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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늦겨울 나들이 (의열사, 금성산, 조왕사, 궁남지)



' 부여 늦겨울 나들이 '

금성산 성화대에서 바라본 부여읍내

▲  금성산 성화대에서 바라본 부여읍내

궁남지와 포룡정 국립부여박물관 석조여래입상

▲  궁남지와 포룡정

▲  국립부여박물관 석조여래입상



 


천하의 바다를 주름잡으며 거대한 해양대국을 일구었던 백제(百濟), 바다 건너 왜열도를
속방으로 거느리고 중원대륙(서토)의 수많은 해안 지역(요서에서 오월까지)을 점령해 다
스렸으며, <월남(越南, 베트남)과 동남아까지 장악했다는 설도 있음> 5세기 후반에는 산
동반도(山東半島)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북위(北魏)와 자웅을 겨루어 그들의 수십만 기병
을 묵사발로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수백 년 동안 동아시아를 주름잡던 백제는 660년 7월, 신라(新羅)~당(唐) 연합군
의 공격과 나라의 내부 분열로 허무하게 그 막을 내리고 만다.

충남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도읍(都邑)으로 여겨지는 곳으로 그때는 사비성(泗沘城)이라
불렸다. 백제 26번째 군주인 성왕(聖王, 재위 523~554)은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夫餘)로
바꾸고, 538년 웅진(공주로 여겨짐)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겼는데, 왕년에는 15만 호(戶)
의 약 80만 인구를 지녔던 대도시로 명성을 날렸다. (고구려 평양성은 21만 호, 신라 경
주는 17만 호)
허나 지금의 부여읍내를 보면 이곳이 과연 15만 호를 지녔던 현장인지 의문이 벌컥 든다.
터가 좀 작기 때문이다. 하여 사비가 부여가 아닌 다른 곳으로 보는 견해도 적지 않으며,
중원대륙(서토)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그렇게 장엄했던 사비성은 백제 멸망 이후, 조그만 고을로 전락하여 부여란 이름
으로 충남의 조그만 군(郡)으로 살아가고 있다.

겨울 제국의 기운이 조금씩 덜해가던 2월의 끝 무렵, 옛 백제의 영광을 느끼고자 간만에
부여를 찾았다. 거의 11년 만에 방문으로 설레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아침 일찍 남부터미
널로 이동하여 부여로 가는 시외직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서 부여까지는 거의 2시간 거리, 부여시외터미널에 도착하자 바로 첫 답사지인 의
열사로 이동했다. 그곳에 가려면 부여의 대표 명소로 꼽히는 정림사지(定林寺址)의 북쪽
돌담길을 지나가야 되는데, 돌담 너머로 정림사터와 정림사지오층석탑이 잠시 들렸다 가
라며 진하게 유혹의 눈짓을 보낸다.
허나 그들은 20대 시절에 실컷 둘러본 터라 쿨하게 통과했으나 오랜만에 만난 그들의 유
혹을 뿌리치기가 여간 힘들지가 않았다.



 

♠  백제와 고려, 조선의 충신을 봉안한 조그만 사당
의열사(義烈祠)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14호

▲  담장 밖에서 바라본 의열사

부여문화원 뒷쪽이자 금성산 서쪽 자락에는 의열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1575년 부여현감
홍가신(洪可臣)이 백제 의자왕(義慈王) 때 충신인 부여성충(扶餘成忠, 흔히 성충이라 불림)과
흥수(興首), 계백(階伯). 그리고 고려 후기 충신인 이존오(李存吾)를 봉안하고자 세웠다.
홍가신은 그들의 충의(忠義)가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대단함에도 천하에 너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안타까워 손수 사당을 세웠는데, 1577년 나라로부터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부여 출신
으로 선조 때 활동했던 정택뢰(鄭澤雷), 인조 때 문신인 황일호(黃一皓)를 추가 배향하여 백
제와 고려, 조선을 아우르는 6명의 인물을 봉안하게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6명)

1641년 사당을 새로 지었으며, 1866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가 이후 읍내 부근 용정리 망월산에 다시 지었다. 그러다가 1971년 현 자리로 이전되어 지금
에 이른다.

