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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나들이 (아차산성) '

▲  아차산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아차산5보루

▲  아차산성

 


 

아차산은 해발 287m(또는 285m)로 용마산과 망우산을 거느린 큰 산줄기이다. 서울 강북의
동남쪽 벽으로<동북쪽 벽은 수락산과 불암산> 서울 광진구와 중랑구, 경기도 구리시의 경
계를 이루고 있으며, 예전에는 중랑구 봉화산(烽火山)까지 아차산의 영역이었다. <봉화산
에 있는 봉수대를 '아차산 봉수대'라 부름>

아차산은 음은 같지만 한자 표기만 해도 무려 4개(阿嵯, 峨嵯, 阿且. 峩嵯)씩이나 되는데,
삼국시대에는 아차(阿且), 아단(阿旦)이라 불렸으며, 고려 때 이르러 지금 널리 쓰이는 '
아차(峨嵯)'란 이름이 나타난다. ('峩嵯'도 이때 나타남)
아단(旦)이란 이름은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세우고 이름을 단(旦)으로 고치자 제
왕의 이름을 피하는 법칙에 따라 '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갈았다는 이야기가 있
으며 조선 때는 악계산(嶽溪山), 남쪽을 향해 솟은 산이라 하여 남행산(南行山)이란 별칭
까지 있었다.


겉으로 보면 수도권에 널린 흔하고 흔한 산이지만 천하가 서울의 북현무(北玄武) 북악산<
北岳山, 백악산 342m>보다 키가 더 작은 이 산을 주목하고 있다. 바로 고구려의 영광스러
운 역사가 진하게 배여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과 만주, 요동, 요서(遼西) 등 차디찬 북
(北方)을 제외한 남한 영역에서 고구려 유적이 몰려있는 유일한 현장으로 그 값어치는 실
로 대단하다.
천박한 오랑캐 강대국들에게 둘러싸여 안그래도 좁아터진 땅, 남과 북으로 갈라진 채, 70
여 년 넘게 아옹다옹거리며 살아온 우리에게 너른 대륙과 바다를 다스렸던 고구려(高句麗
)와 발해(渤海), 백제(百濟), 옛 조선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너무 크기 때문일 것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차산은 거의 동네 뒷산이었다. 그러다가 1989년 큰 산불이 터졌는
데, 이를 진화하는 과정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이어진 이상한 돌무지와 산봉우리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파인 구덩이들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그들을 들춰보니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아차산 장성(長城)과 보루들이었다.
아차산장성은 아차산에서 용마산, 망우산까지 이어진 장대한 성으로 돌성과 토성(土城)으
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차산 주능선을 반달 모양으로 좌우 2겹으로 감싼 형태로 조성되었
는데, 중랑천을 건너 서울시립대 뒷산인 배봉산(拜峰山, 해발 110m)까지 이어졌다는 학설
도 있으며, 백제의 첫 도읍으로 한강 이북 어딘가에 있었던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의 흔
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들의 발견으로 아차산에 대한 호기심이 격하게 솟은 구리시(구리문화원)는 1994년 아차
산 일대를 조사하여 15개의 보루를 발견했고, 1997년 이후 아차산4보루를 비롯해 땅 속에
잠긴 보루와 유물을 끄집어냈는데, 이들이 거의 고구려 것으로 밝혀지면서 고구려 유적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남한에 한줄기 단비를 선사했다.

보루의 무더기 출현에 힘입어 아차산 일대가 고구려 유적의 꿀단지로 격하게 떠오르자 서
울 광진구(廣津區)와 경기도 구리시가 이곳을 둘러싸고 서로 고구려의 도시임을 자처하며
오랫동안 쓸데없는 소모전을 벌이기도 했고, 아차산의 존재감이 나날이 커짐에 따라 등산
과 답사 수요까지 계속 상승 곡선을 달리게 되었다. 게다가 완만한 산세와 일품 조망으로
야간 등산(야등) 수요까지 늘어나 서울 야등의 성지(聖地)로 추앙받고 있으며, 천하 둘레
길의 성지인 서울둘레길 2코스(용마·아차산코스)도 이곳에 숟가락을 얹히며 남북으로 흘
러간다.

이처럼 든든한 후광인 고구려 유적과 완만하고 아름다운 산세 덕에 관악산(冠岳山), 수락
산(水落山) 등 쟁쟁한 뫼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 아차산, 하지만 만약 고구려 유적이 없
었다면 아차산은 그저 그런 평범한 산으로 조용히 누워있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사람도
그렇고 산도 그렇고 때와 장소를 정말 잘 만나야 된다.


 

♠  고구려를 품은 꿀단지, 아차산 입문

▲  친수계곡 입구에 자리한 아차산 표석과 사슴 모형등

계절의 여왕으로 추앙받는 5월의 평화로운 주말, 일행들과 아차산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가운
데에 걸려있던 14시, 아차산역(5호선)에서 길을 시작하여 음료수와 떡, 과자 등을 사들고 아차
산으로 인도하는 골목길을 쫓았다.

