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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민통선(DMZ) 나들이


' 파주 민통선(DMZ) 겨울 나들이 '
(임진각, 도라산역, 도라산전망대, 제3땅굴)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 (휴전선과 개성 지역)

▲  장단역 증기기관차

▲  경의선 도라산역

 


겨울 제국(帝國)이 무심히 깊어가던 연말 한복판에 파주(坡州) 민통선(DMZ)을 찾았다. 늦
가을이 저물고 겨울이 천하를 지배하면서 연말(年末)과 나이 1살 누적이란 우울한 선물을
뿌려대니 이때만큼은 참 기분이 꿀꿀하다. 이럴 때 딱 어울리는 곳은 천하에서 제일 예민
한 곳이자 민족의 통한이 깃든 남북의 경계선, 휴전선과 민통선 구역일 것이다.

민통선은 휴전선 주변에 그어진 금지된 땅으로 이들 지역에 주민들이 살고 있으나 외지인
의 출입은 아주 까다롭다. 그나마 신분증이 있으면 상당수 통과할 수 있지만 파주 임진강
이북(군내면, 진동면, 장단면)과 철원 북부, 화천 풍산리 이북 등은 신분증으로도 어림도
없다. 다만 파주 민통선 관광지는 제한적으로 개방되어 있어 임진각에서 DMZ관광이용권을
구입해 셔틀버스를 타고 둘러볼 수 있다. (단체 관광도 가능)


♠  남북분단이 빚은 안보관광지의 성지(聖地), 임진강(臨津閣)

▲  임진각

2001년 9월, 문산역에서 50년 가까이 끊겼던 남측 경의선이 임진강역까지 아주 살짝 연장되었
다. 임진강역은 임진각 바로 동쪽으로 연장 기념으로 발행된 기념승차권을 아는 경로를 통해
여러 장 입수하여 임진강역까지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임진각을 찾은 이후, 한참의 시간이 흐
르고 다시 그곳과 인연을 지었다.

간만에 찾은 임진각은 파주시 문산읍 임진강(臨津江)변에 자리해 있다.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
을 사이에 두고 금지된 땅, 민통선과 마주하고 있는데,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안보관광지이자
민통선을 코앞에 둔 서울과 매우 가까운 북쪽 한계선으로 1972년 안보관광지로 야심차게 조성
되었다.
임진각은 윗 사진에 나온 건물 이름이지만 그 주변을 한 덩어리로 묶어 임진각(임진각 관광지
)이라고 한다. 요즘에는 '임진각 국민관광지','임진각 관광지','임진각 평화누리'로 많이 불
리지만 '임진각'이라 불러도 크게 상관은 없다.

이곳은 태생부터가 남북분단의 비애를 상징하는 안보 관광지라 그에 걸맞는 볼거리를 갖추었
다. 초창기에는 500만 이산가족을 위해 지은 망배단과 자유의다리, 경의선 철도중단점 표석,
종군기자비 등의 여러 조형물, 2000년에 조성된 평화의 종 등 오로지 분단의 매정한 현실을
생각하고 이산가족들의 한을 달래던 안보관광지의 역할만 하였으나 그것으로는 더 이상 관광
객을 유혹하기가 어려웠다.
하여 2005년 세계평화축전을 계기로 3만 평의 대형 잔디 언덕을 닦고 평화누리와 바람개비를
잔뜩 심은 바람의언덕, 음악의언덕 등을 지어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했다. 기존의 남북분단의
한이 깃든 우울한 이미지에서 조금이나마 화사한 이미지로 변신을 시도한 것이다. 또한 매년
9월에는 세계평화축전(DMZ평화음악회)을 개최하는데, 이제는 인기가 상당하여 이때만 되면 사
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며, 2020년 9월에는 임진강 허공을 가로질러 금지된 땅으로 아주 살짝
들어가는 임진각평화곤돌라가 개통되었다.

임진각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한식당과 빵집, 커피집, 패스트푸드점, 편의점, 기
념품점, 옥상 전망대를 지니고 있다.

* 임진각관광지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1325-2 일대 (☎ 031-953-4744)


▲  자유의다리에서 바라본 임진각

▲  임진각 옥상 무료전망대 (옥상 전망대)

임진각 옥상 전망대는 무료임을 강조하고 있다. 허나 고작 3층 높이에 불과해 보이는 범위는
그리 넓지는 못하다. 이런 전망대로 감히 돈을 받는다면 이건 염치가 없는 것이지. 그러니 '
무료' 2글자는 좀 뺐으면 좋겠다.

이곳은 초창기부터 전망대로 쓰였는데, 임진각 관광지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현장이라 임진
각 일대를 훤히 조망하기에 좋다. 또한 맨눈으로 보는 조망의 한계를 조금이나마 극복하고자
망원경을 넉넉히 깔아놓았는데, 그들은 오로지 500원짜리 동전만 밝히는지라 그것을 넣어야만
비로소 못생긴 눈을 뜬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두들겨 패도 깨어나지 않는다. 민통선 방향
인 북쪽과 서쪽에 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금지된 땅인 임진강 너머의 안부를
매우 궁금해 하기 때문이다.
허나 임진강 너머는 모두 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겨우 강과 북쪽 땅을 가리고 앉은 산줄
기만 조망할 수 있다. 강 너머 산줄기는 비록 민통선이긴 하지만 엄연한 이 나라의 영토이니
괜히 이북 땅으로 오해하여 설레지 않도록 한다.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쪽 천하 ①
2002년에 개통된 경의선 임진강 철교와 6.25때 끊긴 옛 임진강 철교,
그들 너머로 민통선에 묶인 파주시 군내면 지역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자유의다리와 복원된 장단역 증기기관차 주변, 임진강, 경의선 철교,
파주시 군내면 지역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서남쪽 방향
망배단과 임진강, 그리고 무늬만 남은 파주시 장단면 지역(임진강 너머 지역)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④
임진강 물을 먹고 자라는 마정리 평야 (임진각 동남쪽)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⑤ 북쪽 방향
임진각 주차장과 바람의 언덕, 그리고 저 멀리 통일대교까지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⑥ 동북쪽 방향
평화랜드, 평화누리, 음악의언덕, 자유인터체인지(통일대교 남쪽) 등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⑦ 동쪽 방향
임진강역과 철도중단점 등

