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여주 파사성 2. 파사성으로 인도하는 파사산 숲길 3.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파사성 4. 파사성 남문터 5. 남문터 안쪽 6. 남문터 주변에서 바라본 남한강과 여주의 산하 7. 계단처럼 펼쳐진 북쪽 성곽 8. 북쪽 성곽에서 바라본 남한강과 여주의 산하 9. 파사성 북쪽 성곽 10. 파사성 정상 직전에서 바라본 북쪽 성곽과 남한강 11. 북쪽 성곽에서 바라본 상자포리 마애여래입상 주변 12. 파사성 동북쪽 끝부분 (정상 옆) 13. 파사성의 지붕인 파사산 정상 (해발 230.4m) 14. 파사성 정상에서 바라본 남한강과 양평 개군면, 양평읍 지역 15. 파사성 정상에서 바라본 양평 개군면, 지평면, 여주 대신면 지역 16. 파사성 동북쪽 끝에서 상자포리 마애불로 인도하는 계단길 1..

1. 대빈궁경우궁과 선희궁, 저경궁 사이에 자리한 대빈궁은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생모인 희빈장씨의 사당이다. 그 유명한 희빈장씨는 숙종의 왕후인 인현왕후와의 권력 싸움에서 최종 패배하여 결국 1701년 쓰디쓴 사약을 1사발 들이키는 신세가 되었는데, 그가 죽자 숙종은 그의 신위를 정동에 봉안했다.1722년 경종은 어미를 옥산부대빈으로 추존하고 경행방 교동에 사당을 세워 대빈묘라 했으며, 1870년 선희궁처럼 육상궁으로 옮겼다가 1887년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1908년 다시 육상궁에 통합되었다. 2. 1열로 나란히 자리한 경우궁(선희궁)과 대빈궁, 저경궁 (오른쪽부터)4열로 닦여진 장대석 석축 위에 3열로 된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사당을 얹혔다. 4열로 된 석축 가운데인 대빈궁에 돌계단을..

1. 칠궁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 내부 사진 (감실과 신주)칠궁을 이루고 있는 7개의 사당(궁)과 부속건물들은 모두 내부 공개를 하지 않는다. 하여 굳게 닫힌 모습으로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2. 길쭉한 모습의 수복방내삼문과 자연(연못) 사이에 자리한 수복방은 7칸짜리 맞배지붕 건물이다. 칠궁을 관리하는 사람의 숙소 및 창고로 1753년에 육상묘(숙빈최씨의 사당)가 육상궁으로 격이 높여지면서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3. 수복방 옆 내삼문칠궁 바깥에서 칠궁 사당으로 가려면 3개의 문을 거쳐야 된다. 내삼문은 그 가운데 문으로 삼문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굳이 이 문이 아니더라도 재실 동쪽에 있는 중문을 통해 칠궁 중심부로 들어서도 된다. 4. 서쪽에서 바라본 냉천정냉천정은 정면 5칸..

1. 육상궁과 연호궁육상궁은 영조의 생모이자 숙종의 후궁인 숙빈최씨의 사당이다. 칠궁 자리에 처음부터 있었던 터줏대감 같은 존재로 영조가 재위에 오른 1724년 경복궁 북쪽인 현재 자리에 생모의 사당을 세울 것을 명령하여 1725년에 완성을 보았다.처음에는 숙빈묘라 했으며, 1744년에 육상묘로 묘호를 갈았다. 그러다가 1753년 사당의 격을 '廟'에서 '宮'으로 크게 높였는데, 이때부터 제왕들이 왕후(황후)에 오르지 못한 생모의 사당을 짓는 사묘 제도가 제대로 형식을 갖춘 것으로 여겨진다.1878년 화재로 쓰러진 것을 다시 세웠으나 1882년 다시 화재를 만나면서 건물은 물론 숙빈최씨의 신주와 옥책, 은인까지 싹 화마의 덧없는 먹이가 되고 말았다. 다만 이곳에 들어있던 영조의 어진은 송죽헌으로 피신시켜..

1. 칠궁 냉천정육상궁, 연호궁 구역과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 대빈궁, 저경궁 사이에 냉천정이 자리잡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집으로 영조가 선희궁에 봉안된 모후 숙빈최씨의 제사를 준비하고 제사 뒷풀이 및 휴식을 취했던 곳이다.언제 지어졌는지는 북악산(백악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육상궁이 처음 지어진 때에 마련된 것으로 여겨지며, 영조의 어진을 봉안했던 곳이라 봉안각이라 불리기도 했다. 순조 이후부터 냉천정으로 이름이 갈린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름은 동쪽 옆구리에 있는 냉천이란 우물에서 비롯되었다.집은 서쪽 2칸은 온돌방, 동쪽 1칸은 대청으로 되어 있으며, 칠궁이 비록 속세에 열린 공간이지만 냉천정 뒤쪽과 냉천만큼은 여전히 통제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그 앞으로만 지나다..

1. 칠궁 재실(송죽재, 풍월헌)청와대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칠궁은 조선 왕실의 사당이다. 북악산(백악산) 그늘이자 청와대 바로 서쪽인 이곳은 제왕이나 친왕(황제의 아들)의 모친이지만 왕후(황후) 반열에 들지 못한 후궁들의 사당으로 이런 사당을 사친묘라고 한다.이곳에는 저경궁(선조의 후궁이자 추존 원종의 생모인 인빈김씨)과 대빈궁(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생모인 희빈장씨), 선희궁(영조의 후궁이자 추존 장조의 생모인 영빈이씨), 경우궁(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 덕안궁(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 귀비 엄씨), 육상궁(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 연호궁(영조의 후궁이자 추존 진종의 생모인 정빈이씨) 등 궁을 칭하는 사당 7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에는 원래 육상..

