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산동반도 청도 (절강로천주교당, 잔교, 소어산공원, 칭따오맥주박물관)


' 산동반도 청도(칭따오) 여름 나들이 '

소어산공원 남조각에서 바라본 청도(칭따오) 시내
▲  소어산공원 남조각에서 바라본 청도(칭따오) 시내

절강로천주교당 잔교공원에서 바라본 잔교

▲  절강로천주교당

▲  청도 잔교

 


여름 제국의 위엄이 막바지에 이르던 8월의 끝 무렵, 서해바다 너머에 자리한 산동반도
<山東半島, 산동성(山東省)>를 찾았다.

중원대륙의 일원인 산동반도는 고조선(古朝鮮)과 백제(百濟),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李
正己)의 제(濟), 그리고 신라와 발해의 후손 및 여진족이 세운 금(金)이 다스렸던 우리
의 옛 영역으로 우리 귀에도 꽤 익은 동이족 출신에 공자와 맹자, 강태공(姜太公)이 활
동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또한 신라가 산동반도와 중원대륙에 많은 해안 지역을 장악하
여 큰 세력을 일구었다. <그 흔적이 신라방(新羅坊)> 그만큼 산동반도는 우리와 인연이
각별한 곳이다.
하지만 세상이 여러 번 엎어지면서 지금은 중국이라 불리는 중공(中共, 중화인민공화국
)이란 이상한 공산국가가 거저 차지하여 꿀을 빨고 있는데, 비록 남의 땅으로 전락하긴
했으나 언젠가는 반드시 되찾아 영유해야 될 땅이다.

이번 산동반도 나들이는 3박4일 일정으로 내 생애 첫 중원대륙 나들이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아침 일찍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로 이동, 일행들과 중공
국적의 산동항공 비행기를 타고 1시간 반 정도를 비행해 산동성의 중심 도시인 제남(濟
南, 지난)에 도착했다.
제남 시내에서 표돌천과 대명호 등을 둘러보고 제녕(濟寧, 지닝)으로 이동하여 곡부(曲
阜, 취푸)의 공자(孔子) 유적(공묘, 공부, 공림), 추성(鄒城, 쩌우청)의 맹자(孟子) 유
적(맹묘, 맹부, 맹림)으로 둘째 날을 배불리 채우고 태안(泰安, 타이안)으로 넘어갔다.

태안에서는 중원대륙 오악(五嶽)의 중심 산인 태산(泰山, 타이산)과 대묘(岱廟, 다미먀
오)로 셋째 날 여로를 채우고 청도(靑島, 칭따오)로 이동했는데, 태산에서 청도 중심부
까지는 400km가 넘는 거리라 바로 넘어가지 않고 그 중간인 유방(潍坊, 웨이팡)시내 호
텔에서 1박을 했다. (제남과 곡부, 추성, 태산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겠음)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호텔 조식을 섭취하고 2시간을 더 달려 청도 시내의 중심부인 시
남구(市南區, 스난구)에 이르렀다. 바로 이곳이 이번 산동반도 나들이의 마지막 메뉴로
청도 시내에 대표적인 명소들은 상당수 시남구 지역에 몰려 있다.


♠  독일이 산동반도 통치 시기에 세운 20세기 초기 성당
절강로천주교당(浙江路天主教堂)

▲  절강로천주교당 입구 주변
성당으로 인도하는 길 좌우로 식당과 숙박업소, 기념품점이 즐비하다.


산동반도 남쪽에 자리한 청도(칭따오)는 중공에서 4번째로 큰 항구 도시이다. 산동성의 대표
적인 항구 산업도시로 산동성 지방정부와 동등한 경제권을 지니고 있는데, 7개의 구와 5개의
시(市), 900만 정도의 인구를 지니고 있다.
역사가 나름 오래된 해안 도시로 옛 조선(고조선)과 백제, 신라, 금이 이곳을 다스렸으며, 백
제 때는 성양(城陽)이라 불렸는데, 백제 제왕이 성양태수(太守)를 임명해 파견했다는 기록이
여실히 전하고 있다. <청도시에 '성양구'가 있음> 금이 사라진 이후 작은 어촌으로 머물러 있
다가 1891년 여진족(만주족)의 청나라가 군사시설을 닦으면서 다시금 존재감을 드러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운이 좋게 승리한 왜(倭)는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으로 요동반도를 거
저 먹으려고 했으나 러시아와 독일, 영국이 태클을 건 이른바 삼국간섭(三國干涉, 1895년)으
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독일은 청나라를 도와준 대가로 1897년 청도 지역을 조차지(租
借地)로 얻게 된다.
독일은 청도를 극동 근거지로 삼이 크게 키웠고, 이곳을 발판으로 산동반도 일대를 장악했다.
청도 중심지에는 19세기 말~20세기 초반 서양식 건물이 많이 전하고 있어 일명 '중공 속의 유
럽'으로 통하는데, 그들 대부분은 독일이 이 지역을 잠깐 차지하면서 남긴 것들이다.


