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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룡 사계고택 문간채(대문채)

호남선 계룡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사계고택은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사계 김장생(1548

~1631)이 말년을 보냈던 곳이다.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사상과 학문을 이어받아 예학의 최고봉을 이룬 유학자로 1602년 벼슬을 버리

고 고향인 연산에 내려와 바로 이곳에 은농재를 짓고 말년을 보냈다. 그 시절 계룡시 지역은 연산 고

을 관할이었다.

그는 여기서 서적 저술과 제자 양성에 주력했으며, 그의 8번째 아들인 김규(1606~1677)가 이곳을 물

려받아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살아왔다.

 

계룡시와 충남에 대표적인 조선 중기 한옥으로 안채와 사랑채, 안사랑채, 곳간채, 광채, 문간채, 행랑

채 등을 지니고 있는데, 후손들이 이곳을 각별히 애지중지하여 원래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건물

배치도 당대 양반가의 일반적인 방법을 잘 따랐으며, 이곳의 중심 건물이자 사랑채인 은농재는 처음

에는 초가지붕이었으나 나중에 기와집으로 업그레이드 시켰다.

 

김장생과 김규의 후손들이 대대로 소유하고 생활하던 집이지만 그들의 흔쾌한 협조에 힘입어 속세에

개방되었다. 하여 계룡시의 대표급 명소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데, 관람시간은 9~18시(겨울은 17시

까지)이며, 관람료는 없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과 설날과 한가위 당일, 국공휴일 다음날은 문을 닫아

걸고 쉰다. 그러니 그때만 피해서 오면 양반가의 기품이 파도를 치는 이곳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집 내부 방까지 마구 들쑤시면 안된다. 어디까지나 개방된 공간만 둘러봐야 된다.

 

그동안 계룡시는 논산에서 대전으로 넘어가면서 지나간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사계고택

을 둘러보면서 처음으로 계룡시에서도 출사/답사를 벌였다.

 

2. 사계고택 행랑채

사계고택 바깥에 있는 3칸짜리 초가이다. 다른 집은 모두 기와집인데 반해 이곳만 초가 형태인데, 고

택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머무는 공간과 창고로 쓰였다.

 

3. 사계고택 대문의 위엄

길쭉한 문간채 한복판에 대문이 있다. 대문에 걸린 '사계고택' 현판은 서예가인 여초 김응현이 쓴 것으

로 이 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채인 은농재가 마중을 한다.

 

4. 사계고택 은농재

사계고택의 중심 건물이자 사랑채로 김장생의 생활 공간이다. 원래는 초가지붕집이었으나 나중에 기

와집으로 업그레이드 되었으며, 김장생은 여기서 개인 생활 및 제자 교육, 서적 작성과 공부 등을 하

였다.

 

5. 서쪽에서 바라본 문간채 (오른쪽에 보이는 맞배지붕 길쭉한 집도 문간채)

 

6. 안채로 넘어가는 은농재 동쪽 협문

 

7. 은농재 동쪽 문간채 (현재 학습관으로 쓰임)

 

8. 은농재 서쪽 문간채 (현재 예절관으로 쓰임)

 

9. 팔작지붕을 펄럭이는 은농재 (옆에서 바라본 모습)

 

10. 안채와 성예당, 영당으로 인도하는 은농재 서쪽 협문

 

11. 성예당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안채 서쪽에 자리한다.

 

12. 영당

영당은 1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1631년 8월 3일 사계 김장생이 사망하자 출상하기 전 이곳에 시신

을 봉안했다. 사계의 시신은 이곳에 78일 동안 있었으며, 10월 19일 출상하여 여기서 가까운 진잠 성

북동(현재 대전 성북동)에 안장했다가 1641년 10월 9일, 연산면 고정리로 이장되었다.

현재 영당은 그 시절 것이 아닌 이후에 손질된 것으로 양반가에 이런 집은 거의 흔치 않다. 또한 영당

주변은 이곳의 정원, 후원 같은 곳으로 꽃과 수풀이 가득 뿌리를 내렸다. 하여 봄에는 봄꽃의 향연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다면 나처럼 가을과 겨울 사이에 찾지 말고 봄에 찾기를 권한

다.

 

13. 날씬한 모습의 영당

영당은 땅에 붙어있는 것이 아닌 약간 허공을 두고 있다. 이런 양식을 부경이라고 하는데, 부경은 고

구려 건축 양식에서 비롯되었다.

 

14. 안채 뒷쪽과 돌담

 

15. 안채의 서쪽 바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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