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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산책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숙용심씨묘표

▲  마실길 돌탑

▲  숙용심씨묘표

 


봄이 한참 익어가던 4월의 끝 무렵, 천하 도보길의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을 받는 북한
산둘레길을 찾았다.
이번 둘레길 나들이는 북한산성입구에서 시작해 내시묘역길 진관동(津寬洞) 구간과 마실
길을 거쳐 은평뉴타운 제각말아파트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천하 탐방밀도 1위(1㎢당 5만
여 명)로 기네스북에도 오른 북한산(삼각산) 탐방객의 절반 정도가 둘레길 방문자라고
하니 그 인기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진관동 구간

▲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 입구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가면 서울에서 제일 작은 초등학교인 북한산초교가 있다.
(거의 시골학교 분위기임)


북한산둘레길 10구간인 내시묘역길은 고양시 효자동(孝子洞) 공설묘지에서 진관동 방패교육대
에 이르는 3.5km의 산길이다. 북한천(北漢川)에 걸린 둘레교를 사이로 북쪽은 고양시, 남쪽은
서울 영역으로 평지와 야트막한 산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주이씨 서흥군파묘역과 경천군 송
금비, 경주이씨묘역, 여기소터, 백화사, 중골마을 느티나무 등의 늙은 명소가 있다.

백화사 뒤쪽 산자락에 천하 최대의 내시묘역이었던 이사문 공파(李似文 公派)의 묘역이 있었
다. 바로 그 묘역 때문에 '내시묘역길'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는데, 그 묘역의 규모는 8,800평
으로 45기의 조선 중~후기 무덤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가장 오래된 묘는 자헌대
부(資憲大夫)로 승전관(承傳官)을 지낸 김충영(金忠英)의 무덤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대단한
곳이 있구나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묘역은 2012년 4월 귀신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후손들이 묘역을 정리해 조경개발업자에게 팔았기 때문이다. 백화사까
지 길이 뚫리면서 땅값이 많이 오르자 팔았다고 전하며 후손들은 땅값으로 4.8억원을 만졌다
고 한다. 유골은 화장하여 납골당 등에 두었고 무덤에서 나온 유물 또한 후손들이 가져갔으나
무덤에 배치된 문인석(文人石)과 상석(床石) 등의 무거운 석물은 버려져 여기저기 흩어졌다.
얼마나 비밀리에 콩 볶듯이 했는지 동네 사람들과 백화사 승려들도 묘역이 없어진 것을 뒤늦
게서야 알았다고 한다.
이 땅 최대의 내시묘역으로 무궁무진한 가치를 지녔던 그곳은 그렇게 사라져 이제는 한낱 전
설 속의 이야기처럼 되었다. 진작에 국가 사적이나 지방문화재로 지정했더라면 이런 일은 막
을 수 있었을 것인데(후손들이 문화재 등급 지정을 신청하거나 동의해야 가능함) 많은 이들의
그릇된 생각과 내시묘역에 대한 저평가, 그리고 철밥통들의 직무유기가 낳은 비극이다.
(현재는 거의 숲이 들어섬)

이제 내시묘역도 없는 내시묘역길이 되었으니 그 이름도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이는 갈비탕
에 갈비가 빠졌음에도 갈비탕을 칭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름을 바꾸는 것이 적당하
다고 본다. 하지만 북한산국립공원 철밥통들은 이름 변경도 귀찮다며 계속 수수방관하고 있다.


▲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에서 경천군 송금비 구간)
숲이 워낙 삼삼하여 햇살도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긴다.

▲  경천군 송금비 주변 내시묘역길
산길 주변은 경주이씨 경천군파 문중 땅이라 양쪽에 철책과 나무난간을 둘러
외지인의 출입을 막고 있다.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慶川君 李海龍 賜牌地 松禁碑)
- 서울시 지방기념물 35호


한산초교입구에서 내시묘역길을 따라 자연에 묻힌 민가를 여럿 지나면 울창한 숲속에 들어
서게 된다. 마치 자연휴양림에 들어온 듯, 키가 크고 늘씬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며 이로운
기운을 아낌없이 베풀어 속세에서 오염된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데, 그 1폭의 수채화와 같은
오솔길을 가다 보면 조그만 늙은 비석이 활짝 마중을 나온다. 그 비석이 바로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이다. (줄여서 '경천군 송금비', '경천군 송금물침비'라 불림)

경천군은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서예가 겸 역관(譯官)으로 이름은 이해룡(李海龍)이다. 본관
은 경주(慶州), 자는 해수(海叟). 호는 북악(北嶽)으로 해서체(楷書體)를 꽤 잘 썼다고 하며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한호<韓濩, 한석봉(韓石峯)>에 필적하는 명필이라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는 왜어(倭語)에 능숙해 1588년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사자관(寫字官)으로
왜열도에 갔다 왔으며 많은 글씨를 그곳에 뿌리고 왔다.

