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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향천사9층석탑과 그 뒷쪽에 자리한 나한전

향천사9층석탑은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로 높이는 3.75m이다. 이 탑은 이곳의 2번째 주지를

지낸 도장을 기리고자 세웠다고 전하며, 백제가 사라진 이후인 7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

지는 백제 탑의 후예이다.

이렇게 지긋한 나이를 지니고 있지만 탑신과 기단 부분의 피부 색깔이 너무나 틀려 상당히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기단부는 그래도 고된 세월의 때가 자욱하여 까무잡잡하나 탑신은 그와는 상반되

게 하얀 피부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탑이 이 모양이 된 것은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절을 파괴

하면서 탑을 아작냈기 때문이다.

또한 절에는 2기의 석탑(5층탑이라는 설이 있음)이 있었는데, 모두 파괴되어 흩어진 것을 하나로

모아서 수습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본래 9층석탑으로 보기도 어렵다.

 

새로 만든 2중의 네모난 바닥돌 위에 얹혀진 이 탑은 2중의 헌 바닥돌 위에 1층 기단을 올리고 그

위에 9층탑을 얹힌 형태로 3층까지는 탑신이 잘 남아있으나 4층부터는 탑신이 없어지고, 여기저

기 깨진 지붕돌만 포개진 모습으로 놓여져 있다. 얇고 넓적한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고

있으며, 탑 꼭대기에는 사각 받침돌 위에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이 살짝 놓여있다.

비록 백제시대 탑은 아니지만(일부에서는 백제 탑이라고 함) 백제탑을 계승한 탑으로 온전하게 남

지 못해 많은 아쉬움을 준다.

 

그리고 탑 뒷쪽으로 부처의 열성 제자인 16나한이 봉안된 나한전이 있는데, 그는 1983년에 옛 극락

전을 부시고 만든 건물이다.

 

2. 검은 때로 자욱한 늙은 괘불석주

괘불을 걸어두는 석주이다. 괘불은 친견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존재로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등

극히 일부 날에만 잠깐씩 외출을 나온다.

 

 

3. 근래 조성된 석조약사여래좌상

예전에는 없던 존재로 파리도 능히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를 자랑한다. 왼손에 약합 같

은 것을 들고 있는 것을 통해 그의 정체가 동방정토의 주인장인 약사여래임을 알려준다.

 

 

4. 향천사의 법당, 극락전에 봉안된 아미타삼존상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꽃을 든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자리해 아미타삼존상을 이룬다. 이

들은 단향목으로 만든 것으로 1359년 또는 조선 초기나 중기에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5. 향천사 괘불이 고이 깃든 괘불함 (극락전 내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괘불이 저 길쭉한 괘불함에 들어있다. 괘불은 워낙 만나기가 힘들어서 운에 맡기

지만 괘불함은 종종 이렇게 만난다.

 

6. 천불선원 앞에 자라난 늙은 느티나무

추정 나이는 350년 정도라고 하며, 높이는 20m로 천불선원에 늘 그늘을 드리워준다. 장대한 세월을

먹고 자란 그의 허리 둘레는 약 3.1m이다.

 

7. 경내 서쪽에 자리를 닦은 천불선원

경내에서 조그만 계곡을 건너 서쪽 언덕을 오르면 따로 담장을 두른 천불선원이 모습을 비춘다. 이곳

은 천불도량을 자처하는 향천사의 중심이자 성지와 같은 공간으로 천불전 주변에 부속 건물 2동을 만

들고 이를 담장으로 둘러 천불선원으로 삼았다. 예전에는 속인들의 출입을 통제했다고 하는데, 이제

는 자유롭게 들어갈수 있다.

 

8. 향천사 천불전

천불선원의 중심인 천불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세운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이다.

경내에서 극락전에 버금가는 건물로 현판에 쓰인 이름 그대로 1,000불이 봉안되어 있다.

이 건물은 의각이 당나라 오자산에서 직접 만든 3,053기의 불상과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16나한을 봉안하고자 세운 것이라고 전하며, 840년에 보조국사가 당나라에서 1,053기의 불상을 가져

와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596년에 멸운이 다시 중건했으며, 1984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어

찌된 영문인지 1986년에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지금의 새 건물을 지어 옛날의 구수한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건물을 다시 지었음에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박탈당하지 않은 것은 불단에 봉안된 불상

때문인듯 싶으며, 천불의 조성 시기는 전설과는 달리 조선 초기로 보인다.

 

건물의 이름 그대로 1,000기의 불상이 있어야 되지만 정확하게는 그보다 1.5배 많은 1,515기의 불상

이 불단을 어지럽게 메우고 있다. 이는 이 땅에 널린 천불전의 불상 수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로 그 흔

한 이름 천불보다는 눈에 좀 띄게 천오백불(1,500불)이라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천불과 3천불은

많지만 1,500불은 희귀하기 때문이다.

이들 천불은 미혼자의 혼인 대상자를 점쳤다는 전설이 있으며, 우리나라 7천 만 인구 마냥 가지각색

의 모습과 표정으로 개성들이 넘친다. 모두 하얀 불상으로 작은 불상은 대부분 석고상이고, 큰 불상

은 돌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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