▲  하늘을 찌르는 절강로천주교당의 위엄

청도 중심부인 시남구에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절강로(저장루)천주교당이다. 그는 절강로와
비성로가 만나는 곳 언덕에 자리한 아주 큰 성당으로 독일이 1932년에 짓기 시작해 1934년에
완성을 보았다.
그 시절 독일의 큰 자부심과 저력이 고스란히 깃든 곳으로 주황색 지붕을 지닌 쌍둥이 첨탑(
종탑)을 하늘 높이 내밀고 있는데, 강철과 벽돌의 혼합 골조로 외장은 황색 화강암으로 지었
다. 성당 면적은 2,470㎡, 본당 길이 80m, 본당 내부 천장 18m, 종탑까지 높이 56m, 탑 끝에
매달린 십자가는 4.5m로 총 높이는 60m에 이른다.
본당의 수용 인원은 1,000명으로 뒤쪽에 큰 제단이 2개 있고, 좌우 아래쪽에 대칭형으로 작은
제단 2개가 있으며, 위쪽 돔형 천장에는 아름다운 성화(聖畵)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종탑 종
루 안에는 4개의 큰 종이 있다.

중공의 천박한 개짓거리인 문화대혁명('문화대
학살'이라 읽는다) 시절에 상당 부분이 파괴되
는 고통을 겪었으며, 1980년 청도시에서 비용
을 지원하여 1981년에 복원되었다.
이때 문화대혁명(학살) 시절에 파괴된 십자가
를 찾아서 언덕에 묻었으며, 1982년 4월 부활
절에 속세에 정식 개방되어 자유의 공간이 되
었다.

▲  밑에서 바라본 절강로천주교당

 

주황색 지붕과 첨탑, 하얀색과 누런색 피부가 조화를 이루는 예술적인 성당으로 주변에 독일
이 심어놓은 서양식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하여 잠시나
마 유럽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성당 둘레로는 조약돌길이 닦여져 있으며, 청
도에 발을 들였다면 꼭 둘러봐야 되는 청도의
대표급 명소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잦다. 특히
신혼부부와 예비부부들이 결혼 사진을 찍는 명
소로 쓸데없이 유명한데, 우리가 갔을 때도 결
혼 사진을 찍는 중공 애들로 완전 난장판을 이
루었다.
자유의 공간인 바깥과 달리 펜스가 둘러진 성
당 안쪽과 내부는 유료의 공간이라 입장료를
내야 들어갈 수 있다. 입장료는 그리 각박한
편은 아니지만 딱히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
어서 이렇게 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성당 개방시간 8~17시, 일요일 9~17시)

◀  정면에서 바라본 절강로천주교당
성당이 얼마나 큰지 그 앞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개미 떼로 만들어버린다.


▲  절강로천주교당 옆에 자리한 20세기 초기 독일 건물
천주교당 주변에는 독일이 심어놓은 건물이 즐비해 작은 유럽을 방불케 한다.


♠  청도의 오랜 상징물이자 19세기 근대 유적
잔교(棧橋, 짠치아오)

▲  바다를 향해 길게 팔을 뻗은 잔교

절강로천주교당을 둘러보고 동남쪽으로 이어지는 중산로로 들어섰다. 이곳은 먹자골목이 크게
형성되어 있어 늘 북새통을 이루는데, 그런 인파를 비집고 10분 정도 가면 시원스런 서해바다
와 함께 청도의 오랜 상징물이자 필수 관광지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잔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시남구 앞바다인 회천만(匯泉灣)에 자리한 잔교는 1891년 청도에 해군기지를 설치하면서 지어
졌다. 육지 쪽은 둑, 회란각 쪽은 다리 형태로 지어진 둑과 다리가 혼합된 형태로 1931년 해
군 전함을 정박시키고자 크게 증축되었는데, 잔교의 길이는 440m, 폭 10m로 다리 양쪽에는 난
간을 두르고 연꽃무늬 램프를 두었으며, 근처 부두에 원형 방파제가 있어 이 일대 파도를 막
아주는 역할을 했다.
청도시에서 1984년과 1998년에 전면 보수를 벌였으며, 이때 화강암을 사용해 견고하게 다지면
서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이때 둑과 다리의 폭을 넓히고 램프 12개를 설치했으며, 그
로 인해 원형을 크게 잃었다.