아차산은 1991년 중학교 시절에 처음 인연을 지었다. 이후 20년 동안 인연이 없다가 2011년 야
간 등산으로 여러 번 찾았고, 2014년 여름 이후 야간과 낮 산행으로 발길이 무척 잦아졌다. 내
가 좋아하는 뫼의 하나다보니 아무리 많이 가도 질리기는 커녕 집에 온 듯, 반갑기만 하다. 그
아차산에 퐁당퐁당 빠진 큰 이유는 그곳에 서린 고구려의 흔적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다음
은 빼어난 절경과 완만한 산세)

아차산 남쪽 밑에 자리한 아차산 생태공원에서 잠시 발을 멈추어 속세에서 사온 먹거리를 섭취
하고 잠시 아차산을 등지며 남쪽에 솟은 홍련봉을 오른다. 그 언덕은 구의2동 주택가와 아차산
공원 사이에 자리한 조그만 뫼로 아차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는데, 그 정상에는 아차산 보
루의 최남단인 홍련봉 보루(堡壘) 유적이 깃들여져 있다.


▲  홍련봉 보루 입구 (아차산 만남의 광장 맞은편)
홍련봉 코스는 딱 1보루까지만 길이 이어져 있다. 그래서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야 된다. (1보루 이후는 길이 막힘)


▲  한참 조사를 받고 있는 홍련봉(紅蓮峰) 2보루 - 사적 455호

해발 60m 정도의 홍련봉 정상은 급한 경사와 달리 넓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은 장대한
기골을 지닌 아차산과 연결되어 있고, 동쪽과 서쪽, 남쪽은 평지라 조망도 나름 괜찮다. 또한
지척에 보이는 한강 너머로 강동, 송파 지역이 흔쾌히 두 눈에 들어오니 이런 곳에 산성이나
보루를 구축하면 제법 아름다운 요새가 된다.
하여 이곳에 일찌감치 매료된 옛 사람들은 보루를 3개씩이나 닦았는데 정상 북서쪽(북보루, 2
보루)과 남동쪽(남보루, 1보루)에 10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보루를 세웠으며, 홍련봉 남쪽 작
은 봉우리에도 보루 유적이 있다. 허나 그 유적은 정립회관 체육시설과 군사시설로 이미 아작
난 상태이다.

가는 날이 문닫는 날이라고 우리가 갔을 당시 2보루는 한참 발굴조사를 받느라 여념이 없었다.
2004년 이후 여러 차례 조사를 벌였지만 아직도 다 캐내지 못한 옛날 이야기 보따리를 끄집어
내려는 학자들의 불굴의 집념은 계속 되고 있었다. 그래서 보루 주변은 접근이 통제된 상태라
그 통제에 순응하며 금줄 너머로 그 뜨거운 현장을 지켜보았다.
발굴로 인해 강제로 흙색 속살을 드러내며 황량한 몰골이 되었지만 발굴이 끝나면 다시 자연의
옷과 돌을 입혀 보루를 산듯하게 복원할 계획이다.

2보루는 둘레 약 190m의 타원형 모양으로 남북 폭이 최대 85m, 동서 42m이다. 정상 일대를 평
탄하게 다듬고 조촐하게 보루를 쌓았는데 북서쪽에서 약 40m까지는 보루 주위의 토루(土壘)와
비슷한 높이로 흙이 깎여져있고 남동쪽 부분은 토루보다 2m가 낮다.