▲  이산가족의 한을 먹고 자란 망배단(望拜壇)

임진각 서쪽에는 이산가족의 한과 눈물을 어루만지느라 여념이 없는 망배단이 있다. 임진각이
조성된 이후 500만이 넘는 실향민들은 이곳을 찾아와 잃어버린 땅 북녘에 둔 가족과 부모를
그리워하거나 제사를 지냈다. 특히 설과 한가위(추석)에는 그들을 위해 합동 제단(祭壇)이 설
치되어 수백 명이 단체로 차례를 지냈는데, 설에 지내는 것을 연시제(年始祭), 추석에 지내는
것을 망향제(望鄕祭)라 불렀다.

이렇게 실향민들의 넋두리 현장이 된 이후, 임시 제단이 아닌 완전한 제단을 설치해줄 것을
염원하는 이들이 늘자 파주군과 내무부, 이북5도청이 5억의 돈을 들여 1985년 9월 26일 지금
의 망배단을 닦았다.
120평 대지에 제단과 향로를 두고, 중앙에 망배탑을 세웠으며, 그 좌우에 7개의 화강석 병풍
을 두어 병풍의 역할을 맡겼다. 이 병풍석에는 북쪽의 여러 문화유산과 풍물, 산천의 특징을
복합적으로 표현해 실향민의 상념을 달래주고자 배려했다.

허나 망배단 역시 남북분단이 빚은 통한의 산물이다. 그의 역할과 기능이 계속 이어질수록 이
산가족과 이 땅의 사람들의 한은 더욱 깊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속히 이 땅이 통일되어 망
배단의 역할이 완전히 끝나게 되기를 고대해본다. 그의 생명이 쓸데없이 늘어날수록 한은 정
비례로 늘고 그 생명이 끝날수록 그 한은 반비례가 된다. 하지만 빠른 통일은 힘들 것 같다.
남과 북의 위정자들이 죄다 썩어문드러졌고, 주변 오랑캐들도 우리의 통일을 반기지 않기 때
문이다. 그러니 망배단은 더욱 고개를 들 것이다.


▲  동쪽에서 바라본 자유의다리 - 경기도 지방기념물 162호

망배단 뒷쪽에는 임진각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자유의다리가 있다. 연못에 발을 담군 이 다
리는 임진각과 임진강 사이의 낮은 곳에 세워져 있는데, 원래 임진강 경의선 철교에 임시로
놓인 것을 임진각 관광지 조성 이후, 연못을 닦고 이곳으로 옮겼다.

서울과 신의주(新義州)를 잇던 경의선은 경부선(京釜線)과 더불어 2개의 철길로 이루어진 복
선(複線) 철도이다. 그러다 보니 임진강에 상행, 하행 2개의 철교가 있었으나 6.25때 폭격으
로 파괴되어 다리 기둥만 멀뚱히 남아있었다. 그렇게 다리가 파괴된 1951년 이후 경의선은 완
전 두 동강이 나버리게 된다.
이후 국군이 이곳을 탈환하면서 하행선 철교를 사람과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다리로 보수했
으며, 1953년 남한과 북한이 서로 포로를 교환할 때 기둥 위에 철교를 복구하고 그 남쪽 끝에
나무와 철제를 혼합하여 임시 다리인 지금의 자유의 다리를 놓았다. 다리 부근 노상리 쪽자연
마을의 이름을 따서 '독개다리'라 불렀으나 북한에 잡혀간 포로 12,773명이 이 다리를 건너서
귀환했기 때문에 자유를 찾았다는 의미로 '자유의다리'라 불리게 되었다. 그 시절 포로들은
차량으로 철교까지 와서 걸어서 이 다리를 건넜다.

판문점(板門店)에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와 더불어 6.25의 비극을 상징하는 다리로 썩 유
쾌하지 않은 역할과 의미를 지녔다. 허나 어찌하랴. 시대를 잘못 탔으니 말이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남북회담 대표들이 이 다리를 건너 왕래를 했으며, 이후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고, 기존 철교는 육중한 다리 기둥만 남아있다.


▲  상판이 나무로 이루어진 자유의다리

자유의다리 길이는 83m, 폭 4.5m, 높이 8m 내외로 나무를 짜맞추어 만들었는데, 힘을 많이 받
는 부분은 철재를 섞어서 사용했다. 임시로 가설된 다리라 솔직히 작품성이나 개성은 없으나
6.25시절 '자유로의 귀환'이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현장으로 그 시절을 나타내는 산증인이
다. 그래서 지방기념물의 적당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임진각에 왔다면 꼭 거닐어야 되는 다리로 임진강과 접한 서쪽은 막혀있다. 하여 다시 제자리
로 돌아와야 되며, 막힌 곳을 넘어가서는 절대로 아니 된다. 그 너머는 민통선 구역이기 때문
이다. 막힌 곳에는 통일을 염원하는 이 땅의 사람들이 달아놓은 온갖 종이와 천, 태극기 등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통일 염원에 대한 뜨거운 열기를 보여준다. 허나 열기가 아직은 빈약한지
휴전선을 녹이지는 못하고 있다.


