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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백담사, 영시암, 수렴동계곡


' 설악산 겨울 나들이 (백담사, 영시암) '

백담사 백담계곡 돌탑들

▲  백담사 백담계곡 돌탑들

설악산 백담사 설악산 수렴동계곡

▲  설악산 백담사

▲  수렴동계곡


 


차디찬 겨울 제국의 한복판인 1월의 어느 적적한 날, 세계적인 명산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
는 설악산(雪嶽山)을 찾았다.
설악산은 거의 10여 년 만에 방문으로 그의 품이 몸살이 나게 그리워지면서 이전부터 가고
싶었던 내설악(內雪岳)의 백담사로 출동했다. 허나 백담사만 보기에는 50% 허전하고 내 성
미에도 맞지 않아 영시암까지 가보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봉정암과 대청봉까지 싹 인연
을 짓고 싶었으나 산에서 지나친 욕심은 금물이다.

아침 일찍, 동서울터미널로 이동하여 백담사를 거쳐 속초(束草)로 가는 시외직행버스에 나
를 담았다. 동해바다를 향해 총알처럼 내달려 2시간여 만에 백담사입구에 도착했는데 평일
이라 사람은 별로 없었다.
백담사입구에서 외가평교를 건너 12분 정도 가면 백담사 주차장과 마을버스 승차장이 마중
한다. 백담사는 길이 영 좋지 못해 일반 차량과 버스는 접근이 금지되어 있어 여기서 무조
건 차를 세우고 도보 또는 마을버스를 타야 된다.
용대리 사람들이 돈을 투자해 운영하는 이 마을버스는 백담사 주차장에서 백담사까지 운행
하는 백담사 셔틀버스로 중간에 정차하는 곳은 1도 없다. 겨울에는 보통 9시부터 17시까지
거의 20~30분 간격으로 다니며 휴일에는 증회한다. (여름에는 7시~19시까지 운행) 단 눈과
비가 내리거나 얼음이 얼면 바퀴를 접고 쉬므로 날씨를 잘 살피고 가야 뒷탈이 없으며, 강
추위가 기승일 때는 버스가 아예 안뜬다고 보면 된다.
또한 버스비가 무려 2,500원(성인 기준)이나 하여 이 땅에서 가장 비싼 마을버스에 속한다.
완전 독점 운행에 길까지 좋지가 못하니 비싸게 받는 것인데, 버스가 아니면 꼬박 2시간을
걸어야 되니 꿩 대신 닭을 고를 권리는 애시당초 주어지지 않는다. 백담사 권역을 찾는 사
람들 대부분은 마을버스를 이용하므로 설악산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은 그야말로 마르지 않
는 꿀샘이다.

마을버스 승차장에서 버스표를 구입하고(카드 결제 가능) 타는 곳으로 가니 버스가 바퀴를
접고 대기를 하고 있다. 만석 직전이라 서둘러 승차하니 운전사가 일일이 버스표를 수거하
고 시동을 걸어 백담사로 출발한다.
백담사로 인도하는 백담로는 백담계곡(百潭溪谷)을 따라 거의 1차선 수준으로 이어져 있는
데, 마치 뱀의 허리에 올라탄 듯 구불구불의 극치를 보여준다. 비포장 구간과 벼랑길도 상
당수 존재하여 생각 이하로 길 상태가 영 좋지 못하며, 차량 교행은 운전사들이 서로 연락
하여 적당한 곳에서 한다. 단순히 계곡을 따라 가는 길이라 쉽게 봤더만 그게 아니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백담계곡과 꼬부랑길의 정석을 보여주는 백담로에 한참 넋
이 나가 있으니 어느덧 백담사 정류장에 도착해 바퀴를 멈춰선다. 여기까지 소요시간은 15
분 정도, 거리는 7km 남짓이다.


♠  내설악의 중심 사찰, 백담사(百潭寺)

▲  백담계곡 건너에서 바라본 백담사 외경

백담사 정류장에서 백담계곡에 걸린 하얀 피부의 수심교(修心橋)를 건너면 바로 백담사 경내
이다. 절은 백담계곡 옆구리에 자리하여 뒤로는 내설악의 험준한 산줄기를 병풍으로 삼고 앞
에는 계곡을 방패로 삼아 속세의 기운을 경계하고 있는데, 그것으로도 부족한지 계곡가에 석
축을 다지고 돌담까지 둘렀다. 오랫동안 화마(火魔)로 고통받은 절이라 이렇게 2중으로 벽을
친 모양이다.


