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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동 봉은사(진여문, 법왕루, 선불당, 대웅전, 미륵대불)


' 서울에서 제일 큰 절, 삼성동 봉은사 '

오색연등으로 가득한 봉은사 대웅전 뜨락

▲  오색연등의 상큼한 물결, 봉은사 대웅전 뜨락

봉은사 판전 봉은사 영산전

▲  봉은사 판전

▲  봉은사 영산전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선인 5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강남구 봉은사(奉恩寺)를 찾
았다.
강남구(江南區) 노른자위 땅에 넓게 자리한 봉은사는 20번 넘게 인연을 지은 곳으로 소
장하고 있는 지정 문화유산이 무려 20여 점이 넘는다. 그래서 그들을 모두 사진에 담고
싶은 소박한 욕심에 간만에 그곳의 문을 두드렸다.

봉은사에 도착한 시간은 둥근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3시라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
'이란 크고 아름다운 말에 따라 잠시 봉은사를 접어두고 절 동쪽에 있는 한식당에서 점
심으로 김치전골을 섭취했다.
그렇게 고기 냄새가 진동할 정도로 내 똥배를 가득 채우고 봉은사로 들어선다.


♠  봉은사 입문

▲  봉은사의 정문인 진여문(眞如門)

봉은사는 서울에서 제일 큰 절이자 강남권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휴일을 맞이해 많은 사람들
이 나들이를 나왔는데, 양이(洋夷)를 비롯한 외국인 관광객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서울에
서 외국 애들이 많이 찾는 절은 조계사, 화계사, 도선사, 길상사, 봉은사 등이 있음)

봉은사 경내로 들어서려면 진여문이란 커다란 문을 지나야 된다. 다른 절과 달리 그 흔한 일
주문(一柱門)이 없고 진여문이 그 역할을 대신 하고 있는데, 문의 이름인 진여(眞如)는 사물
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사물의 본체로써 영원불멸한 것을 뜻한다. '선정능지(宣靖陵誌)'와 '
봉은사사적'에 절 창건 당시부터 있던 건물로 나오며, 봉은사가 선종(禪宗) 수사찰(首寺刹)로
크게 위엄을 부리던 시절에는 진여문과 천왕문, 해탈문의 순서대로 문을 갖추고 있었다.
허나 1939년 대화재로 이들은 모두 소실되었고, 급한데로 1942년 일주문을 세워 진여문의 역
할을 맡겼다. 이후 진여문 복원을 추진하면서 1982년 일주문 자리에 진여문을 세웠고 기존의
일주문은 양평에 있는 용문산 사나사(舍那寺, ☞ 관련글 보기)로 보냈다. 하여 그곳 일주문으
로 20년 정도 살아가다가 2000년대 중반 사나사가 새 일주문을 장만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진여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문으로 높이와 덩치가 그 이상으로 장대해 절을
찾은 중생들의 기를 제대로 주눅들게 한다. 문 좌우에는 작은 집을 덧붙여 목사천왕상을 2개
씩 봉안해 중생들을 검문하고 있는데, 이들은 천왕문에 있던 것으로 법왕루 건설로 천왕문이
철거되자 진여문으로 거처를 옮겼다.
진여문 현판은 봉은사 주지를 지낸 석주가 썼으며, '奉恩寺' 현판은 만해 한용운과 만당(卍堂
)을 결성해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청남 오재봉(菁南 吳齋峯, 1908∼1991년)이 썼다.


▲  봉은사 목사천왕상(木四天王像)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60호 ▼
- 위의 것은 다문천왕(多聞天王)과 지국천왕(持國天王)
- 밑의 것은 증장천왕(增長天王)과 광목천왕(廣目天王)

진여문의 신세를 지고 있는 목사천왕상은 1746년에 조성되었다. 능창군<綾昌君, 선조의 7번째
아들인 인성군(仁城君)의 증손>과 상궁 박필애(朴弼愛)가 돈을 대어 만든 것으로 커다란 통나
무를 깎아 조각했는데, 두 발처럼 부분적으로 돌출되거나 추가 부분은 따로 나무를 조각해 붙
여넣었다.
그들의 갑옷과 보관(寶冠)은 붉은색, 녹색, 파란색, 황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몸통에 비
해 얼굴이 좀 커 보인다. 넙적한 얼굴에는 표정이 살아있으며, 세밀하고 정교하게 조각되었으
나 다소 경직된 무늬 등은 18세기 중반 조각 양식의 특징을 보여준다.
지국천왕은 그의 애용품인 칼이 사라졌고, 광목천왕은 장대 끝의 창날이 없어지는 고통이 있
었으나 그 외에는 무탈한 모습이며, 그들의 뱃속에서 복장(腹臟) 유물이 나와 그들의 탄생시
기를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하여 18세기 중반 불교 조각 연구에 좋은 사례가 되어주고 있
으고 서울에서 거의 유일한 늙은 사천왕상으로 가치가 높아 지방문화재의 감투를 쓰게 되었다.