▲  자유의다리의 막다른 곳 (임진강 방향)

다리는 물줄기로 끊어진 양쪽을 이어주는 존재이다. 허나 이곳은 한쪽만 열려있고, 다른 한쪽
은 막혀 있어 다리의 기능을 온전히 하지 못한다. 마치 분단된 이 땅의 현실을 상징하듯 말이
다.
다리를 건넌 이들은 여기서 강제로 발길을 돌려야 되니 그 아쉬움을 종이와 천에 담아 봉쇄된
벽에 걸어두었다. 저 막힌 곳을 뚫고 북쪽으로 뻗어 나가야 되거늘 이렇게 70년 이상 묶여있
으니 참으로 답답할 따름이다,


▲  자유의다리 (막다른 곳에서 바라본 모습)

▲  장단역에서 가져온 낡은 철로

자유의 다리 북쪽에는 낡은 철로가 짧게 재현되어 있다. 이들은 민통선에 갇힌 옛 장단역(長
湍驛) 부근에 버려져 있던 레일과 침목을 가져와서 재활용한 것으로 침목 위에는 경의선의 민
통선 이북 철도역 28개(임진역, 개성역, 사리원역, 평양역, 신의주역 등)의 이름과 임진강역
부터의 운행 거리가 적혀 있어 분단의 아픔과 미답지 경의선 이북(以北) 구간에 대한 호기심
을 크게 자극시킨다.

▲  완전 고철이 되어버린 레일 변경 레버

▲  장단역 부근에서 가져온 레일과 못


▲  장단역 증기기관차와 재현된 역 플랫폼

정말 오래간만에 발을 들인 임진각에는 눈에 익지 않은 낯설은 존재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중
에는 분단의 지독한 현실과 남북의 해묵은 악감정만큼이나 낡고 빛바랜 존재가 아른거리고 있
었으니 바로 민통선에서 가져온 장단역 증기기관차와 앞서 언급한 철로였다.


▲  장단역 증기기관차 - 국가 등록문화재 78호

임진각의 새로운 명물로 등극한 장단역 증기기관차는 자유의다리와 더불어 임진각의 6.25전쟁
상징물이다.
이 기관차는 언제 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최고 속도는 80km, 기관차 길이 15m, 폭 3.5
m, 높이는 4m이다. 산악 지형에 최적화된 화물운송용으로 국군이 38선을 넘어 신나게 북진을
하던 1950년 늦가을 한복판에 군수물자를 바리바리 싣고 개성에서 평양으로 칙칙폭폭 달리던
중, 중공 개잡것들이 북한을 돕고자 전쟁에 불법 개입하면서 황해도 평산군 한포역에서 눈물
을 머금고 바퀴를 돌렸다.
남쪽으로 후진하던 열차는 장단역에 멈춰섰는데, 북한과 중공 잡것들이 개성 부근까지 내려온
상태라 국군과 연합군은 이 열차가 그것들에게 쓰일 것이 우려되어 군수물자만 서둘러 챙기고
폭파시켰다. (당시 이 열차 기관사는 한준기) 이때 증기기관차 1량만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1953년 휴전까지 장단, 파주 지역에서 치열하게 격전이 벌어지면서 다시금 무거운 상처를 입
었다. 그렇게 하여 그의 몸에는 1,020여 개의 총탄 자국이 박혔으며, 바퀴까지 휘어져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아련히 전해준다.

2006년 경기도는 이 열차를 주목하고 수풀을 뒤집어 쓴 채 웅크리던 증기기관차와 파편 292점
, 레일 관련 파편 132점을 수습해 화물차를 통해 임진각 보존센터로 옮겼다. 화통에서 자라던
뽕나무도 같이 가져와 그 곁에 심었으며, 녹슨 열차를 복원하고자 포스코에 의뢰하여 철제 문
화재 보존처리 기술과 재정지원을 받아 2년 동안 정밀조사, 구조보강, 녹 제거, 보호코팅제
도포 등을 거쳐 2008년 12월 보존처리가 마무리 되었다.
이후 자유의다리 북쪽에 기관차가 머물 자리를 닦아서 2009년 6월 25일 이곳으로 옮겨 천하에
공개했으며, 이때 장단역 부근에서 가져온 레일도 일부 복원했다.


▲  장단역 증기기관차 구제 과정을 담은 사진
버려진 기관차를 감싸던 수풀을 모두 제거해 화물차에 싣고 통일대교를 통해
임진각으로 가져오는 과정이 담겨져 있다.

▲  장단역 증기기관차의 뒷모습
그의 이름이 '장단역 증기기관차'가 된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바로 장단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경의선의 주요 역이자 장단군(長湍郡)의 관문이던 장단역,
허나 남북분단 앞에 '장단군'이란 고을은 아작나서 사라지고
지도에서도 자취를 감추었다. (파주시에 통합됨)

▲  장단역 증기기관차의 앞 모습
기관차 옆에 역 플랫폼을 설치하여 '임진각역'으로 삼았다. 물론 무늬만 역이다.
간신히 살아남은 기관차의 보호를 위해 일종의 지붕을 설치하여
비와 바람, 햇살로부터 그를 지킨다.

▲  하얀 피부로 이루어진 임진각역 표시판

장단역 증기기관차의 거처로 지어진 임진각역, 여기서 고려의 옛 도읍인 개성(開城)까지는 불
과 22km, 서울역에서도 겨우 75km로 천안보다도 가까운 거리이다. 허나 남북분단의 현실이 여
기서 개성까지의 체감 거리를 22억km 이상으로 늘려놓아 차라리 지구에서 떨어진 달나라로 가
는 것이 더 속이 편할 정도이다. 그만큼 개성은 우리에게 그림의 떡 같은 존재가 되었다.