임진왜란 시절에는 역관으로 왜군과의 협상테이블에 참여해 화평교섭에 힘썼으며, 1595년 중
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가 되고 1602년에는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가 되었다. 선조(宣祖)
는 왜군과의 교섭에서 큰 공로를 세운 것을 치하하며 그를 경천군에 봉했으며, 지금의 백화사
북쪽 일대의 땅을 하사했다.

광해군(光海君)은 1614년 사패지(賜牌地, 제왕으로부터 받은 땅) 적당한 곳에 송금비를 세워
주었는데, 비문에는 큼지막하게 '慶川君 賜牌定界內 松禁勿侵碑' 13자가 쓰여 있다. 그 내용
은 경천군이 하사받은 땅에서 소나무를 벌목하거나 무단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으로 뒷면에
는 '만력(萬曆) 42년 갑인(甲寅) 10월'이라 쓰여 있어 1614년 10월에 세웠음을 알려준다.

▲  조성시기가 쓰여진 송금비 뒷면

▲  경천군 송금비 주변

비석에 쓰인 송금(松禁)은 나라에서 필요한 목재를 확보하고자 소나무가 많은 산을 선정해 보
호하는 것으로 고려 때 시행되었다. 이곳 송금비는 조선시대 임업정책의 하나인 송금 정책을
보여주는 산증인으로 400년이 넘은 나이에도 무탈하게 잘 남아있으며 조선 임업사에서 꽤 중
요한 유적이자 천하에서 딱 하나 밖에 없는 존재로 가치가 무지하게 높다. 그래서 2014년 뒤
늦게나마 서울시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받게 되었다. 이런 비가 2기가 있다고 하나 현재는 이
곳만 있다. (다른 하나는 여전히 숨바꼭질 중)

비석이 바라보는 방향을 보면 철책 사이로 잠겨진 문이 보일 것이다. 그 문을 열고 숲으로 살
짝 몸을 숨기면 이곳의 주인인 이해룡의 묘역을 만날 수 있는데 이들 묘역은 경주이씨 묘역이
라 불린다.
고색의 때가 가득해 중후한 멋을 풍기는 비석 주위에는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의자 3개가 마
련되어 있다. 워낙 숲속이고 평일에는 인적도 별로 없어 바람의 소리와 새의 노랫소리가 이곳
을 이루는 소리의 거의 전부이다. 북한산둘레길이 닦이면서 비로소 그 존재를 속세에 내보인
존재로 만약 둘레길이 아니었다면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둘레길이 많
은 숨겨진 명소를 속세로 꺼내주었음)

* 경천군 송금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25


▲  경천군 송금비에서 백화사로 이어지는 내시묘역길
중간에 의상봉과 용출봉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손을 내민다.

▲  고품격 숲길을 자랑하는 내시묘역길 (백화사 직전)

▲  중골마을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10호

경천군 송금비에서 7~8분 정도 남쪽으로 가면 백화사(白華寺) 옆구리이다. 여기서부터 전원(
田園) 분위기를 지닌 중골마을(여기소마을)이 펼쳐지는데, 마을로 들어서면 늙은 느티나무가
바로 마중을 나온다.

이 나무는 높이 19m, 둘레 4.7m의 큰 나무로 추정 나이는 210년 정도이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165년) 이곳은 이사문 내시 집안이 살던 곳으로 그 후손이 심은
것으로 여겨지며 오늘도 시원한 그늘을 베풀어 자연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준다.


▲  여기소(汝其沼)터 표석

백화사입구 정류장에서 백화사로 가는 길목 초입에 여기소터 표석이 있다. 여기소는 소(못)의
이름으로 지금은 실체는 없고, 이름만 남아있는데,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북한산(삼
각산)의 산바람을 타며 아련히 전한다.

