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운길산 수종사


' 한여름 산사 나들이, 운길산 수종사 '
수종사에서 바라본 천하
▲  수종사에서 바라본 천하
 


여름 제국의 위엄이 사해를 떨치던 7월의 첫 무렵, 일품 조망을 자랑하는 운길산 수종사
를 찾았다.
그곳의 일품 조망이 갑자기 당겨서 바로 짐을 꾸리고 가게 되었는데<짐이라고 해봐야 돈
과 카메라, 손수건 밖에는 없음> 그곳은 초등학교 말년에 1번 가본 것이 전부이다. 그때
가 어언 20여 년 전이니 거의 새로 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 사이 수종사는 많이 변
하여 오히려 젊어진 기분이고, 그에 반해 나는 많이 늙어버렸다.

집과 가까운 방학역(1호선)에서 1호선을 타고 회기역에서 경의중앙선으로 환승하여 운길
산역에서 내렸다. 여기서 운길산까지 걸어가도 되지만 날씨가 무더워 문명 이기(利器)의
혜택을 1분이라도 더 누리고자 남양주시내버스 58번을 타고 수종사입구(조안보건지소)에
서 두 발을 내렸다. (운길산역에서 수종사입구 정류장까지 800m 거리)


♠  운길산 수종사(雲吉山 水鐘寺) 입문

▲  운길산 산행이 시작되는 곳 (도자기마을 앞)

수종사입구 정류장에서 운길산으로 인도하는 2차선 길(북한강로433번길)을 5분 정도 가면 도
자기마을이 나온다. 평평했던 길은 여기서부터 크게 흥분을 보이며 오르막길로 변하는데, 그
길을 25~30분 정도 올라가야 비로소 수종사 일주문에 이르게 된다.
경내까지 1차선 크기의 포장길이 닦여져 있어 차량 접근도 가능하며, 이제는 유명 사찰이 다
되어서 거의 3~6분마다 차들이 지나간다. 비탈진 산자락을 깎아서 낸 길이라 지그재그가 다소
있으며 경사 구간이 많아 차량들도 힘겹게 바퀴를 움직인다. (대형버스는 접근 불가) 그 길을
차량과 사람이 같이 이용하고 있으니 걸어가든, 차로 가든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중간에
뚜벅이를 위한 산길이 별도로 있으나 그 거리는 짧음)


▲  수종사 일주문(一柱門)

지나가는 차량의 눈치 보랴, 무더위로 비오듯 쏟아지는 땀 닦으랴, 눈과 두 손, 두 다리가 바
쁘게 오르막길을 오르니 나오지 않을 것 같던 일주문이 마중을 나온다. 이제 경내 턱 밑에 이
른 것이다.
근래 지어진 일주문 앞에는 차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있으며 불교용품과 음료수, 간
식 등을 파는 매점이 중생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노려본다. 잠시 더위나 씻을 겸, 음료수나 아
이스크림을 사먹으려고 했으나 속세보다 배 가까이 받아먹고 있어 먹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
졌다. (어찌 절이 동네 편의점보다 가격이 더 비쌀꼬?)

▲  일주문 부근에 있는 석조미륵불입상

▲  수종사 불이문(不二門)

일주문에서 약간의 숲길을 지나면 단출한 모습의 불이문이 마중을 한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어느 길로 가든 경내로 이어지나 불이문 계단길이 조금 지름길이다. 차량은 이곳까
지 접근 가능하며, 여기서 3분 정도만 올라가면 경내에 이른다. (나는 계단길로 올라가서 동
쪽 길로 내려왔음)