잔교 끝에는 황금색 유리기와를 눌러쓴 2층짜리 회란각(回瀾閣. 후이란거)이 있어 잔교의 상
큼한 장식물이 되어주고 있는데, 칭따오맥주를 보면 2층짜리 기와집이 그려져 있다. 그 기와
집이 바로 잔교 회란각이다.


▲  잔교의 어렸을 적 사진 (20세기 초/중기)

▲  잔교 해변에서 바라본 잔교와 회란각

▲  잔교 동쪽 해변(잔교공원)
잔교 주변에는 모래사장을 지닌 작은 해변이 펼쳐져 있다. 잔교를 포함한
해변 일대는 잔교공원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잔교 관광객과 해변
피서객들이 뒤엉켜 시장통을 이룬다.

▲  잔교 서쪽 해변(잔교공원)
해변 백사장은 피서삼매에 빠진 중공 애들로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오늘도 크게 고통받는 우리의 서해바다(황해바다).

▲  회란각 서쪽 둑에서 바라본 잔교

▲  회란각 동쪽 둑에서 바라본 잔교

잔교를 건너는 인파들로 잔교를 이루는 다리와 둑이 거의 무너질 지경이다. 사람이 그냥 많은
것이 아닌 너무 미치도록 많다.


▲  잔교에서 바라본 잔교공원 동쪽 해변

▲  잔교의 끝을 잡고 있는 회란각

잔교는 무료의 공간이나 정작 회란각 내부는 별도의 입장료를 뜯는다. 앞서 절강로천주교당도
그렇고 무료로 해방해도 충분한 곳을 금줄을 치고 돈을 받아먹으니 역시나 돈에 환장한 청도
시와 사이비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중공 정부답다. (회란각 내부는 딱히 볼거리도 없으며, 내
부는 굳이 들어가지 않았음)


▲  회란각 서쪽 둑

회란각 서쪽과 동쪽 둑에는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이들은 배를 정박하던 곳이나 이제
는 바다를 구경하거나 해조음을 듣는 곳으로 조용히 살아간다. 수심이 깊은 곳이나 내가 갔을
때는 수영복 차림에 지역 작자 하나가 홀로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고 있었다. 수영을 하
려면 잔교공원 백사장에서 하면 될 것을 굳이 이런 곳에서 요란법석을 떨어야 했는지 정말 의
문이다. 심지어 회란각 동쪽 둑에서는 살짝 소변을 보는 작자들도 몇몇 눈에 띄었다. 역시나
중공 애들의 클래스는 어디 가지 않는다. (잔교 관리인도 제재를 하지 않았음)


▲  회란각 동쪽 둑

▲  회란각에서 바라본 서쪽 바다 (회천만) ①
회천만 해변에는 가지각색의 고층빌딩이 즐비하여 산동반도 제일의
항구, 산업, 해양관광도시로서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준다.

▲  회란각에서 바라본 서쪽 바다 (회천만) ②

▲  잔교 서남쪽 바다 (회천만)
바다 멀리 보이는 곳은 청도 지역의 서남쪽을 이루고 있는
황도구(黃島區, 황다오구) 지역이다.

▲  평화로운 모습의 잔교 동쪽 바다

▲  잔교공원 북쪽에서 만난 서양식 근대 건축물


♠  청도 중심부의 지붕이자 일품 조망 명소
소어산공원(小魚山公園, 샤오위산궁위엔)

▲  소어산공원 정문(북문)

사람들로 오지게 복잡한 잔교를 벗어나 전용버스를 타고 부근에 자리한 소어산공원으로 이동
했다.
소어산공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소어산은 해발 60m의 낮은 뫼로 청도 시남구의 대표 지붕이다.
청도 도심의 유명 명소로 늙은 명소나 특별한 볼거리가 딱히 있는 것은 아니나 청도 도심(시
남구 지역)과 앞바다(회천만)가 시원스럽게 바라보이는 일품 조망을 지니고 있다. 즉 청도 도
심과 앞바다 조망을 위해 준비된 곳이다.