▲  속세와 백담사를 이어주는 수심교 (잠수교에서 바라본 모습)

절의 정문인 일주문(一柱門)은 수심교 동쪽에 있으나 백담사 정류장에서 백담사를 잇는 동선
에서 다소 비껴있어 지나치기 쉽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깜박하고 지나치
는 형편으로 그를 직접 지나는 것은 백담사 차량과 외지 차량 정도이다. 나는 일주문을 보긴
했으나 그의 아랫도리를 지나지 않았으며 사진에 담는 것도 깜박했다.

수심교를 건너면 맞배지붕을 지닌 금강문(金剛門)이 중생을 검문한다. 다소 소외된 일주문과
달리 경내로 들어서려면 꼭 거쳐야 되는 문이라 이곳의 실질적인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좌우로 돌담을 둘러 혹시 모를 좋지 않은 기운을 경계한다.
금강문은 금강역사(金剛力士)의 공간으로 그 검문을 통과하면 바로 불이문(不二門)이 등장하
여 마지막으로 중생을 검문한다.

불이문을 지나면 사물(四物)의 공간인 2층짜리 범종루가 나오고, 이어서 서로 비슷하게 생긴
화엄실(華嚴室)과 법화실(法華室)이 나란히 나타난다.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그들은 종무소(
宗務所)로 여기서 화엄실은 전두환 전대통령이 1995년에 귀양살이 비슷한 은거(隱居) 생활을
했던 그 유명한 현장이다.
일명 29만원으로 악명이 높은 전두환이 이곳에 들어오게 되자 인제군 의원들은
'여기는 만해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머물던 곳이지 죄인의 은둔지가 아니다. 그러니 나가라!
'
요구했으며, 그가 이곳에 머물 때는 절 옆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관광객들을 상대로 팔자 좋
게 불교와 자신을 주제로 요란하게 떠들기도 했다.
그가 잠시 서식했던 화엄실 방에는 그의 옷과 그때 사진을 전시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맑은 물 가득한 백담사에서 유일하게 물이 흐린 곳 같다'
며 그의 흔적을 까기도 했다. 비록
노태우의 정치쇼긴 하나 과거의 잘못 좀 뉘우치라며 벽지 산사에 귀양을 보냈건만 그 보람도
없이 자신의 죄를 반성하지 않고 개짓을 일삼다 지옥으로 갔으니 실로 개탄스럽기 그지 없다.

화엄실과 법화실을 지나면 3층석탑이 나오면서 이곳의 법당인 극락보전 앞에 이르게 된다. 그
럼 여기서 잠시 백담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길쭉한 만해교육관
정면 9칸, 측면 6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백담사
에서 가장 큰 집이다. 현재 템플스테이 공간으
로 바쁘게 살고 있다.

            ◀  야광(夜光)나무
5월에 하얀 꽃을 내놓는 백담사의 상큼한 명물
로 그 꽃들이 밤에 주위를 환하게 비춰주어 야
광나무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그 광경을 보려면 5월 이후에 와야 되나 엉뚱
하게도 겨울 한복판에 와서 화사한 꽃불은커녕
그 불에 몽땅 타버린 듯한 앙상한 모습만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설악산의 첩첩한 산주름 속인 백담계곡 깊숙한 곳에 그 이름도 유명한 백담사가 포근히 둥지
를 틀고 있다.
내설악의 대표 고찰이며 관문인 이곳은 647년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는 여기서 한참 남쪽인 한계령(寒溪嶺) 부근 한계리에 절을 지어 아미타삼존상을 봉안하고 절
이름을 한계사(寒溪寺)라 했다고 하는데, 자장의 창건설은 솔직히 신빙성이 없다.
690년 화재로 무너진 것을 719년에 다시 세웠는데 '심원사 사적기(尋源寺 事蹟記)'에 따르면
낭천현(狼川縣, 강원도 화천으로 여겨짐)에 있던 비금사(琵琴寺)를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고
하는데, 그와 관련된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하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비금사 주변은 산짐승들이 많아 사냥꾼들의 발길이 잦았고, 그들로 인해 산수가 다소 더러워
졌다. 허나 비금사 승려들은 절 바깥에서 일어나는 산짐승 사냥은 전혀 모른 채, 열심히 샘물
을 길러 부처 공양에 여념이 없었다. 그 더러움을 싫어한 산신령은 신통력을 부려 하룻밤 사
이에 대승폭포 밑 옛 한계사터로 절을 옮겨버렸다.
그 사실을 모르던 비금사 승려와 길손들은 다음날 아침 깨어보니 절은 분명 비금사이나 주변
풍경이 확 달라진 것에 크게 놀랐다. 전날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멋진 기암괴석은 물론 폭
포까지 있던 것이다. 이에 어리둥절하던 사람들에게 관음청조(觀音靑鳥)가 날라와 '낭천의 비
금사를 옛 한계사터로 옮겼소~~!'
알려주었다.
산신령이 절을 강제로 옮기는 과정에서 절구가 떨어졌는데, 그 떨어진 곳이 춘천 부근 절구골
이라고 하며, 한계리 청동골에는 청동화로가 떨어졌다고 한다. 물론 전설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되겠으나 한계사를 중건했을 때 비금사를 옮겨 세운 것은 분명하다. 그걸 그럴싸하게 설화로
빚은 것이다.

