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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충무공 조영무 신도비

광주 퇴촌면의 중심지인 광동리에서 남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첩첩한 산골에 조영무장군묘가

있다. 원래는 그곳 대신 다른 곳으로 갈 생각으로 퇴촌면에 들어섰으나 버스 시간 문제로 부득이

퇴촌면 중심지에서 가까운 조영무묘를 꿩 대신 닭으로 찾게 되었다.

 

내가 갔을 때는 마침 퇴촌면 중심지에서 퇴촌 토마토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이번이 22회로 매년

6월에 사흘 정도 일정으로 열리는데, 퇴촌 지역이 토마토로 제법 유명하다고 한다. 허나 축제는

가족 단위 나들이객, 어린이들, 토마토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눈에 주로 맞춰져 있어서 혼자 찾은

나에게는 딱히 흥미거리는 없었다. 하여 간단히 둘러보고 조영무묘로 향했다.

 

조영무(?~1414)는 사극 '용의눈물'과 '태종이방원'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고려 후기~조선 초

기 무인으로 본관은 한양인데, 고려 후기에 중원대륙에서 넘어온 조지수의 고손이자 한산백 조

세진의 아들이다. 그는 체격이 좋고 무예가 무지 뛰어났는데, 조상 대대로 고려의 중원대륙 영토

에서 살다가 살던 곳이 몽골(원나라)에게 넘어가고 이후 중원대륙 쪽을 명나라가 차지하면서 고

려 본토로 넘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성계의 그늘에서 활동했는데, 나이는 이성계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그

의 아들인 이방원과도 친했다. 하여 1392년 그의 명으로 개경 한복판인 선죽교에서 포은 정몽주

를 죽였으며, 이후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판전중시사에 올라 개국공신 3등으로 한산군에 봉해졌

다.

1394년 상의중추원사로 강계등처도병마사를 겸임했으며, 1397년에 충청도 도절제사가 되었다.

1398년에 역시 이방원을 도와 정도전을 척살했는데, 그 일로 태조 이성계의 미움을 받아 잠시 곡

산에서 유배살이를 하기도 했다.

허나 곧 풀려나 문하시랑찬성사가 되었으며, 1399년 정사공신 1등에 봉해졌다. 이후 판중추부사,

의흥삼군부중군, 동지절제사, 참찬문하부사가 되었다.

 

1400년 '도독중외제군사도진무'로 임명되어 병권을 장악했으며, 1400년 이방간, 박포의 난 때 이

방원을 다시 도와 좌명공신 1등이 되었다.

태종이 공신과 무인들의 사병을 혁파하려고 하자 이를 불쾌히 거부했으며, 심지어 무기를 가지러

온 군관까지 구타했다. 하여 황주로 유배되었으나 결국 태종의 뜻에 굴복하니 이에 재등용되어 서

북면도순문사 겸 평양부윤이 되었다.

 

이후 판삼군부사, 권행의정부사, 판승추부사를 거쳐 영승추부사로 병조전서를 겸임했으며, 1405

년 우정승이 되었다. 1406년 판이병조사를 겸직했으며, 1409년 훈련관도제조, 영삼군부사 등을

역임하다가 병으로 사직했다.

1412년 수군첨절제사에 임명된 박영우의 취임 거부로 조정에서 말썽이 생기자 그를 추천한 일로

탄핵을 받아서 파직되었으나 1413년 우정승으로 복직되었다.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광주시 퇴촌에서 말년을 보냈는데, 조영무의 호가 퇴촌이라 지역 이름이 퇴

촌이 되었다. 1414년 사망하자 태종은 크게 애통해하며 충무공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무덤을 크게

지어주었다.

 

태종의 총애가 대단하여 궁궐 궁녀를 크게 건드렸음에도 별다른 징계를 받지 않았으며, 용의눈물에

서는 조금은 코믹한 인물로, 태종이방원에서는 위엄있는 인물로 나온다. 또한 오랫동안 무인으로 활

동했으며, 처음에는 이성계, 이후로는 이방원의 측근으로 활동해 그를 위해 견마지로를 다했다. 물

론 사병혁파 문제로 갈등이 다소 있기는 했으나 결국 태종의 뜻을 따랐으며, 그 대가로 높은 벼슬과

막대한 부를 받았다.

 

조영무신도비는 조영무묘 동쪽 산너머에 자리해 있는데, 근래 세운 것이다. 산너머라고 해서 한참 거

리가 있는 것은 아니며, 퇴촌면 중심지에서 조영무묘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다.

 

2. 조영무묘로 인도하는 가파른 오르막길

예전에는 무덤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이 있었으나 근래 주변을 손질하면서 끝부분만 남겨두었다. 그러

다 보니 딱히 통행 편의도 없는 각박한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된다.

 

3. 조영무장군묘

조영무묘는 고려~조선 초기 무덤 양식인 네모난 봉분을 중심으로 묘표, 상석, 향로석, 장명등, 문인석,

망주석, 곡장을 지니고 있다. 이중 네모난 봉분과 장명등, 문인석 정도만 무덤을 만들던 15세기 것이

며, 나머지는 근래 새로 보충했다.

 

4. 조영무묘 앞에 차려진 석물들

키 작은 장명등과 문인석 2기는 고색의 기운이 역력해 500~600년 세월의 기운이 느껴진다. 망주석과

그 바깥에 있는 새로운 장명등은 근래 마련해 늙은 장명등, 문인석과 다소 어색한 조화를 보인다.

 

5. 조영무묘로 인도하는 각박한 오르막길 (조영무묘에서 바라본 모습)

 

6. 늙은 문인석과 젊은 망주석

 

7. 고색의 기운이 크게 느껴지는 장명등과 봉분, 묘표

조영무묘는 15세기 무덤 양식을 잘 간직한 늙은 묘이나 아직까지 그 흔한 경기도 지방문화재나 광주

시 향토문화유산의 지위도 얻지 못했다. (후손들이 문화재 지정에 관심이 없는듯) 게다가 무덤을 알

려주는 이정표도 없다. (다음카카오지도와 네이버지도, 카카오버스 앱 지도에는 무덤이 나와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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