1. 단양 봉서정단성면 중심지 북부(하방리)에 자리한 단성면보건지소 앞에 2층 누각인 봉서정이 있다. 봉서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누각으로 남한강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는 왕년에 단양에서 잘 나갔던 존재이다. 허나 그가 부재중이던 시간이 무지하게 길었던 터라 단양이 외가 시골임에도 그의 존재는 처음이다. 봉서정은 1602년 단양군수 이준이 관아 누각으로 세웠다. 1764년에서 1769년까지 단양군수로 있던 조정세가 중수했으며, 1853년에서 1854년 사이에 군수 심원택이 중수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의 13번째 화첩인 구학첩에 봉서정과 옛 단양 고을의 모습이 등장한다. 허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없는 것을 단양군에서 지역의 역사성 회복을 명분으로 2013..

1. 단양적성 남쪽 성곽단양적성(적성산성)은 1,500년 이상 묵은 매우 늙은 산성이다. 근래 복원 재현된 성곽에는 대자연 형님이 여름 감성에 걸맞게 깔아놓은 온갖 들꽃과 수풀들로 상큼한 풍경을 보이고 있다. (이때가 6월 한복판이었음) 2. 수풀과 들꽃으로 가득한 단양적성과 푸르른 여름 하늘 3. 단양적성 남쪽 성곽 4. 단양 적성비와 단양적성으로 올라가는 산길단양적성을 1바퀴 돌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적성 성곽은 상당수가 복원 재현되어 있으며, 적성에서 바라보는 주변 풍경이 일품이다. 다만 주변이 높은 뫼들로 첩첩히 둘러진 탓에 보이는 범위는 그리 넓지 않다. 5. 단양적성으로 인도하는 단양팔경휴게소 뒤쪽 산책로 6. 기와지붕을 눌러쓴 단양적성 안내문과 그 너머로 보이는 단양적성과 성재산..

1. 여름 내음에 잠긴 단양적성 (북문터 주변)단성면 중심지(옛 단양읍내)의 오랜 뒷동산인 성재산 정상부에 단양적성(적성산성)이란 오래된 산성 유적이 깃들여져 있다.신라를 크게 중흥시킨 진흥왕(재위 540~576)이 554년에 죽령을 넘어 고구려의 많은 지역을 점령했는데, 그때 또는 그 이전(5~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의 둘레가 1,768척이며 성내에 큰 우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까지 이 지역을 지키는 요새로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적성이 깃든 성재산 바로 밑이 단양 고을의 중심지이다. 하여 조선 때도 고을을 지키는 용도로 어느 정도로 쓰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단양 고을은 읍성을 따로 갖추지 못했음)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버려져..

1. 대구제일교회근대문화유산이 풍부하게 깃든 대구 도심부 남성로에 붉은 피부를 지닌 대구제일교회가 자리해 있다. 대구약령시한의학박물관 바로 이웃에 자리한 이곳은 1933년에 신도들의 돈과 중앙교회의 성금으로 지어진 것으로 적벽돌 2층 예배당 건물이었다. 그러다가 1937년 신도인 이주열에 지원으로 높이 33m의 종탑이 세워져 현재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이 교회는 미국에서 건너온 북장로교 소속으로 그 조직의 일원인 선교사 베어드(William M. Baird)가 영업 확장을 위해 조선에 들어와 부산에 둥지를 틀었다. 1895년 선교본부를 대구로 옮겨 경북 일대 영업애 매진했으며, 1896년부터 1898년까지 현재 대구제일교회 자리에 있던 집 8채를 매입해 교회를 차리니 그것이 대구와 경북 지역 최초의 기..

1. 주차장으로 살아가고 있는 횡성 둔내 철기시대 주거지 유적횡성군 동쪽 끝에 자리한 둔내면, 칼처럼 높이 솟은 뫼들 사이에 포근히 뉘어진 둔내면 중심지에 철기시대 주거지로 보이는 늙은 유적이 전하고 있다. 다른 유적들은 발견된 모습 그대로 땅속에 묻어서 그 위에 풀과 나무를 심고 유적을 알리는 안내문이나 비석을 세우기 마련이나 이곳은 그럴 겨를도 없이 집과 주차장, 농경지에 모두 파묻힌 상태이다. 그리고 주차장 한쪽에 그들을 알려주는 안내문만 달랑 있을 따름이다. 이곳 유적은 '呂'자형 주거지로 규모는 전체 길이 13.52m, 너비 8.7m, 면적은 96평방미터 정도이다. 둔내 지역에서 나온 주거지 유적 중 가장 큰 편으로 다량의 토기 파편과 소량의 철기류, 석기류 등이 나왔는데, 화재나 큰 사고로 집..

1. 단양 신라 적성비를 품고 있는 팔작지붕 비각단성면 중심지의 오랜 뒷동산인 성재산 정상부에 단양적성(적성산성)이라 불리는 늙은 산성이 있다. 그 산성 내에는 단양 적성비(단양 신라 적성비)란 이름을 지닌 매우 늙은 비석이 있어 고색의 향기를 마음껏 내뿜는다.이곳 적성비는 완전한 모습이 아닌 일부만 남아있는 것으로 1978년에 발견되었다. 이때 땅속에서 비스듬히 누워있는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그러다 보니 비문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비석에는 288자의 글씨가 있는데,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었다. 예서체에서 해서체로 넘어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으며, 깨지고 사라진 비문을 포함해 전체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여겨진다. 이 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