▲  홍련봉(紅蓮峰) 1보루 - 사적 455호

2보루에서 동쪽 숲길을 100m 가면 1보루가 나온다. 여긴 발굴조사가 끝났는지 2보루와 달리 인
적이 없어 한적했는데, 넓직한 푸른 덮개로 보루의 속살을 가리고 있었다.
이 보루는 서쪽 2보루와 비슷한 모습으로 둘레가 약 150m에 이르는 타원형이다. 폭은 최대 57m
, 최소 36m 정도이며, 남한 최초로 고구려 연꽃무늬 와당이 발견되어 아차산 보루의 중심 역할
을 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발굴 휴유증을 보듬고자 덮개를 뒤집어쓰며 곤히 잠든 보루를 건들
기가 그래서 굳이 그의 등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홍련봉 보루는 아차산보루와 달리 오래전에 확인이 된 유적으로 1942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성터로 나와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속세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버
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1994년 구리문화원이 아차산 일대를 뒤집으며 문화유적 정밀지표 조사
를 벌였고, 이곳이 고구려 보루로 크게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하여 2004년 고려대 매장문화재
연구소에서 홍련봉1보루의 속살을 털면서 고구려의 신성한 유적임이 밝혀진 것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홍련봉 보루의 신상을 털어보면 대략 이렇다. 아차산보루와 비슷한 5~6세기에
고구려가 쌓은 것으로 보루 안에 온돌을 갖춘 건물과 물을 보관하는 저수시설, 물을 밖으로 내
보내는 배수시설, 토기와 기와를 생산하던 조그만 가마터가 있었다. 북쪽 평탄지에는 저수시설
이 나왔는데, 바닥에 목재를 깔았던 흔적이 있으며, 흙을 파서 찰흙을 입힌 뒤 석축으로 벽면
을 쌓았다. 2005년에 확인된 가마터 흔적에서는 온돌 3기가 나왔고, 온돌을 폐기한 후 모래를
섞은 흙을 다져 가마터 시설을 조성한 흔적이 나왔다.
또한 보루 내부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완벽한 배수시설 구조가 나왔으며, 보루 밖에는 'ㄴ'자로
판 후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도로 시설이 나왔고, 2013년 여름 이후에는 마른 해자의 흔적까지
쏟아져 나오면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했다. 이는 남한에서 최초로 확인된 고구려 해자였던 것
이다. 해자란 방어력을 높이고자 성곽 주위에 두룬 물줄기로 북서쪽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에
서 드러났는데 규모는 길이 204m, 폭 1.5~2m, 깊이 0.6~2.5m, 단면 형태는 'U'자형과 'V'자형
이다.
이들은 흙을 파서 내,외벽을 이루고 있는데, 외벽 일부에는 배수로가 설치된 구간을 석축으로
쌓거나 따로 배수시설을 연결했으며 동/서쪽 내벽은 석축 성벽이다.

그리고 고구려 토기와 연꽃무늬 와당(기와), 철제 깃대, 철촉, 삽날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토기 중 '官瓮(관옹)'이 새겨진 붉은 토기와 '庚子(경자)'가 새겨진 토기가 있었다.
여기서 경자는 520년(또는 460년)을 뜻하며, 이를 통해 보루가 바쁘게 움직이던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여러 유물과 시설이 발견되면서 비슷한 시설 흔적이 나왔던 아차산3보루와 더불어 아차
산의 군수물자를 책임지던 병참기지(兵站基地)로 여겨지며, 연꽃무늬 와당을 통해 아차산 보루
의 중심지였음을 귀뜀해준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곳이 아차산의 중요한 목구멍이 되었을까? 아마도 한강이 가까운 탓이 아닐
까 싶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시절 고구려는 중원대륙 진출에 대한 몸풀기로 아리수(阿利
水, 한강) 이북을 점령했고, 장수태왕(長壽太王) 말엽인 475년에는 한강을 건너 경북 중부까지
장악했다.
한강은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요충지로 그 강을 통해 아차산을 비롯한 남쪽 후방으로 물자를 수
송했을 것은 뻔한 이치이니 강과 가깝고 아차산과 바로 이어지는 홍련봉과 인근 구의동(정립회
관), 자양동에 보루를 쌓아 아차산의 병참기지로 삼은 것이다.

허나 6세기 중반 신라가 백제의 뒷통수를 후려치며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그 기세로 아차산까
지 공격하자 고구려군은 강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털리고 말았다. 이는 온달(溫達)장군의 설화
를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신라는 이곳을 활용하여 한강과 서울 지역을 수비하고 고구려를 견
제했으나 8세기 이후 군사기지로서의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완전히 버려지게 된다.
그렇게 사람의 손길이 끊어진 보루는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완전히 헝클어졌고, 대자연의 힘
에 의해 아차산의 일부로 완전히 녹아버렸다. 그 억겁의 세월동안 자연에 강제로 묻히며 한이
단단히 쌓였을 홍련봉보루, 이제 그 한을 풀고 이곳에 묻힌 이야기 보따리(특히 고구려)를 모
두 풀어주기를 염원해본다.

홍련봉 보루는 '아차산 홍련봉 보루 유적'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21호의 지위를 누리
고 있었으나 사적 455호로 지정된 '아차산 일대 보루군'의 일원으로 흡수되었다.

* 홍련봉 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 4-13


▲  홍련봉 1보루 밑에서 바라본 천하
숲 너머로 바로 보이는 아파트가 워커힐아파트이다.

▲  홍련봉 보루 조감도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  아차산 소나무숲 입구

홍련봉 보루를 둘러보고 다시 내려와 아차산으로 인도하는 소나무숲으로 들어섰다. 아차산성으
로 가려면 이곳을 거쳐가는 것이 제일 빠르기 때문이다.

이 소나무숲은 아차산생태공원의 일원으로 소나무와 들꽃이 어우러진 상큼한 공간이다. 소나무
가 삼삼하여 따가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힘을 쓰지 못하며 달달한 솔내음을 머금은 솔바람이 살
포시 다가와 벌써부터 피어난 땀과 속세의 무성한 번뇌를 앗아간다. 소나무 그늘에는 들꽃이
가녀린 미소를 머금으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무책임하게 돌을 던지고, 그런 꽃내음과
솔내음이 어우러져 조촐하게 극락을 연출한다.