▲  세월이 증기기관차 화통에 달아준 훈장, 뽕나무

50년 이상 버려졌던 증기기관차 화통에는 장대한 세월이 심어놓은 뽕나무가 감쪽같이 뿌리를
내렸다. 그 많은 자리 중에 왜 하필이면 연기가 나오는 화통에 둥지를 틀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과 증기기관차의 애환을 먹으며 어엿한 나무로 자라났다.

2006년 증기기관차를 수습하면서 같이 임진각으로 갖고 나와 이곳에 심었는데, 만약 열차 주
변에 뿌리를 내렸다면 이런 대접까지는 받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제자리에 그냥 두었거나
열차 수습 과정에서 밀어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증기기관차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화통에 자
리를 닦은 탓에 이렇게 임진각에서 존재감도 드러내고 대우도 받는 것이다. 사람이든 무엇이
든 자리를 잘 잡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자리 하나에 팔자가 싹 바뀌니 말이다.


▲  증기기관차 주변에서 가져온 철길 레일과 파괴된 열차의 파편

▲  장단역 증기기관차 주변에서 바라본 임진강 경의선 철교

▲  통일을 꿈꾸는 평화의 종

장단역 증기기관차 북쪽에는 평화의 종을 머금은 커다란 종각(鐘閣)이 있다. 이 땅의 평화통
일을 염원하는 장소에 어울리게 '평화의 종'을 하나 장만하여 북쪽을 향해 은은한 종소리를
날려보내는데, 1999년에 조성하여 2000년 1월 1일 0시 첫 타종식을 치뤘다.
21세기 첫 날에 선보이는 종에 걸맞게 무게는 21톤이며, 높이 3.4m, 지름 2.2m로 그를 품고
있는 종각은 면적 21평, 높이 12.2m이다.

이 종은 누구든 칠 수 있으나 1회 타종에 10,000원의 돈을 줘야 된다. 타종 시간은 10시부터
17시까지이며, 임진각 관리사무소(☎ 031-954-0025)에 신청하면 된다.


♠  임진강을 건너 금지된 땅(민통선)에 들어서다. (도라산역)

▲  경의선 남측에 최북단 역, 도라산역(都羅山驛)

임진각에 발을 들이자 제일 먼저 임진각DMZ매표소를 찾았다. 거기서 민통선 관광 신청을 받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입장권을 구입하면 되는데, 가격은 12,200원(제3땅굴 모노레일 포함, 미
포함시 9,200원)이다. (신분증은 반드시 지참 요망)
DMZ관광코스는 제3땅굴과 도라산전망대, 통일촌직판장을 둘러보는 코스만 운영되고 있다. (평
일은 1일 10회, 주말 휴일에는 1일 12회 운행 / 매주 월요일과 주중 공휴일, 설날과 추석 당
일에는 운행하지 않음) 예전에는 도라산역도 필수로 경유했으나 지금은 가지 않으며, 허준(許
浚)묘와 해마루촌을 둘러보는 코스도 있으나 현재는 내놓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시간이 넉넉해 앞서 다뤘던 자유의다리와 장단역 증기기관차를 둘러보고 시간에
맞춰 돌아가니 민통선 내부로 우리를 안내해줄 셔틀버스가 막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버스에는 20여 명의 관광객이 탔는데, 양이(洋夷) 여인네 2두와 중공 잡것들 여러 두 등 외국
애들도 여럿 탑승했다. 우리를 비롯한 이 땅의 사람들도 그렇고, 외국 애들도 그렇고 다들 미
지의 땅으로 탐험가는 기분 마냥 들떠있었다. 분명 대한민국 영토가 맞고, 지구의 일부긴 하
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금지된 곳을 가기 때문이다.

시간이 되자 버스는 드디어 출발했다. 임진각 북쪽 자유인터체인지에서 1번 국도(통일로)로
진입하여 임진강에 발을 담군 통일대교로 들어섰다. 다리 북쪽 끝에 이르자 검문소가 민통선
으로 들어가는 차량들을 막으며 삼엄하게 검문을 하고 있었는데, 그 검문의 정도가 대충 보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철저하게 개미새끼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살피는지라 검문 시간
이 꽤 걸렸다.
드디어 우리의 셔틀버스가 검문 받을 차례가 되자 헌병 아저씨가 차에 올라 일일히 신분증을
확인했다. 외국 애들은 여권을 보여주면 된다. 만약 신분을 증명할 어떠한 증서도 없다면 여
기서 강제 하차를 당하거나 강제 회차를 당한다. 절대로 들어갈 수가 없다.
참고로 통일대교를 건널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다리 이북에 사는 주민들과 학생, 거
기서 근무하는 군인이나 기타 근무자들, 개성공단 직원과 관계자 밖에 없으며, 차량 역시 신
고된 차량만 통행이 가능하다. 현지 주민이나 군인, 근로자 외에는 임진각에서 민통선 관광을
신청하여 셔틀버스로 이동하는 신분이 확실한 사람, 사전에 수속 절차를 밟은 단체 관광객을
태운 관광버스, 해마루촌이나 통일촌 사람들의 보증을 받은 민박이나 나들이, 업무 손님들은
그때에 한해서만 1회 출입이 가능하다.
그 외에 문산읍내(문산역)에서 대성동과 해마루촌으로 들어가는 파주시내버스 93번 시리즈를
타는 방법도 있으나 이 역시 현지 주민과 군인, 근로자가 아닌 사람은 제아무리 날고 기어도
통일대교 검문소에서 무조건 강제 하차를 당한다. 이 버스는 이 땅의 시내버스 중 민통선을
가장 깊숙히 들어간다. (판문점 직전 대성동까지 운행함)

검문이 끝나자 드디어 검문소를 통과했다. 검문소 주변은 혹시나 모를 북한의 침공에 대비해
그 넓은 도로에 장애물을 잔뜩 깔아놓아 잠시 지그재그로 움직여야 되는데, 그 구간을 지나면
통일대교 북단이다. 이제 임진강을 건너 미지의 땅, 민통선(민북선)에 완전히 들어선 것이다.
여기도 분명 우리나라가 맞는데, 왜 이렇게 낯설기만 한지. 잠시 다른 나라로 순간 이동을 당
한 기분이다. 창 밖 풍경도 이 땅에 흔한 풍경인데 말이다.

