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양주 죽산안씨연창위종가 나리농원 남쪽 숲속에는 '죽산안씨연창위종가'라 불리는 늙은 한옥이 있다. 이곳은 1500년에 안방형 이 세운 것으로 그는 세종의 부마이자 정의공주의 남편인 연창위 안맹담의 손자이다. (안맹담은 정의 공주에게 장가들어 '연창위'의 작위를 받았음) 죽산안씨 집안인 안방형이 여기에 터전을 잡은 인연으로 이곳은 죽산안씨의 집성촌이 되었는데, 그 가 지은 집이 그들 집안의 종가로 자리를 잡아 지금까지 자리를 지킨다. 영조 시절에 현재 모습으로 중건되었다고 하며, 왜정과 6.25 때 일부 파손된 것을 보수했다. 그 과정 에서 다소 변형이 있었다. 가옥은 'ㄷ'자형 안채와 'ㅡ'자형 사랑채가 합쳐진 'ㅁ'자형 구조로 그 가운데에 마당이 있다. 남쪽으로 문을 냈으나 굳게 닫혀져 있으며, 그..
1. 안성 이해룡 고가 서운산 청룡사에서 남쪽으로 300m 정도 떨어진 청룡리 마을에 이해룡 고가란 늙은 집이 있다. 초가 와 기와집이 혼합된 18세기 주택으로 안채 상량문을 통해 1797년에 사랑채와 안채가 건립되었음을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집은 남서향으로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바깥에 'ㅡ'자형의 초가집 행랑채가 있고, 그곳을 들어서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ㅡ'자형 사랑채와 'ㄱ'자형 안채가 연결된 'ㄷ'자형의 기와집 본채 가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 남쪽에는 중문이 있어 최근 손질된 행랑채와 연결되며, 사랑채는 4칸 반 크기로 민도리집인데, 남쪽에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이 있고, 북쪽에는 대청 안채 건너방과 이어져 있다. 안채는 건넌방, 대 청, 안방이 일렬로 배열되..
1. 강릉 최선평가옥 (가옥 대문) 주문진읍 장덕리에 있는 옛날삼교리막국수집 동쪽에 최선평가옥이란 늙은 기와집이 있다. 그 기와집 을 보고자 여기까지 들어온 것은 아니고 막국수 1그릇 먹으려고 옛날삼교리막국수를 찾았다가 우연 히 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 한옥이 세워진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대략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ㅡ' 구조의 안채와 'ㄱ' 구조의 사랑채가 이어져 전체적으로 'ㅁ' 구조를 보이고 있는데, 안채는 용마루 밑 에 방이 2줄로 배치된 겹집이며, 안채 앞면에는 툇마루가 있고, 건너편에 있는 사랑채 툇마루와 'ㄷ' 모양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안채와 사랑채가 연결되는 모서리 부분에는 두 짝 여닫이문을 두어 바깥을 오갈 수 있게 했다. 사랑채 대청마루는 우..
1. 보성향교의 정문인 외삼문 보성읍내에 자리한 보성향교는 1397년에 보성군수 김유양이 세웠다. 향교는 조선 조정에서 서울을 제외한 전국 고을에 세운 국립중등교육기관으로 공자와 맹자 등 두 귀에 익히 익은 동이족 출신 유교 성현과 중원대륙 성현, 신라와 고려, 조선 성현들을 봉안한 대성전과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숙식 공간인 동재, 서재, 대성전의 보조 공간인 동무, 서무 등을 지니고 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1602년에 현재 위치에 다시 지었으며, 왜정 시절인 1921년 보성 유 림들이 항일 의거를 펼쳤던 곳이다. 1921년 8월 왜정이 보성향교 문묘대제에 올릴 제주에 대해서 주 세령 위반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멋대로 봉인하는 무례를 범했는데, 이에 유림들이 크게 반발하여 그 ..
