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단양 봉서정단성면 중심지 북부(하방리)에 자리한 단성면보건지소 앞에 2층 누각인 봉서정이 있다. 봉서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누각으로 남한강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는 왕년에 단양에서 잘 나갔던 존재이다. 허나 그가 부재중이던 시간이 무지하게 길었던 터라 단양이 외가 시골임에도 그의 존재는 처음이다. 봉서정은 1602년 단양군수 이준이 관아 누각으로 세웠다. 1764년에서 1769년까지 단양군수로 있던 조정세가 중수했으며, 1853년에서 1854년 사이에 군수 심원택이 중수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의 13번째 화첩인 구학첩에 봉서정과 옛 단양 고을의 모습이 등장한다. 허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없는 것을 단양군에서 지역의 역사성 회복을 명분으로 2013..

1. 단양적성 남쪽 성곽단양적성(적성산성)은 1,500년 이상 묵은 매우 늙은 산성이다. 근래 복원 재현된 성곽에는 대자연 형님이 여름 감성에 걸맞게 깔아놓은 온갖 들꽃과 수풀들로 상큼한 풍경을 보이고 있다. (이때가 6월 한복판이었음) 2. 수풀과 들꽃으로 가득한 단양적성과 푸르른 여름 하늘 3. 단양적성 남쪽 성곽 4. 단양 적성비와 단양적성으로 올라가는 산길단양적성을 1바퀴 돌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적성 성곽은 상당수가 복원 재현되어 있으며, 적성에서 바라보는 주변 풍경이 일품이다. 다만 주변이 높은 뫼들로 첩첩히 둘러진 탓에 보이는 범위는 그리 넓지 않다. 5. 단양적성으로 인도하는 단양팔경휴게소 뒤쪽 산책로 6. 기와지붕을 눌러쓴 단양적성 안내문과 그 너머로 보이는 단양적성과 성재산..

1. 여름 내음에 잠긴 단양적성 (북문터 주변)단성면 중심지(옛 단양읍내)의 오랜 뒷동산인 성재산 정상부에 단양적성(적성산성)이란 오래된 산성 유적이 깃들여져 있다.신라를 크게 중흥시킨 진흥왕(재위 540~576)이 554년에 죽령을 넘어 고구려의 많은 지역을 점령했는데, 그때 또는 그 이전(5~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의 둘레가 1,768척이며 성내에 큰 우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까지 이 지역을 지키는 요새로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적성이 깃든 성재산 바로 밑이 단양 고을의 중심지이다. 하여 조선 때도 고을을 지키는 용도로 어느 정도로 쓰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단양 고을은 읍성을 따로 갖추지 못했음)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버려져..

1. 단양 신라 적성비를 품고 있는 팔작지붕 비각단성면 중심지의 오랜 뒷동산인 성재산 정상부에 단양적성(적성산성)이라 불리는 늙은 산성이 있다. 그 산성 내에는 단양 적성비(단양 신라 적성비)란 이름을 지닌 매우 늙은 비석이 있어 고색의 향기를 마음껏 내뿜는다.이곳 적성비는 완전한 모습이 아닌 일부만 남아있는 것으로 1978년에 발견되었다. 이때 땅속에서 비스듬히 누워있는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그러다 보니 비문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비석에는 288자의 글씨가 있는데,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었다. 예서체에서 해서체로 넘어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으며, 깨지고 사라진 비문을 포함해 전체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여겨진다. 이 비석..

1. 단양적성 주차장에서 바라본 적성(적성산성)옛 단양 읍내였던 단성면 중심지(하방리, 상방리) 뒷쪽에는 성재산이란 320m급 뫼가 있다. 그 뫼 정상부에 적성산성 또는 단양적성이라 불리는 꽤 늙은 산성이 깃들여져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단성면과 적성면, 단양읍, 대강면 지역을 굽어본다. 단양적성은 신라 중기인 진흥왕 시절에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산성 안에서 진흥왕 때 세운 것으로 보이는 적성비란 늙은 비석이 나왔기 때문으로 그 비석을 통해 545~551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어림짐작일 뿐, 자세한 시기는 모르며, 그보다 더 이르게 봐야될지도 모른다. 만약 이르게 본다면 6세기가 아닌 4~5세기 정도 될 것이다. 그만큼 이곳은 무지하게 늙은 산성이다.산성의 둘레는 약 ..

1. 수몰이주기념관 뜨락에 있는 단양군수 황준량 선정비황준량은 1557년 단양군수로 부임했다. 그는 단양향교를 이건했으며, 단양의 척박한 사정을 조정에 상소하여 단양 백성들에게 10년 동안 조세 감면의 큰 선물을 주었다. 하여 지역 백성들은 그의 선정비를 세워 그의 선정을 두고두고 기렸다. (1560년 황준량은 경상도 성주목사로 자리를 옮겼음)수몰이주기념관에 모인 비석 중 가장 늙은 존재로 비석 한쪽 귀퉁이가 깨졌으며, 글씨도 마멸되어 확인이 거의 어렵다. 2. 단양군수 정의동 영세불망비정의동은 1902년 단양군수로 들어와 1904년까지 이곳을 다스렸다. 그는 흉년으로 고통받는 단양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해줄 것을 조정에 상소했으며, 1904년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 3. 열녀 김연옥 정려비김연옥은 정병..

