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말산 산길 (이말산 동남쪽 자락) 2. 나란히 목을 잃은 동자석들 3. 이말산 능선길 4. 흙과 나무에 깔린 무덤 상석 5. 머리가 덥수룩한 옛 무덤들 6. 이말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향로봉과 족두리봉 7. 이말산 동쪽 자락 무덤군 8. 장대한 세월에 꼬꾸라진 묘비 9. 칠원윤씨 윤용 묘역 10. 칠원윤씨 윤응린, 하동정씨 부부묘 11. 칠원윤씨 윤용, 윤응린 묘역 전경 12. 상선 노윤천 묘역 13. 노윤천 묘역 문인석 14. 정체성을 잃은 무덤 상석 15. 이말산 서쪽 능선길 16. 방공호 시설이 있는 이말산 정상 17. 이말산 정상 표목 18. 개나리들이 격하게 반겨주는 약수사 방면 산길 19. 이말사 약수사
1. 이말산 조선시대 무덤군 2. 금성당 3. 이말산 숲길 4. 서쪽에서 바라본 금성당(샤머니즘박물관) 5. 금성당 대문과 대문채 6. 본채와 안채 경계에 놓인 오리 솟대 7. 금성당 본채와 행랑채 8. 금성당 행랑채와 본채 9. 안채 서쪽에 있는 샤머니즘박물관의 무속 유물들 10. 'ㄱ'자 모습의 금성당 안채 11. 금성당 아래채(왼쪽)와 대문채 12. 금성당 안채 마루 13. 안채 뒤쪽 장독대와 부뚜막, 그리고 낡은 가마솥 14. 안채 뒤쪽 15. 본채 뒤쪽에 가득 널린 장독대들 16. 금성당 동쪽 돌담 17. 금성당의 뒷모습 18. 이말산 최효원묘역 19. 최효원과 남양홍씨 합장묘 (오른쪽이 홍계웅 묘, 왼쪽이 홍계남묘) 20. 홍계웅과 김화김씨 묘 21. 최수강과 김해김씨 묘 22. 최수강 묘비 ..
1. 시흥동 호암산폭포 이번 호암산 나들이는 벽산5단지 정류장(152, 6515번 시내버스 경유)에서 시작했다. 호암산을 200번 넘게 찾았지만 벽산5단지로 주로 내려오기만 했지 여기서 올라간 것은 거의 손에 꼽는다. (보통은 호 압사입구나 삼성산성지에서 길을 시작했음) 벽산5단지 정류장에서 조금 오르면 서울둘레길5코스(사당역~석수역)와 함께 호암산폭포가 마중을 나 온다. 호암산의 새로운 명물인 호암산폭포는 2011년에 산사태로 좋지 않게 변한 가파른 곳을 손질하 여 만든 인공폭포로 높이가 75m에 이르러 서울에서 가장 큰 폭포로 추앙을 받는다. 폭포수는 산사태 로 노출된 자연암반에서 나오는 물로 때우고 있는데, 아무래도 인공폭포라 전기세의 눈치가 커서 물은 일정 시간에만 흘려보낸다. (그 외 시간에는 ..
1. 의두암 바위글씨 의두암은 3층 구조를 지닌 높이 4m에 큰 바위로 그 피부에 예서체 스타일의 '의두암' 바위글씨가 진 하게 깃들여져 있다. 그 글씨를 남긴 사람은 운양 김윤식(1835~1922)으로 1887년 명성황후의 친러 정책에 반대하며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을 모의하다가 면천 고을로 유배되어 5년 6개월을 머물렀다. 처음에는 순성면 양유리 앵두샘마을에서 유배살이를 하다가 영탑사 아래 절골로 자리를 옮겼으며, 영탑사 노전에서도 유배 생활을 했다. 그는 거의 매일 이곳에 올라 임금님이 있는 북쪽 서울을 바라 보며 죄를 짓고 유배온 자신을 한탄했는데, 그렇다고 한탄만 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지역 선비와 유 지들과 여기서 시문도 짓고, 활도 쏘고, 곡차 1잔의 여유도 누렸다. 바위 꼭대기에 올라 앉..
1. 영탑사 유리보전 유리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고려 때 조성된 약사여래상의 공간이다. 약사여래 상은 바위에 조각된 마애불로 그 바위에 집을 씌웠는데, 유리보전은 약사여래의 거처인 약사전의 별 칭이다. 2. 영탑사 약사여래상 (마애약사여래상) 유리보전에 소중히 들어있는 약사여래상은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다. 높이 3.5m 정도로 고려 후기 에 무학대사가 영탑사를 둘러보다가 경내 주변에 기이하게 생긴 바위가 빛을 내는 것을 보고 그 바위 에 불상을 새겨 나라의 평안을 빌었다고 전한다. 불상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을 표현했으며, 얼굴은 윗부분이 넓고, 밑부분이 갸름하여 신체 에 비해 큰 편이다. 눈과 코, 입은 길고 큼직하며 다소 서투르게 표현되어 전반적으로 둔한 모습인데, ..