785년 화재로 절이 파괴되었으며, 790년에 종연, 광학, 설흡 등이 한계사터 아래 30리 지점에
절을 짓고 운흥사(雲興寺)라 했다. 하지만 984년에 또 불을 만나 쓰러지자 987년에 동훈, 준
희 등이 운흥사에서 북쪽으로 60리쯤 되는 곳에 절을 중건하고 심원사(深源寺)로 이름을 갈았
다.
이후 450여 년 동안 딱히 별탈이 없어 절은 비로소 기지개를 제대로 켰다. 이때 법당, 극락전
, 벽운루, 선승당. 동상실 등의 건물을 무수히 달았으며, 오세암, 봉정암, 백련암, 원명암 등
의 부속 암자를 거느렸고, 많은 고승이 찾아와 수도를 했다.

▲  교육 공간으로 쓰이는 만해당(卍海堂)

▲  화엄실(왼쪽)과 법화실(오른쪽)

1432년 오랫동안 뜸했던 화마가 다시 다녀가면서 잿더미가 되었으며, 1434년에 30리 밑에 절
을 중건하고 선구사(旋龜寺)라 했다. 이때 의준, 해성 등이 법당과 극락전, 요사채 2동을 세
웠다.
허나 1443년 화재로 또 무너지면서 1447년 한계사터에서 서쪽으로 10리(또는 1리) 정도 떨어
진 곳에 절을 세우고 영취사(靈鷲寺)라 했으며, 1455년 화재로 다시 파괴되자 1457년에 재익,
재화, 신열 등이 옛 절터 상류 20리 지점에 절을 짓고 백담사로 이름을 갈았다. 여기서 '담(
潭)'은 물이 모인 못을 뜻하는데, 그 덕분에 화마가 움찔하여 한동안 오지 않다가 1772년에
다시 찾아와 장난을 쳤다.
이때 놀란 승려들은 죄다 흩어지고 최붕(最鵬) 홀로 절터를 지키다가 1775년 태현(太賢), 태
수(太守) 등과 절을 일으켜 세우면서 옛날 이름인 심원사로 갈았다. 이후 6년 동안 법당, 향
각(香閣) 등을 세웠으며, 1783년에 현재 이름인 백담사로 이름을 바꾸게 되니 그 사연은 이렇
다.