1. 벌교 현부자네집 벌교시외터미널 북쪽에 보성의 대표 명소로 크게 추앙을 받는 태백산맥문학관이 있다. 조정래가 쓴 대하소설 '태백산맥'과 조정래에 대해 다루고 있는 문학관으로 그 동쪽에 태백산맥에 나오는 '현부자 네집'과 '소화의집'이 있는데, 이들은 기존 기와집에 현부자네집, 소화의집이라 이름만 붙인 것이다. 태백산맥문학관은 유료의 공간으로 입장료를 흔쾌히 치루고 내부를 둘러보았는데, 내부 촬영은 통제 되어 있어 사진에 담은 것은 하나도 없다. 또한 태백산맥의 내용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이 없어 본글 에서는 태백산맥문학관과 태백산맥 소설에 대해서는 쿨하게 생략한다. 현부자네집과 뒷쪽에 있는 제각은 본래 박씨 문중의 것으로 지금은 태백산맥 명소로 속세에 개방되 어 있는데, 대문과 안채는 한옥의 기본 틀로..
1. 용흥궁 우물 (내전 옆) 철종의 잠저였던 용흥궁에는 2개의 늙은 우물이 있다. 지금은 죽은 우물로 주둥이가 모두 닫혀져 있으 며, 각각 내전(안채)과 외전(사랑채) 옆에 자리해 있다. 2. 용흥궁 별전터 별전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허전하게 터만 남아있다. 3. 별전터에서 바라본 내전(왼쪽)과 외전(오른쪽) 4. 용흥궁 내전 행랑채 5. 내전 행랑채와 대문(대문간채와 내전을 이어주는 문) 6. 외전(사랑채)으로 인도하는 기와문 (내전 뒷쪽) 7. 용흥궁 뒷쪽 언덕 (용흥궁 후원) 용흥궁 경내 뒷쪽(북쪽)에는 나무가 무성한 언덕이 있다. 용흥궁에 딸린 후원으로 언덕 정상까지 계단 이 놓여져 있으며, 후원에 건물은 없다. 8. 나무가 무성한 용흥궁 후원 정상부 9. 용흥궁 후원에서 바깥을 이..
1. 용흥궁 잠저구기 비각 강화읍내에 자리한 용흥궁은 조선 25대 제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어린 시절에 살던 곳이다. 그 렇다고 현재 기와집에서 그가 살았던 것은 아니며, 그의 집은 원래 조그만 초가였다. 1849년 헌종(재위 1834~1849)이 승하하자 순원왕후와 안동김씨 패거리들은 그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얼떨떨한 왕족을 물색하여 강화도에 살고 있던 이원범을 추대해 왕위에 앉혔다. 이원범은 전계대원군 의 3째 아들이자 사도세자(장헌세자)의 3세손으로 1844년 친형인 회평군 이명의 옥사로 가족들이 강화 도로 유배되어 아주 힘들게 살고 있었다. 1853년 강화유수 정기세가 철종이 살던 곳(잠저)임을 기리고자 그가 살던 초가를 밀고 기와집을 크게 지어 용흥궁이라 했으며, 1903년 청안군..
1. 영양 약산당 신구동3층석탑 옆에는 약산당이란 오래된 기와집이 있다. 이곳은 장례원 판결사를 지낸 조광의(1543 ~1608)가 학문을 닦던 곳으로 현재 집은 그의 후손들이 인조 시절에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팔작지붕 집으로 지산서당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는데, 집 주위로 담장을 빙 둘렀으며, 남쪽에 기와문을 내어 집과 바깥 세상을 이어준다. 내부 구조가 섬세해 조선 중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비록 기와문은 굳게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가기는 어렵지만 사진 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 바깥에서도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2. 담장 밖에서 까치발로 바라본 약산당(지산서당) 3. 약산당의 수수한 뒷모습 4. 신구리에서 선바위관광지로 이어지는 시골길(외씨버선길4코..
