라 했다.

규모가 큰 '∩'자형 안채와 사랑채 역할을 하는 마루방, 대문간이 더해져 거의 'ㅁ'구조를 이
루나 안채가 워낙 커서 안채 위주로 집을 짰음을 알려준다. 간소하게 민도리집을 채택했으나
안채 앞쪽은 일반 민가에서 보기 힘든 기둥머리에 익공을 치장하는 등, 20세기 초반 최상류층
주택의 면모를 보여준다.


▲  옥인동 윤씨가옥 대문간채
안채와 대문간채, 마루방이 이어져 'ㅁ' 구조를 이룬다.

▲  옥인동 윤씨가옥 부엌 ▲
윤덕영과 그 떨거지들의 배때기를 풍요롭게 채워주던 음식들이 만들어진 곳이다.

▲  윤씨가옥 대문간채의 바깥 모습과 계단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대문간채 대문 밖에는 동네로 내려가는 계단길이 있다. 옥인동 47-133번지에도 대문간채와 대
문, 대문 앞 계단이 잘 남아있는데, 이곳 계단은 그곳 계단의 윗부분만 재현한 것이다. 계단
은 밑에서 대문간채까지 돌로 반듯하게 닦여진 것으로 현재 계단 양쪽으로 집들이 들어차 있
으며, 대문간채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대문간채 앞을 지나면 인왕산 쪽으로 올라가는 달동네 스타일의 좁은 골목길이 있는데
, 그 골목길을 통해 많이 변형된 안채의 지붕과 일부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  청학지에서 바라본 윤씨가옥 대문간채

남산골한옥마을 한옥들은 한옥마을 담장 테두리 안에 집과 대문을 두어 바깥에서는 거의 보이
지 않는다. 그런데 윤씨가옥만 유일하게 한옥마을 밖으로 대문간채와 대문을 드러냈다. 이는
대문 앞 계단의 윗도리를 재현하고자 그런 것이다.


▲  남산골한옥마을의 친일파 집들
(왼쪽부터 옥인동 윤씨가옥, 윤택영 재실, 관훈동 민씨가옥)


남산골한옥마을 한옥 5형제 중 3채가 친일파 버러지(민영휘, 윤택영, 윤덕영)들이 지은 집이
나 안내문에는 그 잡것들이 집을 지었다고만 나와있을 뿐, 친일파 관련 내용은 일절 없다. 아
마도 일부로 누락시킨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부분은 분명히 기재할 필요가 100% 있다.

이들 집을 지은 친일파 잡것들과 그 후손들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그 3대를 처벌해야 마땅
하다. 그리고 자고로 역적의 집은 밀어버리고 그곳에 연못을 만드는 법이니 이들 집도 싹 밀
어버리는 것이 맞겠다. 허나 집들은 소유자가 여러 번씩 바뀌었고, 20세기 초반 상류층 한옥
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이유로 윤택영 재실과 민씨가옥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는 특혜
까지 받았다. (정말 집의 가치만 보고 지정한 것인지 아니면 친일 잡것들의 로비가 있었는지
는 모르겠으나 이 나라의 꼬라지를 봐서는 후자의 확률이 어느 정도 있다고 여겨짐)
그렇지만 이들은 그 시절의 유물이자 한옥 변천 과정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어 무작정 밀어버
리기는 좀 아깝다.

허나 해방 이후 친일매국노 단죄를 하지 못한 불운으로 그 잡것들과 그 후손들, 친일 패거리
들이 대놓고 활개치는 이 땅의 더러운 현실을 남산골한옥마을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니
실로 씁쓸하기 그지 없다. 그러니 아무리 문화유산 한옥이라고 해도 그 잡것들이 남긴 흔적에
게는 결코 고운 눈길을 보낼 수가 없다.


♠  남산골공원 마무리

▲  남산골공원 산책로 (남산골 전통정원)

남산골한옥마을을 간만에 복습하고 남산골공원을 가볍게 1바퀴 돌았다. 남산골공원의 상당수
는 싱그러운 자연의 공간으로 숲길이 그림처럼 닦여져 있고, 관어정과 망북루, 청류정 등 옛
날 이곳 일대에 있던 정자 이름을 취한 전통식 정자들이 곳곳에 자리해 조촐하게 눈요깃감이
되어준다.