비파를 든 다문천왕은 마치 눈썹에 눈이 얼어붙은 듯 하얀색이라 나이가 좀 들어 보이며, 지
국천왕은 두 손을 배 앞에 대고 절을 찾은 사람들에게 환영 인사를 하는 듯 하다. 증장천왕은
다소 인상을 쓴 표정으로 용의 머리를 꽉 쥐어들며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듯 두리번 바라보
고 있으며, 보관을 쓴 광목천왕은 흥이 잔뜩 오른 듯 다소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다. 표정은
각각 다르나 무서움보다는 친근함과 귀여움이 묻어난 모습이며, 그들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꽃이 가득하여 높은 인기를 보여준다.


▲  허공을 가득 메운 연등 (진여문에서 법왕루 구간)

부처님오신날(석가탄신일)이 있는 5월을 맞이하여 봉은사는 일찌감치 연등으로 허공을 꾸미고
커다란 장엄등을 꺼내 경내 곳곳을 수식했다. 봉은사는 석가탄신일까지 약 1달 정도 장엄등과
연등 전시회를 열어 상큼한 눈요깃감을 선사하고 있는데, 햇님이 그만의 공간으로 쏙 사라지
면 연등과 장엄등은 어둠을 몰아내고자 일제히 빛을 발산해 화려한 야경을 빚어낸다.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조계사(曹溪寺)도 연등 전시회를 열긴 하나 봉은사가 더 장관이며, 석
가탄신일 1주 전 토요일에 열리는 연등회(燃燈會)에 많은 장엄등을 내보내 서울 도심의 저녁
을 곱게 물들인다.

진여문~법왕루 구간은 약간의 오르막길로 그 허공을 오색 연등이 황홀하게 물들였다. 백두산
보다 높은 하늘이라고 해도 이때만큼은 연등의 눈치로 하늘이 움푹 낮아진 기분이다.


▲  오색영롱한 연등의 그늘 속으로~~ (법왕루 방향)

▲  오색영롱한 연등의 그늘 속으로~~ (진여문 방향)

▲  진여문~법왕루 구간에 닦여진 조그만 개울

법왕루로 인도하는 길 서쪽에 바위와 수풀을 지닌 조그만 개울이 닦여져 있다. 무늬만 개울이
아닌 살아있는 개울로 졸졸졸~♪ 소리를 들으니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귀가 싹 정화
되는 것 같다. 잠시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산사(山寺)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 허나 현실
은 온갖 키다리 건물로 즐비한 강남 한복판이다.


▲  조그만 연못의 포대화상과 물고기 연등

연못 복판에 자리를 편 조그만 똥배 아저씨(포대화상) 앞에 동그란 돌통에 있다. 그 안에 동
전이 들어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많은 이들이 소액 투자로 소망 성취라는 큰 이익을
얻고자 열심히 동전을 던진다.
돌통이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훨씬 작다 보니 골인을 시키는 것이 여간 어렵지가 않아
연못 바닥으로 가라앉은 동전도 적지 않다. 골인을 시킨 중생의 소망이 과연 성취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덕에 봉은사만 재미를 본다. 재주는 포대화상이 부리고 돈은 봉은사가 가져가
는 것이다.


▲  경내를 가리고 앉은 법왕루(法王樓)

법왕루는 봉은사 경내에서 가장 큰 기와집으로 경내의 중심인 대웅전 구역을 몽땅 가리고 있
다.
이 건물은 1997년에 지어진 것으로 그의 공간을 위해 사천왕상의 거처인 천왕문이 희생되었으
며, 원래 법왕루였던 건물은 미륵전으로 새로 간판을 갈았다. 건물의 이름인 법왕(法王)은 법
의 왕이라는 부처를 뜻한다.
봉은사의 튼튼한 재력을 널리 과시하듯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데, 그의 밑도리를 지나
면 대웅전이 나온다. 허나 법왕루 옆구리에도 넓게 길이 있어 취향대로 대웅전으로 접근하면
된다. (나는 법왕루 밑도리로 들어가서 옆구리로 나왔음)

1층에는 종무소(宗務所)와 사무실이 있으며, 2층이 바로 법왕루의 중심으로 중생들의 돈으로
만든 3,300기의 작은 관세음보살 원불(願佛)이 가득해 장관을 이룬다. 또한 커다란 관세음보
살 누님상이 중심 법단에 자리해 있어 관음전(觀音殿)의 역할도 하고 있으며, 공간이 넓어서
사시예불과 대법회, 교육 공간으로도 쓰인다.


▲  붉은색(연등)과 금색(관세음보살상)의 화려한 조화, 법왕루 내부

▲  법왕루 관세음보살상과 조그만 원불(관세음보살)의 금빛 물결
작은 관세음보살부터 큰 관세음보살까지 헤아리기조차 힘들 정도로 수많은
원불이 벽에 빼곡히 들어앉았다. 그들의 일방적인 금색 광채로
두 눈이 부시다 못해 눈이 멀 지경이다.


