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계룡돈대 내부 강화나들길16코스(서해황금들녘길)가 지나는 황청리 해안 언덕에 계룡돈대가 둥지를 들고 있다. 길 이 30m, 너비 20m의 네모난 돈대로 높이는 3~5m 정도인데, 1679년 강화유수 윤이제가 강화도 해 안 방어를 목적으로 함경도(간도, 연해주 포함)와 황해도, 강원도에서 승군 8,000여 명과 어영군 4,300여 명을 동원해 80여일 동안 만든 48개 돈대의 일원이다. (강화도에 전하는 돈대 상당수는 이 때 생겨남) 동벽 석축 하단에 '강희일십팔년사월일 경상도 군위어영'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강화도 54개 돈대 중 유일하게 쌓은 시기를 알려주고 있으며, 왜정 이후 돈대가 손상된 것을 근래 중수했다. 돈대 내부 는 관람이 가능하며, 서해바다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 일몰 구경에 ..

1. 강화 계룡돈대 강화나들길16코스(서해황금들녘길)가 지나는 황청리 해안 언덕에 계룡돈대가 포근히 둥지를 들고 있다. 길이 30m, 너비 20m의 네모난 돈대로 높이는 3~5m 정도인데, 1679년에 강화유수 윤이제가 강화도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함경도(간도, 연해주 포함)와 황해도, 강원도에서 승군 8,000여 명과 어영군 4,300여 명을 동원해 80여 일 동안 만든 48개 돈대의 일원이다. (강화도에 전하는 돈대 상당 수는 이때 생겨남) 동벽 석축 하단에 '강희일십팔년사월일 경상도 군위어영'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강화도 54개 돈대 중 유일하게 쌓은 시기를 알려주고 있는데, 고약했던 왜정 시절 돈대 상당수가 망가진 것을 1970년 대 이후 중수했으며, 돈대 내부는 관람이 가능하다. 2. 계룡돈대..

1. 망월돈대 남쪽 내가천 하류 고려산과 혈구산, 퇴모산이 나란히 빚은 내가천이 여기서 서해바다와 만난다. 바다와 접하는 하류까 지 검은 피부의 갯벌이 펼쳐져 있어 서해바다 특유의 감성을 돋구고 있으며, 바다 너머로 석모도의 북 쪽 지붕인 상주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 강화나들길16코스(서해황금들녘길, 13.5km)는 이곳 하류를 지나 북쪽(망월돈대, 창후리)과 남쪽(계룡돈대, 외포리 방향)으로 흘러간다. 2. 구하리 들판에서 바라본 동쪽 방향 (고려산, 혈구산) 내가천 하류를 지나서 강화나들길16코스가 있는 해안길로 가지 않고 구하리 평야를 가로지르는 농로 를 이용했다. 강화나들길16코스가 신세를 지는 해안길 상태가 영 좋지 못하여 잡초가 오지게 무성했 기 때문이다. (난 반바지를 입고 갔었음) 3..

1. 강화 망월돈대 망월리 해안에는 강화도 돈대의 일원인 망월돈대가 있다. 1679년에 조성된 네모난 돈대로 가로 38 m, 세로 18m, 높이 2.5m 규모인데, 0.4~1.2m의 돌을 장방형으로 다듬어서 쌓았다. 돈대 북쪽에는 해안을 따라 길게 두룬 성곽의 흔적이 일부 있는데, 1232년에 고려가 개경에서 강화 도로 임시 천도하면서 해안 방어를 위해 만들었다고 전한다. 허나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고려 때 강화도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산동반도나 그 주변)이라는 뜻 있는 학자들의 의견도 많이 나오고 있다. 어쨌든 돈대 북쪽의 긴 성곽은 1618년 안찰사 심돈이 수리를 했으며, 1745년 강화유수 김시환이 중 수했는데, 성곽이 무지하게 길어서 '만리장성'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돈대 내부는 관..

1. 강화나들길16코스 창후리 구간 강화나들길16코스(서해황금들녘길)는 창후리 창후항에서 외포리까지 이어지는 13.5km의 도보길이 다. 해안길과 들녘길, 산길이 고루고루 섞여있으며, 무태돈대(창후항 북쪽 해안에 있음)와 망월돈대, 계룡돈대, 국수산, 망양돈대를 지난다. 이번 16코스 나들이는 창후리에서 망월돈대, 계룡돈대를 경유 해 황청리까지 이동했는데, 중심 메뉴는 무태돈대와 망월돈대, 계룡돈대이다. 2. 창후리 들녁을 지나는 강화나들길16코스 3. 창후리 들판 너머로 바라보이는 별립산(416m) 4. 수풀이 무성한 강화나들길16코스 강화도의 대표 둘레길인 강화나들길이 수도권의 유명 도보길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그렇다고 강화나 들길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다. 16코스 같은 경우는 나그네의 발길이 별로..

1. 강화도 무태돈대 교동도와 마주보고 있는 창후항 북쪽 해변에 무태돈대가 있다. 이곳은 강화도에 아주 흔한 돈대의 일 원으로 1679년 강화유수 윤이제가 강화도 해안 방어를 위해 간도와 연해주가 포함된 함경도와 황해 도, 강원도 3도에서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여 명을 동원하여 80여 일 동안 만든 48개 돈대의 하나이다. 무태돈대는 북쪽에 있는 인화보에서 관리했는데, 돈대 규모는 해안 쪽으로 긴 면이 44m, 짧은 면은 20m의 직사각형 형태이다. 돈대 안에는 대포를 두는 포좌 4문을 바다를 향해 설치했으나 어느 세월 이 잡아갔는지 사라졌으며, 돈대도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많이 망가진 것을 근래 정비했다. 2. 무태돈대에서 바라본 교동도와 화개산 교동도는 교동대교가 개통되기 이전(..

