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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산, 안산 (무악산 동봉수대) '

▲  무악산 동봉수대(안산 동쪽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천하만물의 마지막 희망, 늦가을이 세월의 저편으로 뉘엿뉘엿 저물고 혹독한 겨울 제국(帝
國)이 한참 기세를 올리던 11월 끝 무렵, 떠나가는 늦가을 누님의 뒷자락이라도 잡아볼 생
각에 친한 후배와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안산을 찾았다.

오후 3시 서대문역(5호선)에서 그를 만나 독립문 남쪽에 있는 영천시장에서 떡복이와 오뎅,
튀김 등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였다. 원래 시장은 일정에 없었으나 안산에 가다보니 자연히
지나치게 되었고,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쿨하게 못지나치듯 시장 먹거리를 온전히 뿌리치기
가 어려웠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아름다운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지! 그래서
잠시 안산을 잊고 먹거리 섭취에 임했다.
그렇게 요기를 마치고 포만감의 행복을 누리며 독립문 삼호아파트 뒷쪽으로 흘러가는 안산
자락길로 들어섰다. 그 길을 따라 안산의 남쪽 기점인 천연뜨란채아파트로 이동, 거기서부
터 안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안산(鞍山)의 품으로 들어서다.

▲  안산 남쪽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멀리 관악산과 호암산도 덩달아 시야에 들어온다.


서울 도심 북서쪽에 누워있는 안산은 해발 295.9m의 조촐한 산이다. 대륙을 향해 뻗어가는 의
주로(義州路)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仁王山, 338m)
과 마주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홍제천(弘濟川)을 사이에 두고 백련산(白蓮山)과 이어진다.
산의 영역은 남쪽으로 천연동(天然洞)과 북아현동(北阿峴洞), 북쪽은 홍제1동과 연희동. 동쪽
은 의주로, 서쪽은 서대문구청 뒷쪽과 연세대에 이르며, 남북으로 아무리 길게 잡아봐야 3km
남짓이다.

안산이란 이름은 산의 모습이 마치 말과 소의 등에 짐을 싣기 위해 사용하는 길마처럼 생겼다
하여 유래된 것으로 <안(鞍)은 안장을 뜻함> 길마재라고도 하며, 모래내, 추모련, 무악산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또한 산 꼭대기에 봉수대가 있어 봉우재라 불리기도 했다. 서울의 남주작
(南朱雀)인 남산(南山, 목멱산)보다는 조금 높지만 인왕산과 북악산(北岳山, 백악산)보다는 조
금 낮으며, 이들 산과 비슷하게 덩치도 고만고만하여 아무리 산행을 길게 잡아도 2~3시간 내외
면 충분하다.
또한 바위와 벼랑이 많은 정상부(동쪽 정상)를 제외하면 산세가 완만하고 산길이 잘 닦여져 있
어 누구든 부담없이 안길 수 있으며, 편한 둘레길의 정석으로 추앙받는 안산자락길이 산 허리
에 둘러져 있다. 게다가 조망도 일품이고 수맥도 풍부하여 20여 개가 넘는 약수터가 나그네의
목마름을 어루만진다.

지리적인 위치를 보면 인왕산과 함께 서울 도심을 서북쪽으로 둘러싼 형태로 예나 지금이나 서
울을 지키는 주요 요충지이다. (지금도 안산 정상에 군사시설이 있음) 하여 산을 둘러싼 다툼
도 여럿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1623년에 일어났던 이괄(李适)의 난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의 주역이던 이괄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
으켜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했다. 서인(西人) 패거리에 의해 왕위에 오른 얼떨떨한 인조(仁祖)
는 서인 일당을 데리고 충청도 공주(公州)로 급하게 줄행랑을 쳤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은 어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토벌하고자 안산에 진을 치
니 도성을 점령하여 잔뜩 자만감에 빠진 이괄은 도성 사람들에게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때려잡을 것이니 나와서 싸움이나 구경하도록~~!' 자신감을 강하게 내
비췄다. 그리고 군사<군사 중에 임진왜란 때 투항한 항왜(降倭)들이 많았음>를 이끌고 인왕산
서쪽으로 나가 장만의 군사와 대치했다. 도성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고자 인왕산에 잔뜩
모여들었는데, 조선 사람들은 대체로 흰 옷을 즐겨입다보니 산을 가득 메운 그들로 인해 산이
마치 하얀 백로처럼 보였다고 한다.