※ 수도산(修道山) 봉은사의 내력
천하에서 가장 비싼 땅이라는 서울 강남(江南), 그 콧대 높은 강남 한복판에 자리하여 강남의
좋은 기운을 먹고 자란 봉은사는 794년에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창건했다는 견성사(見性寺)를
그 시작으로 삼고 있다.
허나 창건 이후 700년 이상 바퀴자국이 남아있지 않으며, 본격적인 사적(事蹟)도 15세기 후반
부터나 등장을 한다. 게다가 1334년에 조성된 청동은입사향완(靑銅銀入絲香椀)이 가장 오래된
유물이라 창건 시기에 심히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하여 고려 초나 중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
이 크다.

원래 봉은사는 성종의 능인 선릉(宣陵) 동쪽에 있었다. 1498년 성종의 왕후인 정현왕후(貞顯
王后)는 견성사를 선릉의 원찰(願刹)로 삼아 크게 중창했으며, 이때 왕실의 은혜를 받든다는
의미로 절 이름을 봉은사로 갈았다. (명종 때 이름을 갈았다는 이야기도 있음)
1501년 연산군(燕山君)은 절에 왕패(王牌)를 하사했으며, 중종(中宗)의 3번째 왕후로 불교에
호의적이었던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는 정난정(鄭蘭貞)의 소개로 보우선사(普雨禪師)와 친
분이 두터워졌다. 하여 그가 머물던 봉은사는 크게 혜택을 보게 된다.
윤씨는 1550년 봉은사를 선종 수사찰로 삼았으며, 연산군 때 중단되었다가 중종 때 폐지되었
던 승과(僧科)를 부활시켜 봉은사에서 시험을 보게 했다. 하여 1552년 1월 그 첫 시험이 진행
되었는데, 보우가 그 감독관을 맡았으며, 먼저 예비합격자 400명을 뽑고 최종 33명을 가려서
도첩(度牒)을 내렸다. 즉 국가 공인 승려의 자격을 준 것이다. 그해 4월에는 그 유명한 서산
대사(西山大師)가 합격했으며, 1562년에는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이곳을 통해 세상에 데뷔했
다.

문정왕후는 중종의 능인 정릉 옆에 묻히고 싶은 욕심에 1562년 봉은사 자리에 정릉을 옮겼다.
대신 봉은사를 현 자리로 옮겨 크게 중창했는데, 이때 도감(都監)을 설치해 20여 동의 건물을
지으니 그 규모가 경산제찰(京山諸刹)의 으뜸이었다고 전한다. 1563년에는 순회세자(順懷世子
)의 사패를 봉안하고자 강선전(降仙殿)을 세웠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절 상당수가 파괴되었으며, 1612년에 벽암선사(碧巖禪師)가 중수를 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터지자 인조(仁祖)는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봉은사 옆을 지나 남한산
성(南漢山城)으로 콩 볶듯 줄행랑을 쳤다. 이때 청나라군이 그 길을 따라오면서 절은 완전 쑥
대밭이 되고 만다.
1637년 승려 선화(禪華)와 경림(敬林) 등이 절을 일으켜 세웠으나 1665년 화재로 건물 상당수
가 잿더미가 되었으며, 1692년 선/정릉에 참배하러 갔던 숙종이 봉은사 중창 현장을 직접 둘
러보고 재물을 내려 공사를 도왔다. 1702년에는 전백(錢帛)을 하사해 중건을 마무리 지었으나
절의 규모는 문정왕후 시절보다 많이 떨어졌다.

1720년에는 450근의 범종을 주조하여 범종각(梵鍾閣)에 걸었으며, 1777년에는 삼장탱과 시왕
탱, 사자상 등을 조성하고 석가여래상 등을 개금했다. 1790년 정조는 봉은사를 비롯한 서울
주변의 5개 사찰을 규정소(糾正所)로 지정해 전국의 사찰을 관리하게 했는데 봉은사는 강원도
지역의 사찰을 담당했다.

1855년 남호영기(南湖永奇)는 화엄경판을 판각하고자 인허성유(印虛性維)와 제월보성(霽月寶
性), 쌍월성활(雙月性闊) 등과 봉은사에 간경소를 세웠다. 왕실의 내탕금(內帑金)과 사대부(
士大夫)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1856년 화엄경 80권 3,479판의 경판을 만들었으며, 그 경판
을 보관하고자 판전을 지었다. 이때 화엄경 외에 별행록 1권, 천태삼은시집도 등이 간행되었
으며 봉은사에 머물던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친히 판전 현판을 썼다.

1902년 조정은 대한사찰령을 제정하여 봉은사를 비롯한 전국 14개 사찰을 수사찰로 삼았으며,
1911년 왜정은 사찰령(寺刹令)을 반포하여 봉은사를 전국 31본산(本山)의 하나로 삼아서 서울
, 경기도 지역 78개 사찰을 관할케 하였다. 그 31본산 중 1번째로 꼽히는 절이 되어 '선종갑
찰대본사 봉은사(禪宗甲刹大本山 奉恩寺)'를 내세웠으며, 서산-사명-벽암으로 계승되는 법맥
을 강조했다.