1. 보문사 석실 큰 바위 아랫도리에 닦여진 석실은 나한상의 공간으로 나한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눈썹바위에 크게 깃든 마애석불좌상과 더불어 보문사의 주요 명물로 절을 세웠다는 회정대사가 어부들이 바다에서 건진 나한상을 봉안하고자 만들었다고 하나 신빙성은 없다. 다만 1812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1867년에 경산이 보수했으며, 1958년 춘성이 석굴 내부를 확장, 개수했고, 1980년에 정수가 내부를 확장하여 불단 뒤와 옆에 석조탱화를 조성했다. 우리나라의 몇 안되는 석굴 법당으로 바위 밑에 난 천연동굴을 개조하여 만들었는데, '1⌒1⌒1⌒1' 모양의 3개의 홍예문을 만들고 동굴 안에 30평 크기의 공간을 닦아 18나한과 석가여래상,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 송자..

1. 보문사 경내에서 눈썹바위, 마애석불좌상으로 인도하는 418계단 (보문사 방향) 간만에 보문사 마애석불좌상과 눈썹바위를 친견하고 다시 보문사 경내로 내려왔다. 마애석불좌상과 눈썹바위는 보문사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막다른 곳이라 왔던 길로 다시 내려가야 된다. 2. 보문사 삼성각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과 독성, 칠성 등 삼성의 공간이다. 1960년에 지 어졌는데, 그때는 4평도 안되는 작은 집이었다. 3. 보문사 석실 보문사에는 유명한 존재가 2개가 있으니 하나는 눈썹바위에 깃든 마애석불좌상이고 다른 하나는 바 로 석실이다. 그래서 보문사에 왔다면 이들 2곳은 꼭 챙겨봐야 나중에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보문사 석실은 바위 밑도리에 있는 자연산..

1. 보문사의 오랜 상징이자 백미, 보문사 마애석불좌상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의 일원으로 크게 추앙을 받고 있는 보문사 경내에서 낙가산으로 난 418계 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장대한 모습의 눈썹바위와 그 바위에 몸을 의지한 커다란 마애석불좌 상이 모습을 비춘다. 마애불이 몸을 기댄 바위 위쪽에는 특이하게도 암석이 눈썹처럼 앞으로 돌출 되어 있어 100년 동안 마애불의 우산 역할을 해주었는데, 그로 인해 석불의 건강은 여전히 청신호 이다. 이 석불은 1928년 금강산 표훈사 주지였던 이화응과 당시 보문사 주지인 배선주가 관음성지의 명 성을 견고히 다지고자 조성한 것이다. 왜정 때 조성된 불상의 일원이자 가장 규모가 큰 석불로 그의 얼굴을 보면 조금은 우울해 보이는데, 이는 1920년대 어둠의 시기를 ..

1. 석모도 보문사 (보문사 극락보전) 서해바다가 잘 바라보이는 낙가산 서쪽 자락에 그 이름도 유명한 보문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 다. 보문사의 '보문'은 중생을 구제하려는 관세음보살의 보살행이 크고 변함이 없다는 뜻으로 동해 바다의 양양 낙산사, 남해바다의 남해 보리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 추앙을 받는다. 이 절은 635년에 회정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금강산에서 도를 닦고 강화도로 들어와 보문 사와 마니산 정수사를 창건했다고 하는데, 이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은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창건 이후 무려 1,100년 이상의 공백기가 있어 창건 시기에 대해 심히 회의감을 품게 한다. 다만 경내에 600~700년 묵은 늙은 향나무가 있어 적어도 고려 중/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

1. 용흥궁 우물 (내전 옆) 철종의 잠저였던 용흥궁에는 2개의 늙은 우물이 있다. 지금은 죽은 우물로 주둥이가 모두 닫혀져 있으 며, 각각 내전(안채)과 외전(사랑채) 옆에 자리해 있다. 2. 용흥궁 별전터 별전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허전하게 터만 남아있다. 3. 별전터에서 바라본 내전(왼쪽)과 외전(오른쪽) 4. 용흥궁 내전 행랑채 5. 내전 행랑채와 대문(대문간채와 내전을 이어주는 문) 6. 외전(사랑채)으로 인도하는 기와문 (내전 뒷쪽) 7. 용흥궁 뒷쪽 언덕 (용흥궁 후원) 용흥궁 경내 뒷쪽(북쪽)에는 나무가 무성한 언덕이 있다. 용흥궁에 딸린 후원으로 언덕 정상까지 계단 이 놓여져 있으며, 후원에 건물은 없다. 8. 나무가 무성한 용흥궁 후원 정상부 9. 용흥궁 후원에서 바깥을 이..

1. 용흥궁 잠저구기 비각 강화읍내에 자리한 용흥궁은 조선 25대 제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어린 시절에 살던 곳이다. 그 렇다고 현재 기와집에서 그가 살았던 것은 아니며, 그의 집은 원래 조그만 초가였다. 1849년 헌종(재위 1834~1849)이 승하하자 순원왕후와 안동김씨 패거리들은 그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얼떨떨한 왕족을 물색하여 강화도에 살고 있던 이원범을 추대해 왕위에 앉혔다. 이원범은 전계대원군 의 3째 아들이자 사도세자(장헌세자)의 3세손으로 1844년 친형인 회평군 이명의 옥사로 가족들이 강화 도로 유배되어 아주 힘들게 살고 있었다. 1853년 강화유수 정기세가 철종이 살던 곳(잠저)임을 기리고자 그가 살던 초가를 밀고 기와집을 크게 지어 용흥궁이라 했으며, 1903년 청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