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북분단이 빚은 안보관광지의 성지(聖地), 임진강(臨津閣)
▲ 임진각 |
2001년 9월, 문산역에서 50년 가까이 끊겼던 남측 경의선이 임진강역까지 아주 살짝 연장되었
다. 임진강역은 임진각 바로 동쪽으로 연장 기념으로 발행된 기념승차권을 아는 경로를 통해
여러 장 입수하여 임진강역까지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임진각을 찾은 이후, 한참의 시간이 흐
르고 다시 그곳과 인연을 지었다.
간만에 찾은 임진각은 파주시 문산읍 임진강(臨津江)변에 자리해 있다.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
을
사이에 두고 금지된 땅, 민통선과 마주하고 있는데,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안보관광지이자
민통선을 코앞에 둔 서울과 매우 가까운 북쪽 한계선으로 1972년 안보관광지로 야심차게 조성
되었다.
임진각은 윗 사진에 나온 건물 이름이지만 그 주변을 한 덩어리로 묶어 임진각(임진각 관광지
)이라고 한다. 요즘에는 '임진각 국민관광지','임진각 관광지','임진각 평화누리'로 많이 불
리지만 '임진각'이라 불러도 크게 상관은 없다.
이곳은 태생부터가 남북분단의 비애를 상징하는 안보 관광지라 그에 걸맞는 볼거리를 갖추었
다.
초창기에는 500만 이산가족을 위해 지은 망배단과 자유의다리, 경의선 철도중단점 표석,
종군기자비 등의 여러 조형물, 2000년에 조성된 평화의 종 등 오로지 분단의 매정한 현실을
생각하고 이산가족들의 한을
달래던
안보관광지의 역할만 하였으나 그것으로는 더 이상 관광
객을
유혹하기가 어려웠다.
하여 2005년 세계평화축전을 계기로 3만 평의 대형 잔디 언덕을 닦고 평화누리와 바람개비를
잔뜩 심은 바람의언덕, 음악의언덕 등을 지어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했다. 기존의 남북분단의
한이
깃든 우울한 이미지에서 조금이나마 화사한 이미지로 변신을 시도한 것이다. 또한 매년
9월에는
세계평화축전(DMZ평화음악회)을 개최하는데, 이제는 인기가 상당하여 이때만 되면 사
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며, 2020년 9월에는 임진강 허공을 가로질러 금지된 땅으로 아주 살짝
들어가는 임진각평화곤돌라가 개통되었다.
임진각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한식당과 빵집,
커피집, 패스트푸드점, 편의점, 기
념품점, 옥상 전망대를 지니고 있다.
* 임진각관광지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1325-2 일대 (☎ 031-953-4744) |
▲ 자유의다리에서 바라본 임진각
▲ 임진각 옥상 무료전망대 (옥상 전망대) |
임진각 옥상 전망대는 무료임을 강조하고 있다. 허나 고작 3층 높이에 불과해 보이는 범위는
그리 넓지는 못하다. 이런 전망대로 감히 돈을 받는다면 이건 염치가 없는 것이지. 그러니 '
무료' 2글자는 좀 뺐으면 좋겠다.
이곳은 초창기부터 전망대로 쓰였는데, 임진각 관광지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현장이라 임진
각
일대를 훤히 조망하기에 좋다. 또한 맨눈으로 보는 조망의 한계를 조금이나마 극복하고자
망원경을 넉넉히 깔아놓았는데, 그들은 오로지 500원짜리 동전만 밝히는지라 그것을 넣어야만
비로소 못생긴 눈을 뜬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두들겨 패도 깨어나지 않는다. 민통선 방향
인 북쪽과 서쪽에 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금지된 땅인 임진강 너머의
안부를
매우 궁금해 하기 때문이다.