조선 숙종(肅宗) 시절, 북한산성(北漢山城)을 크게 증축했을 때 지방 관리로 있다가 공사 현
장에 파견된 관리가 있었다.
그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기생은 그를 보고자 먼 길을 마다하고 여기까지 왔으나 공사 관계자
들이 만나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너무 열받은 나머지 이곳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그런 사연으로 '너의 그 사람이 잠긴 못'이란 뜻에서 '여기소'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조금만 기다렸으면 공사가 끝날 것을 뭐가 그리 급해서 섣부른 행동을 했을까? 옛말에도 급하
면 돌아가라고 했거늘, 그 속담만 얌전히 지켰으면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것인데 말이다. 아마
도 꽤나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모양이다.


▲  내시묘역길 남쪽 구간 (북한산캠핑장 주변)
내시묘역길도 그렇고 북한산둘레길은 민가와 농장, 경작지, 개인 토지를 이리저리
피해가느라 우리네 인생처럼 굴곡이 좀 크다.

▲  쭉쭉 뻗은 내시묘역길 남쪽 구간


♠  북한산둘레길 9구간, 마실길

▲  마실길 북쪽 시작점

내시묘역이 없는 내시묘역길은 여기서 마실길로 간판을 바꾼다. 마실길은 방패교육대에서 진
관생태다리까지 이어지는 1.5km 구간으로 완전 평지 수준이며 북한산둘레길 구간 중 가장 짧
고 편한 길로 살랑살랑 거닐기에 아주 좋다. 하여 마실길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 코스에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숲길, 삼천사계곡, 진관사계곡, 숙용심씨묘표, 영산
군묘역, 화의군묘역, 진관동 느티나무 4형제 등의 명소가 있어 볼거리도 풍년이며 진관사(津
寬寺)와 삼천사(三千寺)도 가까워 자연과 산책을 겯드린 답사 코스로 아주 좋다.


▲  마실길 진관천 벼랑길

마실길을 들어서면 진관천 벼랑에 닦여진 나무데크길이 나온다. 깎아지른 벼랑에 잔도(棧道)
처럼 길을 낸 것으로 동쪽은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벼랑이, 서쪽은 진관천이 삼
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물을 모두 머금으며 창릉천으로 흘러간다.


▲  수풀로 무성한 진관천(津寬川)과 벼랑길(마실길)
예전에는 이곳도 피서의 성지로 북새통을 이루었으나 요즘은 진관사계곡과
삼천사계곡 상류로 많이 넘어갔다.


진관천 벼랑을 통과한 마실길은 삼천사입구에 이른다. 삼천사는 서울에서 가장 늙은 마애불(
磨崖佛)을 지닌 절로 그곳이 당기면 잠시 둘레길을 놓아두고 갔다 와도 상관없다. (20~30분
정도 걸림)
삼천사입구에서 삼천사계곡 구간에는 농장과 식당이 여럿 있는데 식당 중간을 지나 삼천사계
곡을 건너야 다음 코스로 진행이 된다. 평일에는 썰렁하지만 휴일에는 맛있는 냄새가 아주 진
동을 하여 그 유혹을 무시하기가 어렵다.


▲  마실길 돌탑 구간

삼천사계곡을 건너면 'S'자로 살짝 구부러진 길이 나오고 길 왼편으로 비슷하게 생긴 돌탑 4
형제가 마중을 한다. 이들 돌탑은 둘레길을 조성하면서 수식용으로 만든 것으로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들이 있어 둘레길을 아기자기하게 꾸며준다.


▲  마실길의 오랜 터줏대감,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11호

돌탑을 지나면 울창한 모습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나그네의 두 눈을 단단히 동여맨다. 그는 동
화 속 푸른 언덕이나 초원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나무로 나이는 약 170년에 이른다.
자꾸만 먹어도 끝이 없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높이 18m, 둘레 4.2m에 큰 나무로 성장했는데
그의 위치는 진관동 132-20번지로 북한산둘레길이 생기기 이전에는 삼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사이에 어정쩡하게 자리해 찾는 이는 거의 없었다. 삼천사와 진관사를 수없이 들락거린 나도
둘레길의 안내로 2012년 이후가 되어서야 그를 만났으니 앞서 경천군 송금비와 더불어 둘레길
이 캐준 소중한 보물이다.


