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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름 내음에 잠긴 단양적성 (북문터 주변)

단성면 중심지(옛 단양읍내)의 오랜 뒷동산인 성재산 정상부에 단양적성(적성산성)이란 오래된

산성 유적이 깃들여져 있다.

신라를 크게 중흥시킨 진흥왕(재위 540~576)이 554년에 죽령을 넘어 고구려의 많은 지역을 점령

했는데, 그때 또는 그 이전(5~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

람에는 '성의 둘레가 1,768척이며 성내에 큰 우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까

지 이 지역을 지키는 요새로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적성이 깃든 성재산 바로 밑이 단양 고을의 중

심지이다. 하여 조선 때도 고을을 지키는 용도로 어느 정도로 쓰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단양 고을

은 읍성을 따로 갖추지 못했음)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버려져 대자연과 세월에 의해 거의 헝클어

지는 신세가 되었다.

 

성내에서는 삼국시대 토기와 기와조각, 고려 때 유물, 그리고 진흥왕 때 비석인 적성비(단양 신라

적성비)가 발견되었으며, 단양적성은 동서로 긴 타원형 모습으로 북서쪽은 경사가 급하고, 남동쪽

은 비교적 완만하다.

성벽은 기초 부분을 돌과 진흙으로 단단히 다졌고, 성의 외벽은 자연석으로 쌓았다. 그리고 성곽

안쪽은 말을 타고 다닐 수 있게끔 평평하게 다져 쌓았다. 성을 쌓는 방법이 매우 견고해 신라의 축

성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를 받는다.

 

이곳 적성은 초등학교 말년이던 1990년에 1번 인연을 지은 적이 있었다. 그때 이후 무려 30여 년

만에 방문으로 외가집이 여기서 가까운 단성과 대강 사이인 북하리에 있었음에도 인연이 참 지지

리도 없었다.

 

2. 유연하게 곡선을 보이며 흘러가는 단양적성 (북문터 주변)

현재 단양적성은 상당수 구간이 복원 재현되었다. 하지만 성곽만 일으켜 세웠을 뿐, 여장이나 성문 같

은 시설은 아직 재현하지 못했다. 1,500년 이상 묵은 워낙에 늙은 산성이라 왕년의 모습으로 95% 이

상 가깝게 재현 복원하기도 쉽지가 않다.

 

3. 자연석들이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며 견고한 성곽을 이루는 단양적성

 

4. 단양적성 북문터

단양적성에는 3개의 성문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은 북문터로 성문을 재현하지는 못하고 이렇

게 뻥 뚫어놓은 모습으로 두었다.

 

5. 북문터 바깥에서 바라본 단양적성의 바깥 모습

 

6. 단양적성에서 바라본 북쪽 방향

단양의 산천을 크게 바꿔놓은 남한강이 유유자적 흐르고 있고, 그를 중심으로 단양읍과 적성면 지역,

단양 관내를 가로지르는 5번 국도가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 남한강 한복판에 길쭉하게 보이는 섬

같은 것이 있는데, 그가 단양 속의 섬인 시루섬이다.

 

시루섬은 충주댐 이전부터 섬으로 있던 곳으로 지대가 낮았다. 그러다 보니 1972년 8월 태풍 베티의

내습으로 남한강이 크게 흥분했을 때, 섬이 거의 통째로 물에 잠겼는데, 섬 주민 198명이 섬에서 그

나마 높은 곳인 지름 5m, 높이 6m 크기에 조그만 물탱크에 올라가 서로를 단단히 붙잡으며 14시간

을 버텨 살아남았다. 그때 아기를 업은 여인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너무 밀착해서 붙어있다 보니 아

기는 그들 틈에서 그만 질식사하고 말았다.

이를 여인이 알았으나 그것을 말하면 물탱크에 겨우 의지해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동요가 생겨 많

은 이들이 밑으로 떨어질 것이 뻔하므로 꾹 참았다. 그 덕에 아기 1명을 제외한 197명이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 세상에서는 그 사건을 시루섬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7. 단양적성 북문터 주변

 

8. 무성한 숲을 지닌 단양적성, 성재산 정상부

단양적성 성곽도 예전에는 수풀에 묻혀있었으나 성곽을 복원 정비하면서 성곽을 누르고 있던 수풀들

을 거의 밀어냈다.

 

9. 동쪽에서 바라본 단양적성 북문터

 

10. 서쪽으로 흘러가는 단양적성 (적성비 방향)

 

11. 여름 들꽃과 키 작은 수풀로 가득한 단양적성 성곽길 (적성비 방향)

 

12. 남쪽에서 바라본 단양적성 (북문터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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