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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엔군 초전기념관에 전시된 구 초전기념비 동판

오산에서 화성 병점, 수원, 서울로 넘어가는 죽미령 고개에는 오산시의 꿀명소로 크게 추앙을 받고

있는 유엔군 초전기념관과 죽미령평화공원이 넓게 자리해 있다.

죽미령은 오산시 북부에 자리한 고개로 고개 서쪽과 남쪽에는 회색빛 아파트로 무지하게 도배된 세

교지구가 닦여져 있는데, 이 고개는 우울했던 6.25 시절 유엔군이 처음 나섰던 전투의 현장으로 사

연은 대략 이렇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불법남침을 자행해 6월 28일 서울을 털어먹고 7월이 되자 한강을 건너 경

기도 남부 지역까지 우걱우걱 먹어들어갔다. 원래 북한의 계획은 서울을 완전히 포위하여 전쟁을 끝

내는 것이었으나 춘천, 홍천에서 우리군에게 크게 고전을 하면서 그 계획은 흔쾌히 좌절 된다. 하여

3일만에 서울을 먹었음에도 한강을 바로 건너지 못하고 여러 날을 지체했고, 그 사이 우리군과 미국

군은 잠시나마 정비를 했다.

 

6.25가 터지도록 수수방관했던 미국은 늦게서야 자기네 군사들을 우리나라로 파병해 우리군을 돕게

했는데, 그중에는 스미스부대(스미스특수임무부대)가 있었다. 그들은 C-54더글라스호를 타고 부산

으로 들어와 경부선 열차를 타고 대전까지 올라왔는데, 거기서 평택과 안성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

았다. 하여 평택까지 왔으나 오산 죽미령이 방어에 좋을 것이라 여겨 평택보다 훨씬 북쪽인 죽미령

까지 들어왔다.

죽미령에 이른 시간은 7월 5일 새벽 3시, 그날 따라 여름비가 무지하게 쏟아졌는데, 비를 맞으며 죽

미령 도로와 경부선 철로 부근에 진지를 구축했다. 도로를 포함한 좌측 능선에 B중대를, 경부선 철로

좌측에 있는 진지 내 우측 고지에는 C중대를 배치하고 105mm 포대를 죽미령 후방 수청리(오산 수

청동)에 포진시켰다.

 

아침 7시가 되자 견고한 무쇠덩어리의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8시 16분 스미스부

대는 사격을 개시해 그들을 맹렬히 공격했지만 소련제 T-34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주

지 못했다. 그리고 오전 10시가 되자 약 10km에 달하는 북한군의 행렬이 나타났다.

스미스부대는 3대의 견고한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보병을 공격했지만 오히려 북한군에게 퇴로를 차

단당했으며, 전차가 중앙을 돌파하면서 방어선은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탄약과 병력이 크게 소진된 스미스부대는 14시 30분, 퇴각을 결정하여 후퇴하고 말았으니 이 전투에

서 스미스부대원 540명 중 보병 150여 명, 포병 3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으며, 북한군은 150

여 명이 전사 또는 실종되었다.

 

이 전투는 미국이 중심이 된 유엔군의 첫 전투로 이 첫 전투에서부터 미군은 북한군에게 완전 털렸다.

하지만 이 전투를 계기로 유엔군의 참전은 가속화되었으며, 북한은 미국이 개입하기 전에 남한을 모

두 털어먹을 계획이었으나 남침 10여 일 만에 미군의 참전을 확인하게 되면서 크게 긴장하게 된다.

 

죽미령 전투 현장에 자리한 유엔군 초전기념관은 2013년 4월 23일에 개관했다. 그해 5월 13일 국가

보훈처로부터 현충시설로 지정되었고, 그해 8월 7일 경기도 공립박물관으로 등록되었으며, 2019년

초전기념관 북쪽에 스미스평화관을 만들고 북쪽과 동쪽에 오산 죽미령평화공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2020년 7월 5일 스미스평화관과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이 정식으로 속세에 열렸다.