▲  은행나무숲길 옆에 닦여진 돌탑들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숲과 돌탑이 나란히 있으니 마치 신성한 어딘가로
인도당하는 기분이다. 저곳을 지나면 신선이나 어느 영적인 존재를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  마실길 은행나무숲길

북한산둘레길에 아름다운 풍경이 꽤 있지만 그중에서 5곳을 뽑는다면 이곳 은행나무숲길과 그
옆에 자리한 170년 묵은 느티나무를 강하게 꼽고 싶다.
이곳은 마실길의 백미(白眉)와 같은 곳으로 수목원이나 휴양림의 그림 같은 숲속길이나 산책
로를 거니는 듯한 즐거운 기분이 든다. 느티나무 주변을 곱게 손질하고 나무와 꽃을 많이 심
어 마실의 기분을 진하게 들게 했으며,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로 조촐하게 은행나무숲길을
내어 전남 담양(潭陽)의 명물인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에 못지 않은 맵시를 자랑한다.

은행나무숲길은 북한산둘레길이 지나는 명소 가운데 가장 내 마음을 홀린 곳으로 집으로 훔쳐
와 나 혼자서 두고두고 보고 또 보고 누리고 싶다. 이런 곳에서는 정말 옛 사람들처럼 시 1수
흉내내야 운치가 나거늘, 시적(詩的) 감각이 떨어지고 인간의 하찮은 말과 언어로 자연의 아
름다움을 감히 표현하고 희롱한다는 것도 조금은 실례가 되는 일이 아닐까 싶어 그냥 탄성만
질러본다.


♠ 마실길 끝에서 만난 문화유산들

▲  영산군 이전 묘역(寧山君 李恮 墓域) - 서울 지방기념물 26호

은행나무숲에서 진관사계곡을 건너 계단을 오르면 진관사로 인도하는 도로(진관길)가 나온다.
여기서 동쪽은 진관사로 이어지며, 서쪽은 은평한옥마을로 마실길은 바로 서쪽에 있는 3거리
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산자락을 가만히 살펴보면 무덤들
이 보일 것인데 그곳이 바로 영산군 묘역이다.

묘역에는 영산군 내외와 그의 아들인 장흥군 이상(長興君 李祥), 손자 이경의(李鏡義), 증손
자 이종(李琮) 등 4대가 묻혀있는데, 가장 위쪽이 묘역의 터줏대감인 영산군의 무덤이고, 제
일 밑이 이종의 무덤이다. 그 묘역으로 가려면 서쪽 3거리에서 마실길을 따라가다가 동쪽(오
른쪽)을 살펴보면 그곳으로 오르는 길이 보인다. 그 길을 오르면 된다.

묘역의 주인인 영산군 이전(1490~1538)은 조선 9대 군주인 성종(成宗)의 13번째 아들로 숙용
심씨(淑容沈氏)의 소생이자 연산군(燕山君)과 중종의 이복 동생이다. 그는 문무에 매우 능했
다고 하며 말을 매우 잘탔다고 한다.

연산군(燕山君) 시절의 어느 날, 그는 연산군, 진성대군(晋城大君, 후에 중종)과 함께 도성(
都城) 밖 금표(禁標) 구역으로 사냥을 나간 적이 있었다. 사냥을 마친 연산군은 무엇을 시험
하고자 함인지 진성대군에게
'나는 동대문으로 들어갈테니, 너는 남대문(南大門)으로 들어가라. 만약 나보다 늦게 도착하
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야!!' 이랬다.
그 말을 들은 진성대군은 크게 쫄아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하자, 영산군이 진성대군에게
'형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요. 제 말이 전하(殿下, 연산군)께서 타신 말보다 훨씬 빠르니 제
가 대신 하겠습니다'
말하면서 진성대군을 따라가니 말이 갑자기 나는 듯이 도망쳐버렸고, 도
성에 이르니 조금 후에 연산군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렇게 영산군이 나서준 덕에 발등에 떨어진 급한 불을 끈 진성대군은 1506년 박원종(朴元宗)
과 성희안(成希顔), 홍경주(洪景舟) 등이 반란을 일으킨 이른바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위
에 올랐다. 후대 사람들은
'영산군은 중종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말했다고 하며 중종 자신도 연산군 시절 그에게 받
은 신세로 그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중종 시절 영산군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으며, 1538년 48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시호는 충
희공(忠僖公)으로 부인은 2명이 있었는데, 전처는 금릉군부인 청송심씨(金陵郡夫人 靑松沈氏)
이며, 후처는 교성군부인 경주정씨(交城郡夫人 慶州鄭氏)이다.