1912년 청호(晴湖)가 주지가 되었는데, 절 부근 황무지를 개간해 20만 평에 토지를 확보해 절
의 몸집을 크게 불렸다.
1925년 그 유명한 을축년 대홍수가 발생하여 한강이 범람하자 그는 승려와 신도를 모아 직접
배를 띄워 708명의 사람을 구했으며, 절의 재물을 풀어 이재민을 구호했다. 그의 도움을 받았
던 사람들은 수해구제공덕비를 세워 청호의 공덕을 기렸고, 당시 지도층 인사들이 이를 기리
는 시화를 모아 불괴비첩(不壞碑帖)을 만들기도 했다.
1939년 불의의 대화재로 판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무너지자 1941년에 태욱(泰旭)이 중창했
으며, 1950년 6.25전쟁으로 건물 상당수가 또 날라가는 피해를 입었다.

6.25전쟁이 끝나자 조금씩 절을 일으켜 세웠으며, 불교정화운동으로 통합종단 조계종이 출범
하자 봉은사는 그 밑으로 들어갔다. 1964년 대학생 수도원이 세워졌으며, 1972년 동국역경원
을 세워 대장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은 산과 밭에 둘러싸인 완연한 시골로 뚝섬에서 나룻배를 타고 접근
했다. 절을 둘러싼 산은 수도산이라 불렸으며, 그 시절에는 산사의 내음이 진했다. 허나 개발
의 칼질이 강남과 영동(영등포 동쪽에 있다고 해서 영동이라 불림) 지역에 요란하게 칼춤을
추면서 강남이란 거대한 도시가 닦여졌고, 그로 인해 뜻하지 않게 도시 속의 별천지이자 외로
운 공간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강남 졸부들과 강남권, 잠실권으로 유입된 사람들이 봉은사의 고객이 되면서 절의 규
모는 더욱 커져갔고 이제는 서울 굴지의 사찰이 되었다.

넓은 경내에는 대웅전과 선불당, 영산전, 판전, 북극보전, 법왕루 등 20여 동의 건물이 있으
며 1996년에 마련된 거대한 미륵대불이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인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과 청동은입사향완<현재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에 있음>이 있으며, 선불당과 괘불도
등 20여 점의 서울시 지방문화재를 지니고 있다. 그 외에 조선 후기에 조성된 불상과 보살상,
경판, 탱화 등이 수십 점 전하고 있으며, 5월에 1달 정도 연등 전시회를 열고 있다.

봉은사는 이렇듯 조선 왕실의 오랜 원찰로 번영을 누렸으며, 왜정 때는 31본산의 하나로, 현
대에 들어서는 강남 개발의 후광으로 끊임없이 전성기를 이어가고 있다. 난개발로 인해 도시
에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되었으나 경내 뒷쪽인 북극보전과 영산전 구역은 숲에 묻혀있어 산
사의 내음이 조금은 남아있으며, 문화유산이 많아서 고색의 향기도 풍년이다.
또한 강남 번화가의 상큼한 오아시스 같은 곳이자 서울 지역 고찰(古刹)의 대표급으로 명성을
누리고 있으며, 절의 새로운 샘물인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절찬리에 운영하고 있다. 단 가격
은 강남프리미엄 때문인지 다른 절보다 다소 비싸게 받는 편이다. (정기 템플스테이 1박2일
가격이 9~12만원)

* 봉은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73 (봉은사로 531, ☎ 02-3218-4800)
* 봉은사 홈페이지(템플스테이 포함)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봉은사 미륵전(彌勒殿)과 그 앞에 소환된 초파일 장엄등


♠  봉은사 선불당, 대웅전

▲  봉은사 선불당(選佛堂) - 서울시 유형문화유산 64호

법왕루 옆구리 길로 가면 선불당이란 큰 기와집이 마중을 한다. 그는 선방(禪房)의 역할을 하
는 건물로 예전에는 비슷한 성격을 지닌 심검당(尋劍堂)이 있었는데, 1939년 대화재로 무너졌
다. 하여 1941년에 다시 지었는데 봉은사에서 승과를 실시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따라 승려
를 뽑는다는 뜻의 '선불당'으로 이름을 갈았다.

정면 8칸, 측면 3칸의 초익공(初翼工) 팔작지붕 집으로 북쪽과 서쪽, 남쪽에는 쪽마루가 길게
닦여져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건물 내부 구조는 정면 5칸으로 동서로 4칸, 남북 3칸 규
모의 큰방을 중심으로 3면이 방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동쪽에 파란색 문을 두었는데, 그 좌우
로 나무장작이 두둑히 쌓여있어 마치 겨울을 나는 산사 분위기를 자아낸다.

건물 내부 천장과 뒷편이 조금 변형이 되었고, 이제 80여 년 묵은 건물이나 서울에서 이런 형
태의 목조건물이 매우 드물어 봉은사의 문화유산 중 제일 먼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  연등 구름으로 지붕이 지워진 선불당
선불당 쪽마루에는 잠시 쉬어가는 나그네들이 많다.

▲  하얀 연등이 으시시 하늘을 훔친 지장전(地藏殿)

선불당 북쪽에는 지장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1939년 대화
재 때 소실된 것을 1941년에 중건했다. 허나 2002년 6월에 화마(火魔)의 장난으로 또 무너진
것을 2003년 겨울에 기존 12평에서 40평으로 크게 늘려 중창했다.