1. 낙선재 뒷쪽 꽃계단 낙선재와 석복헌, 수강재 뒷쪽(북쪽)에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4단의 꽃계단(화계)을 닦았다. 꽃계 단에는 키 작은 나무와 다양한 꽃을 심어 화사하게 꾸몄으며, 꽃계단 앞에는 괴석(수석)과 굴뚝, 석지 등의 장식물을 두었다. 꽃계단 윗도리로 담장이 둘러져 있고, 그 너머로 기와집 하나가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데, 그는 6각 형 건물인 상량정이다. (상량정은 통제구역) 2. 낙선재 꽃계단 앞에 자리한 석지(석조) 크고 견고한 돌을 네모나게 다지고 그 안에 수분 공간을 만든 커다란 석조이다. 이런 석조를 돌 연못 을 뜻하는 석지라 표현하기도 한다. 이곳 석지는 채워줄 수원이 따로 없어 부근 샘에서 물을 가져오거나 하늘이 준 비로 채워야 되는데, 내가 갔을 때는 봄비가 한동안 내리지..
1. 봄내음이 가득한 연경당 대문(장락문) 앞 애련정 구역 서쪽 숲에는 연경당이란 너른 기와집이 있다. 사랑채와 안채, 선향재, 행랑채, 농수 정, 반빗간 등을 지니고 있어 궁궐 속의 사대부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1827년(또는 1828 년)에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부왕인 순조와 모후인 순원왕후 김씨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식 과 진작례를 위해 진장각 옛터에 세운 것으로 그 시절 부왕(순조)을 대신해 국정을 살피면서 왕 권 강화를 추구했던 그의 숨은 의지가 담겨져 있다. 조선 궁궐에서 거의 흔치 않은 양반사대부가로 99칸을 넘는 120칸(지금은 109칸 반만 남음) 규 모를 자랑해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큰 집이다. 이렇게 지은 것에 대해서는 효명세자가 사대부가 체험을 하려고 지었다는 설, 순조가 ..
1.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몸채 바깥쪽 (사랑채와 안채 바깥 부분) 2.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왼쪽)과 관훈동 민씨가옥(오른쪽) 윤택영과 민씨가옥의 주인이었던 민영휘는 모두 악질 친일매국노 잡것들이다. (윤택영 재실과 관 훈동 민씨가옥 안내문에서 윤택영과 민영휘가 악질 개친일파라는 내용이 빠져 있음) 3. 옥인동 윤씨가옥 윤택영의 친형이자 악질 친일파로 더러운 이름을 떨쳤던 윤덕영(1873~1940)이 1910년대에 지은 한옥이다. 윤덕영은 옥인동47번지 일대(옥인동의 거의 절반 크기)를 차지하여 20여 채의 집을 짓 고 가족, 첩들과 모여 살았는데, 그 작자가 지은 집중에서 프랑스식으로 지어진 벽수산장이 꽤 유 명했다. 허나 막대한 부채로 벽수산장과 주변 집들을 모두 팔아먹으면서, 하나 둘 ..
1.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사랑채 이 한옥은 순종의 장인이자 순정효황후의 부친인 친일파 윤택영이 지었다. 지은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사위인 황태자가 제위에 오르고 자신의 딸이 황후에 책봉된 1907년경으로 여겨진다. 윤택 영과 순종은 장인, 사위 관계이나 순종보다 2살이 어렸으며, 황후에 오른 딸도 순종과 무려 20살 이나 차이가 났다. 윤택영은 1910년까지는 그런데로 우국충정의 모습을 보였으나 1910년 이후 안면을 싹 바꾸고 친 일파로 악명을 떨쳤다. 낭비벽과 경제관념이 꽝인 작자라 돈을 펑펑 써댔고 사치가 대단하여 주변 으로부터 빌린 돈이 상당했다. 하여 '채무왕' , '차금대왕(借金大王)'이란 별명까지 지녔다. 그의 빚은 고종이 일부 갚아주기도 했으나 그래도 빚은 여전했으며, 순종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