▲  아차산 소나무숲의 한복판


 

♠  삼국시대 주요 격전지였던 아차산성(阿且山城) - 사적 234호

▲  아차산성 서벽 (1)

아차산 남쪽 자락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차산성이 장대한 세월을 머금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소나무숲을 지나 10분 정도 오르면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덥수룩하
게 자라난 나무와 수풀로 오랫동안 고통 받아오던 것을 2013년 이후 성곽 주변을 꾸준히 다듬
으면서 북쪽과 남쪽 성벽도 그런데로 확인이 가능하다.
허나 아무리 꾸준히 이발을 하고 숯을 쳐내도 대자연의 의해 금세 수풀이 자라 성곽을 가리려
드니 역시나 인간의 피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돌이나 모래알에 불과하다.

아차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백제 9대 제왕인 책계왕(責稽王)이 위
례성(慰禮城)과 함께 수축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백제 초기(1~2세기 경)에 국도(國都)
인 위례성 주변 수비와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귀신도 지릴
정도로 상당히 오래 묵은 성이다.
처음에는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렸는데, 5세기 이후부터 단(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변
해 아차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문은 비슷한 모양으로 인해 금석문(金石文)과 판각인쇄
에서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으며,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달리 하여 '峨嵯山城'이라 쓰는 경우
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문화재청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한자(阿且山城)를 정식 명칭으로 삼으
면서 한자 논쟁은 그런데로 종결이 되었으나 아차산의 공식 한자 표기인 '峨嵯山'과 달리 그
산성은 예전 한자로 따로 노는 이상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아차'란 이름 외에도 장한성(長
漢城), 광장성(廣壯城)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으니 한자 이름도 그렇고 별칭까지 참 복잡하다.
그만큼 이곳은 역사적으로도 꽤 복잡했던 곳이다.

4세기 후반 고구려의 위대한 군주, 광개토대왕(재위 392~413)이 한강 이북을 말끔히 장악하면
서 이곳은 백제의 심장을 겨낭한 고구려의 화살이 되었다. 위례성으로 여겨지는 서울 강동/송
파 지역이 훤히 바라보이는 잇점을 지닌 아차산을 흔쾌히 활용한 것이다.
그렇게 위례성(한성)을 새가 땅을 바라보듯 감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개로왕(蓋鹵王)이 고구
려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시에 백제 자신의 라이벌<동성왕(東城王) 시절에 산동반도에서 북위의
대군을 크게 때려잡은 사건이 있었음>이기도 했던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같이 치
자고 들쑤시는 일이 발생했다. (북위는 백제의 요구를 거절함)
이에 뚜껑이 열린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3만의 군사를 휘몰아 한성<漢城, 위례
성과 하남위례성을 한성이라 부름>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화공(火攻)으로 성문과 도성(都城)을 불태웠고, 개로왕은 급히 도성을 버리고 줄행
랑을 치던 중, 자신의 장수인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을 만났다. 허나 이들
은 개로왕의 미움을 받아 고구려에 투항한 상태로 그를 잡고자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런 사실을 알 턱이 없던 개로왕은 크게 안심을 했으나, 그들이 왕에게 절을 하면서 바로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3번 뱉고 온갖 육두문자를 내뱉은 다음 포박하여 고구려에 바쳤다.

그렇게 포로가 된 개로왕은 아차산성으로 끌려와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바다 건너 왜열도와 중
원대륙의 무수한 해안 영토를 거느렸던 백제의 도읍 위례성(한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 땅에
서 영구히 지워지고 말았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 때문에 이 땅의 학자들이 위례성을 찾느
라 오랫동안 진땀을 뺐던 것이다. (장수태왕 큰형님 너무 나빠여~~!)


▲  아차산성 서벽 (2)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고구려는 아차산성을 보조하고 한강과 중랑천, 구리 지역을 효과적
으로 수비하고자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조그만 보루를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이곳에 설치된 보루는 발견되지 않은 것까지 고려하여 최대 30개 정도로 여겨지며, (현재 17기
가 발견됨) 이들 보루는 북쪽으로 봉화산과 수락산, 사패산(賜牌山), 불곡산, 양주, 연천 지역
까지 이어지는데, 주목할 점은 오직 서울과 경기 북부에서만 발견되는 고구려의 독특한 요새라
는 점이다. 이는 오랜 라이벌인 백제를 크게 의식하고 경계하고 있었음을 뜻하며 그만큼 백제
는 고구려의 강력한 적이었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시절 온달이 이곳에 쳐들어온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
하며, 이후 신라가 접수해 고구려를 막는 요충지로 삼았다. 한때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 불
리기도 했고,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종종 건드렸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대륙을 다스렸던 고구려가 사라지고(668년) 신라가 황해도와 강원도 지역을 간신히 장악하면서
아차산은 전방 신세에서 벗어났다. 즉 좁아터진 신라 땅의 한복판이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아
차산은 할 일이 크게 줄어들어 한가한 신세가 되었고, 결국 산성과 보루는 완전히 버려지게 되
었다. (신라 말에 모두 버려진 것으로 여겨짐) 보루는 대자연과 세월의 의해 모두 아작이 났지
만 아차산성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며 그 자리를 지켜왔다.