▲  굳게 닫힌 의열사 삼문(정문)

▲  뒷쪽에서 바라본 의열사

의열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사당 외에 재실(齋室) 1동을 갖춘 조촐한 규
모이다. 내가 갔을 당시는 태극마크가 그려진 삼문(三門)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어서 담장 바
깥에서 까치발로 대충 내부를 살폈다. 담장이 낮기 때문에 바깥에서 봐도 충분하므로 굳이 무
리하면서까지 담을 넘거나 문을 두드릴 필요는 없다.
매년 3월 20일, 9월 20일에 제향을 올리며, 사당 밖에는 의열사의 역사를 담은 의열사비가 있
다.

▲  적막이 스치는 의열사 뜨락

▲  의열사비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46호

의열사와는 실과 바늘의 관계인 의열사비는 1723년에 이간(李柬)이 썼다. 의열사의 건립 과정
과 역사, 이곳에 배향된 인물에 대해 적혀 있는데, 두툼하게 생긴 네모난 기단(基壇) 위에 빗
돌을 세우고 지붕돌로 마무리를 지은 단촐한 모습으로 용정리 망월산에 있던 것을 1971년 이
곳으로 옮겨왔다.

사당 앞에 서면 부여읍내가 전체는 아니지만 상당수 시야에 들어온다. 겨우 조그만 언덕을 올
라왔을 뿐인데도 이 정도까지 보이는 것은 읍내가 금강(백마강) 주변 평지에 둥지를 틀고 있
어서이다. 읍내를 둘러싸고 북쪽에 부소산(扶蘇山), 동쪽에 금성산이 있고, 서쪽과 남쪽은 백
마강에 감싸여 있다.

* 의열사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산3 (의열로29번길 11-33)


▲  금성산의 서쪽과 동쪽을 이어주는 계백문 생태다리

의열사 동쪽에 금성산으로 이어지는 조그만 길이 있다. 그 길을 오르면 쉼터를 갖춘 공원(남
령근린공원)이 나오는데,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계백문'이라 불리는 생태다리가 마중을 한다.

계백문은 계백로 도로 개설로 금성산과 의열사가 있는 산자락이 절단되자 그 끊어진 맥을 잇
고자 도로 위에 만든 일종의 생태다리이다. 온갖 수풀과 소나무를 가득 심고 그 중간에 박석
을 입힌 산책로를 내었는데, 이것이 도로 위에 만든 생태다리인지 그냥 산의 일부인지 모를
정도로 아주 감쪽 같이 만들었다. 다리 양쪽 사이드에는 노란색 바탕에 백제 깃발을 주렁주렁
달아놓아 백제 요새를 거니는 기분과 함께 이곳이 백제의 옛 도읍이었음을 잊지 않게 한다.

이 생태다리가 계백문이 된 것은 바로 계백로에 있기 때문이다. 황산벌(논산시 연산으로 여겨
짐)에서 신라의 5만 대군과 맞서다가 장렬히 전사한 계백 장군의 이름을 딴 도로로 계백에 대
한 부여 사람들의 마음과 자긍심을 진하게 비추고 있으며, 부여군청로터리에는 그의 동상까지
있다.


▲  서쪽에서 바라본 계백문 생태다리

▲  금성산 숲길 (성화대 방향)

계백문을 넘어 경사진 산길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느긋하게 펼쳐진 서쪽 숲길로
가면 무로정과 성화대로 이어지는데, 무로정 주변에는 몸을 푸는 운동시설이 여럿 있다.


▲  인간의 제일 큰 꿈, 불로(不老)를 담은 무로정(無老亭)

금성산 서쪽 봉우리에 자리한 무로정은 1977년 12월 부여군수 정연달이 지었다. 정자의 이름
인 '무로'는 늙지 않는다는 뜻으로 인간들의 가장 큰 소망을 머금고 있다.