다리를 건넌 버스는 통일촌4거리를 지나 북쪽으로 1km 떨어진 3거리에서 좌회전하여 '희망로'
로 들어선다. 이 길로 들어서면 도라산역과 도라산전망대, 개성공단으로 이어지며, 쿨하게 직
진하면 대성동과 판문점으로 이어지나 아쉽게도 그곳은 가지 않는다. 관광 코스에는 없기 때
문이다.
넓게 닦여진 도로(6차선)에 비해 지나가는 차량도 별로 없어 무척 한산한데, 개성공단 검문소
직전에서 좌회전하여 도라산역 주차장에서 바퀴를 멈춘다. 운전사는 여기서 20분을 줄테니 시
간을 맞추라고 그런다. (외국어 방송 서비스나 가는 곳에 대한 설명은 일절 없음)

▲  도라산역과 통일아트 스페이스 현수막

▲  2008년 9월에 개방된 도라산평화공원
안내도

▲  한산한 도라산역 내부 (측면)

▲  도라산역 남북출입사무소

도라산역은 경의선 남측에 북쪽 종점이다. 원래는 개성을 지나 사리원, 평양, 안주, 신의주,
그리고 우리의 옛 땅인 요동반도와 요서, 하북성, 중원대륙까지 달려야 될 철로이지만 남북분
단으로 인해 문산~개성 구간이 끊겨 남과 북이 서로 다른 경의선을 가지게 되었다. 하여 경의
선 남측의 북쪽 종점은 부득불 문산역이 되었고, 임진각에 철도중단점을 설치해 고자가 되버
린 경의선을 위로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끊어진 구간에 드디어 희망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2000년부터 문산~도라산
역 구간 복원 공사에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2001년 문산~임진강역 구간이 개통되었고, 2002
년 2월 도라산역까지 완성되면서 경의선은 50여 년 만에 임진강을 넘어 개성 코앞까지 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북한 개성과도 이어지면서 반백 년 만에 경의선은 하나가 되었다.

이곳 이름이 도라산이 된 것은 부근에 도라산전망대를 품은 도라산이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마지막 제왕인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이 고려에 항복하고 개경(開京)에 입조(入朝)를
했는데, 그는 이 산마루에 올라 신라의 도읍인 서라벌(경주) 방향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고 한다. 그래서 도라(都羅)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전한다.

도라산역은 어지간한 시,군 철도역에 버금가는 규모로 산뜻하게 지어졌는데, 예민한 위치에
자리한 탓에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편이며, 그 큰 규모가 무색하게 무지 썰렁하다. 한때 서울
역에서 이곳까지 새마을호 열차가 운행하기도 했고, 서울~도라산, 문산~도라산 통근형 열차도
들어왔었으며, 그들을 대신해 DMZ관광열차도 들어왔다. 심지어 경의중앙선 전철 전동차도 DMZ
관광열차 대신 잠시나마 이곳까지 바퀴를 들인 적이 있었다.
허나 지금은 북한의 태클과 관광열차의 노후화 등으로 열차의 기적소리가 사라진 상태라 무늬
만 남은 철도역 신세가 되었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오랫동안 끊어진 경의선을 하나로 이어 장차 통일과 대륙 진출에 대비하며
민통선 안에 근사한 역을 지은 것에 그 의미를 둔 현장이다.

* 도라산역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노상리 556


▲  도라산역 내부 (정면)

▲  통일의 피아노 - 분단의 상징으로 통일을 노래하다.
장소가 장소인만큼 그에 걸맞는 이름을 지닌 피아노. 그는 특이하게 철조망을
개조하여 피아노 현을 엮었다. 그러다 보니 소리는 일반 피아노보다 조금
못한데, 이는 현재 남북의 온전치 못한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  통일을 염원하는 온갖 포스터들
우리는 잃어버린 땅이 오지게도 많다. 당장에 북한도 그렇고, 대마도(對馬島)도
그렇고, 만주와 요동, 연해주, 산동반도, 화북 일대, 그리고 왜열도까지
어느 세월에 다 찾지??

▲  도라산역 기공식 때 김대중 대통령 내외의 기념 서명이 담긴 침목

▲  침목에 쓰인 김대중 대통령 내외의 서명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시여'
도라산역 기공식이 열린 역사적인 2000년 9월 18일, 김대중 대통령 내외가
이곳을 찾아 소감을 밝히고 침목에 이렇게 서명을 남겼다.

▲  미국 부시 대통령의 기념 서명이 담긴 침목

2002년 2월 20일 미국 부시가 도라산역을 방문하여 침목에 기념 서명을 남겼다. 한글로 써야
마땅하지만 건방지게도 꼬부랑 알파벳으로 휘갈겨 썼는데, 내용은 '이 철도가 한민족을 이어
주기를 염원합니다' 이런 뜻이다. 허나 현실은 미국 양이(洋夷)나 러시아 양이, 중공 개잡것
들, 왜열도 원숭이들이 합심해서 통일을 방해하고 있다.


▲  미국 부시가 남긴 친필 서명


♠  북쪽을 향한 몸부림, 도라산전망대와 제3땅굴

▲  군부대 스타일로 지어진 도라산전망대(도라전망대)

도라산역은 역사(驛舍) 내부만 둘러봤다. 열차를 타는 플랫폼은 문이 잠겨있었고, 주어진 시
간도 20분에 불과해 역 북쪽에 닦여진 도라산 평화공원은 어림도 없었다.

