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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봉원사 대방 석조여래좌상

흥선대원군의 공덕동 별장인 아소정을 가져와서 삼은 대방(염불당)은 승려의 생활 공간 및 손님 공

간, 유가족을 위한 49재, 그리고 영산재와 범패를 지도하는 공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대방 불단에는 아기나 동자승처럼 생긴 조그만 하얀 피부의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는 높

이 37cm에 작은 불상으로 경주 불석으로 조성되었는데, 원래는 철원 심원사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6.25때 심원사가 파괴되면서 그곳에 깃든 많은 불상과 보살상이 전국에 흩어졌는데, 그때 들어온 것

으로 보이나 확실한 것은 없다.

그의 작은 뱃속에서는 '금강반야바라밀경'과 '팔엽대홍련지도', '준제구자천원지도', '열금강지방지도'

등 각종 다라니가 나왔는데, 그들을 머금은 복장 주머니에는 '證明臣 華應 亨眞 謹封(증명신 화응 형

진 근봉)'이라 쓰인 띠가 둘러져 있다. 허나 이들은 20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화응 형진이 봉안한 것이

지 불상 조성 당시 것은 아니다.

예로부터 영험이 있다고 전해져 불상에 대한 기도 수요가 적지 않으며, 추사 김정희가 직접 쓴 파란

글씨 현판과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승려의 신장도(부엌문에 있음) 등이 대방 내부와 외부를 아낌없이

수식한다.

 

2. 문 안쪽 불단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

석불의 보호를 위해 불단 앞에 여닫는 붉은 문을 설치했다. 석불 뒤로는 색채가 고운 후불탱이 자리해

불상의 뒤를 든든히 받쳐준다.

 

3. 확대해서 바라본 석조여래좌상의 위엄

 

4. 추사 김정희가 쓴 산호벽루 현판

 

5. 추사의 스승인 옹방강이 썼다는 무량수각 현판

 

6.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 현판

 

 

7. 팔작지붕을 휘날리는 봉원사 대웅전

봉원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봉원사가 연세대 자리에 있던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1748년 절을 옮겨오

면서 조금 변형된 것으로 보고 있다. 18세기 중반 건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8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는데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린 사찰 건축물은 화계사 대웅전,

흥천사 극락전과 명부전, 그리고 봉은사 선불당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일찌감치 서울 지역 조선 후기

사찰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봉원사 대웅전은 1991년 삼천불전을 무리하게 짓는 과정에서 전기 누전으로 홀라

당 태워먹고 말았다. 그때 영조가 내린 봉원사 현판을 비롯해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던 조선 후기 탱

화들이 모조리 재가 되었으니 6.25 시절 피해만큼이나 그 안타까움은 실로 컸다.

이후 2년 동안 공사를 벌여 1993년에 생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일으켜 세웠지만 떠나간 지방문화재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으며, 승려 이만봉이 탱화와 단청 대부분을 그려 건물 내부는 매우 화려하다.

 

대웅전 안에는 조그만 범종(서울 유형문화유산)이 하나 깃들여져 있다. (종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흥선대원군이 부질없는 명당 욕심으로 예산 덕산에 있던 가야사를 불지르고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그

곳으로 이전했는데, 그때 가야사에서 수습된 종이라고 한다.

 

8. 대웅전 앞에 차려진 연꽃 밀림

 

9. 삼천불전에서 바라본 3층석탑과 대웅전 주변

 

10. 봉원사3층석탑

절에 필수 요소인 석탑은 보통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다. 허나 봉원사는 풍수지리 때문인지 오랫동

안 탑이 없었다.

1991년 7월 봉원사 승려와 신도 75명이 스리랑카의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에 있는 강가라마

사(寺)를 방문했는데, 그곳 대승정인 그나니사라가 부처의 사리 1과를 선물로 주면서 봉원사도 어엿

한 진신사리 보유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사리는 가져왔으나 정작 탑을 세우지 못해 애를 태우다가 삼천불전이 세워진 이후 신도들의 지원으

로 석가탑을 닮은 3층석탑을 세우게 되었다. 대웅전 앞에 세우면 좋으련만 삼천불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그 앞에 세워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를 마음껏 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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