허나 임진강 너머는 모두 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겨우 강과 북쪽 땅을 가리고 앉은 산줄
기만 조망할 수 있다. 강 너머 산줄기는 비록 민통선이긴 하지만 엄연한 이 나라의 영토이니
괜히 이북 땅으로 오해하여 설레지 않도록 한다. |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쪽 천하 ①
2002년에 개통된 경의선 임진강 철교와 6.25때 끊긴 옛 임진강 철교,
그들 너머로 민통선에 묶인 파주시 군내면 지역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자유의다리와 복원된 장단역 증기기관차 주변, 임진강, 경의선 철교,
파주시 군내면 지역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서남쪽 방향
망배단과 임진강, 그리고 무늬만 남은 파주시 장단면 지역(임진강 너머 지역)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④
임진강 물을 먹고 자라는 마정리 평야 (임진각 동남쪽)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⑤ 북쪽 방향
임진각 주차장과 바람의 언덕,
그리고 저 멀리 통일대교까지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⑥ 동북쪽 방향
평화랜드, 평화누리, 음악의언덕, 자유인터체인지(통일대교 남쪽) 등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⑦ 동쪽 방향
임진강역과 철도중단점 등
▲ 이산가족의 한을 먹고 자란 망배단(望拜壇) |
임진각 서쪽에는 이산가족의 한과 눈물을 어루만지느라 여념이 없는 망배단이 있다. 임진각이
조성된 이후 500만이 넘는 실향민들은 이곳을 찾아와 잃어버린 땅 북녘에 둔 가족과 부모를
그리워하거나 제사를 지냈다. 특히 설과 한가위(추석)에는 그들을 위해 합동 제단(祭壇)이
설
치되어 수백 명이 단체로 차례를 지냈는데, 설에 지내는 것을 연시제(年始祭), 추석에 지내는
것을 망향제(望鄕祭)라 불렀다.
이렇게 실향민들의 넋두리 현장이 된 이후, 임시 제단이 아닌 완전한 제단을 설치해줄 것을
염원하는 이들이 늘자 파주군과 내무부, 이북5도청이 5억의 돈을 들여 1985년 9월 26일 지금
의 망배단을 닦았다.
120평 대지에 제단과 향로를 두고, 중앙에 망배탑을 세웠으며, 그 좌우에 7개의 화강석 병풍
을
두어 병풍의 역할을 맡겼다. 이 병풍석에는 북쪽의 여러 문화유산과 풍물, 산천의 특징을
복합적으로 표현해 실향민의 상념을 달래주고자 배려했다.
허나 망배단 역시 남북분단이 빚은 통한의 산물이다. 그의 역할과 기능이 계속 이어질수록 이
산가족과 이 땅의 사람들의 한은 더욱 깊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속히 이 땅이 통일되어 망
배단의
역할이 완전히 끝나게 되기를 고대해본다. 그의 생명이 쓸데없이 늘어날수록 한은 정
비례로 늘고 그
생명이 끝날수록 그 한은 반비례가 된다. 하지만 빠른 통일은 힘들 것 같다.
남과 북의 위정자들이 죄다 썩어문드러졌고, 주변 오랑캐들도 우리의 통일을 반기지 않기 때
문이다. 그러니 망배단은 더욱 고개를 들 것이다. |
▲ 동쪽에서 바라본 자유의다리 - 경기도 지방기념물
162호 |
망배단 뒷쪽에는 임진각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자유의다리가 있다. 연못에 발을 담군 이 다
리는 임진각과 임진강 사이의 낮은 곳에 세워져 있는데, 원래 임진강 경의선 철교에 임시로
놓인
것을 임진각 관광지 조성 이후, 연못을 닦고 이곳으로 옮겼다.
서울과 신의주(新義州)를 잇던 경의선은 경부선(京釜線)과 더불어 2개의 철길로 이루어진 복
선(複線) 철도이다. 그러다 보니 임진강에 상행, 하행 2개의 철교가 있었으나 6.25때 폭격으
로 파괴되어 다리 기둥만 멀뚱히 남아있었다. 그렇게 다리가 파괴된 1951년 이후 경의선은 완
전 두 동강이 나버리게 된다.
이후 국군이 이곳을 탈환하면서 하행선 철교를 사람과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다리로 보수했
으며, 1953년 남한과 북한이 서로 포로를 교환할 때 기둥 위에 철교를 복구하고 그 남쪽 끝에
나무와 철제를 혼합하여 임시 다리인 지금의 자유의 다리를 놓았다. 다리 부근 노상리 쪽자연
마을의 이름을 따서 '독개다리'라 불렀으나 북한에 잡혀간 포로 12,773명이 이 다리를 건너서
귀환했기 때문에 자유를 찾았다는 의미로 '자유의다리'라 불리게 되었다. 그 시절 포로들은
차량으로 철교까지 와서 걸어서 이 다리를 건넜다.