절에 화마가 다녀갈 때마다 주지승 꿈에 도포를 입고 말을 탄 사람이 나타나 변을 알려주었다.
기이하게도 절 근처에 도포를 입고 말을 탄 듯한 바위가 있다. 계속되는 화재로 고통받던 주
지승은 절 이름을 바꾸려고 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대청봉(大靑峯)에서
절까지 웅덩이(담) 수를 세어보라고 했다. 하여 이튿날 세어보니 딱 100개이다. 그래서 100개
의 담이란 뜻에 백담사로 이름을 갈고 현재 자리로 절을 옮기니 당분간은 평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름의 효과도 잠시, 1915년 겨울밤에 화마가 기습하여 불상과 탱화 20여 위를 제외한
건물 70여 칸(또는 160여 칸)과 경전, 범종을 모조리 날렸다.
하여 주지 인공(印空)은 오세암(五歲庵)으로 자리를 옮겼고, 강원도 일대를 돌아 1,786원 30
전을 마련하여 1919년 4월 법당 20칸과 화엄실 20칸을 마련했다. 그리고 1921년 봄에 응향각
과 사무실 등 30칸을 마련하고 종과 북까지 주조해 낙성법회를 열었다.
허나 6.25 때 총탄에 의해 절 태반이 다시 화마의 덧없는 먹이가 되고 만다. 이후 1957년 중
건했으며, 계속 불사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백담사의 역사는 창건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화마와의 싸움, 화마의 희롱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 화마로 인해 잃은 것이 너무 많다. 정말 백담사는 불과 무슨 원한이 있는지 절을 완전히 날
려버린 화재만 무려 8번에 이른다. 오죽하면 절의 이름도 불과 상극인 '백담'이라 했겠는가.

▲  극락전에 봉안된 지장보살상과 지장탱

▲  백담사의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

만해 한용운은 백담사와 오세암에 머물며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십현담주해(十玄
談註解)','님의 침묵' 등을 집필했으며, 그가 남긴 서적과 유품이 만해기념관에 일부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딴 만해당, 만해교육관이 있고,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용대리에
만해마을이 있는 등, 만해와 백담사, 설악산과의 끈끈한 인연을 보여준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해 나한전, 만해당, 금강문, 관음전, 산령각, 무문관(無門關
) 등 2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절이 비록 오래되었다고 하나 툭하면 화마로 모두 날라가 고
색의 기운도 싹 날라갔다. 그러다 보니 소장문화유산도 국가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
상 및 복장유물이 전부이며, 오래된 3층석탑이 극락보전 뜨락에 있다.
또한 만해기념관에는 만해와 백담사 승려들의 서적과 유물이 있고 절 주변 백담계곡에는 돌탑
이 무수히 닦여져 이곳 풍경의 백미로 꼽힌다. 게다가 교통도 불편한 첩첩한 산골에 묻혀 있
어 산사의 내음이 아주 진해 속세(俗世)에서 나란 존재를 잠시 지우며 머물고 싶은 충동을 일
으킨다.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음)

* 백담사 소재지 :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산62 (백담로 746 ☎ 033-462-6969)
* 백담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백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 보물 1,182호

백담사에 왔다면 극락보전에 깃든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꼭 친견하기 바란다. 그는 이곳의 유
일한 국가 문화유산이자 오래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백담사 법당이 그 흔한 대웅전(大雄殿) 대신 극락보전을 칭한 것은 바로 아미타여래좌상의 공
간이기 때문으로 그 좌우에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고운 모습으로 자
리해 있는데, 저들은 아미타불이 적적할까봐 근래에 붙여놓은 협시보살들이다.

이곳 아미타불은 1748년에 조성된 것으로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였고, 머리
꼭대기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히 솟았다. 얼굴은 둥글며, 가는 눈과 작은 입,
오똑 솟은 코를 지녔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다. 넓은 가슴과 어깨를 지니고 있으
며, 양 어깨를 감싼 옷은 두꺼운 편으로 옷주름이 곡선(曲線)으로 처리되었다. 가슴에는 'U'
자형의 중복된 주름을 보이는데 이런 주름은 조선 초기 특징을 이은 것이다.

18세기 초기 불상 중 뛰어난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의 뱃속에는 고맙게도 조성 연대
를 알려주는 발원문 여러 장과 저고리 1점, 유리와 수정 등의 파편 등이 나와 안그래도 빈약
한 백담사의 문화유산을 조금 늘려주었다. 이들 유물은 아쉽게도 공개하지 않으며 오로지 아
미타불만 관람이 가능하다.


▲  백담사3층석탑
바닥돌과 기단(基壇), 3층 탑신, 약간의 머리장식을 지닌 조촐한 모습으로
조선 때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  만해기념관에 전시된 영환지략(瀛環志略) (전 10권)

영환지략은 1904년에 백담사 승려로 만해의 스승인 김연곡(金連谷)이 건봉사(乾鳳寺) 유학승
들로부터 얻은 세계지리서이다. 그는 이 책으로 세계일주 여행을 계획해 먼 길을 떠났는데,
우리의 옛 땅인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친일 패거리인 일진회(一進會) 회원으로 오인을
받아 자칫 골로 갈 뻔했다.