관군을 맞은 이괄은 처음에는 여유롭게 전쟁을 진행했으나 난데없이 불어닥친 강풍에 기가 꺾
여 장만에게 몰리고 말았다. 그래서 서둘러 도성으로 도망쳤으나, 백성들이 성문을 죄다 걸어
잠구면서 도성을 포기하고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까지 줄행랑을 쳤다. 하지만 내부 갈등으로
결국 부하에게 살해되어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이때 살아남은 이괄의 부하들은 목을 붙잡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후금(後金)으로 도망쳤는
데, 그들은 청태종(淸太宗)에게 광해군(光海君)의 복수를 구실로 조선을 치라고 들쑤셨다. 그
래서 일어난 것이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이 되겠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청나라군이 안산과 인왕산 사이의 무악재를 눈치를 보며 넘었
으며, 1950년 9월에는 인천(仁川)에 상륙한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되찾고자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던 현장이기도 하다.

안산의 포근한 품으로 들어서려면 서대문구청이나 홍제천인공폭포(연희숲속쉼터). 봉원사, 천
연동, 홍제1동, 무악재역, 한성과학고 등지에서 접근하면 된다. 근래에는 서대문구청에서 안산
자락길이라 불리는 둘레길(7km)을 야심차게 닦았는데, '쉽게 걸을 수 있는 편안한 여행길 10선
'에 꼽혀 국민적인 둘레길로 칭송을 받고 있다.
안산 서남쪽 자락에는 서울 지역의 주요 고찰(古刹)이자 영산재(靈山齋)의 성지(聖地)인 봉원
사가 있고, 산 동쪽 정상에는 무악산 동봉수대가 있으며, 연희숲속쉼터와 안산허브공원, 흔들
바위, 안산자락길, 메타세콰이어숲, 잣나무숲 등의 명소가 즐비해 지루할 틈이 거의 없다.
이렇게 착한 산임에도 오랫동안 인왕산과 북악산, 북한산, 남산에게 제대로 가려져 고통(?)의
시간을 보내다가 안산자락길을 계기로 동네 명소에서 벗어나 서울 굴지의 꿀단지로 훨훨 나래
를 펼치고 있다.

※ 안산 찾아가기 (2017년 1월 기준)
① 봉원사
*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6번 출구), 지하철 2호선 신촌역(3,4번 출구), 서울역버스환승센터에
  서 7024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1번 출구)에서 272, 606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대부고에서 하차, 동쪽
  (오른쪽) GS25시(봉원동4거리) 앞에서 7024번 시내버스로 환승 또는 도보 10분
② 천연동
* 지하철 2,5호선 충정로역(7,8번 출구)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02번(대) 천연뜨란채아파트 방
  면 차량을 타고 뜨란채아파트 101동 종점에서 하차
③ 독립문역
* 지하철 3호선 무악재역 3번 출구에서 1분 정도 가면 통일로23길 골목길이 나온다. 그 가파른
  골목길을 5~6분 정도 오르면 안산자락길이 모습을 드러낸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천연동, 신촌동, 연희동, 홍제동


▲  안산 숲 너머로 바라보이는 서울 시내 (남산과 N서울타워도 덤으로)

▲  안산 산책로에서 만난 조촐한 쉼터

천연동에서 안산 정상까지는 능선길을 따라 30~40분 정도 걸리는데, 경사가 거의 느긋하고 길
도 잘 닦여져 있다. 능선길이라 오로지 직진을 고수하면 무난하게 봉수대가 있는 정상으로 갈
수 있으며, 서울 도심과 독립문, 서대문구/마포구 지역만 보이던 시야도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정비례로 늘어나 조망의 품질도 높아진다.

늦가을의 향연을 누린 나무들은 무심히 다가온 겨울 제국의 눈치를 보며 거추장스러운 잎을 떨
구고 초라한 몰골로 내년 봄을 기다린다. 몇몇 나무들은 나뭇잎을 단단히 붙들며 가을을 끝까
지 고수하지만 이미 하늘마저 겨울로 가득차 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은 귀를 접으며 인
생의 마지막을 노래하고, 산꾼들은 낙엽의 사각사각 소리가 듣고자 그들을 밟고 지나간다. 낙
엽의 처절한 말로를 보면서 '올해도 완전 저물었구나, 이제 곧 1살이 강제로 누적되겠지~!' 싶
은 우울감이 나를 감싼다.


▲  안산 능선길 동쪽으로 보이는 독립문 주변과 인왕산
인왕산 너머로 북악산(백악산)과 북한산(삼각산)까지 두 눈에 들어온다.