▲  아차산성 구조와 관련 사진들

산성의 둘레는 약 1,038m(길게 잡으면 1,125m)로 산허리에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성이다.
아차산 남쪽 자락에서 워커힐 뒤쪽까지 이어져 있으며, 동문터와 남문터, 서문터, 수구(水口)
터, 곡성(曲城)터, 장대(將臺)터, 건물터, 온달장군이 마셨다고 전하는 우물이 있다. 장대(장
대터)는 전쟁시에는 장수들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쓰였다고 하며, 커
다란 왕개벚꽃나무 1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덩치로 봐서 100~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성벽 높이는 평균 10m, 성 내부 면적은 약 103,375㎡이며, 광나루까지 성을 쌓은 흔적이 발견
되었으나 워커힐이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1997년과 1999년 광진구에서 부분 발굴조사를 벌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토기와 기와파편, 흙
으로 만든 인물상, 철로 만든 솥과 쟁기날 등을 건졌고, 신라의 북한산성이 대충 이곳임이 밝
혀졌다.
그리고 2015년 광진구가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한국고고환경연구소와 함께 아차산성 남벽과
배수구 일대 4,575
를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는데, 그 결과 여러 흥미로운 존재들이 햇살을 보
았다. 고구려의 연꽃무늬 기와인 '연화문와당'이 나왔고 (홍련봉 1보루에서 발견된 와당과 비
슷한 형태임) 남벽 90m 외벽에서는 신라 건축의 특징인 외벽 보축(補築) 시설과 물을 내보내는
출수구 3곳, 내벽에서는 입수구 2곳이 나왔다. 또한 망대(望臺)터에서는 내외성벽을 비롯한 치
성(雉城)과 방대형 시설이 나왔으며, 신라의 연화문와당 10여 점과 '북한산성'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의 북한산성이 이곳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다.

허나 아차산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워커힐 관련 사유지로 묶여 있어 아직까지도 건드리지 못한
부분이 많다. 산성은 물론 그 주변까지 모두 뒤집으면 보다 많은 유물과 숨겨진 이야기가 쏟아
져 나올 것인데 그 점이 몹시 아쉽다.

1999년 이후 헝클어진 산성을 복원 정비하였고, 그들의 건강과 사유지 보호를 위해 산성 주변
에 철책을 둘러놓아 출입을 막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널린 산성(山城) 유적 중 유일하게 접
근이 통제된 까칠한 성곽이 되었는데<휴전선과 민통선 지역의 성곽 유적은 제외> 2014년 이후
부터 서울시와 워커힐이 협의하여 산성을 개방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감감
무 소식이다.
<2017년 광진구청장이 신년사에서 아차산성을 복원 정비하고 4계절 힐링공간을 위한 아차산 문
화벨트 조성사업을 마무리해 아차산둘레길과 연계한 문화탐방 명소로 만들겠다고 언급했음>

서벽과 북벽 일부, 남벽 일부는 산길에서 휴전선 너머를 바라보듯 만날 수 있으나 그 외는 어
림도 없다. 다만 1년에 딱 1번 아차산성의 속살이 강제로 해방되는<인터넷 용어로 민주화가 되
는> 날이 있는데, 바로 1월 1일 아침, 아차산 해맞이 행사 때이다. 그렇다고 정식 개방되는 것
은 아니다. 그때만 되면 산꾼들이 해돋이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산성으로 마구 넘어 들어가는데
그 행렬에 살짝 묻어 들어가면 된다. 물론 정당한 방법은 아니나 그때만큼은 아차산 일대가 수
만 명에 달하는 해돋이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니 단속반도 거의 손을 못쓴다. 어차피 산성에 해
꼬지만 안하면 된다.

아차산성 내부를 정당하게 둘러보고 싶다면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아차산 생태공원에 있음)'
에 문의하거나 '한강문화재연구원'에 도움을 청해보자. 나도 아직 아차산성의 속살로 들어간
적이 없다. 그곳이 속칭 민주화되기를 몇 년째 기다리고는 있지만 그 민주화라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 마치 이 땅의 민주화가 힘들게 자리를 잡은 것처럼 말이다.