허나 아쉽게도 이 세상 누구도 늙음에서 자유
로운 존재는 없다. 우탁(禹倬)의 탄로가(嘆老
歌)처럼 아무리 철통 같이 늙음이 오는 것을
막아도 결국 지가 알아서 찾아온다.
그러니 '무로'는 인간의 큰 꿈이면서도 부질없
는 꿈인 것이다. 하지만 이곳이 읍내 중장년층
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라 그들의 희망을 저
격하고자 이런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  필체가 또렷한 무로정 현판의 위엄

 


 

♠  부여읍의 포근한 뒷동산, 금성산(錦城山)

▲  부여읍내를 굽어보는 금성산 성화대

부여읍내 동쪽에 자리한 금성산은 해발 124m의 야트막한 뫼이다. 읍내 사람들의 포근한 뒷동
산으로 낙화암(落花巖)과 고란사(皐蘭寺), 백마강(白馬江)을 품은 부소산은 많이들 알고 찾아
가지만 금성산은 인지도가 낮아 찾는 이는 별로 없다. 아직까지는 지역 사람들의 숨은 뒷동산
인 것이다.

허나 이곳은 낮은 명성과 달리 부여의 꿀단지 같은 산이다. 산세가 넓고 길쭉해 부여읍의 동
쪽 지붕길을 이루고 있으며, 멀리 능산리고분군과 청마산성(靑馬山城)까지 이어진다. 경사도
완만하고 포근하며, 숲이 짙어 정상 주변은 산림공원으로 가꿔지고 있다.
또한 조왕사(금성산) 석불좌상과 의열사, 금성산성터, 백제 와적기단 건물터 등의 늙은 문화
유산과 성화대, 국립부여박물관 등 많은 명소를 품고 있다. 특히 성화대에 오르면 부여읍내와
부소산, 백마강이 훤히 시야에 들어와 조망도 매우 일품이다. 그러니 부여에 왔다면 그 흔한
곳들만 살피지 말고 금성산에도 꼭 안겨 보기 바라며 성화대에서 부여읍내를 굽어보며 한때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위엄을 날렸던 사비성의 모습을 상상 속에서 각자 그려보기 바란다.

* 금성산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가탑리


▲  사비 백제의 상징, 금동대향로가 새겨진 성화대(聖火臺)

금성산은 백제 후기에 오산, 부산(浮山)과 더불어 삼영산(三靈山)의 하나인 일산(日山)으로
깊히 신성시된 산이라 전한다. 백제가 번성했을 때는 이들 삼영산의 신(神)들이 자주 왕래를
했다는 전설이 있어 조촐한 겉모습과 달리 백제와 부여 땅의 중요한 산이었음을 알려주고 있
으며, 부여의 대표적인 축제인 백제문화제가 열리기 전에 이곳 성화대에서 삼신제(三神祭)를
지낸다.


▲  성화대에서 바라본 부여읍내 (정림사지와 백마강, 부산도 바라보임)

금성산은 부여읍내가 훤히 바라보이고, 읍내 동쪽에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부여를 지키는 요
충지로 매우 애지중지되었다. 하여 백제는 이곳에 산성을 쌓아 도성(都城)을 지켰고, 신라~당
연합군과 내부 배신자들에 의해 700년 이상 묵은 백제가 멸망하자 전국에서 백제부흥군이 들
고 일어나 신라~당 연합군을 부소산성 일대로 몰아넣고 금성산에 목책을 세워 도성 탈환을 노
렸다.


▲  성화대에서 바라본 부여읍내 남부 (궁남지 주변과 백마강)

▲  성화대에서 바라본 부여읍내 북부 (백마강과 구드래, 부소산)

성화대는 서쪽으로 펼쳐진 부여읍내를 굽어보고 있다. 읍내 전체는 물론 백마강과 규암면 지
역, 금성산과 함께 삼영산의 하나였다는 부산까지 훤히 시야에 들어오는데, 부소산은 읍내(남
쪽) 방향을 향해 이런 조망을 보기가 어려워 금성산이 부소산도 감당하지 못한 그 조망을 유
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  금성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소나무 숲길

금성산에는 소나무가 많아 솔내음의 품질도 좋은 편이다. 기왕 뫼에 왔으니 그 정상도 가보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그곳은 일정에 없었기 때문에 흔쾌히 통과하고 조왕사로 내려갔다. 솔직히
15분 정도만 가면 금성산 꼭대기로 왕복 30분에 머무는 시간 10분을 더해서 40분이면 충분하
거늘 그것도 귀찮아서 발길을 돌려버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다소 후회가 든다. 그렇다
고 나중에 또 간다는 보장도 없거늘 다시 가야 되는 빌미만 만들고 말았다.