남쪽으로 시남구 앞바다인 회천만(匯泉灣), 북쪽으로 팔관산(八關山)과 이어져 있으며, 예전
에는 아문산(衙門山)이라 불렸으나 1922년 산 주위로 '어산로(魚山路)'란 길이 닦이면서 작은
물고기를 뜻하는 소어산으로 이름이 갈렸다.
1984년 청도시에서 이곳에 공원을 씌워 소어산공원이라 했으며, 공원 정상에는 8각3층정자인
18m 높이의 남조각을 비롯해 벽파정, 옹취정 등의 정자가 닦여져 조촐하게 쉼터 역할을 한다.
조그만 뒷동산공원으로 조망 외에는 볼거리가 빈약하나 그럼에도 입장료를 뜯고 있으며, 관람
시간은 8시부터 17시까지이다. (관람시간은 변동될 수 있음)


▲  녹음이 깃든 소어산공원 산책로 (정문에서 남조각 방향)

▲  소어산공원에서 바라본 시남구 지역 (서쪽 방향)

중공 애들은 청도를 두고 '홍와녹수남천벽해(紅瓦綠樹藍天碧海)' 즉 붉은 지붕과 녹색 숲, 푸
른 하늘, 파란 바다의 도시라고 한다. 소어산공원에 올라서 청도 시내를 바라보면 그 말이 그
리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공원 주변으로 붉은 지붕을 지닌 집들과 푸른 숲이 꽤 포진해 있는데, 붉은 지붕의 건물 중에
는 20세기 초/중기 것도 많지만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 지어진 것도 제법 된다. 이는 이곳만
의 독특한 풍경을 최대한 살리려는 청도시의 정책 때문이다.

▲  푸른 기와지붕을 눌러쓰며 천하를
굽어보는 벽파정(碧波亭)

▲  녹색 지붕을 지닌 옹취정(擁翠亭)과
'ㄷ'구조의 회랑

      ◀  하늘 높이 솟은 남조각(覽潮閣)
소어산 정상에 자리한 남조각은 3층8각의 기와
건물로 높이는 18m이다. 소어산공원의 상징적
인 존재로 3층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저곳에
서 바라보는 조망이 아주 일품이니 꼭 올라가
보자.


▲  남조각에서 바라본 회천만과 청도제1해수욕장
같은 서해바다임에도 우리 본토는 갯벌과 조석 간만의 차이가 커서 종잡을 수가
없지만 산동반도 해변은 우리의 동해/남해바다 같은 모습이다.

▲  확대해서 바라본 청도제1해수욕장 주변
부산 해운대나 광안리 해변의 축소판 같다.

▲  남조각 조망 중 가장 백미로 통하는 서쪽 방향 (잔교 방향)
붉은 지붕 집들로 가득한 언덕 너머로 회천만과 잔교, 시남구의
키다리 빌딩들이 앞다투어 두 망막에 들어온다.

▲  빨간 지붕의 물결, 남조각에서 바라본 북쪽 방향 (팔관산 방향)

▲  남조각에서 바라본 동쪽 방향 (바로 밑에 보이는 정자는 옹취정)

▲  남조각에서 바라본 서남쪽 방향
회천만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곳은 황도구(황다오구) 지역이다.

◀  옹취정 벽에 새겨진 물고기 형상
소어산이란 작은 물고기를 뜻한다. 하여
산 이름에 걸맞게 물고기 2마리를
귀엽게 포장하여 새겼다.

▲  남조각에 걸린 그림 같은 사진
남조각에서 바라본 잔교와 회천만 주변
풍경이다.

▲  소어산공원을 마무리 짓다
(소어산공원 정문 안쪽)


♠  청따오맥주의 생산 현장이자 천하 제일의 맥주박물관
칭따오맥주박물관<비주박물관(啤酒博物館)>

▲  칭따오맥주박물관으로 살아가고 있는 옛 공장 건물

소어산공원을 둘러보고 시남구 북부에 자리한 칭따오맥주박물관으로 이동했다. 원래는 팔대관
(八大關, 빠따관)을 가려고 했으나 기왕 칭따오맥주의 고장인 청도에 왔으니 칭따오맥주박물
관을 보자는 의견이 커서 그곳으로 변경했다.