▲  불이문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길

▲  계단 끝에 자리한 조그만 기와문

현재의 불이문이 있기 전에는 저 계단 끝에 달린 기와문이 불이문의 역할을 했었다. 저 문을
들어서면 하늘 높이 들어앉아 일품 조망을 뽐내는 고즈넉한 절, 수종사 경내가 펼쳐진다. 그
럼 여기서 잠시 수종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운길산 동쪽 자락 370m 고지에 둥지를 튼 수종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봉선사(奉先寺)
의 말사(末寺)이다.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운길산 산신도 고개를 저을 정도로 여러 의견이 있
으나 경내에 1439년에 조성된 사리탑이 있어 길게 잡으면 고려 초/중기, 짧게 잡으면 14세기
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가까운 마현마을에서 태어난 정약용(丁若鏞)은 그의 '유수종사기(遊水鐘寺記)'에 신라
때 지어진 절이라 기록했다. 허나 이를 입증할 사료나 유물은 없다. 또한 고려 태조(太祖)가
군사를 이끌고 주변을 지나다가 산 위로 이상한 구름의 기운을 보고 가봤더니 우물 속에 동종
이 있어서 그곳에 절을 짓고 수종사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오나 이 역시 믿거나 말거
나 수준이다.

어쨌든 창건 이후 오래 가지 못하고 자연재해 등으로 폐허가 되어 사라졌는데, 1458년 세조(
世祖)가 금강산(金剛山)을 탐방하고 돌아오다가 이수두(二水頭, 양수리)에서 하룻밤을 머문
인연으로 다시 세상에 존재감을 드러낸다.
잠을 청하던 세조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소리에 깜박 잠이 깨어 신하를 시켜 주변을 살피게
했다. 그랬더니 운길산 절터 바위굴 속에서 18나한(또는 16나한)이 발견되었고, 굴 안에서 물
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울려나왔다고 한다.
뜻하지 않은 18나한의 발견과 종소리 비슷한 물방울에 크게 감동을 먹은 세조는 바로 명을 내
려 절을 크게 짓게 하고 수종사라 했다고 한다. 이때 5층의 돌계단을 쌓아 터를 다지고 절을
지어 나한을 봉안하고 5층석탑을 세웠다. 그래서 이때를 실질적인 창건시기로 보는 의견도 있
다. 하지만 사리탑이 그 이전부터 전하고 있었으므로 지나는 길에 절을 중건한 것으로 여겨진
다.

절의 위치가 아주 기가 막혀 동쪽과 동남쪽이 확 트여있는데, 여기서 바라보는 양수리와 2개
의 한강(북한강과 남한강) 풍경은 가히 천하 제일을 자랑한다. 그러다 보니 많은 문인들이 문
턱이 닳도록 찾아와 시와 글, 그림을 남겼으며, 서거정(徐居正)은 '동방 제일의 전망을 가진
절'이라며 격하게 찬양했다.
한음 이덕형(李德馨)은 말년에 운길산 밑 송촌리에 별서(別墅)를 짓고 수종사를 종종 찾아가
승려와 교류를 했으며, 다산 정약용도 이곳을 자주 들렸다. 그는 여기서 지낸 즐거움을 군자
유삼락(君子遊三樂)으로 비교할 정도로 수종사에 퐁당퐁당 빠졌는데, 다성(茶聖)으로 추앙을
받는 초의선사(草衣禪師)는 정약용을 찾아와 여기서 차를 마셨다고 전한다.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유명한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그린 독백탄(獨栢灘)은 현재 양수
리 지역을 그린 것으로 수종사에서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수종사에서 그려야 제대로 나옴)