우리의 조급한 셔틀버스는 도라산전망대로 길을 잡았다. 잠깐 희망로를 타다가 서쪽으로 난
조그만 길로 들어서 꼬불꼬불한 언덕 길을 오른다. 길 좌우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고, 해골 마
크가 그려져 있는데, 이들은 지뢰가 매설된 곳이다. 이곳 외에도 희망로 서쪽 상당수의 숲과
산도 해골마크가 염통을 건드리는 지뢰 천국이다. 특히 도라산전망대로 올라가는 고갯길 좌우
는 완전 지뢰밭이며, 전망대 주변 숲도 상당수 지뢰밭이다.
그러니 여기서 바퀴를 잘못 놀리는 날에는 완전 지뢰 밥이 되고 마니 완전 공포 특집이 따로
없다. 은근히 쫄깃해지는 염통을 부여잡고 있으니 버스는 무사히 도라산전망대 주차장에 바퀴
를 접으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전망대로 오르는 길은 비록 해발은 낮지만 'S'라인의 극치를 보여주는 고갯길이라 만약의 실
수를 대비해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쌓인 날에는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관람시간을 30분 정도 주었다. 아무래도 북쪽 땅이 바라보이는 곳이라 넉넉히 주
는 모양이다. 주차장에서 내리니 바로 군부대 스타일로 지어진 얼룩무늬의 도라산전망대(도라
전망대)가 나오는데, 이곳은 도라산(156m) 정상부로 전망대 건물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으며,
일반 관광객은 그 서쪽에 닦여진 전망대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된다.

도라산전망대는 휴전선 서부전선 군사분계선 최북단에 있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민통선 전
망대로 기존 송악산OP(관측소)가 폐쇄되면서 1986년 이곳에 북한을 바라보는 전망대를 닦아
1987년 1월 속세에 공개되었다.
고려에 항복한 신라의 마지막 군주, 경순왕이 개경에 입조하여 늘 이곳에 올라 고향, 경주를
바라보며 눈물 짓던 곳으로 오늘날 우리들은 여기서 금지된 땅 북한을 바라본다. 아마도 경순
왕이나 우리나 바라보는 마음은 조금은 비슷할 것이다. 그리워하는 마음만큼은 같기 때문이다.

전망대의 규모는 803.31㎡로 관람석 500석, VIP실, 상황실, 주차장(30~40대) 등을 갖추고 있
으며, 이곳이 개성을 비롯한 북한 땅과 가장 가까운 현장이라 개성공단과 북한의 선전용 마을
인 기정동, 거대한 규모의 김일성 동상, 개성 동부와 송악산(松嶽山) 등이 바라보인다고 한다.
허나 우리가 갔을 때는 날씨도 조금 흐렸고 거기에 중공산 미세먼지까지 요란하게 점을 찍으
면서 겨우 개성 동부 지역만 확인했다.
사람들의 시력 한계를 극복하고자 망원경 34대도 깔려있는데, 임진각 옥상 전망대처럼 500원
을 요구한다. (일부는 무료임)
 
* 도라산전망대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점원리 390-2 (제3땅굴로 308)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개성 동부 지역과 개성공단 방향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개성 동부 지역과 개성공단 방향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개성 남부 지역과 개성공단 방향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④
파주 장단면과 개성 남부 지역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⑤ 파주 장단면 지역 (남측 민통선)
개성공단 남북출입사무소(검문소)에서 개성공단, 개성으로 이어지는 도로(희망로)가
바라보인다. 예전에는 판문점을 거쳐 북으로 갔으나 개성공단 개발로 인해
새로운 길이 생긴 것이다. 허나 아무나 갈 수 없는 콧대 높은 도로이니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도로에 불과하다.

▲  도라산전망대 앞 휴전선 구역

도라산전망대는 2018년 10월에 기존 전망대(군부대 스타일로 지어진 건물)에서 약간 북쪽으로
신축 이전되었다.

허나 우리에게는 이런 콘크리트 전망대는 필요 없다. 그까짓 기정동과 개성 일부 지역을 봐서
무엇을 하겠는가? 서로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이런 것에 경쟁하지 말고 속히 통일이 되어
서로를 완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이런 소모적인 것들에 치중해야 되
는지 모르겠다. 단순히 북쪽 땅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닌 '한때 우리에게도 이런 우울한 시절이
있었구나' 추억에만 머무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  DMZ마크를 내민 제3땅굴 입구

보면 볼수록 한숨만 나오는 북쪽 땅을 20여 분 바라보고 다시 셔틀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크
게 긴장을 하며 마치 뱀 허리에 올라탄 듯 도라산을 조심조심 내려와 북쪽에 자리한 제3땅굴
로 이동했다.
제3땅굴은 땅굴 파기 전문인 북한이 남침용으로 뚫은 4개의 땅굴 중 하나이다. 3번째로 발견
되어 제3땅굴이란 단순한 이름을 달게 되었는데, 문산에서 12km, 서울에서 불과 52km로 서울
에서 가장 가까운 남침용 땅굴이다. 만약 발견되지 못했다면 자칫 상당히 예민한 상황을 맞았
을지도 모르겠다.