천하 맥주의 하나로 명성이 높은 칭따오맥주는 맥주 전문가인 독일 애들이 만든 것으로 1903
년 청도에 붉은 피부의 맥주공장을 세워 독일식의 맥주를 내놓은 것이 그 시작이다. 독일은
그들의 맥주 제조기술을 이곳에 아낌없이 풀어놓았는데, 맥주 제조에 필요한 물은 청도 시내
동쪽에 있는 노산(崂山, 라오산)의 지하 100m에서 소환했다.
독일이 물러나면서 맥주공장은 중공이 거저 꿀꺽했으며 그들의 맥주 제조기술까지 꿀꺽해 단
단히 재미를 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중공은 땅부터 해서 거의 모든 것을 거저 꿀꺽했다. 그
러면서도 하는 짓거리는 완전 소인배보다 더하니 그 너른 땅덩어리가 아깝다.

2001년에 기존의 맥주공장을 손질해 칭따오맥주박물관을 열었는데, 청도의 대표 명소이자 천
하 맥주박물관의 대표 성지(聖地)로 단단히 자리를 잡았으며, 칭따오맥주의 100년 역사와 문
화, 생산공예, 다기능구역 등 3개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미니어처 등으로 맥주 제조
과정과 여러 제조 장비들, 세계 여러 나라의 맥주를 다루고 있다.

맥주박물관은 유료 공간으로 비싼 입장료를 뜯고 있으며, 관람객들에게는 칭따오맥주와 안주
를 무료로 제공하나 양은 매우 적다. 그리고 맥주를 빚으면서 만든 찌꺼기 같은 것도 주는데
맛이 좋다.
매년 8월 중순에는 2주 정도 칭따오 맥주축제가 열리는데, 이때 세계 20여 개 맥주회사가 참
여하며, 다양한 공연과 불꽃놀이, 맥주마시기 대회 등이 열린다.

그렇게 명성이 자자한 맥주이건만 2023년 가을, 공장 일꾼이 맥주 제조 현장에 수시로 소변을
갈긴 사실이 드러나 온 천하에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로 인해 칭따오맥주는 소비량이
폭풍 감소했고, 이미지도 완전 개판에 똥판 수준이 되었다.
나는 사람들과 술을 마실 때 칭따오맥주도 가끔 찾는 편이었는데, 그 사건으로 칭따오맥주를
쓰레기 맥주로 간주해 내 데이터에서 완전히 지웠다. 아무리 맥주가 고프더라도 속세에 크게
실망감을 준 그런 맥주를 절대로 가깝게 대하면 안된다.

▲  칭따오맥주 공장 건물

▲  유럽식으로 산뜻하게 지어진
칭따오맥주 공장 본관

 ▲  맥주박물관 앞에 있는 재미난 조형물

▲  칭따오맥주박물관 현관에 걸린
청도비주(청도맥주) 간판


▲  1903을 강조한 옛 공장 건물 (1903은 칭따오맥주의 탄생 연도)

맥주박물관으로 살아가는 옛 공장 건물은 붉은 피부의 벽돌집으로 푸른 담쟁이덩굴을 걸치고
있어 고색의 내음을 크게 풍긴다. 박물관이긴 하나 맥주공장의 역할도 여전히 수행하고 있다.


▲  1930년대 맥주 제조 과정 (맥주박물관 내부)

▲  칭따오맥주병 제조 과정

▲  맥주박물관 전시실 내부


▲  지금도 한참 움직이고 있는 맥주박물관 내부 맥주병 가동 공간
여기서 생산된 맥주병은 소변 사건으로 얼룩진 칭따오맥주를 머금고
중원대륙은 물론 다른 나라로 팔려나간다.

▲  무수히 생산되는 칭따오맥주의 위엄 ①

▲  무수히 생산되는 칭따오맥주의 위엄 ②

▲  칭따오맥주박물관 쉼터

맥주박물관 관람의 마지막 공간은 술집 스타일의 쉼터이다. 이곳에 이르면 칭따오맥주와 안주
를 벼룩의 간 수준으로 제공하는데, 더 먹고 싶다면 돈을 건네고 사먹어야 된다. (칭따오맥주
병과 캔맥주를 판매하고 있음)
박물관 내부는 사람이 오지게 많고, 공간이 다소 어두웠으며, 관람시간을 너무 촉박하게 줘서
사진에 별로 담지 못했다. 그 점이 실로 안타까웠지만 나에게는 일정을 조정할 칼자루가 없었
다.