다른 곳은 보기만 해도 기분을 즐겁게 하는 오색 연등 일색이지만 이곳은 기분이 급히 우울해
질 정도로 하얀 연등 일색이다. 이는 이곳이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의 공간으로
영가(靈駕, 죽은 사람)들의 극락왕생을 그들에게 부탁하고자 망자를 상징하는 하얀 연등을 달
아서 그렇다.


▲  연등이 새로 하늘을 연 대웅전 뜨락과 3층석탑

봉은사의 중심인 대웅전, 그 뜨락의 허공을 오색 연등이 장악해 새로운 하늘을 만들었다. 그
러다 보니 이곳의 유일한 석탑인 3층석탑의 머리가 가려져 버렸다. 마치 자욱한 안개에 산 윗
부분이 가려진 것처럼 보이며, 하늘이 탑의 머리만큼 움푹 낮아진 기분이다. 흔히 태초(太初)
의 세계는 하늘과 땅이 바짝 붙어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자욱하게 깔린 연등 구름에 머리장식이 가려진 3층석탑은 1970년대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석
가여래의 사리 1과가 들어있다.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얹히고 머리장식으
로 마무리를 지은 탑으로 신라 탑의 상징인 불국사 석가탑(釋迦塔)을 많이 닮았다. (그를 모
델로 하여 만들었음)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와 아름다운 맵시를 자랑하며, 기단석 밑층에는
중생들이 갖다놓은 화분 꽃이 가득하다. 또한 탑 앞에는 중생이 피워놓은 향이 넘쳐나 주변
50m까지 향 냄새가 진동을 한다.


▲  정면에서 바라본 3층석탑과 대웅전(大雄殿)

자욱한 연등 구름에 윗도리가 가려진 대웅전은 봉은사의 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
지붕 집이다. 1982년에 중창된 것으로 내부에는 보물로 지정된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과 지방
문화재인 삼세불도와 신중도, 감로도, 삼장보살도(이것은 친견하지 못했음), 홍무25년 장흥사
명 동종 등의 문화유산이 들어있으니 여로(旅路)를 살찌울 겸, 꼭 살펴보기 바란다. 봉은사의
문화유산은 대웅전과 판전, 영산전에 대부분 집중되어 있어 이들은 이곳의 불교박물관이자 보
물 창고와 다름이 없다.


▲  뜨락 동쪽에서 바라본 대웅전과 봄바람에 펄럭이는 연등 구름

▲  홍무25년 장흥사명 동종(洪武25年 長興寺銘 銅鐘) -
서울시 유형문화유산 76호


대웅전에 발을 들여 동남쪽 구석(뜨락 방향)을 살펴보면 검은 피부의 조그만 종이 눈빛을 보
낼 것이다. 대웅전 내에 그에 대한 안내문도 없고 피부가 탱탱하여 현대 종으로 여기고 지나
칠 수 있으나 그가 바로 봉은사에서 2번째로 늙은 문화유산인 장흥사명 동종이다. (동종의 위
치는 변경될 수 있음)

이 동종은 1392년에 조성된 것으로 종 이름 앞에 붙은 홍무(洪武)는 명나라를 세운 태조 주원
장(朱元璋)의 연호이다. 원래 장흥사에 있었으나 어찌어찌하여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는데, 종
을 매다는 용뉴는 사라졌으나 몸통은 잘 남아있다. 종 밑에 연화대(蓮花臺)를 두고 구름을 탄
보살과 당좌가 각각 1개씩 새겨져 있으며, 600년이 넘은 늙은 동종임에도 건강은 양호하다.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시 유형문화유산 229호

대웅전 같은 법당에는 법당 지킴이인 신중도(신중탱)가 꼭 들어있기 마련이다. 이곳 신중도는
1844년 7월에 상궁(尙宮)들의 시주로 조성된 것으로 세로 200.5cm, 가로 245cm의 비단 바탕에
그려졌다.
이 땅의 신중도 중 가장 큰 편으로 화면 위쪽에 구곡병(九曲屛)을 두르고, 향 우측에는 위태
천(韋太天)과 천룡팔부(天龍八部) 등의 신장(神將)을, 향 좌측에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
天)을 비롯한 천부중을 빼곡히 배치하여 안그래도 침침한 두 눈을 더 어지럽게 만든다.

신중도의 주인공인 범천과 제석천은 네모난 신광(身光)을 두르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왼쪽
에는 이마에 제3의 눈이 표현된 범천이 큰 보관을 쓰고 합장을 하고 있고, 맞은편에 황금 보(
補)가 달린 옷을 입은 제석천이 옷 속에 두 손을 넣고 서 있다.
범천은 녹색, 제석천은 붉은 옷을 입고 있으며, 옷에는 아름다운 문양과 화려한 금니(金泥)가
채색되어 있다. 얼굴과 손 등에는 호분을 칠했으며, 둥근 얼굴에 작은 이목구비가 단정하면서
도 원만한 모습이다.
범천 밑에는 문관 복장과 원유관(遠遊冠)과 경전을 얹은 관을 쓴 일궁천자(日宮天子)와 월궁
천자(月宮天子)가 나란히 있는데, 금색의 화려한 각대(角帶)와 금으로 장식된 보관이 천자의
위상을 나타내는 듯하다. 이들 오른쪽에는 비파와 생황, 대금, 피리 등을 연주하는 주악천녀(
奏樂天女)와 향로를 들고 있는 천녀, 당번(幢幡)을 들고 있는 천녀와 동자가 있다.