▲  조왕사 윗쪽 산길 (성화대 남쪽)

▲  금성산의 소중한 선물, 조왕사 약수터

조왕사 동쪽에는 금성산의 젖줄인 조왕사 약수터가 있다. 부여읍내에서 유명한 약수터로 겨울
가뭄이 극심이지만 금성산의 마음이 넉넉한지 이곳만큼은 가뭄을 잊어도 좋다. 백제 후기부터
부여를 보듬던 금성산이니 그 마음이 오죽하랴.
겨울 단잠에 빠진 빨간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목구멍에 들이키니 갈증과 몸속의 체증
이 싹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없다.


▲  금성산 조왕사(朝王寺)

조왕사는 금성산 서쪽 자락에 안긴 조그만 산사(山寺)이다. 내가 금성산을 찾은 주된 이유는
바로 조왕사에 머물고 있는 늙은 석불을 보고자 함이다.
그 석불은 1913년 금성산 남쪽 자락의 옛 절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1919년 김병준이란 사람이
석불을 봉안하고자 불당 1칸을 지으니 그것이 조왕사 100년 역사의 시작이었다. 절 이름인 '
조왕'은 '제왕을 조근(朝覲)한다'는 뜻으로 왜정(倭政)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은 조선 왕조를
섬기려는 의도에서 지어졌다고 전한다.
1981년 요사(寮舍)를 새로 짓고, 1984년 왜인(倭人) 불자들이 보낸 돈으로 종각(鐘閣)을 지었
으며, 1987년 홍수로 발견된 옛 석탑의 부재를 수습해 대웅전 앞에 복원했다.

손바닥만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요사, 종각 등 3~4동의 건물이 있으며, 석불좌상과 석탑 등의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다.


▲  조왕사 석탑 - 부여군 향토유적 13호

잔디가 입혀진 대웅전 뜨락에는 고색의 기운이 짙은 엉성한 모습의 석탑이 있다. 그는 1987년
여름 홍수 때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부근에 묻혀 있던 석탑의 부재(部材)들이 거친 홍수로 다
시금 햇살을 보게 되자 그들을 꺼내 3층석탑으로 일으켜 세웠다.
바닥돌과 기단(基壇), 1층 탑신은 전혀 어색함이 없어 하나의 탑이었음을 보여주나 2층과 3층
은 발견된 탑돌과 지붕돌을 대충 끼어 맞추면서 상당히 어색한 모습을 자아내고 있다. 서로가
이토록 맞지가 않으니 아마도 2기 이상의 탑이 뒤엉켜 쓰러져 있던 것으로 보이며, 탑의 양식
으로 보아 조선 때 것으로 여겨진다.


▲  금성산 석불좌상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23호

대웅전 안에는 이곳의 대표 보물인 석불좌상이 소중히 봉안되어 있다. 그는 금성산 남쪽 자락
이름 없는 절터에 묻혀있던 것으로 1913년에 발견되었다.
다시 햇살을 보게 된 이후, 병을 낫게 해주고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영험한 석불로 소문이 나
면서 동네 사람들이 애지중지했으나 딱히 거처가 없어서 이리저리 옮겨다닌 것을 1919년에 비
로소 집이 생겼다. 그것이 지금의 조왕사이다.