쉼터에서 맥주와 안주를 간단히 들고 콩 볶듯이 밖으로 나와 1시간 남짓 머문 칭따오맥주박물
관과 작별을 고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자 전용버스를 타고 시남구 동부에 있는 경복궁(景福宮
, 징후공)이란 한식당으로 이동했는데, 제남에 도착한 첫날부터 오늘까지 4일 동안 호텔뷔페
를 포함해 중원대륙 음식을 섭취했다. 음식의 절반 이상은 입맛에 맞아서 둘째 날까지는 열심
히 잘 먹었으나 셋째 날부터는 느끼하고 물려서 정말 먹기가 싫었다. 솔직히 냄새도 맡기 싫
을 정도였지. 하여 셋째 날 저녁과 넷째 날 호텔 조식은 거의 대충 먹었다.
그런 상태에서 경복궁에서 먹은 한식은 그야말로 빛과 소금이었다. 여기서는 김치찌개와 파전
을 먹었는데, 반찬도 우리가 흔히 먹는 것들이 나왔다. 중원대륙 음식에 제대로 지쳐있던 차
에 얼마나 입맛에 착착 맞았는지 밥을 무려 2그릇이나 비웠고, 반찬도 싹싹 긁어먹었다. 여기
서 먹은 한식으로 몸이 완전히 해독이 된 기분이다.


▲  한식당 경복궁에서 섭취한 칭따오맥주

즐겁게 점심을 먹고 시남구 시내를 가로질러 청도공항으로 이동했다. (중간에 공항 근처 상가
에 잠시 들려 쇼핑을 했음) 이제 청도 시내를 비롯한 3박4일에 걸친 산동반도 나들이는 그 종
점에 이른 것이다.
청도공항에 이르러 4일 동안 길잡이를 해준 조선족 가이드와 작별을 고하고 각자의 짐을 챙겨
공항청사로 들어가 출국수속을 거치고 우리 본토로 옮겨줄 비행기를 기다린다. 3박4일이 정말
찰라처럼 흘렀지만 이제는 산동반도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보다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 뿐이다. 다음날 바로 일상으로 돌아가야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18시대에 인천공항으로 가는 산동항공 비행기를 예약했는데, 인천공항을 비롯한 수도
권에 태풍으로 인해 큰 비가 내려 비행기 운행에 비상이 생겼다. 내가 없는 사이에 남쪽에서
태풍이 올라와 비행기 길에 훼방을 놓았던 것이다. 하여 17시 이후부터 비행기는 제시간에 뜨
지 못하고 계속 지연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1~2시간이면 되겠지 싶었다. 허나 그 시간대를 넘
어 21시가 넘었고, 계속 delay된다는 안내방송만 연거푸 나온다. (청도공항 안내방송은 우리
본토 방향 비행기에 한해 중공말, 영어, 우리말 순으로 해주었음)
그런 상황에 산동항공 잡것들은 기다림에 지친 승객들에게 저녁밥도 제공하지 않는 등, 서비
스 개판으로 일관하자 승객들이 크게 항의하니 그제서야 저녁거리를 제공한다. 저녁은 느끼한
중원대륙 음식인데 먹기가 싫었다. 다행히 일행들이 컵라면을 구해와 그 컵라면에 밥을 말아
먹으면서 저녁을 때웠고, 나머지는 쿨하게 버렸다.

그렇게 공항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죽이며 제자리로 돌아갈 시간만 애타게 기다리다가 자정이
넘어서 새벽 1시에 드디어 비행기가 준비되어 승객들을 태웠다. 무려 7시간이나 지연을 먹은
것이다.
승객을 태운 산동항공 비행기는 청도공항을 이륙, 서해바다를 가로질러 1시간 정도를 비행해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활주로에 바퀴를 내렸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으나 시간은 새벽 2
시이다.
비행기에서 내려 서울로 넘어가는 심야공항버스 시간을 확인하니 시간이 거의 임박했다. 하여
그것을 타고자 일행들과 서둘러 작별하고 입국수속을 서둘러 마친 다음, 인천국제공항 제1터
미널로 나와 서울로 가는 서울공항버스 N6001번(인천국제공항↔서울역)을 타고 서해바다와 한
강을 건너 4일만에 서울 도심으로 진입, 서울역에 두 발을 내렸다. 앞서 비행기에서 밤참거리
로 기내식을 주었는데, 중원대륙 음식은 손도 대지 않고 가져왔다가 서울역 정류장에서 쓰레
기통에 버렸다.
서울역에서 서울N16번(도봉산↔온수동) 시내버스를 타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오니 시간은 새벽
6시, 원래대로라면 자정 이전에 도착하여 꿀잠을 자고 있어야 했는데, 오지게도 늦었다.
이렇게 하여 산동반도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다음에 그곳에 갈 때는 남의 땅
산동반도가 아닌 우리 땅 산동반도가 되었으면 좋겠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4년 2월 1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4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