땅굴이 발견된 경위는 대략 이러하다. 1974년 북한에서 남침 땅굴 측량기사로 일했던 김부성
이 귀순을 했다. 그는 판문점 근처에 땅굴이 있음을 알려 주어 1975년부터 주변을 샅샅이 뒤
졌으나 3년이 넘게 발견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78년 6월 10일, 시추공 중 1개가 폭발하면서 역갱도 굴착 공사를 벌여 10월 17일
에 판문점 남쪽 4km 지점에서 땅굴을 발견했다. 땅굴 폭은 2m, 높이 2m, 깊이 73m, 총길이는
1,635m로 휴전선에서 무려 435m나 남쪽으로 들어왔으며, 임진각에서 4km, 통일촌 민가에서 겨
우 3.5km로 1시간에 최대 3만의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는 규모였다.

땅굴이 발견되면서 휴전선 남쪽 170m 지점을 철저하게 틀어막았는데, 북한은 엉뚱하게도 남한
이 판 땅굴이라 주장하며 소심하게 오리발을 내밀었다. 허나 땅굴을 뚫을 때 폭파 흔적이 남
쪽을 향해 있어 그들의 오리발을 무색하며 만들었다.
이후 땅굴 내부를 손질하여 2002년 5월 31일 민통선 관광지의 하나로 세상에 내놓았으며, 미
니열차인 평화호(모노레일)를 바깥에서 땅굴 내부까지 깔았다. 허나 수용 인원에 한계가 있어
서 2004년 지름 3m의 도보 관람로를 따로 닦았다. 또한 DMZ영상관과 상징조형물, 기념품과 간
식거리를 파는 판매장을 설치해 땅굴을 보조한다.

북한이 우리에게 던진 불쾌한 선물인 제3땅굴, 허나 이제는 DMZ명소의 백미이자 파주시의 꿀
단지로 부상하여 파주시와 국방부의 애지중지가 대단하다. 매일 수백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니
말이다. 불쾌한 땅굴이 돈을 부르는 황금 땅굴이 된 것이다.

* 제3땅굴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점원리 1082-1 (제3땅굴로 210-358)


▲  휴전선을 435m나 돌파한 제3땅굴의 위엄

▲  제3땅굴 지하로 인도하는 평화호 모노레일

제3땅굴에서는 무려 1시간에 관람시간을 주었다. 아무래도 파주 DMZ관광지의 갑(甲)과 같은
존재이고 땅굴 내부까지 들어갔다 나오는 시간이 있어서 넉넉히 준 것이다.

이곳은 모노레일 평화호를 타고 땅 속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그 이전에 부근에 마련된 사물함
에 속세에서 가져온 가방과 카메라 등의 소지품을 반드시 넣어두고 가야 된다. 신분증과 지갑
, 핸드폰 정도만 지참이 가능하여 부득이 모든 것을 그곳에 털어넣고 열쇠로 잠구었다. (열쇠
는 비치되어 있음) 그런 다음 별도로 마련된 안전모를 쓰고 평화호에 탑승한다.
안전모 같은 경우는 땅굴 높이가 2m라고 하지만 북쪽 인간들이 오로지 남침에 눈이 어두워 콩
을 볶듯이 판 것이기 때문에 불규칙한 높이가 많다. 하여 땅굴 내부를 거닐다 보면 여러 차례
땅굴 천정과 부딪친다. 그러니 소중한 머리를 위해서 안전모 착용은 필수이다.
또한 땅굴 내부는 사진 촬영이 통제되어 있으며 핸드폰도 터지지 않는다. 그만큼 예민한 곳이
며, 휴전선 코 앞까지 들어간다.

땅굴에 대한 호기심을 품은 사람들을 가득 태운 평화호는 슬슬 기지개를 켜며 지하를 향해 느
릿느릿 이동했다. 속도는 사람 걸음과 비슷하거나 조금 느린 정도로 평화호가 들어가는 터널
은 동굴을 관광지로 닦으면서 남측에서 판 것이다. 그렇게 몇 분을 들어가면 드디어 제3땅굴
승강장에 이르고 여기서 땅굴에 임하면 된다.

속세에 개방된 땅굴 구간은 265m로 휴전선을 불과 170m 앞둔 곳까지 들어갈 수 있다. 더 들어
가고 싶지만 그곳은 차단벽이 설치되어 있고 그 너머는 세상도 눈을 돌린 공간이라 눈물을 머
금고 발길을 돌려야 된다. 땅굴 높이가 다소 들쭉날쭉하여 심심치 않게 안전모와 천장이 부딪
치는 소리가 났으며, 동굴 통로는 2명이 지나다닐 정도의 폭이라 천정만 조금 조심하면 별무
리는 없다.
그렇게 휴전선 앞까지 갔다가 돌아나오는데, 여기서 많은 이들이 아쉬워한다. 말로만 듣던 휴
전선이 코 앞이라니 저기만 넘으면 북한인데, 왜 우리는 가지를 못할까? 한숨은 커져간다. 외
국 잡것들이야 남의 나라 이야기라 상관없는 표정이지만 이 땅의 민중들의 표정은 그렇지가
않다.
땅굴 내부는 지하라 시원하며, 딱히 볼거리는 없다. 다만 평화호 타는 곳 부근에 샘터가 있는
데, 수질은 괜찮은 편이라 1모금 마셔보았다. 민통선 땅굴에서 섭취한 물 맛은 속세에서 마시
는 약수 맛과 비슷한 것 같으니 바깥 세상과 이곳이 같은 나라 땅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땅굴에서 나올 때는 걸어나올까 했으나 마침 평화호가 들어와 관광객을 쏟아내고 있어서 다시
그의 신세를 지며 바깥으로 나왔다. 다시 햇살을 보니 눈이 부시면서도 지옥에서 급히 나온
듯 너무 반가웠다. 아직 20분 정도의 시간이 있어서 땅굴 수식용으로 지어진 DMZ영상관을 둘
러보았다.
시간 관계상 영상물은 시청하지 않았고, 그곳에 전시된 제3땅굴과 휴전선 관련 전시유물, 디
오라마, 사진, 안내문만 둘러보고 나왔다. 그러니 시간이 거의 딱 맞는다.


