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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확 신도비를 머금은 신도비각

옛 능내역에서 가까운 능내리 다산로(옛 6번 국도) 길가에 한확 신도비를 머금은 큰 비각이 있다. 신

도비는 왕족과 2품 이상의 고위 관리의 무덤에만 쓸 수 있던 비싼 비석으로 보통 신도로 통한다는 무

덤 동남쪽에 둔다. 이곳 역시 한확묘 동남쪽에 신도비를 세워 그 원칙을 지키고 있다.

 

비석의 주인공인 한확(1403~1456)은 청주한씨 집안이다. 조선은 시작부터 명나라 주씨왕조에 지극한

저자세를 취하며 우리의 장대한 역사와 고려의 너른 영역을 아주 대차게 말아먹었는데, 초반에는 이쁘

장한 어린 여인을 뽑아 명나라에 공녀까지 보내는 크나큰 국치까지 보였다. 그 과정에서 한확의 큰누

이가 공녀로 명나라 조정에 팔려갔는데, 운이 좋게도 명 태종의 후궁인 여비가 되었다. 그로 인해 한확

은 명나라에서 광록시소경이란 벼슬을 받았으며, 공녀로 또 보낸 그의 막내 여동생 또한 명나라 선종

의 후궁인 공신부인이 되었다.

그 덕에 1435년 조선 조정으로부터 중추원부사란 벼슬을 처음 받으면서 조선과 명 양쪽에서 큰 벼슬

을 누렸다. 그것도 모자라서 그의 딸이 세조의 며느리이자 덕종(세조의 첫째 아들)의 부인으로 들어가

니 그가 그 유명한 소혜왕후(인수대비) 한씨이다.

 

한확은 공녀로 팔려간 누이들 덕에 명나라에도 큰 기반과 벼슬을 지니고 있다 보니 주로 명나라에 공

무로 가는 사신 업무를 많이 담당했다. 1420년에는 명나라 조정에 금, 은을 조공물품에서 빼줄 것을

요구해 그것을 관철시켰으며, 1456년에는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이유와 당위성을 명나라

조정에 설명하여 세조의 왕위 승인을 받게 했다. 허나 그해 조선으로 돌아오다가 병으로 사망하니 그

의 나이 53세였다.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1453년)에 참여해 서성부원군이 되었으며, 세조가 즉위하자 서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양절'로 무덤은 남양주 능내에 썼는데, 이 무덤 자리는 원래 세조가 자신의 능자리

로 봐둔 곳이라고 한다.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사돈이기도 한 한확에게 그 고마움의 뜻으로

자신의 능자리를 흔쾌히 내주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이곳 지명이 능내가 되었다고 전한다.

 

한확의 묘는 문인석 2기와 큼직한 장명등, 묘표, 상석을 지니고 있으며, 봉분은 네모난 모습으로 덩

치가 좀 큰 편이다. (고려와 조선 초기에 네모난 봉분 무덤이 많았음)

무덤 동남쪽 밑에 자리한 신도비는 1495년에 마련된 것으로 소혜왕후(인수대비)가 부친 무덤에 신

도비가 없는 것에 크게 슬퍼하자 성종(소혜왕후의 2쨰 아들)이 명을 내려 비석을 만들게 했다. 허나

그 사이 성종은 붕어했으며, 그의 뒤를 이은 연산군(1495년)이 비석을 완성시켰다.

비문은 어세겸이 짓고, 글씨는 임사홍이 썼으며, 글씨는 송설체이다. 비석의 비신 높이는 257.5cm,

너비 129cm, 두께 23cm으로 비좌의 높이가 커서 전체 높이는 4m가 넘는다. 하여 조선시대 신도비

중 가장 크고 높은 편에 속하며, 조각 수법도 우수해 잘생긴 신도비로 꼽힌다.

비신에는 한확의 생애와 업적, 그의 가족과 자녀(3남 6녀), 그의 외손주(성종, 월산대군, 명숙공주)

등이 언급되어 있다.

 

비석은 대리석으로 다진 것으로 기단석 위에 비신, 이수를 차례로 올렸는데, 이수에는 이무기 2마리

가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모습을 조각했다.

2. 신도비각 속에 들어있는 한확 신도비의 위엄

예전에는 비각이 없었으나 20세기 후반에 비석 보호를 위해 비각을 만들어 씌웠다.

 

3. 한확묘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네모난 큰 봉분과 묘표 2기, 상석, 혼유석, 문인석, 장명등, 망주석을 지니고 있다. 이중 묘표(묘비)는

무척 늙어서 그 옆에 이수를 지닌 새 묘표를 만들었으며, 상석도 새것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망주석도

새로 붙여 넣었다.

 

4. 한확묘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5. 한확묘에서 바라본 신도비각

신도비의 큰 덩치에 걸맞게 비각을 짜다 보니 비각이 조선 왕릉 비각 이상으로 꽤 큰 모양새가 되었다.

이렇게 한확의 신도비를 크게 짠 것은 그가 성종의 외조부이자 소혜왕후의 부친이며, 세조와 사돈이

자, 명나라 태종과 선종의 처남도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단한 위치와 권세를 지녔고, 모후(소혜왕

후)의 부탁도 있었으니 비석이 자연히 커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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