그림 하단에 피리와 대금을 부는 인물들은 서로 조용히 마주보고 있으며, 위태천을 비롯한 천
룡팔부는 칼과 창을 들고 오른쪽을 향해 주악천녀의 음악을 듣는 듯하다. 위태천은 새 날개깃
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투구를 쓰고 금색의 삼지창을 들고 있으며, 그 아래로 백익선(白翼扇)
을 든 산신(山神)과 주조신(主竈神), 용왕(龍王), 주정신(主井神), 무기를 든 신장들이 서 있
다. 천부중들과 달리 얼굴은 짙은 갈색이며, 부릅뜬 눈과 무성한 턱수염을 갖추고 있어 호법
신으로서의 특징을 잘 담고 있다.

채색은 적색을 주조색으로 하여 녹색과 흰색, 갈색, 금색 등을 함께 사용했는데, 특히 권속들
의 보관과 옷, 무기, 지물 등에 금색을 많이 사용하고 권속들의 얼굴에 흰색을 칠하여 화면이
환한 느낌을 준다. 음영법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호법신들의 수염과 천부중의 머리 등을
세필(細筆)로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탱화 화기(畵記)에는 상궁들의 시주로 송암당 대원(松巖堂 大園)과 월하당 세원(月霞堂 世元)
등 여러 승려들이 제작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시주한 상궁들의 이름은 거의 훼손되어 확인
이 어렵다. 이곳 신중도는 한쪽에 범천과 제석천을, 다른 한쪽에 위태천을 배치한 구도로 19
~20세기에 서울과 경기 지역 신중도에 많이 나타나는 양식이다.


▲  봉은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시 유형문화유산 236호

영가(죽은 사람) 천도를 목적으로 하는 감로도는 신중도보다 등장인물이 무진장 많고 몇 배로
더 복잡한 탱화이다. (신중도는 그에 비하면 아주 양반임)
1892년에 후불탱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민두호(閔公斗)와 상궁의 시주로 금어(金魚) 한봉창엽
(漢峰瑲曄)과 혜산축연(蕙山竺衍), 홍범(弘範), 허곡긍순(虛谷亘㥧), 慧寬(혜관), 戒雄(계웅)
이 그렸으며, 그림의 크기는 세로 200cm, 가로 316.5cm로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그림 상단에는 칠여래가 합장을 하며 서 있으며, 좌측에는 아미타삼존(阿彌陀三尊)과 왕후장
상(王侯將相), 선왕선후(先王先后), 북채를 든 뇌신(雷神), 우측에는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
등이 구름 위에 서 있다. 칠여래 밑에는 제단 좌우로 높은 기둥이 서 있고 '남무백억화신불(
南無百億化身佛, 석가여래),'남무청정법신불(南無淸淨法身佛, 비로자나)','남무원만보신불(南
無圓滿報身佛, 노사나)의 삼신불번(三身佛幡)을 늘어뜨리고 온갖 꽃과 공양물을 가득 설치했
다.
제단에 이르는 돌계단 밑 좌우에 놓인 커다란 화병 안에는 붉은색과 흰색의 모란이 가득 꽂혀
있어 당시(1892년) 제단의 모습을 알려주고 있으며, 제단 우측에는 흰 천막을 치고 승려들이
나란히 모여 앉아 독경하는 모습과 작법승(作法僧)들이 큰북과 바라 등을 두드리며 의식을 행
하는 모습, 승무(僧舞)를 추는 모습, 커다란 공양물을 머리에 이거나 들고서 제단을 향해 가
는 사람들의 모습 등이 표현되었다.