▲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
왜정(倭政) 시절 금서(禁書)의 하나로 월남(베트남)의 망국 과정을 담았다.
만해는 이 책을 애독하면서 월남의 망국과 조선의 망국을 비교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강조했다.

▲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의 하나인 황단삼회장 저고리 복제품

비공개인줄 알았던 복장유물의 일원인 저고리가 만해기념관에 들어있다. 설레는 마음을 진정
시키며 고운 빛깔의 그를 대하니 글쎄 복제품이란 3글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 3글자에 얼
마나 허탈하던지;; 복장유물 진품은 공개를 하지 않으며, 만해기념관에 있는 것들도 크게 땡
기는 것이 없어 이 정도로 마무리를 짓는다.


▲  백담사 잠수교 (백담사에서 바라본 모습)

백담사와 속세를 잇는 다리로 수심교와 잠수교 2개가 있다. 백담계곡에 높이 걸려있는 수심교
는 뚜벅이들 전용 다리이고 키가 낮은 잠수교는 차량 통행용으로 뚜벅이들도 이용이 가능하다
. 계곡이 얌전할 때는 건너가도 상관은 없으나 폭우로 계곡이 크게 흥분한 경우에는 다리가
침수되어 이름 그대로 잠수교가 된다. 그때는 무조건 수심교로 건너가야 된다.


▲  백담계곡 건너에서 바라본 잠수교와 백담사

▲  백담계곡 돌탑의 장대한 물결

백담사에 왔다면 목조아미타여래좌상도 중요하지만 백담계곡에 장엄하게 펼쳐진 돌탑의 무리
도 꼭 둘러보기 바란다. 백담사를 대표하는 풍경(백담사를 소개하는 자료나 사진에 메인으로
등장함)으로 경내 밑에서 계곡 상류 약간까지 계곡 돌밭에 수만 개가 넘는 조그만 돌탑이 닦
여져 있다.
눈과 얼음에 꽁꽁 봉해진 계곡 물줄기와 울창한 산림과 어우러진 이곳 돌탑은 중생들이 쌓은
것도 있고, 백담사에서 쌓은 것도 있는데, 그들이 쌓은 돌탑이 차곡차곡 쌓이고 쌓여 돌탑의
거대한 공간이 되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여름이나 초가을에 폭우로 계곡이 단단히
흥분을 하면 돌탑 상당수가 무너지거나 떠내려가기도 하나 계곡이 흥분을 가라앉기가 무섭게
돌탑이 마구 뿌리를 내리며 이전 모습을 되찾아 그야말로 '솟을 돌탑'이다.


▲  사람들의 소망을 먹고 자란 백담계곡 돌탑들

▲  돌탑과 자연석이 뒤섞인 계곡 돌밭과 얼어붙은 백담계곡
(백담사 방향)

▲  겨울 햇살이 살포시 어루만지는 백담계곡 돌탑들 (수렴동계곡 방향)


♠  백담사와 영시암을 이어주는 수렴동계곡(水簾洞溪谷)

▲  수렴동계곡 하류 숲길

보통 백담계곡은 영실천 물줄기 중 백담사입구에서 백담사 주변까지, 그리고 수렴동계곡은 백
담사에서 수렴동대피소 구간 물줄기를 일컫는다. 수많은 소(못)와 담, 기암괴석, 울창한 숲이
어우러진 계곡으로 외설악(外雪嶽)의 천불동계곡(千佛洞溪谷)과 함께 설악산의 대표 계곡으로
추앙을 받는다.