※ 아차산성 찾아가기 (2017년 4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구의역(1번 출구)에서 광진구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영화사입구 하차, 동쪽으로
  펼쳐진 '영화사로'를 따라 10분 정도 가면 아차산생태공원 만남의광장이며, 여기서 소나무숲
  산길로 들어서 10분 정도 오르면 된다.
*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1번 출구)에서 아차산생태공원까지 도보 15분 (길이 좀 복잡함)
* 지하철 5호선 아차산역(2번 출구)에서 아차산생태공원까지 도보 17분
* 아차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5-11 (워커힐로 177)


▲  아차산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부분
저곳에서는 산성을 지휘하는 장대터가 발견되었다.


▲  아차산성 서벽 앞 산길 - 철책 너머가 금지된 성, 아차산성이다.

▲  낙타고개

아차산성 서쪽 옆구리를 지나면 낙타고개가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성이 있는 남쪽 봉우
리와 1보루로 이어지는 능선 사이에 쑥 들어가 있는데, 그 모습이 낙타의 목이나 등 부분의 굽
은 모양처럼 생겼다 해서 낙타고개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그대로 직진하면 아차산 주능선이며, 서쪽은 친수계곡과 영화사, 동쪽은 온달
샘석탑과 대장간마을, 우미내계곡으로 이어진다.


▲  낙타고개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달려가는 숲길

▲  무덤 갈림길

낙타고개에서 아차산 정상까지는 야간 등산에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산길이 잘 닦여져 있다.
그 길을 조금 가면 석축으로 자리를 다지고 들어앉은 조그만 무덤이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두
갈래로 갈린다. (누구 무덤인지는 모르겠으나 위치 하나는 좋아 보임)
아차산 정상과 주능선, 보루가 목적이면 왼쪽 계단길을, 범굴사(대성암)와 아차산3층석탑을 원
한다면 오른쪽 길로 간다.


 

♠  아차산 주능선 더듬기 (아차산1보루, 5보루)

▲  해맞이광장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1)
광진구와 송파(잠실), 강남, 대모산, 관악산 지역


무덤 갈림길에서 주능선을 오르면서 뒤와 옆을 살짝 돌아보는 여유를 누려보자. 그러면 허벌나
게 기가 막힌 조망이 두 눈으로 바로 달려올 것이다. 아차산이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 주
변이 거의 평지라 하늘 밑에 펼쳐진 천하를 훤히 굽어볼 수 있다. 이런 장쾌한 조망은 아차산
정상을 지나 용마산까지 이어지는데, 이 일품 조망 때문에 고구려가 보루를 잔뜩 달아 군사기
지로 삼았고 신라 또한 이곳을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  해맞이광장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2)
광진구, 강동, 송파, 남한산성, 대모산 지역

▲  광진구 해맞이광장 비석

무덤갈림길과 1보루 사이에 해맞이광장이 조촐하게 터를 닦았다. 이곳은 묵은 1,000년이 지고
새로운 1,000년이 도래하던 2000년 1월 1일 아침 7시, 광진구청에서 하늘과 가까운 이곳에서
새천년 해맞이 행사를 치른 것을 기리고자 돌을 쌓아 비석을 세우고 해맞이 광장으로 삼은 것
이다. 여기서는 지는 해는 물론 뜨는 해도 맞이할 수 있으며, 광진구가 야심차게 닦은 서울의
주요 해돋이 성지로 매년 1월 1일 아침마다 '아차산 해맞이축제'가 절찬리에 열린다.


▲  해맞이광장에서 바라본 천하 (1)
광진, 성동, 송파, 강남, 대모산, 관악산 지역


▲  해맞이광장에서 바라본 천하 (2)
강동구와 하남시, 남한산성과 검단산(黔丹山)

▲  해맞이광장에서 바라본 천하 (3)
'S' 라인을 보여주고 있는 한강과 구리, 강동구, 하남시, 남양주시 와부읍 지역

▲  아차산1보루 - 사적 455호

해맞이광장을 지나면 두툼히 살이 오른 아차산1보루터가 나온다. 이곳이 넘버원 1보루가 된 것
은 별 이유 없다. 남쪽을 기준으로 발견된 순서대로 나열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해발 250m에 자리한 1보루는 봉우리를 활용해 닦은 것으로 1994년 발굴조사 때 고구려 토기가
여럿 나왔다. 동쪽과 남쪽에서 보루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보루의 정체가 알려지기 훨씬 이전
부터 보루의 남쪽 성벽 흔적을 밀어버리고 산길을 냈으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보루 주변
에 나무 난간을 둘러 접근을 통제하고 그 옆구리에 우회길을 내었다. 그러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보루를 개방하면서 자유로운 공간이 되었다.

아차산 보루 중 가장 남쪽으로(홍련봉 보루 제외) 5보루와 함께 아차산성과 아차산 정상을 이
어주는 요새였으며, 동과 남, 서쪽이 확 트여있어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특히 5보루
와 남쪽 해맞이광장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난 해돋이 명소로 추앙을 받고 있어 1월 1일만 되면
사람들로 봉우리가 무너질 지경이다.