1890년 혜일(慧一)은 고종에게 8,000냥을 지원 받아 퇴락한 절을 중창했으며, 1891년 금백홍
사(金帛紅絲)와 4,000냥의 돈을 더 지원 받아 사존불을 개금했다. 이때 방광(放光) 현상이 일
어났다고 한다.
1939년 태욱(泰旭)이 크게 중수했으나 6.25전쟁 때 싹 파괴되는 비운을 겪었으며, 1975년 주
지 혜광(慧光)이 대웅보전 등을 중건하고, 1981년 산신각, 종각 등을 중건했다. 1999년 주지
동산(東山)이 선불장과 삼정헌을 지었으며, 이후로도 계속 불사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응진전, 산신각, 약사전, 삼정헌 등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
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팔각5층석탑과 사리탑, 남양주시 보호수인 은행나무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속삭여준다. 또한 절 자체는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 일원'이란 이름으로
가 명승 109호
로 지정되었다. 명승 지정 사유는 아름다운 조망을 지닌 곳으로 자연경관 가치
가 높기 때문이다. (해돋이와 운해를 볼 수 있고, 운길산 정상에서 일몰도 볼 수 있음)
또한 삼정헌이란 찻집을 운영하고 있는데, 무료로 전통차를 제공하고 있다. 수종사의 꿀단지
같은 존재로 리필도 가능하니 꼭 차 1잔의 여유를 누리고 가기 바란다. 창 밖으로 펼쳐진 일
품 조망을 바라보며 차향(茶香)을 즐기면 마치 천상세계의 신선이 된 기분이다.

* 수종사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1060 (북한강로433번길 186, ☎ 031-576-
  8411)
* 수종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수종사의 백미, 절에서 바라본 천하
북한강과 남한강, 2개의 한강이 갈라지고 합쳐지는 곳에 자리한 양수리,
그리고 광주 남종면 지역이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수종사 둘러보기

▲  수종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수종사의 법당(法堂)인 대웅보전(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남쪽을 굽
어보고 있다. 수종사가 양수리가 있는 동남쪽으로 시야가 트여 있어 건물도 막연히 그쪽을 향
해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대웅전 등 주요 건물은 남쪽을 고집하고 있다. 불단에는 석가
여래 대신 비로자나불이 중심이 된 비로자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보전 비로자나삼존불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노사나불(盧舍那佛)과 석가여래상이 좌우에 자리한다. 비록
비로자나불이 중심에 있긴 하나 모두 불교에서 높은 존재들이라 덩치는
다들 비슷하다.

▲  수종사의 제일 가는 보물들, 사리탑(왼쪽)과 8각5층석탑(오른쪽)

대웅보전 서쪽 옆구리에는 8각5층석탑과 조그만 3층석탑, 사리탑이 나란히 자리하여 서로 고
색을 견준다.
그들은 겉연령이 무척 젊어진 수종사의 특별한 존재들이자 이곳의 오랜 역사를 알려주는 산증
인들로 이들 중 제일 늙은 것은 왼쪽 사리탑이다. 사리탑과 5층석탑은 조선 왕실에서 지어주
고 그 안에 보물까지 넉넉히 챙겨주었다.

▲  수종사 8각5층석탑 - 보물 1,808호

수종사 8각5층석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8각의 기단부를 쌓고 그 위에 8각의 5층 탑신(塔身)
과 머리장식을 얹힌 꽤 잘생긴 탑이다.
고려시대 8각 석탑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탑의 높이는 4~5m 정도이다. 1957년 해체수리를 했
을 때 1층 탑신과 지붕돌, 기단 중대석(中臺石)에서 19구의 불상이 나왔으며, 1970년 이곳으
로 이전했을 때 2층과 3층 지붕돌에서 12구의 불상이 추가로 나왔다. 이들은 모두 '남양주 수
종사 8각5층석탑 출토유물 일괄
'이란 이름으로 보물 1,788호 지정되어 조계사에 있는 불교중
앙박물관에 가 있다.

불상과 함께 나온 묵서명(墨書銘)을 통해 탑의 정체가 밝혀졌는데 태종의 후궁이던 명빈(明嬪
) 김씨(?~1479)가 발원조성하고 성종의 후궁들이 홍치(弘治) 6년(1493년)에 불상 2구(석가여
래 1구, 관세음보살 1구)를 넣었다. 그리고 선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가 넣은 금동불과 보
살상들, 숭정(崇禎) 원년(1628년)에 조각승 성인(性仁)이 만든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을 집어넣
어 탑의 조성시기는 15세기(1493년 이전), 1628년에 중수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세조가 1458
년 수종사를 중건하면서 5층석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 탑일 것이다.

