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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암동 무계원 (무계원 사랑채)

인왕산 그늘에 깃든 무계원은 한옥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부암동의 새로운 명소로 나름 바쁘게

사는 이곳은 익선동에 있던 오진암을 옮겨온 것인데, 그 집은 서화가로 유명한 송은 이병직(松隱

李秉直, 1896~1973)이 1910년에 지은 고래등 기와집이다.

집의 규모는 무려 700평으로 이병직은 여기서 많은 글씨와 그림을 남겼는데, 특히 사군자 중에서

난과 죽을 잘 그렸으며, 서화 감식에도 매우 밝았다.

 

1953년 집을 조모씨에게 팔았고, 그는 이곳을 요정으로 손질하여 장사를 했다. 이 집이 바로 이 땅

최초의 요정이자 서울시에 등록된 음식점 1호인 오진암(梧珍庵)이다. 오진암이란 이름은 뜨락에

큰 오동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진암을 시작으로 청운각과 대원각, 삼청각 등의 요정이 서울 도심과 성북동에 생겨났으며, 이들

과 함께 1960~1980년대 요정 정치의 산실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흔히 서울 3대 요정으로 삼청각,

대원각, 청운각을 꼽으나 청운각 대신 오진암을 넣기도 한다.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박성철 제2부수상과 논의하여 그 유명한 7.4남북공동성명

을 이끌어낸 현장이기도 하며, 권력 실세와 고위 관료, 기업인들이 자주 들락거렸는데, 이름만 대

면 이 땅의 사람들이 거의 알만한 사람들이 이곳의 단골이었다. 이후락도 오진암의 단골로 많이

재미를 봤다고 한다.

또한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늘자 당시 미국 등 철없는 양이 언론들이 이 땅의 요정들이 기생 관

광으로 돈을 번다며 꼬집었는데, 그때 오진암이 진하게 언급되기도 하였다.

2006년에는 어느 손님이 무려 290만원을 카드로 결제해 유명세를 타기도 했으며, 이곳 음식은 맛

이 좋고 정갈한 편으로 접대 아가씨들이 매우 친절했다. 하지만 가격이 후덜덜한 수준이라 그 시절

기준 100만원 이상은 훌쩍 넘어간다. 그래서 서민들은 얼씬도 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있는 자, 권력

층의 폐쇄된 공간이었다.

 

허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급 요정도 대거 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대원각은 절

로 탈바꿈해 길상사가 되었고, 삼청각은 서울시가 인수해 고급 문화공간이 되었다. 청운각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으며, 오진암은 그들보다 더 오래 버티긴 했으나 손님이 줄면서 주인 조모씨는

결국 2010년에 집을 내놓고 말았다.

이곳을 사들인 사업자 이솔트는 10층짜리 관광호텔을 짓고자 그해 9월 오진암을 밀어버렸는데, 오

래된 한옥이고, 20세기 중반 요정/풍류문화가 깃든 현장이라 철거 반대 여론도 적지 않았다. 하지

만 종로구에서는 개인 집이고 지정문화재가 아니라는 이유로 집이 가루가 될 때까지 방관하고 말았

다.

다행히 뒤늦게나마 철이 든 종로구는 2010년 10월 호텔 사업자와 협의를 벌여 오진암을 다른 곳으

로 이건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어 철거된 목조 자재를 모아두며 시간을 허

비하다가 2012년 2월 안평대군의 별장인 무계정사터 아랫쪽 지금의 자리를 마련해 복원하기로 했다.

복원 비용은 종로구와 호텔사업자가 부담했으며, 서울시에서 준 특별교부금과 국토교통부의 한옥건

축지원금까지 포함해 23억이 소요되었다.

 

2012년 2월 복원 공사를 벌여 2013년 11월 완성을 보았으며, 오진암에서 옮겨온 목재와 안채의 지붕

기와, 서까래 기둥 등이 활용되었고, 특히 종로 청진동에서 발견된 500년 이상 묵은 건물 주춧돌로

석축을 쌓아 오진암을 그런데로 재현했다. 또한 뛰어난 장인들이 많이 참여했고 (주)이건창호에서 한

옥 화장실을 지어 기증했다.

공사가 완료되자 문화재 전문가들은 이곳이 무계정사터의 일부임을 내세워 그곳과 연관지어 한옥의

이름을 정하자고 요청했다. 하여 고심 끝에 무계원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고, 2014년 3월 20일 세상을

향해 활짝 사립문을 열었다.