1. 단양 우화교 기사비단양 고을의 옛 중심지인 단성면 중심지 뒤쪽 언덕에 수몰이주기념관이 있다. 그 뜨락에는 충주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해 이곳으로 피신한 여러 문화유산들(복도별업 암각자, 우화교 기사비, 탁오대 암각자, 석탑재, 비석들)들이 자리해 서로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주고 있는데, 그들 중 복도별업 암각자와 우화교 기사비, 탁오대 암각자는 충북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우화교 기사비는 1753년 단양읍내 앞 단양천에 우화교란 돌다리를 만들면서 그것을 기리고자 세운 비석이다. 단양군수 이기중이 지역 백성들의 교통 편의를 위해 만든 것으로 그 다리는 이후 큰 홍수로 허무하게 사라지고 비석만 겨우 남았다.비석의 크기는 높이 114cm, 폭 58cm, 두께 16cm로 비문은 남유용이 썼으며..

1. 옛 단양읍내(현재 단성면 중심지)의 빛바랜 흑백 사진 (단성생활체육공원)충북 단양군은 본인의 외가 시골로 서울 다음으로 오래 산 동네이다. (오래 살았다고 해서 몇년씩 살고 그런것은 절대로 아님, 방학과 명절, 일부 날에 여러 날씩 머문 것이 전부)현재 단양군의 중심지는 단양읍(신단양)이나 예전 중심지는 단성면으로 단성면이 단양읍이란 이름으로 단양군내를 다스렸다. 읍내도 제법 컸고, 외가 동네(북하리)하고도 가까워 종종 갔었는데, 너무 어렸을 적(1980년대)이라 기억나는 것도 거의 없다.1985년 충주댐 건설로 남한강에 접한 충주와 제천, 단양 지역이 적지 않게 수몰되는 아픔을 겪었다. 특히 단양군은 그 중심지인 단양읍내까지 수몰지가 되면서 중심지까지 강제로 강 상류로 옮겨야 했다. 하여 우리나라..

제천 의림지~~~ 제천 의림지 ~~~ ▲ 남쪽에서 바라본 의림지 '못가에 휘늘어진 푸른 버들은봄에 오는 시름을 아는 듯꾀꼬리 서로 불러 마지않으니아서라, 이별의 슬픔을' '조선 순조 때 소녀 시인 김금원(金錦園)이 의림지에서 지은 시' 여름 제국이 조금씩 빈틈을 보이던 8월의 끝 무렵, 제천(堤川)의 대표 명소로 꼽히는 의 림지를 찾았다. 의림지는 10여 년 만에 방문으로 아침 일찍 청량리역에서 영동선 무궁화호를 타고 2시간 남짓 달려 제천역에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세명대로 가는 제천시내버스를 타고 북쪽으 로 계속 직진하면 남북으로 길쭉한 제천..

1. 제천 의림지 2. 의림지 동쪽 둑방길 3. 의림지 남쪽 둑방길 4. 영호정 5. 영호정 주변 의림지 남쪽 둑방길 6. 솔내음이 나래를 펼치는 의림지 남쪽 둑방길 7. 의림지 8. 의림지 남쪽 둑방에서 모산동 들판으로 빠지는 수로와 소나무숲길 9. 의림지 남쪽 둑방 10. 의림지 표석 주변 둑방 소나무숲길 11. 의림지 표석(왼쪽)과 누워있는 나무 의자 12. 의림지 표석 주변에서 바라본 의림지 13. 의림지 서쪽 둑방길 14. 의림지 서쪽 둑방길에서 바라본 남쪽 둑방길 15. 경호루 16. 두 호수 사이를 지나는 의림지 서쪽 둑방길 17. 분수대가 율동을 부리고 있는 서쪽 호수 18. 의림지와 서쪽 호수 사이를 지나는 다리와 맞배지붕 문 19. 서쪽 둑방에서 바라본 의림지 2..

1. 백족사 석조여래좌상백족사 대웅전에 중심 불상으로 들어있는 석조여래좌상은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예전에는 석불 전면에 백회가 떡칠 수준으로 칠해져 있어서 원래 모습을 파악하기 힘들었는데, 21세기 이후 백회를 벗겨내고 불단 일부를 손질하면서 석불의 원래 모습 및 불단에 가려졌던 연화대좌까지 모두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석불은 어느 세월이 댕강했는지 절단되어 있던 것을 시멘트로 붙였으며, 접합 부분에 시멘트를 두껍게 덧칠하면서 많이 부어올랐고 눈과 입도 근래에 갈아내고 보수하면서 다소 변형되었다. 게다가 양쪽 귀도 매우 짧아지는 등, 강제 성형을 꽤 당했다.머리는 곱슬머리의 나발로 정수리에는 육계가 솟아있고, 상호는 전체적으로 원만하다. 목에는 삼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시멘트로 보수하면..

1. 백족산 백족사로 인도하는 숲길하얀 발을 뜻하는 백족사는 청주 가덕면 백족산 남쪽 자락에 깃든 고찰이다. 속세에서 그곳을 찾으려면 청주 시내에서 청주 211, 213, 215번 시내버스를 타고 병암3리에서 하차하여 걸어가야 되는데, 211번은 충북도청, 상당공원, 청주대학교에서 이용하면 되며, 석교동(육거리 동남쪽) 이남부터는 213, 215번도 이용 가능하다. (211번은 20분 내외 간격이나 나머지 노선은 배차간격이 무지하게 김) 병암3리 정류장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지는 '은행상야로'로 들어서 조금 들어가면 충북교통연수원 직전에 백족사로 인도하는 1차선 크기의 숲길이 모습을 비추는데, 그 길을 25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차량도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릴 수 있게끔 포장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경사는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