그는 고려 때 석불로 거의 하얀 피부를 지니고 있는데, 얼굴 부분이 다소 검게 탄 것을 제외
하면 상태도 그런데로 양호하다.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고 있는 지권인(智拳印) 비슷한 수인
(手印)을 선보이고 있어 비로자나불로 여겨지며, 검은 꼽슬머리에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
이 얕게 솟아있다. 검은 때가 자욱한 얼굴은 마치 뚱보 아지매처럼 풍만한 모습이며, 길쭉한
눈썹과 눈, 코, 조그만 입, 귀가 남아있다.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주름선이 남아있으며, 어깨는 곡선으로 처리되었다. 그리고 그가 앉
은 네모난 대좌(臺座)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비록 확인은 못했지만 대좌 밑부분에
귀꽃이 핀 안상(眼象)과 밑을 향해 잎을 펼친 복련(伏蓮)이 새겨져 있다. (정면이 아닌 옆에
서 보면 연꽃대좌의 밑도리도 볼 수 있음) 석불의 높이는 127cm, 좌대 높이 96cm, 대좌 너비
는 95cm이다.

나는 그에게 삼배를 올리며 슬쩍 나의 민원을 넣어보았다. 접수가 제대로 되었는지는 석불이
무표정으로 일관하여 알 도리가 없지만 마음만큼은 잠시나마 편해진 기분이다. 석불 뒤에는
석가여래후불탱이 있으며, 주위로 신중탱 등의 그림이 법당(法堂) 내부를 환하게 수식한다.

* 조왕사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0-3 (계백로 334-47, ☎ 041-835-4091)


▲  금성산에서 읍내로 내려가는 길 (오른쪽 펜스 너머가 국립부여박물관)

조왕사를 둘러보고 서쪽 길을 따라 읍내로 내려갔다. 길 남쪽에는 국립부여박물관이 넓게 둥
지를 틀고 있는데, 원래는 부소산 남쪽 관북리에 있었으나 1993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면서
규모가 더욱 장대해졌다.
오랜만에 발을 들인 부여 땅이라 그를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어 1시간 정도 박물관 내부를 둘
러보았다. 게다가 입장료도 없으니 부담도 정말 없다.
(국립부여박물관에 대한 내용은 이쯤에서 쿨하게 자르도록 하겠음)

▲  박물관 뜨락에서 만난 부여 동사리석탑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21호

▲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普光寺 大普光禪
師碑) - 보물 107호

▲  당 유인원 기공비(唐 劉仁願 紀功碑) -
보물 21호

▲  제2전시관에 재현된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3존불



 

♠  백제 무왕(武王)이 만든 매우 오래된 백제시대 정원 유적
부여 궁남지(宮南池) - 사적 135호

▲  연꽃의 거대한 보금자리, 서동공원(薯童公園)

부여읍내 남쪽에 자리한 궁남지는 읍내 북쪽에 부소산성(낙화암, 고란사)과 구드래, 읍내 중
간에 국립부여박물관, 정림사지와 더불어 부여에 왔다면 꼭 들려야 되는 이 지역의 대표 명소
이다. 2002년 이후 궁남지 주변에 연꽃을 위한 연못과 논두렁을 가득 만들어 연꽃을 주렁주렁
심으면서 이제는 천하 제일의 연꽃 성지(聖地)이자 축제 장소로 크게 추앙을 받고 있다.

연꽃이 나래를 펼치는 한여름이나 9월에 왔더라면 그들의 즐거운 향연에 두 망막이 제대로 호
강을 누렸을텐데, 비수기나 다름이 없는 겨울 제국의 한복판에 오니 연못과 논두렁에는 누렇
게 뜬 식물만 가득하다. 그들이 바로 연꽃이었다. 비록 지금은 한결같이 우울한 모습이나 겨
울 제국의 압정(壓政) 속에도 몰래 봄을 잉태하며 소쩍새의 울음 소리를 기다린다.

여름 제국의 한복판(7월)에는 천하 제일의 연꽃 축제인 '부여서동연꽃축제'가 성대히 펼쳐진
다. 공원과 축제 이름에 들어간 서동(薯童)은 백제 30대 군주인 무왕(재위 600~641)의 휘(諱,
제왕의 이름, 본 이름은 부여서동)로 그가 궁남지를 닦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넣은 것이다.

서동공원은 궁남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공원 한복판에 궁남지가 연꽃처럼 자리해 이곳의 정취
를 크게 돋군다. 공원 북쪽과 서쪽, 남쪽에 주차장이 닦여져 있고, 담장도 갖추지 않은 사방(
四方)이 개방된 형태로 동,서,남,북 어디로든 자유롭게 접근이 가능하다.