1. 영탑사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 영탑사 종무소 가운데 칸에는 이곳의 1급 보물인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이 소중히 봉안되어 있다. 조그만 크기의 금동불상으로 연꽃무늬가 새겨진 8각형 대좌에 비로자나불이 앉아있고, 그 좌우로 협 시보살이 자리하여 비로자나3존상을 이루고 있다. 중심 불상(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은 머리에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이 붙여져 있으며, 그 위로 육게(무견정상)가 큼직하게 솟아있다. 거의 네모난 얼굴은 원만한 느낌을 주며 선으로 표현된 옷주름은 도식화된 모습이다. 윗도리는 길고 두툼하지만 아랫도리는 너무 작게 표현되어 신체 비례가 다소 떨어지는데, 무릎 높이도 윗도리에 비 해 낮으며, 가슴 역시 평면적이고 아랫도리는 둔중하게 처리했다. 이런 수법은 고려 중기 이후에 많이 나타난다. 손은..
1. 영탑사로 인도하는 성하로 당진 면천면의 중심지인 성상리에서 성하로를 따라 30분 정도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영탑사가 있다. 영탑사 아래까지 당진시내버스 410, 411번이 운행하고는 있으나 운행횟수가 그야말로 가뭄에 콩나는 수준이라(1일 2~3회 운행) 면천면 중심지에서 가볍게 30분 정도 걷는 것이 낫다. 오르막이 꾸준히 이 어지나 완만한 수준이며, 1.5~2차선 크기의 농로라 도보길이 따로 없어 차량을 조심하면서 움직여야 된다. (오가는 차량도 별로 없음) 2. 애타게 봄의 손길을 기다리는 성하로 가로수들 3. 성하리 느티나무 (당진시 보호수) 영탑사 길목에 자리한 시동저수지 동쪽에 당진시 보호수로 지정된 늙은 느티나무가 있다. 추정 나이 는 440년(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
1. 대마도 와타즈미신사 도리이들 2.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3. 만관교 동쪽 미우라만과 여호도(메고시마) 4. 대마도 만관교(만제키바시) 5. 만관교 서쪽 아소만 6. 만관교 서쪽 만관협곡 7. 만관교 동쪽 미우라만과 메고시마 포구(왼쪽 마을), 구스보(오른쪽 산지) 8. 만관운하 개삭비 9. 만관교 주변(구스보, 메고시마) 지도 10. 에보시다케전망대 11.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과 사가 포구 12.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13. 에보시다케전망대 남쪽 봉우리 14. 주차장에서 바라본 에보시다케 15. 에보시다케 주차장에서 바라본 아소만과 사가 주변 16. 와타즈미신사 남쪽 삼나무숲길 입구 17. 와타즈미신사 남쪽 삼나무숲길 18. 금줄이 쳐진 삼나무숲 도리이 19. ..
1. 면천읍성 서쪽 성곽 (서치성 북쪽) 당진 면천면의 중심지인 성상리 지역에 옛 면천읍성이 남아있다. 지금은 당진시에 딸린 면천면의 중 심지이나 예전에는 면천(면천군)이란 독자적인 고을로 그 고을의 중심지가 바로 성상리이다. 면천읍성은 조선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둘레는 약 1,200m이다. 자연석을 다듬어서 축조했는데, 20 세기 이후 고약한 왜정의 고의적인 읍성 훼손과 저수지 공사, 마을 민가 보수용 등으로 성곽을 마구 잡이로 뜯어 내면서 지금은 겨우 일부만 전하고 있다. 서쪽 성곽과 남쪽 성곽이 그나마 좀 남아있는 데, 서쪽 성곽은 높이가 최대 3.6m로 서쪽 성곽 안쪽 부분은 사다리꼴 모양으로 비탈지게 닦았으며, 바닥 폭이 6.8m, 윗면 너비는 2.4m이다. 성문은 4개가 있던 것으로 여겨지나 ..
1. 염창산(증미산)에서 만난 작은 무덤 염창산 정상부 서쪽에 자리한 작은 무덤으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무덤 뒷쪽(북쪽)으로 한강이 있 고, 앞쪽으로 비록 수목에 가려지긴 했으나 강서구 지역이 펼쳐져 있어 자리 하나는 정말 좋아 보인 다. 무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으나 20세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봉분 외에는 별 다 른 시설은 없지만 봉분 수풀이 그리 수북하지는 않아서 후손들이(또는 강서구청에서 염창공원 관리 차원에서) 계속 벌초를 하는듯 싶다. 2. 염창산 정상부 주변에 박혀있는 삼각점 3. 염창산 북쪽 자락 숲길 염창산은 해발 55.2m의 한강변 언덕이다. 예전 이름은 증산, 증미산으로 지금은 염창산과 증미산 두 이름이 같이 쓰인다. 조선 때 세곡선과 상선 등이 한강을 타고 양화..
1. 염창동 염창산(증미산) 서쪽 산길 염창동 한강변에 조그맣게 솟은 염창산은 해발 55.2m의 낮은 뫼이다. 예전 이름은 증산, 증미산으로 지금은 염창산과 증미산 두 이름이 같이 쓰인다. 조선 때 세곡선 등이 한강을 타고 양화나루와 마포나루, 노량진으로 들어왔는데, 염창산 구간에서 배 가 좌초되거나 파손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때 파손된 배에서 흘러나온 쌀을 줍고자 산 주변에 사 람들이 모여 살았는데, 거기서 쌀을 줍는다는 뜻의 증미산이란 이름이 생겨났고 그것이 나중에 2글자 로 줄어서 증산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증(拯)'은 건지다는 뜻으로 나중에 거듭된다는 뜻의 증(曾) 으로 갈렸다. 그러다가 산 밑에 소금창고(염창)가 생기면서 염창산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귀신바위와 이순 신 장군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