바닥돌 위의 놓인 8각의 대석은 각 면을 2등분하여 장방형의 액(額)을 새기고 그 안에 안상(
眼象)을 표현했다. 같은 형태의 안상은 기단의 받침과 탑신 받침에도 통일되게 새겨져 있다. 기단부는 상대 앙련석(仰蓮石)과 하대 복련석(伏蓮石)에 16엽의 연화문(蓮花紋)이 장식되어
있는데, 연판(蓮瓣)에는 고려 중기부터 유행했던 화려한 꽃머리 장식이 있고, 팔각 중대석에
는 각 모서리에 원형의 우주(隅柱)가 입체적으로 조각되었다.
5층 탑신도 팔각 모서리에 원형의 우주가 새겨져 있고 옥개석에는 각각 3단의 받침이 새겨져
있다. 정상부에는 합각지붕 형태의 삼각형 문양이 조각된 복발과 보주 등의 머리장식이 있다.

왕실에서 발원하여 세운 석탑으로 왕실과 각별했던 수종사의 성격과 위엄을 알려주고 있으며,
기단부는 불상대좌의 양식, 탑신부는 목조건축의 양식, 상륜부는 팔작지붕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형태의 조선시대 탑은 천하에서 오직 이곳이 유일하다.
또한 500년 이상의 오랜 나이에도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피부가 탱탱하고 보존 상태도 좋으
며, 조각 솜씨도 뛰어나 일찌감치 경기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가 2013년 9월 국
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탑 앞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진 네모난 돌이 누워있는데, 이는 탑에 공양물을 올리는 일종의 상
석(床石)으로 여겨진다. 상석까지 갖춘 오래된 탑 또한 이곳 밖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  수종사 사리탑 - 보물 2013호

수종사 사리탑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1439년에 조성되었다. 그가 없었다면 수종사의
창건시기는 꼼짝없이 세조 시절이 되었을 것이다.
탑의 높이는 2.3m로 네모난 바닥돌 위에 2단으로 된 8각 기단부를 깔고 석종형(石鐘形) 탑신
과 지붕돌, 머리장식을 차례로 얹혔다. 하층 기단석의 각 모서리에는 동자주(童子柱)를 새기
고, 그 위의 각 모서리 부분에 두꺼비 형태의 동물을 새겼으며, 상층 기단에는 직사각형의 액
을 상하로 구획해 그 안에 문양을 새겼다.

탑신부는 피부에 구름과 용을 조각했으며, 그 윗쪽을 돌출하여 지붕돌 밑에 조립한 특색을 지
녔다. 처마가 두꺼운 지붕돌 낙수면에는
'太宗 太后(태종 태후), 貞惠翁主(정혜옹주), 舍利造塔(사리조탑), 施主 文化柳氏(시주 문화
류씨), 錦城大君(금성대군), 正統四年 己未 十月日(정통4년 기미 10월일)
'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태종 태후'는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를 뜻한다. 즉 태종 부부의 딸
인 정혜옹주의 사리탑으로 1439년 10월 금성대군과 문화류씨의 시주로 만들었다는 뜻이 된다.
바로 옛 사람들이 남긴 이 짧은 명문(銘文) 덕에 사리탑의 정체와 수종사의 대략적인 창건시
기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탑은 명목상으로는 정혜옹주의 사리탑이나 진짜 사리탑이 아닌 그를 추모하고자 세운 탑이
다. 바닥돌부터 기단부, 탑신부, 머리장식까지 완전히 갖추고 있고, 조각도 우수하며, 건강도
양호하고, 아주 중요한 조성연대도 분명하다. 또한 추모용으로 지어진 것으로 조선 초기 왕실
의 불교신앙과 그 조형의 새로운 경향을 알려주고 있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9년 1
월,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1939년 사리탑을 해체수리하는 과정에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는데, 그는 '남양
주 수종사 사리탑 사리장엄구'
란 긴 이름으로 보물 259호로 지정되어 불교중앙박물관에 가 있
다. 수종사처럼 탑에서 나온 유물이 국가 보물로 2개나 지정된 케이스도 흔치 않다.