보루의 구체적인 생김새는 제대로 파악되지 못했으나 고구려의 축성 양식과 복원된 아차산4보
루를 흔쾌히 참고하여 보루의 모습과 거기서 머물던 고구려 군사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산의 일부로 흡수된 폐허의 현장이고 그들의 생전의 모
습을 담은 사진이나 기록도 없으니까 말이다.

고구려는 아차산을 비롯하여 홍련봉, 구의동, 자양동, 용마산, 망우산, 수락산, 봉화산, 사패
산, 천보산, 불곡산, 연천 지역까지 많은 보루를 설치하여 아차산성 등의 주요 성을 보조하며
주변 지역을 지켰는데, 이들 보루 중,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아차산 보루 6곳, 용마산 보루 7
곳, 망우산 3곳, 수락산 1곳, 홍련봉 2곳을 '아차산 일대 보루군'으로 묶어 사적 455호로 지정
했다.


▲  아차산1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광진, 성동구, 동대문구 지역)

▲  아차산5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5보루터는 해발 267m 봉우리에 둥지를 튼 보루로 둘레 158m, 내부 면적은 1,818㎡ 정도
이다. 봉우리를 활용하여 보루를 다졌는데 보루에 씌웠던 성벽은 거친 세월의 흐름 속에 죄다
휩쓸려 사라지고 겨우 흔적 일부만 있는 형편이다. 북쪽 비탈면에 석축 일부가 남아있으나 보
존을 위해 흙으로 덮었으며, 보루를 잡아먹은 봉우리는 예전보다 살이 두툼해진 상태이다.

그의 정체가 밝혀지기 이전에는 주능선 산길이 보루 복판을 가로질러 흘러갔으나 보루임이 밝
혀진 이후에는 그의 건강을 위해 서쪽에 우회길을 닦았다. 다른 보루와 달리 신라 후기 토기가
여럿 출토되었고, 봉우리 모습이 마치 신라 스타일의 고분과도 비슷해 이를 두고 신라가 고구
려 보루를 밀어버리고 무덤을 만든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고보니 정말 신라 고분처럼
생겼다. 허나 신라는 산능선에 무덤을 잘쓰지 않는 편이라 이 역시 설에 불과하다.

5보루터는 쿨하게 개방되어 있다. 길이 봉우리 남북으로 닦여져 있으며, 그 봉우리에 올라서면
1보루를 비롯해 아차산 능선과 한강, 서울 강동구와 송파구, 광진구, 강남구, 대모산, 구리시,
남양주시(도농, 덕소 지역), 하남시 지역이 훤히 시야에 잡혀 왜 이곳에 보루를 쌓았는지 십분
이해가 간다.


▲  아차산5보루 정상에 닦여진 돌탑

이곳을 스쳐간 산꾼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돌탑을 이루고 있
는 돌 대부분은 헝클어진 5보루 성돌로 여겨지며, 그 성돌이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인 돌
탑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돌고 도는 모양이다.


▲  아차산5보루 남쪽 부분

▲  아차산5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1)
사진 중앙에 보이는 곳이 태왕사신기 촬영지로 조성된 고구려대장간 마을이다.

▲  아차산5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2)
푸른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구리시와 남양주시(도농, 덕소), 서울 강동구,
하남시 지역이 바라보인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

5보루를 지나 계속 주능선을 고집하면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로 지정된 키 작은 소나무를 만나
게 된다.
아차산이 광진구의 소중한 꿀단지라 광진구가 그에게 들이는 정성은 참 대단하다. 그만큼 기대
하는 것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 정성의 하나로 2009년 가을, 아차산에 있는 소나무 중
괜찮은 것을 골라 아차산의 새로운 명물로 키우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바로 이 나무가 그 대상
이 되어 명품소나무 1호란 그럴싸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바위 틈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 천하를 굽어보고 있는데, 가지는 굴곡이 자연스러
우며, 피부가 붉고 아름다워 단아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그의 나이는 40~50년 남짓으로 여
겨지며 나무 곁에는 천하를 굽어보게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에서 바라본 광진, 성동, 동대문구 지역
오른쪽 구석에 남산서울타워도 보인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에서 바라본 용마산, 아차산 산줄기

▲  아차산 명품소나무 2호

명품소나무 1호를 지나면 바로 명품소나무 2호가 나온다. 이 나무는 밑둥부터 여러 가지로 솟
아올라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모습이 마치 고구려의 기상을 닮았다하여 명품소나무 2호의 감
투를 받았다. 그 역시 1호 나무와 함께 광진구청의 보살핌을 받으며 아차산의 차세대 명물을
꿈꾼다. (명품소나무 3호는 아직 없음)


▲  명품소나무2호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길


 