그림 하단 중앙에는 서로 마주보고 꿇어앉은 1쌍의 아귀(餓鬼)가 크게 묘사되었다. 화염이 뿜
어져 나오는 입과 가는 목, 불룩한 배 등 아귀의 특징이 잘 묘사되어 있으나 얼굴 표정 등에
서 다소 희화적이다.
아귀 좌우로는 수목으로 분리된 화면 속에 한복을 입은 남녀가 춤을 추거나 싸우는 장면, 대
장간에서 일하는 장면, 악사들의 반주에 맞춰 광대가 거꾸로 서는 묘기를 부리고 초랭이가 부
채를 들고 춤추는 장면, 죽방울 놀이를 하는 장면, 무당이 굿하는 장면 등 속세의 다양한 장
면들이 묘사되었는데, 음식을 먹거나 술을 받는 모습, 물건을 파는 모습 등은 당시 장터의 모
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표현된 풍속 장면은 주로 장례나 영가 천도 등의
행사와 관련된 장면을 중심으로 표현되어 수륙화로서의 감로도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 그림 우측에는 뇌신을 표현한 화염 아래로 우산을 쓴 인물과 뱀에게 쫓기는 장면 등 '법
화경'에 나오는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의 구제난(救濟難) 장면과 농사짓는 모
습, 공부하는 모습,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 소고 등을 갖고 무리를 지어 노는 모습, 일하러
가거나 장터에 가는 모습 등의 다양한 일상생활과 죄인을 벌하는 모습, 전쟁 장면 등을 표현
하였다. 채색은 전체적으로 적색과 황색, 흰색, 청록색 등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 감로도는 수국사(守國寺) 감로도(1832년)를 비롯해 수락산 흥국사 감로도(1868년), 개운사
감로도(1883년) 등 서울/경기 지역의 19, 20세기 감로도의 도상과 동일한 도상을 취하고 있는
데, 1883년에 개운사 감로도를 그린 대허 체훈(大虛 軆訓)과 천기(天機)가 봉은사 불사에 깊
이 관여한 적이 있어 그들이 사용했던 초본을 참고한 것이 아닐까 싶다.


▲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 보물 1819호
후불탱인 삼세불도(三世佛圖) - 서울시 유형문화유산 234호


대웅전의 주인장인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1651년에 조각승 승일(勝一)이 9명의 보조 조각승
과 함께 만든 것이다. 1689년 화재로 본존불이 소실되자 새로 조성했는데, 이는 1765년에 제
작되어 불상 뱃속에 넣은 개금발원문(改金發願文)을 통해 밝혀졌다.

명상에 잠긴 듯 조용한 모습의 가운데 본존불은 좌우협시상보다 30cm 정도 크고, 변형식 편단
우견(偏袒右肩)으로 법의를 걸치고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한 모습이다. 좌우 협시불인
아미타불과 약사불은 조각적으로 우수하며, 발원문(發願文)과 개금문을 뱃속에 품고 있어 17
세기 불교 조각의 한 단면을 소상히 알려준다. 하여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3월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요즘에는 복장유물이나 조성 관련 명문이 분명히 있는 경우 거의 국가 보물이나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는 추세이다. 옛 사람들의 그런 작은 센스 하나가 그들이 남긴 작품의 가치를 백두산만
큼이나 높여주는 것이다.

삼불좌상 뒤에 듬직하게 걸린 후불탱은 삼세불도이다. 붉은 색채가 유난히 많이 느껴지는 그
는 1892년에 제작된 것으로 세로 319.7cm, 가로 291.8cm 큰 규모이나 현 삼불좌상의 후불벽(
後佛壁)보다는 폭이 좁다. 하여 그 시절 대웅전 후불벽 규모가 삼세불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
다.
그림 상단 가운데에는 석가여래, 그 좌측에 약사불, 우측에 아미타불이 삼세불을 이루고 있는
데, 보살 6구, 나한 8구, 사천왕, 화불 2구, 용왕, 용녀 등이 삼세불을 둘러싸고 있다. 석가
여래는 높은 수미단 위에 닦여진 청련대좌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했는데, 이마 부분이 넓고
턱 부분이 다소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작으며, 육계가 뾰족하다. 신체는 좋은 편으로 왼
쪽 어깨에 붉은 대의를 걸친 후 대의 자락을 오른쪽에 살짝 걸친 변형된 통견식 착의법을 하
고 있다. 대의의 가장자리에는 화문이 있으며, 동일한 화문을 지닌 군의 윗부분이 넓은 U자형
으로 처리되어 있는 점이 독특하다.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했고 길상좌(吉祥坐)를 취한 자세가 안정감을 준다. 약사
불과 아미타불은 석가여래의 얼굴과 착의법, 자세 등이 비슷하나 광배(光背)는 이중륜광으로
처리되었으며 두 상 모두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취했다.

석가여래 밑에는 가섭존자(향우)와 아난존자(향좌)가 본존을 향해 서 있고 광배 주위로 좌우
각 3구씩 제자와 분신불이 배치되었으며, 약사불 위쪽에는 용왕, 아미타불 위쪽에는 용녀가
얼굴 부분만 표현되었다.

석가여래의 대좌 아래쪽에는 6구의 보살들이 사선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다소 무거운 듯한 보
관에 붉은색 천의를 입고 중앙을 향해 서 있다. 정중앙의 두 보살은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
현보살이며, 옆의 보살은 머리에 붉은 해를 단 것으로 보아 일광보살, 반대쪽의 보살은 월광
보살, 가장자리의 두 보살은 특별한 표식은 없으나 아미타불의 협시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
살로 여겨진다.

화면 아래와 위 네 방향에는 사천왕이 있다. 향 우측 상단의 천왕은 비파, 하단의 천왕은 칼
을 들었으며, 향 좌측 상단의 천왕은 탑, 하단의 천왕은 각각 여의주와 용을 들고 있고, 위쪽
의 두 천왕은 화면의 중앙을, 아래쪽의 두 천왕은 바깥쪽을 향하고 있어 사방을 모두 호위하
는 것처럼 보인다.