묘역은 북쪽과 서쪽 지형이 다소 바뀌고 신도비가 묘역 앞으로 이전된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은평뉴타운 개발의 삽질이 막 시작되던 2006년에 강제 이전될 처지에 놓였으나 다
행히 제자리를 지켰다.
16~17세기 왕족 묘역의 무덤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묘비(묘표)와 문인석, 상석(床石)의
상당수는 그 시절 것이라 가치가 상당해 2007년 2월에 서울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
다. 또한 인근에 자리한 화의군 묘역과 달리 사당(祠堂)은 따로 없다.

▲  충희공 영산군 신도비(神道碑)
근래 마련된 신도비로 원래는 여기서
북서쪽에 있었다.

▲  이종(李琮) 내외묘와 묘비(墓碑)
영산군의 증손자인 이종의 합장묘로 근래
만든 묘비와 망주석을 지니고 있다.


▲  영산군의 손자인 이경의(李鏡義) 묘

이종 묘 바로 위에는 그의 부모이자 영산군의 손자인 이경의 내외의 무덤이 있다. 그는 창원
황씨 부인과 합장(合葬)되어 있으며 후처인 곡산노씨(谷山盧氏)는 옆에 따로 작은 무덤을 만
들었는데, 이종의 무덤과 달리 문인석도 1쌍 갖추고 있다.

▲  이경의 묘와 묘비

▲  복스러운 모습의 문인석(文人石)


▲  영산군의 아들인 장흥군 이상(長興君 李祥)의 묘

이경의 묘 바로 윗쪽에는 그의 부모이자 영산군의 아들인 이상 묘가 있다. 봉긋하게 솟아있는
왼쪽 봉분(封墳)에는 장흥군 이상, 오른쪽 봉분에는 죽산안씨 부인이 잠들어 있으며, 묘비는
근래 새롭게 만들었지만 상석과 혼유석은 16세기 모습 그대로로 고색의 때가 짙다.


▲  조촐한 모습의 영산군 묘

묘역 제일 위쪽의 양지 바른 곳에 자리하여 아들과 손자들의 무덤을 바라보고 있는 영산군 내
외의 무덤은 2기로 이루어져 있다. 묘비를 갖춘 왼쪽 묘는 영산군과 교성군부인 경주정씨(交
城郡夫人 慶州鄭氏)의 합장묘이고, 오른쪽은 금릉군부인(金陵郡夫人) 청송심씨의 묘이다.


▲  장대한 세월을 뛰어넘으며 나란히 자리한 3기의 비석

영산군묘 한쪽에는 3기의 비석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오른쪽의 작은 비석
이 초창기의 영산군묘 묘표(墓表)로 1538년에 지어졌다. 그 묘표가 노쇠하자 이수를 갖춘 비
석을 새로 장만하니 그것이 가운데에 있는 검은 피부의 비석이며, 그것 역시 세월을 예민하게
타자 지붕돌 비석을 새로 마련했다. 허나 그마저 지금 무덤 앞에 있는 비석에게 자리를 내주
고 현재 자리로 밀려나 한참이나 선배들인 비석들과 한가로운 여생을 보낸다.

마치 3대가 나란히 기념촬영에 임하는 듯한 모습으로 오른쪽에 작은 묘표가 할아버지, 가운데
비석이 그의 아들, 그리고 지붕돌 비석이 손자 같다.


▲  영산군 옛 묘표의 이수(螭首) 부분
물결무늬 구름 사이로 이무기가 여의주를 희롱하는 장면이 담겨져 있다.

▲  영산군묘를 지키는 문인석

영산군묘는 호석(護石)이 없는 조촐한 봉분 앞에 상석과 묘표를 두고 그 앞에 장명등(長明燈)
과 문인석 1쌍을 두었다.. 홀(忽)을 쥐어들고 서로를 연모하듯 바라보는 문인석은 무려 480년
이 넘는 기나긴 세월에도 표정 하나 고치지 않고 밝은 표정으로 무덤을 지킨다.