♠  아차산 마무리

▲  아차산6보루

명품소나무 2호와 아차산3보루 사이에 아차산보루의 막내라 할 수 있는 6보루가 언덕처럼 봉긋
이 자리해 있다.
언덕처럼 솟은 터가 바로 6보루터로 2005년 3보루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사람이 우연히 발견했
다. 허나 아직까지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 생김새가 보루터 비슷하게 생겨서 아
차산6보루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추정 둘레는 약 80m 정도로 이곳에서 나왔던 옛 불씨는 흙을
덮어 보존하고 있다. 아차산 주능선 바로 동쪽으로 적지 않은 아차산의 과거를 간직하고 있으
리라 여겨지며 속히 조사를 벌여 6보루의 정체성을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  아차산6보루 부근에서 바라본 5보루

▲  아차산6보루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1)
가운데 보이는 산자락에 아차산성이 누워있고, 그 너머로 한강과 강동,
송파 지역이 바라보인다.

▲  아차산6보루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2)
강동구와 하남시 지역

아차산의 품에 들어설 때 처음에는 아차산 정상까지 가려고 했다. 허나 그 힘찬 발걸음은 6보
루에서 뚝 멈추고 말았다. 일몰 시간도 지척인데다가 다들 힘들다고 하소연을 했기 때문이다.
하여 아쉽지만 주능선은 이쯤에서 놓아두고 동쪽으로 내려가 범굴사(대성암)을 경유하여 무덤
갈림길로 돌아왔다.


▲  범굴사 부근에서 바라본 한강과 강동, 구리, 하남 지역

▲  범굴사 부근에서 바라본 강동, 송파 지역

▲  크고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고구려정(高句麗亭)

무덤 갈림길에서 낙타고개 방면으로 내려가면 서쪽에 붉은 기와를 지닌 2층 고구려정이 손짓을
한다.
아차산에 딱 어울리는 이름을 지닌 고구려정은 팔각정 모습으로 이곳에는 원래 1984년에 지어
진 콘크리트 팔각정이 있었다. 허나 노후로 정자 전체가 기울어지는 현상이 발생하자 2008년 1
월에 철거했으며, 고구려 유적의 성지에 걸맞게 고구려 스타일로 다시 짓기로 하고 2009년 2월
착공하여 그해 7월 완성을 보면서 정자 이름을 고구려정이라 하였다.
정자에 쓰인 목재는 300년 이상 묵은 금강송을 사용했는데, 기와는 고구려 왕궁인 평양 안학궁
(安鶴宮)과 홍련봉보루에서 출토된 기와의 붉은 색상과 문양을, 단청 문양과 현무, 주작 그림
은 쌍영총(雙楹塚)과 강서(江西)중묘 등 고구려 고분 벽화를 참고해 남한 최초로 고구려 건축
양식을 재현한 의미 깊은 현장이다.

고구려정은 바위 위에 곧게 자리해 고구려가 늘 응시하던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정자 밑에
넓게 닦여진 넓적바위는 예로부터 기가 왕성한 장소로 알려져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정자 내부는 마루로 이루어져 1층에서 신발을 벗고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되는데 솔솔 불어오
는 산바람에 번뇌를 휘날리며 독서를 하게끔 도서함이 갖추어져 있다. (독서는 자유이나 책을
가져가는 것은 안됨)

▲  야외 도서관을 꿈꾸는 고구려정 도서함

▲  천정에 그려진 주작(朱雀)의 위엄


▲  천정에 장엄하게 그려진 현무(玄武)와 연꽃무늬의 위엄

▲  고구려정에서 바라본 천하 (광진구 구의/자양/성수동 지역과
송파, 강남 지역)

▲  주름진 하얀 피부를 지닌 거대한 넓적바위
아차산 동쪽 자락인 우미내계곡 북쪽에도 이런 비슷한 바위가 누워있다.

▲  밑에서 바라본 고구려정

고구려정에서 잠시 다리를 쉬었다가 정자 밑으로 펼쳐진 넓적바위를 타고 내려갔다. 바위 자체
가 산길로 쓰이고 있는데, 미끄러운 면이 별로 없어 산행에는 크게 불편은 없다. 다만 비/눈이
오거나 얼음이 언 경우에는 바위도 흥분기를 보이니 각별히 주의해야 된다.

아차산공원(동의초교 동쪽)으로 내려오니 어느덧 19시, 그렇게 높이 올라간 것은 아니지만 하
늘과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을 갔다왔더니 시장기도 강하게 요동을 친다. 그래서 어린이대공원
후문 부근에서 뜨끈한 갈비탕에 파전, 거기에 곡차(穀茶) 여러 잔을 겯드리며 황제처럼 저녁을
먹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아차산 나들이는 흐릿한 과거의 일부가 되어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어린이대공원 후문 부근 식당에서 먹은 갈비탕과 파전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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