▲  서동공원 연꽃 논두렁 산책로

▲  겨울에 잠긴 연꽃 논두렁 ①

▲  겨울에 잠긴 연꽃 논두렁 ②

▲  겨울에 잠긴 연꽃 논두렁 ③


▲  연꽃의 와신상담 현장
지금은 폐허의 현장이나 다름이 없지만 앞으로 4개월 이후면 사정이 180도 달라진다.
서동공원은 바로 그 여름에 와야 그 진가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  은빛 물결이 출렁이는 궁남지와 부여 속의 조그만 섬, 포룡정(抱龍亭)

궁남지는 634년 백제 무왕이 궁성(宮城) 남쪽에 조성했다. 그 연유로 이곳 이름이 궁남지(宮
南池)가 되었는데, 무왕은 가까운 백마강을 놔두고 멀리 20여 리나 되는 곳에서 물을 끌어들
여 연못을 채웠고, 그 주변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연못 한복판에 섬을 만들어 삼신
산(三神山)의 하나인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했다.
이 땅에 남아있는 가장 늙은 궁궐 정원 유적으로 어떤 자료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
라고 나와있는데, 인공 연못은 이미 삼국시대 초기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백제는 위례성(慰禮
城, 서울 송파구~강동구 지역으로 여겨짐)을 도읍으로 삼던 한성백제(漢城百濟) 시절부터 궁
궐에 연못을 만들었으며, 고구려 또한 그랬다. 다만 남아있는 것이 유감스럽게도 없으며, 궁
남지가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연못 유적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 아닌, 현존
하는 가장 오래된 연못임)

고구려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의 거친 남하정책에 위례성이 싹 털리자 백제는 급
히 웅진(熊津, 공주로 여겨짐)을 새 도읍으로 삼았다. 산동반도에서 북위의 대군을 격파하고
중원대륙(서토)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드높였던 동성왕(東城王)은 웅진 왕궁 안에 크게 연못
을 만든 바 있으며, 이후 무왕이 사비성 궁궐 남쪽에 연못과 별궁(別宮)을 만들어 놀았다.
이렇듯 백제의 조경 기술은 천하 제일의 수준급이라 신라는 물론 백제의 속국이자 별채였던
왜열도에도 전해져 왜열도 조경의 원류(源流)가 되었다.

백제가 사라진 이후, 궁남지는 철저하게 파괴되어 버려졌고, 방장선산을 본따 만들었다는 섬
과 연못 또한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완전히 헝클어졌다. 그러다가 1965년부터 2년 동
안 복원공사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허나 연못은 원래 크기의 ⅓ 이하로 축소
복원되었으며, 섬은 방장선산 대신 포룡정이란 정자를 지어 옛날과는 다소 다른 모습이다. 그
래도 작게나마 연못과 섬이라도 건진 것이 어디랴.


▲  세상을 향해 작게 다리를 내민 궁남지

▲  동쪽에서 바라본 궁남지

▲  서남쪽에서 바라본 궁남지

▲  포룡정으로 인도하는 나무다리

비록 연못이 왕년의 시절보다 덩치가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넓다. 지금도 이러하니 왕
년에는 완전 바다처럼 보였을 것이다. 백제 무왕이 자신의 위엄과 백제의 힘을 천하만방에 강
조하고자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 만들었으니 말이다.
무왕과 그의 뒤를 잇는 의자왕은 여기서 왕족, 귀족들과 화려하게 연회를 벌이며 종종 뱃놀이
까지 즐겼다. 저 연못과 별궁을 짓고자 수많은 백성들이 동원되었고, 적지 않은 이들이 공사
중에 다치거나 죽어갔다. 또한 망족(望族, 왕족, 귀족)들의 여흥을 위해 백성들의 고혈도 적
지 않게 들어갔으니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그래도 이렇게 연못이라도 남겨주어 백제의
우수했던 조경 기술에 대해 작게나마 속삭여준다.