전체적인 화면 구성은 1878년에 제작된 안성 청룡사(靑龍寺)의 삼세불화와 유사한데, 두 불화
는 일부 권속의 가감을 제외하고는 동일한 본에 의해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삼세불의 뾰
족한 육계, 착의법을 비롯해 사이 사이에 배치된 분신불과 제자들, 사방을 호위하고 있는 사
천왕의 모습 등이 동일하며, 봉은사 삼세불화에서는 6보살이 표현된 것에 비하여 청룡사 삼세
불에서는 8보살과 두 천녀가 배치된 점이 다르다.
이처럼 두 불화가 동일한 도상을 보여주는 것은 봉은사 삼세불도를 그린 화승 중 영명 천기(
永明 天機), 금곡 영환(金谷 永煥). 덕월 응론(德月 應惀)이 청룡사 삼세불화 제작에도 참여
했기 때문이다.
채색은 붉은 색을 많이 사용했으며 청색과 흰색, 녹색, 금색 등을 함께 쓰고 있다. 특히 석가
여래의 신광 내부를 금색으로 칠한 것은 판전 비로자나후불도(1886년)와 같으며, 아미타불과
약사불의 신광 내부는 다양한 색대(色帶)로 표현해 화려하면서도 장식적으로 보인다. 불/보살
의 얼굴은 음영 없이 처리했으나 나한과 사천왕은 음영을 강하게 사용하였는데 다소 과장되면
서도 능숙한 음영 처리가 돋보인다. 필선은 철선묘가 주로 사용되었지만 머리카락과 수염 등
의 묘사에서 세밀한 필치가 엿보인다.

이 불화는 인권시주(引勸施主)인 오청정월(吳淸淨月)과 민두호(閔斗鎬)를 비롯하여 여러 상궁
의 시주로 조성되었으며, 이 그림을 주관한 영명 천기가 본사질로 참여한 것으로 보아 그때는
봉은사에 머물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  봉은사 마무리

▲  영각(影閣)

대웅전 뒷쪽 언덕에는 숲이 우거져 있다. 봉은사가 '수도산 봉은사'를 칭하고 있으니 그 언덕
은 자연히 수도산이 된다. 강남 개발 이전에는 숲에 완전히 감싸인 산사였으나 개발의 칼질이
한바탕 춤을 춘 이후에는 동/서/남 3면은 회색 도시가 되었고, 경내 북쪽에만 겨우 숲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숲도 봉은사가 미륵대불을 심고 절의 덩치를 불리면서 적지 않게 살이 깎여
나갔으며, 숲 너머에는 북촌에서 넘어온 경기고등학교가 넓게 자리를 닦아서 숲의 면적은 별
로 되지 않는다.
그 숲에는 영산전과 북극보전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으며, 숲과 미륵대불 사이에 영각이 자리
하여 남쪽을 굽어본다.

영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봉은사를 열었다는 연회국사와 봉은사를 크게
키웠던 보우대사, 봉은사 승과를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19세기에
화엄경판을 판각하고 판전을 세운 남호 영기, 20세기 승려인 영암, 석주 등 승려 7명의 진영
과 6.25때 전사한 호국영가 201위의 영단이 봉안되어 있다. 중심 불단에는 죽은 이를 기리는
공간에 걸맞게 지장보살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가 자리해 그들의 극락천
도를 책임진다.
건물의 원래 이름은 충령각(忠靈閣)으로 1967년에 7평으로 지어졌으며, 1992년 2배로 증축하
여 영각으로 이름을 갈았다.


▲  봉은사의 자랑, 미륵대불(彌勒大佛)

영각과 판전 사이에는 봉은사의 새로운 명물이자 마르지 않는 샘인 거대한 미륵대불이 둥지를
틀고 있다.
그는 1986년 영암 큰승려가 발원하여 만든 것으로 10,000명 이상이 돈을 대어 10년에 공사 끝
에 1996년 완성을 보았다. 높이는 강남과 봉은사의 위엄에 걸맞게 23m에 이르러 서울 최대의
석불이자 천하 최대급의 미륵석불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요즘은 툭하면 큰 불상이나 보살상
이 만들어지는 세상이라 지금은 덩치 순위가 많이 내려갔을 듯) 밑에서 바라보면 정말 까마득
하게 보여 내 자신이 무척이나 초라해 보인다.


▲  미륵전(彌勒殿)
미륵대불 앞에 자리한 미륵전은 원래 법왕루였다. 1997년에 새 법왕루를 지으면서
이곳으로 옮겨 미륵대불을 보조하는 미륵전으로 간판을 바꾸었다.

▲  1칸짜리 범종각(梵鐘閣)
미륵전 서쪽에 자리한 범종각은 1974년에 지어진 것으로 범종이 들어있다. 허나
그 동쪽에 종루가 새로 세워지면서 지금은 휴업 상태이다. 이제 60년도 안된
팔팔한 나이에도 벌써 강제 은퇴로 물러난 상태이니 그의 모습에
남모를 쓸쓸함이 느껴진다.


봉은사의 보물 창고인 영산전과 북극보전, 판전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본
글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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