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영탑사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 영탑사 종무소 가운데 칸에는 이곳의 1급 보물인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이 소중히 봉안되어 있다. 조그만 크기의 금동불상으로 연꽃무늬가 새겨진 8각형 대좌에 비로자나불이 앉아있고, 그 좌우로 협 시보살이 자리하여 비로자나3존상을 이루고 있다. 중심 불상(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은 머리에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이 붙여져 있으며, 그 위로 육게(무견정상)가 큼직하게 솟아있다. 거의 네모난 얼굴은 원만한 느낌을 주며 선으로 표현된 옷주름은 도식화된 모습이다. 윗도리는 길고 두툼하지만 아랫도리는 너무 작게 표현되어 신체 비례가 다소 떨어지는데, 무릎 높이도 윗도리에 비 해 낮으며, 가슴 역시 평면적이고 아랫도리는 둔중하게 처리했다. 이런 수법은 고려 중기 이후에 많이 나타난다. 손은..

1. 영탑사로 인도하는 성하로 당진 면천면의 중심지인 성상리에서 성하로를 따라 30분 정도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영탑사가 있다. 영탑사 아래까지 당진시내버스 410, 411번이 운행하고는 있으나 운행횟수가 그야말로 가뭄에 콩나는 수준이라(1일 2~3회 운행) 면천면 중심지에서 가볍게 30분 정도 걷는 것이 낫다. 오르막이 꾸준히 이 어지나 완만한 수준이며, 1.5~2차선 크기의 농로라 도보길이 따로 없어 차량을 조심하면서 움직여야 된다. (오가는 차량도 별로 없음) 2. 애타게 봄의 손길을 기다리는 성하로 가로수들 3. 성하리 느티나무 (당진시 보호수) 영탑사 길목에 자리한 시동저수지 동쪽에 당진시 보호수로 지정된 늙은 느티나무가 있다. 추정 나이 는 440년(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

1. 면천읍성 서쪽 성곽 (서치성 북쪽) 당진 면천면의 중심지인 성상리 지역에 옛 면천읍성이 남아있다. 지금은 당진시에 딸린 면천면의 중 심지이나 예전에는 면천(면천군)이란 독자적인 고을로 그 고을의 중심지가 바로 성상리이다. 면천읍성은 조선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둘레는 약 1,200m이다. 자연석을 다듬어서 축조했는데, 20 세기 이후 고약한 왜정의 고의적인 읍성 훼손과 저수지 공사, 마을 민가 보수용 등으로 성곽을 마구 잡이로 뜯어 내면서 지금은 겨우 일부만 전하고 있다. 서쪽 성곽과 남쪽 성곽이 그나마 좀 남아있는 데, 서쪽 성곽은 높이가 최대 3.6m로 서쪽 성곽 안쪽 부분은 사다리꼴 모양으로 비탈지게 닦았으며, 바닥 폭이 6.8m, 윗면 너비는 2.4m이다. 성문은 4개가 있던 것으로 여겨지나 ..

1. 광덕사 석조지장보살입상 파리도 능히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를 지닌 잘생긴 지장보살상으로 근래 조성된 것이 다. 오른손에는 그의 대표 연장인 육환장을, 왼손에는 동그란 보주 같은 것을 들고 있는데, 지장보살 은 명부(저승)에서 가장 높은 인물로 저승에 들어온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책임지고 있다. 2. 광덕사5층석탑 백제 석탑의 백미로 추앙을 받는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을 닮은 탑으로 근래 조성된 것이다. 탑은 보 통 법당 앞에 두기 마련이나 광덕사는 늙은 3층석탑이 이미 법당 앞에 있어 공간이 넓은 이곳에 별도 의 탑을 두었다. 3. 맵시가 고운 광덕사5층석탑의 위엄 4. 광덕사 부도군 5층석탑 우측으로 산길이 있는데, 그 산길을 조금 오르면 부도탑(승탑)의 무리를 만나게 된다. 팔각 원당형..