▲  뒷쪽에서 바라본 8각5층석탑과 3층석탑, 사리탑

5층석탑과 사리탑은 잘생긴 외모와 독특한 개성(8각석탑, 사리탑에 새겨진 명문 등), 몸 속에
서 나온 값비싼 유물 등으로 국가 보물로 명성을 누리고 있으나 정작 가운데에 있는 작은 3층
석탑은 딱히 정보가 없다. 높은 기단에 비해 탑신이 너무 작고 키도 왜소한 편으로 비록 가운
데 있긴 하나 고래등 같은 존재들 사이에 끼어있어 좀 주눅이 든 모습이다.
피부에 고색의 때가 자욱한 것으로 보아 양쪽 고래등 정도는 아니어도 조선 중기나 후기에 세
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  여염집 한옥처럼 생긴 종무소(宗務所)

▲  조그만 샘터


▲  삼정헌 옆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종사는 조망으로 거의 80% 먹고 들어가는 절이라 조망이 좋은 삼정헌
옆구리에 넓게 전망대를 닦아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다.

▲  확대해서 바라본 양평 양수리 지역 (사진 가운데 부분)

두물머리로 유명한 양수리는 2개의 한강(북한강, 남한강)이 만나는 곳으로 양평군(楊平郡) 양
서면의 중심지이다. 양수리에서 북한강 너머에 자리한 동네(사진에서 바로 밑에 보이는 동네)
는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와 진중리, 운길산역이고, 양수리 옆 남한강 건너는 광주시(光州市
) 남종면 지역이다.
양수리 주변이 모두 칼처럼 솟은 뫼들이라 보이는 범위는 저게 전부이지만 마치 구름 위나 하
늘에서 내려다보는 기분으로 휼륭한 조망을 지녔다.


▲  수종사 은행나무 - 남양주 보호수 17호

경내 동쪽 밑에는 범종각과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삼정헌과 은행나무, 범종각이 합심하여
경내가 속세에 보이지 않게끔 가리고 있는데, 특히 은행나무의 덩치가 장대하여 수종사의 숨
바꼭질을 제대로 돕고 있다.

은행나무는 2그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추정 나이는 약 540여 년이다. 그 시기를 거슬러 올라
가면 대략 조선 성종 때가 된다. 허나 나무 나이의 오차가 조금 있을 수 있으므로 길게 잡으
면 세조 시절까지 닿는다. 세조가 절을 중수하고 이들을 심었다고 하니 그런데로 맞아떨어진
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양분과 수종사의 보살핌으로 높이 35m, 25m로 성장했으
며, 가슴둘레는 각각 2m, 1.2m이다. 5층석탑과 사리탑이 절의 제일가는 인공(人工) 보물이라
면 이 은행나무는 제일의 자연산 보물로 경내에서 사리탑 다음으로 늙은 존재이다. 은행나무
밑에는 전망대가 있고 불이문으로 내려가는 길과 송촌리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  은행나무 밑에서 바라본 양수리 지역
조망의 질은 삼정헌 옆보다 조금 낮아졌다.


♠ 수종사 마무리

▲  경내 서쪽 벼랑에 닦여진 계단과 응진전, 산신각

삼정헌 서쪽 벼랑 구역은 근래 닦여진 것으로 석축을 다져 계단을 높이 내고 여러 건물을 얹
혀 절의 덩치와 키를 늘렸다. 예전에는 응진전이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
새 10여m 정도 키를 늘려 이제는 산신각이 그 지붕이 되었다. 경내가 협소해 뒷쪽 벼랑을 건
드린 것으로 삼정헌 옆에서 보는 조망보다 산신각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1단계 높은 수준이니
꼭 올라가보기 바란다.


