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악산 보석사의 외경 2. 보석사 일주문 3. 보석사 의병승장비 4. 비각 뒷쪽에 자리한 여러 비석들 5. 보석사 전나무숲길 6. 조선 후기에 조성된 보석사 부도군(승탑들) 7. 경내를 가리고 있는 돌담과 범종루(梵鍾樓) 8. 보석사 심검당 9. 말라버린 동그란 석조 10. 보석사 대웅전 11. 대웅전 내부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12. 대웅전 신중탱 13. 보석사 기허당 14. 기허당에 봉안된 영규대사와 조구대사의 진영 15. 보석사 산신각 16. 산신각 산신탱 17. 산신각 풍경물고기 18. 보석사 의선각 19. 의선각 현판 20. 천년 이상 묵은 보석사 은행나무 21. 보석사 은행나무 표석 22. 기린암 바위글씨 23. 보석사 경내를 흐르는 계곡 24. 보석사 전나무숲길 (일주문 방향)
1. 의두암 바위글씨 의두암은 3층 구조를 지닌 높이 4m에 큰 바위로 그 피부에 예서체 스타일의 '의두암' 바위글씨가 진 하게 깃들여져 있다. 그 글씨를 남긴 사람은 운양 김윤식(1835~1922)으로 1887년 명성황후의 친러 정책에 반대하며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을 모의하다가 면천 고을로 유배되어 5년 6개월을 머물렀다. 처음에는 순성면 양유리 앵두샘마을에서 유배살이를 하다가 영탑사 아래 절골로 자리를 옮겼으며, 영탑사 노전에서도 유배 생활을 했다. 그는 거의 매일 이곳에 올라 임금님이 있는 북쪽 서울을 바라 보며 죄를 짓고 유배온 자신을 한탄했는데, 그렇다고 한탄만 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지역 선비와 유 지들과 여기서 시문도 짓고, 활도 쏘고, 곡차 1잔의 여유도 누렸다. 바위 꼭대기에 올라 앉..
1. 영탑사 유리보전 유리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고려 때 조성된 약사여래상의 공간이다. 약사여래 상은 바위에 조각된 마애불로 그 바위에 집을 씌웠는데, 유리보전은 약사여래의 거처인 약사전의 별 칭이다. 2. 영탑사 약사여래상 (마애약사여래상) 유리보전에 소중히 들어있는 약사여래상은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다. 높이 3.5m 정도로 고려 후기 에 무학대사가 영탑사를 둘러보다가 경내 주변에 기이하게 생긴 바위가 빛을 내는 것을 보고 그 바위 에 불상을 새겨 나라의 평안을 빌었다고 전한다. 불상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을 표현했으며, 얼굴은 윗부분이 넓고, 밑부분이 갸름하여 신체 에 비해 큰 편이다. 눈과 코, 입은 길고 큼직하며 다소 서투르게 표현되어 전반적으로 둔한 모습인데, ..
1. 영탑사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 영탑사 종무소 가운데 칸에는 이곳의 1급 보물인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이 소중히 봉안되어 있다. 조그만 크기의 금동불상으로 연꽃무늬가 새겨진 8각형 대좌에 비로자나불이 앉아있고, 그 좌우로 협 시보살이 자리하여 비로자나3존상을 이루고 있다. 중심 불상(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은 머리에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이 붙여져 있으며, 그 위로 육게(무견정상)가 큼직하게 솟아있다. 거의 네모난 얼굴은 원만한 느낌을 주며 선으로 표현된 옷주름은 도식화된 모습이다. 윗도리는 길고 두툼하지만 아랫도리는 너무 작게 표현되어 신체 비례가 다소 떨어지는데, 무릎 높이도 윗도리에 비 해 낮으며, 가슴 역시 평면적이고 아랫도리는 둔중하게 처리했다. 이런 수법은 고려 중기 이후에 많이 나타난다. 손은..
1. 영탑사로 인도하는 성하로 당진 면천면의 중심지인 성상리에서 성하로를 따라 30분 정도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영탑사가 있다. 영탑사 아래까지 당진시내버스 410, 411번이 운행하고는 있으나 운행횟수가 그야말로 가뭄에 콩나는 수준이라(1일 2~3회 운행) 면천면 중심지에서 가볍게 30분 정도 걷는 것이 낫다. 오르막이 꾸준히 이 어지나 완만한 수준이며, 1.5~2차선 크기의 농로라 도보길이 따로 없어 차량을 조심하면서 움직여야 된다. (오가는 차량도 별로 없음) 2. 애타게 봄의 손길을 기다리는 성하로 가로수들 3. 성하리 느티나무 (당진시 보호수) 영탑사 길목에 자리한 시동저수지 동쪽에 당진시 보호수로 지정된 늙은 느티나무가 있다. 추정 나이 는 440년(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
1. 면천읍성 서쪽 성곽 (서치성 북쪽) 당진 면천면의 중심지인 성상리 지역에 옛 면천읍성이 남아있다. 지금은 당진시에 딸린 면천면의 중 심지이나 예전에는 면천(면천군)이란 독자적인 고을로 그 고을의 중심지가 바로 성상리이다. 면천읍성은 조선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둘레는 약 1,200m이다. 자연석을 다듬어서 축조했는데, 20 세기 이후 고약한 왜정의 고의적인 읍성 훼손과 저수지 공사, 마을 민가 보수용 등으로 성곽을 마구 잡이로 뜯어 내면서 지금은 겨우 일부만 전하고 있다. 서쪽 성곽과 남쪽 성곽이 그나마 좀 남아있는 데, 서쪽 성곽은 높이가 최대 3.6m로 서쪽 성곽 안쪽 부분은 사다리꼴 모양으로 비탈지게 닦았으며, 바닥 폭이 6.8m, 윗면 너비는 2.4m이다. 성문은 4개가 있던 것으로 여겨지나 ..