▲  제3땅굴을 파는 북한 군인 디오라마 - 역시 땅굴의 귀재들

▲  파괴된 장단면사무소 건물에서 가져온 타일들

장단군(長湍郡)에 속해있던 장단면사무소는 6.25를 겪으면서 건물이 모두 파괴되어 겨우 지붕
만 남아있다. 그 자리 또한 민통선에 철저히 묶이면서 세상 뇌리 속에 잊혀진지 오래이다. 장
단군, 장단면이란 지명까지 더불어...


▲  판문점 모형도

6.25시절 여기서 남북이 휴전 협정을 맺었고, 이후로도 쭉 남북의 대화 창구로써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땅이 통일되는 그 순간까지 판문점의 존재는 미치도록 이 땅의 한을 키울 것이다.
제발 모형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면서..


▲  1968년 1.21사태 때 체포된 김신조
31명으로 이루어진 공비 패거리 중, 유일하게 체포되었다. (29명 사살, 1명 도망)

▲  옛 경의선 측량기준석 (2003년 7월에 발견됨)

▲  옛 경의선의 흔적들 (볼트, 레일, 스파이크판, 석탄 등)
2002~2003년에 수습된 옛 경의선의 아련한 흔적들이다. (석탄은 장단역에서 수습됨)

▲  통일 염원 조형물
쪼개진 2개의 덩어리를 하나로 합치고자 하는
염원이 깃들여져 있다. 아직도 저 염원과
시도는 현재진행형~~

▲  제3땅굴을 수식하는 DMZ영상관


제3땅굴과 DMZ영상관을 둘러보고 아직 1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서 기념품 판매점으로 넘어가
과자와 음료수를 섭취했다. 그렇게 파주시 재정에 약간 도움을 준 다음, 시간에 맞춰 셔틀버
스에 올랐다.

우리의 버스는 도라산과 제3땅굴을 모두 뒤로 한 채,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대성동과 해마루
촌까지 모조리 둘러보고 싶지만 현실은 그러지를 못한다. 언제쯤이나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
을까? 그렇다고 버스에서 몰래 이탈하여 개인 행동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곳은 민통선이라
인원 점검이 철저하며 만약 이탈했을 경우 군인들의 수색 표적이 된다. 또한 월북 시도는 하
지 않는 것이 좋다. 이 땅의 현실도 시궁창이지만 저 북쪽은 더 시궁창이다. 게다가 곳곳에
지뢰밭이 도사리고 있으니 산 속을 잘못 헤매다가는 정말 큰일 난다.

버스는 통일촌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마지막 행선지인 통일촌 직판장 앞에서 그 육중한 바퀴
를 멈춰선다. 이곳은 백련리로 군내면 장단출장소 북쪽이다. 직판장 주변에는 백련리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직판장이란 이름 그대로 민통선 주민들이 생산한 장단콩과 온갖 채소 등을
판매하고 있으며, 기타 간식류와 음식(콩요리 중심)도 팔고 있다. 버스가 이곳에 들른 것은
여기서 지역 특산품이나 간식 등의 소비 행위를 하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주어진 시간은 10분 정도라 마을 구경을 할 시간도 없다. 마치 다른 나라의 마을 같
은 그러나 이 땅의 흔한 시골 풍경을 지닌 백련리와 장단출장소까지 둘러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마을을 아주 조금 둘러보긴 했으나 시간 제약이 발목을 잡고 외지인이 함부로 돌아댕
기면 안되는 곳이라 새가슴처럼 바로 돌아와 음료수 하나 사먹고 차에 오른다.

참고로 파주 민통선 지역에 지역 주민들이 살고 있다. 집과 경작지를 가지고 있는데, 나라의
예민한 곳에 살고 있어 제약은 많다. 허나 그만큼 혜택도 적지 않다. 또한 일정한 인구 수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 때나 전입이 불가능하며, 전출하는 가구가 있어야 그 수만큼 전입
이 가능하다. 그러니 은근히 특별한 동네이다. 허나 휴전선이 코 앞이니 늘 북한의 도발이라
는 폭탄을 안고 살아야 된다.

통일촌직판장을 끝으로 파주 DMZ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통일대교를 건널 때는 별 다른 검
문 절차 없이 통과시켜 주었고 다시 임진각으로 돌아왔다. 마치 오후 낮잠에서 꿈을 꾼 듯 끝
이 난 것이다.

임진각으로 돌아와 앞서 살피지 못한 바람의 언덕을 가고자 했으나 후배가 힘들다며 반대 의
사를 내세워 별 수 없이 주변만 둘러보고 임진강역으로 나왔다. 경의중앙선의 문산~임진강역
셔틀 전철을 탈까 했으나 평일은 2회, 휴일은 4회 밖에 다니지 않아서 역 앞에 있는 버스 정
류장에서 파주마을버스 058번을 타고 문산읍으로 나왔다.

058번은 노선 특성상 운천리와 장산리 일대를 정신 없이 강제투어를 시켜주고 문산읍내에 우
리를 내려놓는다. 이렇게 하여 연말 파주 민통선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임진각에 있는 경의선 철도 중단점과 증기기관차

임진각을 조성하면서 이곳에 경의선 철도 중단점을 세웠다. 허나 2001년까지 경의선 남측 종
점은 문산역으로 여기보다 더 남쪽이며, 2001년 이곳까지 개통되면서 실질적인 중단점이 되었
으나 2002년 이후 임진강 너머로 이어지면서 중단점의 의미는 퇴색되었다. 허나 열차를 타고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곳의 북쪽 중단점이 이곳(임진강역)이니 그 의미로 질긴 목숨을 이어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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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12월 1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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