왼쪽 문인석(왼쪽 문인석 사진) 측면에는 3개의 구멍이 있다. 이들은 6.25시절에 구파발 지역
에서 벌어졌던 동족상잔의 흔적으로 북한군이 쏜 것으로 보이는 총탄 3개가 그의 몸을 가격해
저렇게 치유하지 못할 상처를 안게 되었다. 겉으로야 표정관리하며 태연하게 서 있지만 얼마
나 아팠겠는가. 절대로 일어나지 말았어야 될 그 전쟁은 이 땅의 사람 뿐만 아니라 말을 못하
는 저들에게도 무수한 비극을 안겼다.

* 영산군 이전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39


▲  숙용심씨묘표 주변

진관동 느티나무 3거리에서 진관사입구 교차로 방면(서쪽)으로 몇 걸음 가면 오른쪽에 '셋이
서문학관'이란 2층 한옥이 있다. 거기서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낮은 철책이 둘러진 야트
막한 동산이 있고 그곳으로 인도하는 오르막길이 손을 내민다. 그 손에 이끌려 그 길을 오르
면 그 정상에 숙용심씨묘표와 제단이 있다.

숙용심씨(淑容沈氏, 1465~1515)는 성종(成宗)의 여러 후궁 중의 하나로 세조(世祖) 즉위에 큰
공을 세웠던 원종공신(原從功臣) 심말동(沈末同)의 딸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영산군을
비롯한 이성군(利城君), 경순옹주(慶順翁主), 숙혜옹주(淑惠翁主)등 2남 2녀를 두었으며, 내
명부(內命婦)의 4품인 숙원(淑媛)까지 올랐다. 1515년에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나중
에 3품인 '숙용(淑容)'으로 추봉(追封)되었다.

심씨의 묘역은 분명 서울 근교 어딘가에 마련되었으나 그 위치는 여전히 오리무중에 잠겨있다.
조선시대 왕족의 무덤 중 거의 흔치 않게 무덤 위치가 날라간 것이다. 하여 산사태나 홍수 등
의 천재지변으로 갑자기 사라지거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실전(失傳)된 것으로 보이며, 그의
무덤 앞에 세웠던 묘표(묘비) 역시 500년 가까이 행방이 묘연했다.

이후 한참의 세월이 덧없이 흘러 1999년 6월, 부산일보 동경지사장이자 한일역사공동연구학회
장으로 있던 최성규(崔性圭)가 우연히 왜열도 동경(東京) 미나토구(區)에 있는 '다카하시 고
레키요(高橋是淸) 기념공원'에서 이 묘비를 발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영산군과 이성군파 후손들은 즉각 '묘비환원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왜국 정부
와 동경시에 묘비 반환을 요구했고, 주일(主日) 한국문화원과 한국대사관에서도 적극 그들을
도왔다. 그렇게 1년의 협상 끝에 동경시가 반환에 협조하여 2000년 6월 16일 비석이 있는 공
원에서 후손들과 미나토구청장이 반환 기념행사를 열었고, 7월 3일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허나 이 비석이 언제 어떤 경로로 왜열도로 넘어갔는지, 어찌하여 동경의 조그만 공원에 있게
되었는지는 전혀 전하는 것이 없다. 그 진실은 오직 비석만이 알 것이나 그 역시 묵비권을 행
사하고 있어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심씨의 묘역을 파괴한 왜군이 가져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비석을 되찾은 영산군과 이성군 후손들은 영산군 묘역 맞은편 북한산(삼각산)이 잘바
라보이는 언덕에 자리를 닦아 사라진 묘역을 대신하여 제사를 지낼 제단(祭壇)을 쌓고 그 위
에 이 묘비를 안착시켰다. 그리고 상석과 향로석 등 제사에 필요한 시설을 세워 매년 제사를
지내면서 늘 주변을 손질하는 등 각별하게 관리를 하고 있다.

심씨의 무덤은 거의 영구적으로 사라졌고 묘표에도 그 위치가 나와있지 않다. 그 묘표마저도
다른 나라로 넘어가 자칫 공원의 미아로 그렇게 썩을 뻔했다. 다행히 뒤늦게나마 발견되어 고
국으로 돌아와 아들의 묘역을 마주보고 있는 곳에 둥지를 틀었으니 심씨도 이제 그 한을 풀고
지하에서 편하게 눈을 감았을 것이다.