▲  바위 위에 둥지를 튼 응진전(應眞殿)

응진전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 석가여래의 열성제자인 오백나한(
五百羅漢)이 봉안되어 있다. 특히 수종사는 세조가 굴 속에서 발견했다는 18나한을 내세워 나
한도량을 칭하고 있어 응진전에 대한 기대감이 큰 편이다.


▲  응진전 석가여래삼존상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
파리도 넘어질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를 지닌 저들은 아리따운 여인네나
귀부인 같은 참한 모습으로 이곳을 찾은 중생을 위로한다.

▲  산신각(山神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자리한 산신각은 이름 그대로 산신의 거처이다. 수종사와
하늘의 거리를 좁혀준 그는 달랑 1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여기서 바라보는 조망 맛이 꽤 진
국이다. 단 여기까지 오르는 돌계단이 다소 거칠므로 조심스럽게 오르락 내리락 해야 된다.


▲  산신각에서 바라본 천하
양수리와 북한강, 남한강, 운길산역 주변, 광주 남종면이 사이좋게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같으나 여기서는 수종사 경내가 시야에 추가된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수종사 조망의 위엄~~~!

▲  산신각에서 바라본 경내와 속세

▲  찻집이자 쉼터인 삼정헌(三鼎軒)

수종사 경내를 둘러보고 삼정헌을 찾았다. 대웅보전 옆 종무소 맞은편에 자리한 정면 3칸, 측
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수종사의 단골이었던 다산 정약용이 초의선사, 추사 김정희와 함께
차를 즐겼다는 사실에 근거해 삼정헌이란 간판을 달았다. 여기서 '삼정'이란 시, 선(禪), 다(
茶, 차)가 하나로 통하는 차실(茶室)이란 뜻으로 조계종 25교구 본사 조실(祖室)인 월운이 세
웠다.

삼정헌은 그 이름에 걸맞게 찻집으로 쓰이고 있는데, 다른 절과 달리 전통차를 무료로 제공하
고 있어 속세보다 더 가격을 받아먹는 일주문 옆 매점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즉 수종사의 두
얼굴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다른 절과 달리 전통차를 공짜로 제공하고 있으니 이것도 대단한
것이다. (전통차의 원가는 얼마 안함)
이렇게 차 1잔의 여유를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매력 덕분에 수종사의 새로운 명물로 인기가
대단하다. 그러니 수종사에 왔다면 국가 보물인 5층석탑과 사리탑, 삼정헌 옆과 산신각에서의
조망, 은행나무와 함께 이곳도 꼭 챙기기 바란다.

그 착한 현장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 거기서 일하는 보살 아줌마가 뜨거운 물이 담긴 보온통
을 준다. 그것을 받아 적당한 자리에 앉아 상에 놓인 다기(茶器)에 부어서 적당히 손질해 조
그만 잔에 부어마시면 된다. 여기서 바라보는 조망도 제법 일품이나 앞서 산신각에서 그보다
높은 조망을 맛봐서 그런지 조금 시시해보인다.

나는 전통차를 좋아하여 차향(茶香)과 차의 맛을 음미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문명의 이기
가 무더위를 단죄하고 있으니 더욱 바깥에 나가기가 싫어서 보온통 2병치를 마시고 1시간 정
도를 재충전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시간은 어느덧 18시, 햇님도 슬슬 퇴근 준비로 검은 기운이 조금씩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은
행나무에서 송촌리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산길에 수풀이 너무 우거져서 안전하게 포장길을 따
라 속세로 내려왔다. (반바지를 입고 갔었음)

마음 같아서는 정약용을 흉내내며 여러 날 묵고 싶지만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이런 절간이 아
닌 속세의 한복판이다. 즉 나의 제자리로 돌아와야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여름에 벌인 수종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4년 9월 13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4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