1. 운초 김부용묘 광덕사 경내에서 광덕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10여 분 오르면 운초 김부용묘가 나온다. 김부용 (1820~1869)은 오강루 문집 등 한시 350여 수를 남긴 여인으로 조선시대 3대 여류시인의 하나로 격 하게 추앙을 받고 있는데, 그는 기생 출신으로 평양감사였던 봉조하 김이양의 소실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초당마마라 불렀는데, 김이양이 사망하자 정절을 지키며 홀로 살다가 49살에 사망했 다. 그의 유언에 따라 김이양묘 부근인 광덕사 윗쪽에 묻혔는데, 이후 후손들의 관리 소홀로 무덤을 그만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다가 1974년 광덕산 숲속에서 겨우 찾았으며, 무덤을 손질하면서 봉분 아랫도리에 호석을 두르 고 묘비를 세웠다. 매년 4월말에는 천안문화원 주최로 천안문인협회와 천안향토사..

1. 광덕사 연꽃석조(샘터) 커다란 연꽃석조에는 광덕산(태화산)이 베푼 수분으로 가득해 자연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준다. (물 섭취 가능)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돌거북이 뱉은 시원한 물을 한가득 담아 입에 들이키니 갈증이 싹 내려앉는다. 2. 명부전 옆구리에 있는 조그만 석상 동자상으로 보이는 작고 귀여운 석상이 대좌 위에 우두커니 서 있다. 석상과 대좌에는 고색의 때가 가득해 최소 10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예전(2008년 이전)에는 못봤던 것들이라 2010년 이후에 주변에서 발견된 것을 갖다놓은 모양이다. 3. 뒷전으로 물러난 늙은 맷돌 광덕사 사람들의 음식 제조를 책임졌던 중요한 맷돌이었으나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나 아주 한가로 운 신세가 되었다. 맷돌 위에는 작은 용머리상이 붙어있는데..

1. 광덕사 대웅전 광덕산 동북쪽 자락에 천안 제일의 고찰로 추앙을 받는 광덕사가 포근히 깃들여져 있다. 이곳은 공 주 마곡사의 말사로 652년에 신라 승려인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그 시절 천안 지역은 천하 제일의 해양대국으로 크게 위엄을 날렸던 백제의 영역이었다. 게다가 자장은 말년을 강원도 에서 보낸 것으로 전해져 그의 창건설은 신빙성이 크게 떨어진다. 다만 1680년에 안명로가 쓴 사적기에는 신라 흥덕왕 시절인 832년에 창건된 것으로 나와있으며 그 시절 진산대사가 석가여래의 치아 1매와 사리 10과, 승가리 1령, 불좌 1병을 봉안하면서 크게 중창 했다고 전해져 신라 흥덕왕 시절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464년 온양온천에 휴양차 찾은 세조가 온양에서 가까운 광덕사에 석가의 치아와 ..