판문점(板門店)에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와 더불어 6.25의 비극을 상징하는 다리로 썩 유
쾌하지 않은 역할과 의미를 지녔다. 허나 어찌하랴. 시대를 잘못 탔으니 말이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남북회담 대표들이 이 다리를 건너 왕래를 했으며, 이후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고,
기존 철교는 육중한 다리 기둥만 남아있다. |
▲ 상판이 나무로 이루어진 자유의다리 |
자유의다리 길이는 83m, 폭 4.5m, 높이 8m 내외로 나무를 짜맞추어 만들었는데, 힘을 많이 받
는 부분은 철재를 섞어서 사용했다. 임시로 가설된 다리라 솔직히 작품성이나 개성은 없으나
6.25시절
'자유로의 귀환'이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현장으로 그 시절을 나타내는 산증인이
다. 그래서
지방기념물의 적당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임진각에 왔다면 꼭 거닐어야 되는 다리로 임진강과 접한 서쪽은 막혀있다. 하여 다시 제자리
로 돌아와야 되며, 막힌 곳을 넘어가서는 절대로 아니 된다. 그 너머는 민통선 구역이기 때문
이다. 막힌 곳에는 통일을 염원하는 이 땅의 사람들이 달아놓은 온갖 종이와 천, 태극기 등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통일 염원에 대한 뜨거운 열기를 보여준다. 허나 열기가 아직은 빈약한지
휴전선을 녹이지는 못하고 있다. |
▲ 자유의다리의 막다른 곳 (임진강 방향) |
다리는 물줄기로 끊어진 양쪽을 이어주는 존재이다. 허나 이곳은 한쪽만 열려있고, 다른 한쪽
은
막혀 있어 다리의 기능을 온전히 하지 못한다. 마치 분단된 이 땅의 현실을 상징하듯 말이
다.
다리를 건넌 이들은 여기서 강제로 발길을 돌려야 되니 그 아쉬움을 종이와 천에 담아 봉쇄된
벽에
걸어두었다. 저 막힌 곳을 뚫고 북쪽으로 뻗어 나가야 되거늘 이렇게 70년 이상 묶여있
으니 참으로 답답할 따름이다, |
▲ 자유의다리 (막다른 곳에서 바라본 모습)
▲ 장단역에서 가져온 낡은 철로 |
자유의 다리 북쪽에는 낡은 철로가 짧게 재현되어 있다. 이들은 민통선에 갇힌 옛 장단역(長
湍驛) 부근에 버려져 있던 레일과 침목을 가져와서 재활용한 것으로 침목 위에는 경의선의 민
통선 이북 철도역 28개(임진역, 개성역, 사리원역, 평양역, 신의주역 등)의 이름과 임진강역
부터의 운행 거리가 적혀 있어 분단의 아픔과 미답지 경의선 이북(以北) 구간에 대한 호기심
을 크게 자극시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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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전 고철이 되어버린 레일 변경 레버 |
▲ 장단역 부근에서 가져온 레일과 못 |
▲ 장단역 증기기관차와 재현된 역 플랫폼 |
정말 오래간만에 발을 들인 임진각에는 눈에 익지 않은 낯설은 존재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중
에는 분단의 지독한 현실과 남북의 해묵은 악감정만큼이나 낡고 빛바랜 존재가 아른거리고 있
었으니 바로 민통선에서 가져온 장단역 증기기관차와 앞서 언급한 철로였다. |
▲ 장단역 증기기관차 - 국가 등록문화재 78호 |
임진각의 새로운 명물로 등극한 장단역 증기기관차는 자유의다리와 더불어 임진각의 6.25전쟁
상징물이다.
이 기관차는 언제 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최고 속도는 80km, 기관차 길이 15m, 폭 3.5
m,
높이는 4m이다. 산악 지형에 최적화된 화물운송용으로 국군이 38선을 넘어 신나게 북진을
하던
1950년 늦가을 한복판에 군수물자를 바리바리 싣고 개성에서 평양으로 칙칙폭폭 달리던
중, 중공 개잡것들이 북한을 돕고자 전쟁에 불법 개입하면서 황해도 평산군 한포역에서 눈물
을 머금고 바퀴를 돌렸다.
남쪽으로 후진하던 열차는 장단역에 멈춰섰는데, 북한과 중공 잡것들이 개성 부근까지 내려온
상태라 국군과 연합군은 이 열차가 그것들에게 쓰일 것이 우려되어 군수물자만 서둘러 챙기고
폭파시켰다. (당시 이 열차 기관사는 한준기) 이때 증기기관차 1량만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1953년
휴전까지 장단, 파주 지역에서 치열하게 격전이 벌어지면서 다시금 무거운 상처를 입
었다. 그렇게
하여 그의 몸에는 1,020여 개의 총탄 자국이 박혔으며, 바퀴까지 휘어져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아련히 전해준다.