 

무계원은 대지 1,654㎡, 연면적 389㎡로 안채와 행랑채, 사랑채, 연못, 돌담, 대문을 두었는데, 들어

앉은 지형상 예전 오진암보다는 무지 작게 재현되었다. 그리고 분실된 예전 건물의 부재가 많아 기둥,

건물벽은 거의 새로운 것으로 채워넣었다.

 

다시 태어난 무계원은 전통문화체험 공간으로 개방해 인문학 강좌, 서당체험, 다도교실, 국악공연, 기

획전시 등 다양한 전통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종로구와 안견기념사업회가 2016년 5월 안평대

군과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의 예술혼을 기리고 그 유적 복원을 위하여 '몽유도원무계정사 문화축제'

를 열기도 했다.

 

부암동이 내 즐겨찾기 명소의 일원이다 보니 부암동과 인근 인왕산, 백석동천(백사실계곡)을 찾을 때,

후식거리로 가끔 들리는 편이다. 딱히 달라진 것은 없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집 뜨락에는 늦가을이 한

참이나 머물고 있었다. 현재 이곳은 종로구 산하의 종로문화원에서 관리 운영하고 있다.

 

2. 무계원 뒷뜨락 (사랑채 동쪽)

건물을 짓고 남은 동쪽 짜투리 공간은 뒷뜨락으로 삼았다. 이곳에는 나무와 화초 등을 심었으며, 뜨락

끝에는 굳게 잠긴 협문이 있다.

 

3. 청진동에서 발굴된 조선시대 늙은 주춧돌로 조성했음을 알리는 작은 안내문

 

4. 뒷뜨락에서 바라본 사랑채와 상큼하게 꾸며진 정원

 

5. 사랑채 옆 석축

청진동에서 건진 늙은 주춧돌을 손질하여 닦았다. 석축 위에는 수풀이 뿌리를 내렸으며, 그 너머로 문

이 닫힌 사랑채가 있다.

 

6. 늦가을을 온몸으로 누리고 있는 무계원 은행나무

늦가을 풍경 중 누렇게 익은 은행나무와 알록달록 단풍은 정말로 참기가 힘들다. 마지막 앞에서 처절

하게 아름다움을 불사르는 그들의 짧은 향연이 끝나면 이제 차디차고 혹독한 겨울 제국이 찾아와 3~

4달 동안 천하를 지배한다. 그러니 겨울이 오기 전에 늦가을 향연을 최대한 살펴봐야 나중에 명부(저

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7. 사랑채 뒤쪽에 있는 네모난 연못

조그만 연못 한복판에 크고 견고한 돌덩어리가 하나 놓여져 있다. 예전에는 없던 것으로 연못 주위로

수초들이 가득 모여 그들만의 정모를 벌인다.

 

8. 2014년 3월 20일 무계원 개원 기념으로 종로구청장 김영동이 심은 소나무

 

9. 새집 냄새가 진동하는 사랑채의 안쪽 모습

 

10. 'ㄱ'자 모습의 안채

안채와 행랑채는 모두 'ㄱ' 모습을 취하고 있다.

 

11. 'ㄱ' 모습의 행랑채

 

12. 아무도 없는 행랑채 내부

행랑채는 열린 공간으로 종종 그림 전시회와 문화 행사 등이 열린다. 하여 마루와 방까지 발을 들일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구경만 해야되며, 누워서 자는 등의 민폐 행위는 곤란하다.

 

13. 행랑채에 걸린 매화 그림

무계원의 전신인 오진암을 짓고 살았던 이병직의 그림이다. (진품인지 모조품인지는 모르겠음)

 

14. 안채 뒷쪽 돌담과 단단히 다져진 석대

청진동에서 가져온 조선시대 건물터 석축과 새로 얹힌 하얀 피부의 석축이 어색하게 조화를 이룬다.

 

15. 사랑채 앞에서 바라본 행랑채(왼쪽 기와집)와 안채(안쪽 기와집)

 

16. 늠름하게 생긴 사랑채의 앞모습

 

17. 솟을대문 스타일의 무계원 정문(대문)

대문에 걸린 파란색 피부의 무계원 현판 글씨가 마치 살아서 율동을 부리는 것 같다. 그중에서 '武'자

는 꼭 칼질을 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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