▲  서울천년타임캡슐광장 표석

남산골공원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이곳에서 제일 뒷쪽에 서울천년타임캡슐광장이 둥
지를 틀고 있다.
서울천년타임캡슐광장(이하 타임캡슐광장)은 1994년 11월 29일, 서울 정도 600년을 맞이해 서
울의 모습과 시민들의 생활을 대표하는 문물 600점을 캡슐에 담아 지하 15m에 묻은 곳으로 서
울 정도 1,000년이 되는 2394년 11월 29일에 흔쾌히 개봉될 예정이다. <조선 태조가 1394년
에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수도를 옮겼음>

타임캡슐은 보신각(普信閣) 종 모양으로 다진 직경 1.3m, 높이 1.7m, 무게 2.5톤 규모로 FRP
외장 스테인리스 특수강(STS 316L) 유리섬유와 실리카겔 등으로 구성된 5중 구조이다. 진공처
리(1/1000mmHg) 및 아르곤가스를 주입해 캡슐 내부를 보전하고 있으며, 그 안에 1994년 서울
의 인간과 도시를 대표할 수 있는 문물 600점의 실물을 축소한 모형을 마이크로 필름 Video-
CD 형태로 수장했다.
타임캡슐이 깃든 타임캡슐광장은 시민공모작품 중 최우수작을 택해서 조성했는데, 운석에 의
한 분화구 모양(시간의 영속성을 의미한다고 함)으로 다져 마치 땅 밑에 있는 분위기를 주며,
원형광장은 외경 42m, 내경 27m, 깊이 5.7m, 중앙판석은 지름 7.5m, 두께 0.7m의 화강암이고,
12지 조명과 전실(前室) 등으로 구성되었다. <타임캡슐광장의 규모는 4,960㎡(1,500평)>

▲  타임캡슐광장 북쪽 문 (바깥쪽)

▲  타임캡슐광장 북쪽 문 (문 중간)

◀  작은 광장(전실) 벽
이곳이 조성된 시기와 이유가 여러 나라
언어로 소상히 담겨져 있다.

타임캡슐광장으로 접근하려면 북쪽과 남쪽 문을 통해 들어서야 되는데, 마치 터널이 땅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문과 터널은 하얀 피부나 회색 피부의 돌로 단단히 다져 옛날 성곽 유적
이나 신성한 제단 같은 기묘한 기분을 주는데, 문 안쪽으로 작은 광장(전실)이 있고, 그곳에
이곳을 만든 이유가 여러 나라 말로 적혀 있다. 거기서 안쪽 문으로 들어서면 비로소 타임캡
슐광장의 중심인 원형광장이다.

▲  타임캡슐광장 안쪽 문 (바깥 모습)

▲  타임캡슐광장 안쪽 문 (안쪽 모습)


▲  타임캡슐 원형광장

이곳이 타임캡슐광장의 중심이다. 광장 한복판에 동그란 모습의 중앙판석이 있는데, 그 땅속
15m에 타임캡슐이 고이 깃들여져 있다. 앞으로 370년 후인 2,394년에 뚜껑을 연다고 하는데,
캡슐에 담긴 것을 본 그 시대 사람들은 과연 어떤 생각과 마음을 보여줄까. 그리고 그 시절
이 나라와 지구는 어떤 모습일까. 만약 윤회(輪廻)라는 것이 있다면 그때 나는 어떤 존재로
태어나 있을까. 무지하게 궁금하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은 당장 10분 뒤, 1시간 뒤, 하루 뒤
도 모르거늘 너무 멀리간 것 같다.


▲  남산골공원 숲길 (타임캡슐광장에서 남산골한옥마을 방향)

남산골공원은 충무로역(3,4호선)으로 이어지는 북쪽 정문과 필동(筆洞) 주택가로 이어지는 남
쪽 후문, 그리고 남산으로 이어지는 서남쪽 후문이 있다. (남쪽 후문과 서남쪽 후문은 가까이
에 있음) 하여 남산골공원에서 서남쪽 후문을 통해 바로 남산으로 들어서거나 남쪽 후문을 나
와서 필동 주택가, 필동로를 거쳐 남산북측순환로로 접근해 남산으로 들어서면 된다.

남산골공원을 1바퀴 둘러보니 어느덧 16시, 햇님의 퇴근시간까지 약간 여유가 있어서 남산을
좀 복습하기로 했는데, 남쪽 후문을 나와 필동 주택가를 가로질러 남산북측순환로를 통해 남
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  필동 남쪽 구석에서 남산북측순환로로 인도하는 나무데크길 ①
오르기 편하게끔 낮은 경사를 보이며 지그재그로 펼쳐져 있다.

▲  필동 남쪽 구석에서 남산북측순환로로 인도하는 나무데크길 ②

▲  늦가을의 처절한 아름다움 속으로, 남산북측순환로

남산의 북쪽 허리를 가르는 남산북측순환로(북측순환로입구~소파로)는 차량의 접근이 통제된
뚜벅이 전용 숲길이다. 봄에는 벚꽃과 개나리가, 늦가을에는 단풍의 향연이 순환로를 따라서
길게 펼쳐지는데, 남산 및 도심의 봄꽃, 늦가을 단풍 명소로 명성이 자자하다.
차디찬 겨울을 바로 코앞에 두고 단풍나무 등 온갖 수목들이 처절할 정도로 아름다움을 보이
며 자신을 불태운다. 울긋불긋 익은 단풍들로 곱게 단풍 터널을 이룬 남산북측순환로, 이곳
단풍은 서울 장안에서 다른 곳에 비해 늦게까지 생존하는 편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남산골공원, 남산골한옥마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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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5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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