숙용심씨묘표는 이런 우울한 사연으로 망향의 묘비란 별명을 지니고 있는데, 그와 함께 2005
년 겨울, 동경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서 우리나라를 통해 고향인 함경북도로 돌아간 정문
부(鄭文孚) 장군의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도 다시 되찾기까지 그 과정은 가히 한 편의 영
화와 같았다. 다른 나라로 빼돌려진 문화유산을 되찾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얼마나 많
은 노력과 정성을 쏟아야 되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귀중한 유물이라 하겠다.
이들은 그래도 고국으로 돌아와 거의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일 뿐이
다. 그런 케이스는 아직 흔치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의 수많은 문화유산이 고국을 꿈
꾸며 타국살이를 전전하고 있다. 그들이 우리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음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될 것이며 언젠가는 그들을 싹 되찾아와야 된다. 제일 좋은 방법은 국력을 증강시켜
돈으로 밀어부치거나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 되찾아오는 것이지만 우리 국력에 그것도 쉽지가
않다.
만약 우리가 지구의 평화와 고토(故土) 수복을 위해 왜열도와 중원대륙, 만주를 공격하게 된
다면 그곳에 있는 우리의 문화유산 외에 그들의 문화유산과 보물도 싹 긁어왔으면 좋겠다. 더
불어 지구 정화를 위해 오랑캐들도 싹 청소 좀 하고 말이다.


▲  유리막에 감싸인 숙용심씨묘표(서울 지방기념물 25호)
비석이 작고 이곳이 바깥이라 도난의 위험이 늘 도사린다. 하여 두껍게 유리막을
씌워 그를 보호하고 있다. 비석 입장에서는 좀 답답하겠지만 그의 안전을
위해서 어쩔 수가 없으니 이런 걸 두고 필요악이라 하는 모양이다.


숙용심씨묘표는 비신(碑身)과 머릿돌(이수)이 하나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졌다. 비신에는 해서(
楷書)로 '숙용심씨지묘(淑容沈氏之墓)'라 쓰여 있는데, 글씨의 크기가 깨알같이 작아서 눈을
크게 뜨고 봐야 보일 것이다.
비석이 꽂힌 비좌(碑座)는 특이하게 2단으로 이루어져 통비(通碑)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2단으로 된 비좌는 이 땅에서 이 묘표가 거의 유일하다. 그러니 그의 가치와 의미는 꽤 남다
른 것이다. 비좌 밑에는 연꽃잎이, 위로는 복련(覆蓮)이 새겨져 있으며 그 측면에는 안상(眼
象)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비석 뒷부분에는 앞면과 달리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다.


▲  숙용심씨묘표 이수 앞부분

이수에는 화려해 보이는 무늬들이 잔뜩 새겨져 속세에서 오염된 두 눈을 호강시킨다. 그 무늬
는 꽃잎이나 소용돌이처럼 생긴 구름무늬로 그 무늬 사이로 뿔과 수염이 달린 이무기(반룡)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얼핏 보면 좀 복잡해 보여서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마음을 비우고
천천히 살펴보면 하나, 둘 보일 것이다. 구름 사이를 날아다니는 이무기의 모습이.

비석의 머릿돌(이수)에 구름무늬가 나타난 것은 조선 초부터로 이곳처럼 구름무늬와 용이 함
께 새겨진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하니 그만의 매력을 가진 개성이 넘치는 비석이다. 이건 지방
기념물에 둘 것이 아니라 국가 보물로 삼아도 손색이 없는 보물이다. 고국으로 돌아온 흔치
않은 사연에 2단으로 된 비좌, 그리고 구름무늬와 용이 같이 새겨진 이수까지, 겉은 조그만
비석이지만 대충 넘기기에는 그의 존재는 너무나 크다.

* 숙용심씨묘표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126


▲  구름무늬로 가득해 침침한 두 눈을 빙빙 돌게 만드는 이수의 뒷부분
구름무늬가 내소사(來蘇寺) 대웅전의 꽃창살과 많이 닮았다.

▲  2001년에 세워진 숙용심씨묘비 환원기념비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아주 매끄러운 피부를 지녔다. 허나 거의 한자 투성이에 문단 간격도
아주 각박하여 읽기가 좀 고통스럽다. (오늘도 고통받는 나의 두 망막)

이렇게 하여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산책은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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