 

아랫 사진의 동판은 죽미령 전투에서 전사한 스미스부대원들을 추모하고자 1955년에 세운 구 초전

기념비 기단부에 있던 것으로 기념비를 세운 계기가 적혀 있었다. 허나 1963년 어느 좋지 못한 손에

게 도난을 당해 멀리 미대륙까지 흘러들어갔는데, 1977년에 지갑종 유엔한국참전국협회장이 하와이

에 있는 어느 골동품점에서 정말 우연히 발견했다.

하여 1978년 팀스피리트 훈련에 참가하는 미 제25사단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이 땅에 들어왔고, 2014

년 오산시에 전달되면서 이렇게 초전기념관에 평화롭게 안착한 것이다. 초전기념관이 아닌 그의 원

래 자리인 초전기념비에 붙이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그 자리에는 1964년에 붙인 석재가 있어 공간이

없다.

 

2. 구 유엔군 초전기념비의 과거 사진들 (1978년에 미군으로부터 초전기념비 동판을 건네받는 사진

도 있음)

 

3. 새 유엔군 초전기념비

1955년 7월 죽미령에 유엔군 초전기념비를 세웠다. 하지만 기념비가 늙음에 따라 1982년 4월에 새

기념비를 마련했는데, 이전 기념비보다 규모도 크고 눈요깃감도 늘었다.

편의상 이전 기념비를 구 유엔군 초전기념비, 1982년에 마련된 기념비를 새(신) 유엔군 초전기념비

라 부르며, 구 기념비는 2019년 죽미령 평화공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4. 죽미령 평화공원에 크게 닦여진 천하 제일의 국기, 태극기 깃대

 

5. 죽미령 평화공원에서 바라본 화성시 병점과 동탄 지역

예전에는 이곳 주변이 완전 시골이었으나 개발의 칼질이 요란하게 춤을 추면서 죽미령 밑까지 회색빛

도시들이 들어왔다.

 

6. 죽미령에 남겨진 전쟁의 상흔

2017년 4월 10일부터 4월 21일까지 죽미령 전적지구 일대 4개 지점에서 발굴조사를 벌였다. 하여 포

탄 편과 기름통, 포탄 두, 벨트, 전투화 편 등을 건졌으며, 죽미령 평화공원 사업부지에서 2017년 12

월부터 2018년 4월까지 시굴 및 발굴조사를 벌여 죽미령 전투 때 쓰였던 실탄과 탄피 여럿을 건졌다.

하지만 그때 전사하거나 실종된 군사들의 유골은 찾지 못했다.

 

7. 구 유엔군 초전기념비

구 초전기념비는 1955년 7월에 세워졌다. 1950년 7월 죽미령 전투에 참여했던 스미스 부대원들이

1955년 이곳을 다시 찾았는데, 그때 전사한 전우들을 기리고자 지역 유지들과 함께 540개의 돌을 쌓

아서 만들었다.

딱히 기교가 없는 소박한 모습으로 오산 지역 주민들은 이 탑을 UN탑이라 불렀으며, 원래는 죽미령

전투 때 보병 B중대 1개 소대가 배치되었던 1번 국도 건너편 99고지에 있었으나 2019년 평화공원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그리고 기념비의 기단부는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롭게

제작했다.

 

8. 죽미령 평화공원 상징 조형물

죽미령평화공원에는 여러 조형물이 자리를 채우고 있는데, 이들은 2019년 이후에 마련된 것으로 그

들 중 딱 하나만 사진에 담았다.

이 조형물은 미국 스미스부대와 북한군과 첫 전투가 벌어진 1950년 7월 5일 오전 8시 15분부터 14시

30분까지 6시간 15분간 벌어진 죽미령 전투를 상징적인 형상으로 나타내고, 스미스 부대원의 희생으

로 조금이나마 이루어진 현재 평화를 밝은 이미지의 다채로운 색감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감사'의 꽃

말을 가진 다알리아 꽃을 가운데에 배치해 6.25 시절 참전용사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상징하게 했다.

 

유엔군 초전기념관과 죽미령 평화공원, 유엔군 초진기념비는 모두 둘러봤으나 스미스평화관은 시간

이 늦은 관계로 들어가지 못했다.

(관람시간 9~18시, 17시까지 입장, 매주 월요일과 설날, 한가위, 1월 1일은 휴관, 입장료 없음, 다만

죽미령 평화공원은 관람시간에 제한이 없으며, 스미스평화관의 VR체험은 이용료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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