▲  안산 능선길에서 바라본 천연동, 서대문 주변과 서울 도심

▲  정상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안산천약수터

안산 정상을 10여 분 정도 앞둔 곳에서 길은 능선길과 서북쪽 길로 갈린다. 정상으로 빨리 가
고 싶다면 능선길을 이용하면 되나 거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고 경사가 좀 각박하여 각별한 주
의가 필요하다. 하여 잠시 여유를 갖고 서북쪽 길로 우회하니 안산에 별처럼 널린 안산천약수
터가 살짝 모습을 비춘다.
이곳은 정상에서 가장 가까운 샘터로 가뭄에도 물이 마를 날이 없다고 하는데, 여기서 안산이
베푼 약수를 몇 바가지나 들이키니 목구멍과 몸 속의 불이 싹 진화되는 것 같다.

약수터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산악회에서 만든 조그만 건물이 여럿 있으며, 여기서 북쪽으로 가
면 무악정이란 2층 정자가 모습을 비춘다. 무악정은 근래에 지어진 8각형 2층 정자(亭子)로 여
기서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리는데, 북쪽은 홍제1동과 연희동, 동쪽은 안산 정상이다.


▲  겨울에 잠긴 안산 오솔길 (안산천약수터에서 무악정 방향)
발자국 소리, 낙엽 밟는 소리가 미안할 정도로 고요하기 그지 없다.

▲  정상 입구에 자리한 무악정(毋岳亭)
안산의 구수한 명물로 나그네들의 포근한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동쪽으로 10분 정도 오르면 안산 정상과 무악산 동봉수대에 이른다.

▲  무악정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서대문구와 마포구, 한강 너머로 강남, 동작, 관악, 영등포구 지역과
관악산까지 시야에 잡힌다.

▲  안산 동쪽 정상 밑에 자리한 'H' 마크의 헬기장
(서쪽 정상과 동쪽 정상 사이)


 

  안산 정상과 무악산 동봉수대(毋岳山 東烽燧臺)

▲  안산 동쪽 정상에 자리한 무악산 동봉수대 - 서울 지방기념물 13호

하늘과 맞닿은 안산의 지붕에는 2개의 봉우리가 봉긋 솟아있다. 이중 서쪽 봉우리가 안산의 정
상으로 안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나 그곳에는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어 출입이 100% 통제되어 있
다. 하여 자유로운 땅인 동쪽 봉우리(동쪽 정상, 이하 '안산 정상')가 실질적인 정상의 역할을
맡고 있다. 서쪽 봉우리보다 약간 낮을 뿐, 거의 비슷하며 바로 그 봉우리에 무악산 동봉수대(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무악산 동봉수대터')가 천하를 굽어보며 요새처럼 버티고 있다.

봉수대는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불을 피워 연기와 불빛을 이용해 변방의 소식을 중앙으로 빠
르게 전달하던 것으로 주로 산 정상에 자리를 닦았다. 지금처럼 전화나 인터넷이 있던 시절이
아니니 봉수대의 역할은 더욱 클 수 밖에 없었고 그 봉수대를 이용한 봉수체제가 그나마 제일
빠른 통신 수단이었다. 비와 눈이 내려 연기가 여의치 못할 때는 봉수지기가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소식을 전했다.

조선시대 봉수제(烽燧制)는 1438년(세종 20년)에 확립되었는데, 그때 무악산(안산) 정상에 봉
수대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무악산은 안산의 다른 이름으로 안산과 인왕산 경계에 자리
한 무악재에서 비롯됨)
지금은 동봉수대 1개 밖에 없지만 원래는 2개로 동,서로 구분되어 있었다. 동봉수대는 조선의
제3봉수로(烽燧路)의 경유지로 평안도 강계(江界)에서 시작하여 황해도(黃海道)와 파주, 고양
해포나루, 무악산 동봉수대를 거쳐 남산 훈도방(남산 목멱산 봉수대)에서 그 끝을 맺는다. 이
노선은 직봉 78곳, 간봉 22처를 경유한다. 그리고 서봉수대는 제4봉수로의 경유지로 황해도에
서 시작하여 경기도 해안을 따라 고양시 고봉, 무악산 서봉수대를 거쳐 남산 명래방으로 연결
되며, 직봉 71처, 간봉 22처를 경유한다.
이들 봉수대는 구한말(舊韓末)에 봉수제가 폐지되면서 귀신도 모르게 녹아 없어졌으며, 그 터
만 아련히 남아 전하던 것을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동쪽 정상에
있던 동봉수대만 대충 복원되었다. 허나 서쪽 정상에 있던 서봉수대터는 군부대가 들어앉은 관
계로 재현되지 못했다.