1. 광덕사 석조지장보살입상 파리도 능히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를 지닌 잘생긴 지장보살상으로 근래 조성된 것이 다. 오른손에는 그의 대표 연장인 육환장을, 왼손에는 동그란 보주 같은 것을 들고 있는데, 지장보살 은 명부(저승)에서 가장 높은 인물로 저승에 들어온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책임지고 있다. 2. 광덕사5층석탑 백제 석탑의 백미로 추앙을 받는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을 닮은 탑으로 근래 조성된 것이다. 탑은 보 통 법당 앞에 두기 마련이나 광덕사는 늙은 3층석탑이 이미 법당 앞에 있어 공간이 넓은 이곳에 별도 의 탑을 두었다. 3. 맵시가 고운 광덕사5층석탑의 위엄 4. 광덕사 부도군 5층석탑 우측으로 산길이 있는데, 그 산길을 조금 오르면 부도탑(승탑)의 무리를 만나게 된다. 팔각 원당형..
1. 운초 김부용묘 광덕사 경내에서 광덕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10여 분 오르면 운초 김부용묘가 나온다. 김부용 (1820~1869)은 오강루 문집 등 한시 350여 수를 남긴 여인으로 조선시대 3대 여류시인의 하나로 격 하게 추앙을 받고 있는데, 그는 기생 출신으로 평양감사였던 봉조하 김이양의 소실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초당마마라 불렀는데, 김이양이 사망하자 정절을 지키며 홀로 살다가 49살에 사망했 다. 그의 유언에 따라 김이양묘 부근인 광덕사 윗쪽에 묻혔는데, 이후 후손들의 관리 소홀로 무덤을 그만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다가 1974년 광덕산 숲속에서 겨우 찾았으며, 무덤을 손질하면서 봉분 아랫도리에 호석을 두르 고 묘비를 세웠다. 매년 4월말에는 천안문화원 주최로 천안문인협회와 천안향토사..
1. 광덕사 연꽃석조(샘터) 커다란 연꽃석조에는 광덕산(태화산)이 베푼 수분으로 가득해 자연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준다. (물 섭취 가능)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돌거북이 뱉은 시원한 물을 한가득 담아 입에 들이키니 갈증이 싹 내려앉는다. 2. 명부전 옆구리에 있는 조그만 석상 동자상으로 보이는 작고 귀여운 석상이 대좌 위에 우두커니 서 있다. 석상과 대좌에는 고색의 때가 가득해 최소 10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예전(2008년 이전)에는 못봤던 것들이라 2010년 이후에 주변에서 발견된 것을 갖다놓은 모양이다. 3. 뒷전으로 물러난 늙은 맷돌 광덕사 사람들의 음식 제조를 책임졌던 중요한 맷돌이었으나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나 아주 한가로 운 신세가 되었다. 맷돌 위에는 작은 용머리상이 붙어있는데..
1. 광덕사 대웅전 광덕산 동북쪽 자락에 천안 제일의 고찰로 추앙을 받는 광덕사가 포근히 깃들여져 있다. 이곳은 공 주 마곡사의 말사로 652년에 신라 승려인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그 시절 천안 지역은 천하 제일의 해양대국으로 크게 위엄을 날렸던 백제의 영역이었다. 게다가 자장은 말년을 강원도 에서 보낸 것으로 전해져 그의 창건설은 신빙성이 크게 떨어진다. 다만 1680년에 안명로가 쓴 사적기에는 신라 흥덕왕 시절인 832년에 창건된 것으로 나와있으며 그 시절 진산대사가 석가여래의 치아 1매와 사리 10과, 승가리 1령, 불좌 1병을 봉안하면서 크게 중창 했다고 전해져 신라 흥덕왕 시절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464년 온양온천에 휴양차 찾은 세조가 온양에서 가까운 광덕사에 석가의 치아와 ..
1. 호도전래사적비(오른쪽)와 고려승상 영밀공유청신 공덕비(왼쪽) 광덕사 일주문 옆에는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때깔이 고운 비석 2기가 자리해 광덕사를 찾은 중생 들을 맞이한다. 이 땅에 호도가 처음 들어온 것은 1290년으로 전해진다. 유청신이 몽골(원나라)에 갔다가 충렬왕을 호종하여 귀국하면서 어린 호두나무와 열매를 가져왔는데, 열매는 천안 고향집에 심고, 어린나무는 광덕사에 심었다고 전한다. 그 연유로 광덕사는 호도나무의 첫 고향이 된다. 하여 이를 기리고자 일 주문 옆에 호도전래사적비를 세웠으며, 2010년 이후에 유청신 공덕비를 추가로 세워 호도를 가져온 그의 공적을 기린다. (예전에는 호도전래사적비만 있었음) 유청신은 역모에 가담하여 멀리 귀양을 갔다고 전하며, 비석 피부에는 고려 승상이라 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