1. 호도전래사적비(오른쪽)와 고려승상 영밀공유청신 공덕비(왼쪽) 광덕사 일주문 옆에는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때깔이 고운 비석 2기가 자리해 광덕사를 찾은 중생 들을 맞이한다. 이 땅에 호도가 처음 들어온 것은 1290년으로 전해진다. 유청신이 몽골(원나라)에 갔다가 충렬왕을 호종하여 귀국하면서 어린 호두나무와 열매를 가져왔는데, 열매는 천안 고향집에 심고, 어린나무는 광덕사에 심었다고 전한다. 그 연유로 광덕사는 호도나무의 첫 고향이 된다. 하여 이를 기리고자 일 주문 옆에 호도전래사적비를 세웠으며, 2010년 이후에 유청신 공덕비를 추가로 세워 호도를 가져온 그의 공적을 기린다. (예전에는 호도전래사적비만 있었음) 유청신은 역모에 가담하여 멀리 귀양을 갔다고 전하며, 비석 피부에는 고려 승상이라 쓰..
' 부여 늦겨울 나들이 ' ▲ 금성산 성화대에서 바라본 부여읍내 ▲ 궁남지와 포룡정 ▲ 국립부여박물관 석조여래입상 천하의 바다를 주름잡으며 거대한 해양대국을 일구었던 백제(百濟), 바다 건너 왜열도를 속방으로 거느리고 중원대륙(서토)의 수많은 해안 지역(요서에서 오월까지)을 점령해 다 스렸으며, 5세기 후반에는 산 동반도(山東半島)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북위(北魏)와 자웅을 겨루어 그들의 수십만 기병 을 묵사발로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수백 년 동안 동아시아를 주름잡던 백제는 660년 7월, 신라(新羅)~당(唐) 연합군 의 공격과 나라의 내부 분열로 허무하게 그 막을 내리고 만다. 충남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도읍(都邑)으로 여겨지는 곳으로 그때는 사비성(泗沘城)이라 불렸다. 백제 26번째 군주인 성왕(聖王..
' 충남의 내륙을 거닐다. 청양 겨울 나들이 ' ▲ 천장호와 출렁다리 ▲ 청양 우산 숲길 ▲ 겨울 운무에 잠긴 우산 겨울 제국의 한복판인 1월의 어느 덜 추운 날, 충남의 지붕인 청양(靑陽)을 찾았다. 청양 땅은 20대의 한복판인 2000년대 이후 딱 2번째 방문으로 인연이 참 지지리도 없던 곳이다. 하여 몸뚱이와 정신이 더 늙기 전에 청양의 신선한 공기도 맛보고 그곳의 미답처(未踏處) 도 여럿 지우고자 흔쾌히 청양을 택했다. 아침 일찍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청양으로 가는 직행버스에 몸을 싣고 90분 정 도를 달려 청양시외터미널에 도착했다. 정말 오랜만에 발을 들인 청양읍내는 겨울 안개가 두텁게 내려앉아 가시거리가 100m 이내였는데, 마치 무너진 하늘의 구름 속에 갇힌 듯 눈 에 뵈는 것이 제..
1. 청원(청주) 두루봉동굴 유적 사진 청원 두루봉동굴 유적은 이 땅의 대표적인 구석기유적으로 꼽힌다. 이곳 역시 손보기 교수의 손을 거쳤는데, 석장리유적과 연천 전곡리유적, 단양 수양개유적만큼 중요한 곳임에도 발굴 이후 방치되어 크게 망가지고 만다. (석회암 광산으로 계속 쓰이면서 동굴 유적이 거의 아작났음) 2. 청원(청주) 두루봉 동굴 유적 안내문 3. 청원 두루봉동굴 유적 연구자료와 거기서 나온 뼈 예술품(사슴 정강이뼈) 4. 단양 상시 바위그늘유적 사진 이곳에서는 처음으로 구석기 사람의 뼈가 나왔다. (단양에는 매포읍 상시 바위그늘유적 외에 수양개유적, 금굴 유적 등의 구석기 유적이 있음) 5. '파른'이 무슨 뜻? 손보기 교수는 '파른'이란 호를 썼다. '파른'은 파란색을 뜻하는데 그 사연은 ..
* 공주 석장리 선사유적지 (석장리박물관) 금강 북쪽에 자리한 석장리 유적은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의 1번지이다. 즉 이 땅에서 처음 발견되고 우리 손을 거친 구 석기 유적이다. 이곳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64년 봄으로 미국인 대학원생 엘버트모어(Albert Mohr)와 그의 부인 샘플( L.L Sample)이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 유적을 발굴하고 금강을 찾아 석장리 강변을 살펴보던 중 무너진 층에서 뗀석기 를 찾았다. 그것이 석장리 유적의 첫 세상 데뷔였다. 그는 연세대학교 사학과 손보기 교수와 그해 5월 21일 석장리를 다시 찾아 쌓임층이 무너진 곳에서 석기를 여럿 찾았고, 발굴허가를 정식으로 얻어 그해 11월 11일 연세대대학원 사학과에서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하여 1965년부터 1974년까 지 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