비록 동봉수대가 복원되긴 하였으나 주위가 문화재와 어울리지 않고 추락사고의 위험이 있다는
문제점이 2008년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하여 그때부터 2011년까지 서울시 문화재위원들이 현
장실사와 고증을 통해 화강석 성곽으로 재현하기로 결정하고 기존의 봉수대를 부시고 2단의 석
축을 다진 다음 그 위에 봉수대를 얹혔다.
허나 이번에는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이 떨어진다고 민원이 들어와 지금의 모습으로 어
색하게 재현되었다. 그러니까 원래의 모습이 아닌 사람들 입맛에 맞게 이리저리 변질된 것이다.
굳이 좋게 포장한다면 융통성 있고 시대에 맞게 재현된 것이 되겠지.
그러다보니 봉수대를 받치고 있는 석축과 불을 피우던 봉수대, 봉수대 주변 테두리의 돌 피부
가 확연히 차이가 나 어색하기 그지 없다. 봉수대 석축을 이루는 돌은 고색의 기운이 약간이나
마 피어있는데 반해 봉수대와 테두리에 쓰인 돌은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맨들맨들한 하얀 피
부이다.


▲  천하를 굽어보며 왕년의 향수를 달래는 봉수대
연기를 모락모락 풍기며 불빛을 날리던 왕년의 시절이 있었건만 이제는
안산 정상을 수식하는 장식용이자 전망대 그 이상도 아니게 되었다.

▲  때깔이 고운 하얀 피부의 봉수대
봉수대 중앙에 있는 네모난 창을 통해 불과 연기를 피웠다. 그 연기는
봉수대 꼭대기를 통해 하늘을 찔렀다.

▲  새롭게 두룬 봉수대 테두리

봉수대를 모자처럼 눌러쓴 안산 동쪽 정상, 그 동쪽은 바위로 이루어진 낭떠러지이고, 북쪽과
남쪽은 경사가 다소 각박하여 봉수대 복원 이후 추락사고의 위험이 늘 제기되었다. 하여 2011
년 이후 봉수대를 새로 갈면서 주변에 하얀 피부의 테두리를 성곽처럼 두른 것이다. 그러다보
니 기존의 봉수대 모습을 좀 잃게 되었다.
아무리 호랑이 담배 빨던 시절에 없어진 것을 복원한 거라고 해도 철저하게 고증하여 재현했으
면 좋겠다. 입맛대로 변형을 가하면 그건 더 이상 문화유산이 아니다.


▲  안산 정상(무악산 동봉수대)에서 바라본 인왕산(仁王山)의 위엄
이렇게 보면 인왕산이 좀 낮아보이겠지만 저곳이 이곳보다 40m 이상 더 높다.
그래도 서울의 우백호(右白虎)가 아니던가~~


안산 정상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제법 일품이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이만저만이 아
닌 서울을 두 발 아래 두며 제대로 굽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뫼에 오르는 이유는 바로 이런
맛이 아닐까? 이때만큼은 천제(天帝)도 황제도, 청와대 주인도 부럽지가 않다.

정상에서 보이는 범위는 바로 밑에 무악재를 비롯하여 인왕산, 독립문, 홍제동, 홍은동, 신촌,
서울 도심부, 북한산(삼각산), 북악산을 비롯해 멀리로는 서울 동부, 불암산, 아차산, 여의도,
서울 서남부, 동작구, 강남구, 관악산과 호암산(虎巖山) 등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와 속세에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눈이 제대로 호강을 누린다. 그래서 이곳에 왜 봉수대를 씌우고 이괄의
난(1623년)과 6.25전쟁, 그리고 지금까지 군사적인 요충지로 절찬리에 쓰이고 있는지 십분 이
해가 간다.

* 무악산 동봉수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1) 홍제동과 홍은동, 불광동, 평창동,
북한산 서남부 지역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2)
홍제동과 홍은동, 녹번동, 연신내를 비롯하여 멀리 고양과 파주 지역의
산줄기까지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3) 서울 도심
도심을 이루는 빌딩숲 너머로 남산과 N서울타워가 시야에 들어온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4)
바로 밑에 서대문독립공원과 독립문 주변을 비롯하여 도심부와 남산,
서울 동부, 강남 지역이 바라보인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5) 안산 남부와 도심부, 신촌 지역
우리가 저 밑의 안산 남쪽 기점(천연뜨란채아파트)에서 길을 시작했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꽤나 올라왔다. (초여름 사진)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6)
안산 남부와 서대문구, 마포구, 용산구, 여의도 63빌딩을 비롯하여
동작구와 관악산, 호암산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온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7)
일몰이 진행되는 가운데 서대문구와 마포구, 강서 지역이 바라보인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8)
인왕산 남쪽과 서대문독립공원, 도심부, 서울 동부 지역을 비롯해
불암산과 아차산 산줄기가 까마득하게 바라보인다.