2006년 경기도는 이 열차를 주목하고 수풀을 뒤집어 쓴 채 웅크리던 증기기관차와 파편 292점
, 레일 관련 파편 132점을 수습해 화물차를 통해 임진각 보존센터로 옮겼다. 화통에서
자라던
뽕나무도 같이 가져와 그 곁에 심었으며, 녹슨 열차를 복원하고자 포스코에 의뢰하여 철제 문
화재 보존처리 기술과
재정지원을 받아 2년 동안 정밀조사, 구조보강, 녹 제거, 보호코팅제
도포 등을 거쳐 2008년 12월 보존처리가 마무리 되었다.
이후 자유의다리 북쪽에 기관차가 머물 자리를 닦아서 2009년 6월 25일 이곳으로 옮겨 천하에
공개했으며, 이때 장단역 부근에서 가져온 레일도 일부 복원했다. |
▲ 장단역 증기기관차 구제 과정을 담은 사진
버려진 기관차를 감싸던 수풀을 모두 제거해 화물차에 싣고 통일대교를 통해
임진각으로 가져오는 과정이 담겨져 있다.
▲ 장단역 증기기관차의 뒷모습
그의 이름이 '장단역 증기기관차'가 된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바로 장단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경의선의 주요 역이자 장단군(長湍郡)의 관문이던 장단역,
허나 남북분단 앞에 '장단군'이란 고을은 아작나서 사라지고
지도에서도 자취를 감추었다. (파주시에 통합됨)
▲ 장단역 증기기관차의 앞 모습
기관차 옆에 역 플랫폼을 설치하여 '임진각역'으로 삼았다. 물론 무늬만 역이다.
간신히 살아남은 기관차의 보호를 위해 일종의 지붕을 설치하여
비와 바람,
햇살로부터 그를 지킨다.
▲ 하얀 피부로 이루어진 임진각역 표시판 |
장단역 증기기관차의 거처로 지어진 임진각역, 여기서 고려의 옛 도읍인 개성(開城)까지는 불
과
22km, 서울역에서도 겨우 75km로 천안보다도 가까운 거리이다. 허나 남북분단의 현실이 여
기서
개성까지의 체감 거리를 22억km 이상으로 늘려놓아 차라리 지구에서 떨어진 달나라로 가
는 것이
더 속이 편할 정도이다. 그만큼 개성은 우리에게 그림의 떡 같은 존재가 되었다. |
▲ 세월이 증기기관차 화통에 달아준 훈장, 뽕나무 |
50년 이상 버려졌던
증기기관차 화통에는 장대한 세월이 심어놓은 뽕나무가 감쪽같이 뿌리를
내렸다. 그 많은 자리 중에 왜 하필이면 연기가 나오는 화통에 둥지를 틀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과 증기기관차의 애환을 먹으며 어엿한 나무로 자라났다.
2006년 증기기관차를 수습하면서 같이 임진각으로 갖고 나와 이곳에 심었는데, 만약 열차
주
변에 뿌리를 내렸다면 이런 대접까지는 받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제자리에 그냥 두었거나
열차 수습 과정에서 밀어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증기기관차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화통에 자
리를 닦은 탓에 이렇게 임진각에서 존재감도 드러내고 대우도 받는 것이다. 사람이든 무엇이
든 자리를 잘 잡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자리 하나에 팔자가 싹 바뀌니 말이다. |
▲ 증기기관차 주변에서 가져온 철길 레일과 파괴된 열차의 파편
▲ 장단역 증기기관차 주변에서 바라본 임진강 경의선 철교
▲ 통일을 꿈꾸는 평화의 종 |
장단역 증기기관차 북쪽에는 평화의 종을 머금은 커다란 종각(鐘閣)이 있다. 이 땅의 평화통
일을 염원하는 장소에 어울리게 '평화의 종'을 하나 장만하여 북쪽을 향해 은은한 종소리를
날려보내는데, 1999년에 조성하여 2000년 1월 1일 0시 첫 타종식을 치뤘다.
21세기 첫 날에 선보이는 종에 걸맞게 무게는 21톤이며, 높이 3.4m, 지름 2.2m로 그를 품고
있는 종각은 면적 21평, 높이 12.2m이다.
이 종은 누구든 칠 수 있으나 1회 타종에 10,000원의 돈을 줘야 된다. 타종 시간은 10시부터
17시까지이며, 임진각 관리사무소(☎ 031-954-0025)에 신청하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