연못 한복판에는 동그란 섬이 두둥실 띄워져 있는데, 이 섬이 옛날 방장선산이 있던 현장이라
고 한다. 부여 속의 작은 섬으로 그곳에 가려면 남쪽을 향해 뻗은 나무 다리를 건너야 된다.
이 다리 역시 궁남지를 복원하면서 경복궁 향원정(香遠亭)의 나무다리를 모방하여 지은 것이
라 백제 것과는 완전히 차이가 있다. 물론 무왕 시절에도 섬을 잇는 다리는 있었을 것이나 다
리와 관련된 존재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지금 다리는 1987년에 유실된 것을 다시 만든 것이다.

섬과 세상을 유일하게 이어주는 나무다리는 두 사람이 교행할 정도로 폭이 좁고 난간 또한 아
주 낮다. 그렇다고 특별히 안전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며 연못의 깊이도 2~4m에 이르니 다리
에서 장난을 치거나 뛰어가는 행위는 절대로 하지 말자.


▲  포룡정 나무다리 한복판

▲  포룡정 서쪽에서 바라본 나무다리

▲  동그란 섬에 지어진 포룡정

▲  김종필이 1973년에 쓴 포룡정 현판

▲  포룡정 동쪽에서 바라본 나무다리

포룡정은 1965년에 섬을 다시 재현하면서 지은 네모난 정자이다. 포룡이란 용을 품고 있다는
뜻으로 무왕의 탄생설화에서 따왔다고 한다. 허나 그 이름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닌 1965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섬과 포룡정은 백제 시절과는 거리가 멀게 콩 볶듯 재현된 것이라 나중
에 꼭 시대에 맞게 손을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포룡정 현판은 1973년(계축년)에 김종필이 쓴 것이며, 내부에는 2005년에 작성된 포룡정기가
걸려있다.


▲  포룡정에서 바라본 연못 건너 풍경 (사진 중앙에 돛단배가 있음)

▲  버드나무가 심어진 궁남지 연못 산책로

▲  땅에 기대어 고된 몸을 쉬고 있는 돛단배 (주로 주말에 배를 띄움)

▲  궁남지 백제우물 유적

궁남지 남쪽에는 백제우물 유적이 누워있다. 우물은 보존 및 위험방지를 위해 흙과 잔디로 빼
곡히 덮어두어 내부 확인은 불가능하다. (우물유적 옆에 내부 사진을 첨부한 안내문이 있음)
우물의 깊이는 6.2m, 상부 너비 0.9~1m, 하부 너비 1m의 평면원형으로 궁남지 남쪽에 있는 것
으로 보아 별궁 우물로 여겨진다. 우물 속에서는 백제시대 와전과 토기, 농기구의 목제류, 동
물뼈 등 다양한 유물이 나왔으며, 백제시대 우물 양식과 토목기술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존재이다.


▲  궁남지 남쪽 연꽃 논두렁 ①

▲  궁남지 남쪽 연꽃 논두렁 ②

궁남지와 서동공원 일대를 1시간 정도 둘러보고 공원 서쪽에 자리한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
를 찾았다. 하지만 내가 길을 잘못 들었는지 아니면 군수리사지가 다른 데로 마실을 갔는지
찾지를 못했다. 예전에 분명 갔던 곳으로 내가 10년 이상 찾지 않은 사이에 공원 주변 지도가
많이 바뀌긴 했어도 거의 99.99% 이상은 다 찾아가는 편인데, 이상하게도 그를 발견하지 못해
0.01%의 실수율을 보이고 말았다. 나도 이제 늙은 것인가? 아니면 군수리사지의 얄미운 숨바
꼭질 장난인가?

시간은 어느덧 15시 30분, 햇님도 뉘엿뉘엿 퇴근 준비를 서두른다. 그날 일정은 백마강을 건
너 규암리에 있는 수북정(水北亭)과 자온대(自溫臺)까지 보는 것이었는데, 겨울 제국이 심술
을 부리면서 날씨도 좀 추워지고, 몸도 상당히 지쳐서 그들을 다음으로 모두 이월처리하고 나
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언제 또 인연이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숨쉬는 동안에는 반드시 올
것이다.
이렇게 하여 늦겨울 부여 나들이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궁남지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 (궁남로 52 ☎ 041-830-2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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