▲  정상 바로 밑 바위 (정상 동쪽)
정상 동쪽은 암벽으로 이루어진 낭떠러지이다. 북쪽과 남쪽은 경사가 가파르며
그나마 서쪽이 좀 접근이 편하다.


안산 정상에서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굽어보며 열심히 사진에 담으니 시간은 어느덧 6시가 되
었다. 산바람은 더욱 매서워져 바람과 맞닿은 얼굴이 아플 정도이며, 천하를 비추던 햇님은 달
님에게 모든 것을 넘기고 지평선 너머로 꽁무니를 뺀다. 특히 산에서는 평지보다 일찍 해가 떨
어지기 때문에 서둘러야 뒷탈이 없다. 아무리 안산이 작은 산이라고 해도 염연히 뫼는 뫼이기
때문이다.

짙어져가는 땅거미에 안산 정상을 내주고 봉원사 방면으로 내려가는데 금세 어두워졌다. 길이
미로처럼 여러 갈래로 흩어져 조금 정신이 없었으나 길눈과 지리에 밝은 나의 직감을 믿고 내
려가니 어느덧 봉원사 경내에 이른다. 봉원사는 일몰 이후에 모든 건물을 잠궈놓기 때문에 그
규모에 맞지 않게 벌써부터 어둠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다.
봉원사와 절 밑에 펼쳐진 마을(봉원사 승려들의 집이 대부분)을 지나면 7024번 종점과 봉원사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서 서울역으로 가는 7024번 시내버스를 타려고 했으나 대기시간이 길어
서 봉원동로터리, 이대부고까지 더 내려갔다. 거기까지만 가면 도심으로 가는 버스는 물 흐르
듯 넘쳐난다.

이대부고 정류장에 이르러 어디서 저녁을 먹을까 궁리를 하다가 북촌(北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아무리 명소나 맛집을 많이 안다고 해도 정작 필요할 때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것이 내 돌
머리의 단점이다. 하여 생각난 감에 북촌으로 흔쾌히 넘어가기로 했다.

퇴근/하교 손님들로 가축 수송을 이룬 272번 시내버스(면목4동↔남가좌동)를 타고 안국역에서
내려 나의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인 북촌으로 들어섰다. 한정식을 먹자는 의견이 있어서 마땅한
곳을 물색하던 중, 마침 부근에 '다정'이란 한정식집이 시야에 들어온다. 예전에 가봤던 집을
생각했으나 새로운 집을 개척할 겸, 별 미련 없이 그 집의 사립문을 열었다.


▲  김치 등의 밑반찬과 보쌈, 잡채, 굴

▲  고기 8조각 보쌈의 위엄

▲  달랑 3종류 6조각 전의 초라함

▲  제일 마지막에 나온 칼국수의 위엄

다정에서 2만원대의 한정식을 주문하였다. (가격은 변동 가능) 시장한 배를 달래며 맛이 어떨
까 기대를 하고 있으니 얼마 안가서 김치 등의 밑반찬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것을 시작으로 굴
과 보쌈, 잡채, 전이 차례대로 나왔는데 (그 외 몇 가지가 더 있었으나 생각이 안 남) 높은 가
격에 비해 성인 남자들이 먹기에는 양이 적었다.
좀 두둑하게 나왔으면 좋으련만 쥐꼬리마냥 찔끔찔끔 나오니 나오기가 무섭게 동이 난다. 다행
히 주인 아지매가 인심이 좀 있는지 전과 잡채, 몇몇 반찬을 더 갖다주었으나 그것으로는 택도
없었다.

그렇게 메인 메뉴를 처리하고 나니 제일 끝에 칼국수가 나온다. 칼국수 대신 밥을 먹어도 되지
만 칼국시가 양이 많다고 하여 그것을 택했다. 조개와 호박, 면발이 어우러진 칼국수는 국물이
꽤 진국이었다. 국수와 호박도 괜찮았지. 칼국수가 나오기 전까지는 배가 덜 찼지만 국수로 인
해 배는 완전히 만땅이 되었다. 이건 완전 한정식보다 칼국수가 더 생각이 날 정도로 말이다.
이렇게 비싼 한정식을 끝으로 11월 안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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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1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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