나는 백담사 후식용으로 영시암까지 올라가기로 했다. 백담사에서 그곳까지는 약 3.5km 거리
로 1시간~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나는 걸음을 서둘러 1시간에 갔는데, 오로지 계곡을 따라
가는 길이다. 오르락 내리락이 여럿 반복되고 평탄한 길도, 나무데크 길도 이어지며, 아슬아
슬한 벼랑길도 나타나는 등,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준다. 허나 영시암~오세암, 영시암~봉정
암~대청봉 구간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  얼어붙은 수렴동계곡 하류

조선 때는 백담계곡과 수렴동계곡을 통틀어 곡연(曲淵)이라 불렀다. ('백담계곡'만 지칭하기
도 함) 설악산에 퐁당퐁당 빠졌던 옛 사람 중의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있는데, 그는
곡연을 다녀가 '곡연기(曲淵記)'를 남겼다.
그 기록에는 곡연의 길이는 수십 리에 이르며, 사방이 막혀있어 사람이 통하지 못하나 안으로
들어가면 지세가 평탄하고 넓으며 토지가 비옥해 밭을 일구어 살만하다고 했다. 또한 수석의
뛰어남은 이곳이 제일이라 치켜세웠으며, 옛 집터가 하나 있는데, 그 집은 김시습(金時習)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20세기 말까지 화전민(火田民)들이 설악산 골짜기 도처에 살았고, 백담~수렴동계곡에도 살았
으나 공원을 정비하면서 이제는 가늠하기도 어려운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  얼어붙은 계곡과 끝없이 펼쳐진 계곡 돌밭 (수렴동계곡 하류)

▲  겨울에 깊히 잠긴 수렴동계곡 산길
그윽하면서도 조금은 차가운 산바람이 나의 두 귀를 흥분시킨다. 겨울에
깊은 산골에서 누릴 수 있는 그 시원하고 상큼한 산바람 소리.

▲  수렴동계곡에서 만난 설담당부도(雪潭堂浮屠)

적막한 수렴동계곡을 한참 거닐고 있으니 난데없이 늙은 승탑(부도) 하나가 발길을 붙잡는다.
이런 고적한 곳에 왠 부도인가 싶어 기웃거리니 18세기 승려인 설담당의 승탑(僧塔)이다. 계
곡 길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에 묻혀있으나 길에서도 훤히 보이므로 정신줄을 크게 놓지 않는
이상은 지나칠 우려는 없다.
설담당은 신계 재익(新溪 載益)을 스승으로 삼아 출가한 승려로 법호는 태활(泰闊)이다. 용암
(龍岩)의 법통을 이었고 정월 지순(淨月 知淳)에게 그 법통을 전수했으며, 1781년 경상도에서
설악산 심원사를 찾아와 수행했고, 최붕을 도와 대웅전과 향각을 지었다. (1783년에 절 이름
이 백담사로 변경됨)
이후 그의 행적은 설악산 산신도 모를 정도로 묘연하며, 승탑이 있는 곳이 심원사 옛터 부근
이라 백담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보인다.

숲속에 외롭게 자리한 설담당부도는 18세기 말에 조성된 석종형(石鐘形) 탑으로 돌로 다진 네
모난 바닥돌 위에 탑을 올린 조촐한 형태이다. 엄연한 백담사의 유물로 백담사와 영시암 중간
정도에 자리해 있어 자연이 가득한 곳에 약간의 고색 기운을 선사한다.


▲  수렴동계곡 중류 산길
설담당부도를 뒤로 하며 잠시 잊었던 영시암으로 길을 재촉한다.

▲  수렴동계곡 벼랑길

▲  수목이 울창한 수렴동계곡

▲  얼음에 꽁꽁 봉해진 수렴동계곡 (영시암 직전)


♠  수렴동계곡 깊숙한 곳에 고적하게 자리한
설악산 영시암(永矢庵)


▲  뒷쪽에서 바라본 영시암 경내와 설악산의 깊은 산주름

머리 세었으나 마음은 한층 활기차고 몸은 말랐으되 도(道)는 더욱 살찌네
안위(安危)는 산 밖의 일이니 영원히 영시암 문 열지 않으리

'김창흡이 지은 영시암 춘첩(春帖)'

내 삶 괴로워 즐거움이 없으니 속세의 모든 일 견디기 어려워
늙어서 설악에 투신하려고 여기에 영시암을 지었네
자연을 진실로 사랑하니 바위와 연못 마음에 맞어
마음대로 해도 마땅하니 쓸쓸함도 달게 여기네

'김창흡이 지은 '암자를 얻고서'


백담사에서 1시간을 들어가니 영시암이 슬슬 모습을 드러내면서 내 앞으로 다가선다. 나를 이
첩첩한 산골까지 부른 영시암은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1722)이 지은 집에서 그 역사
가 시작된다.
안동김씨 집안인 김창흡은 김수항(金壽恒)의 3째 아들로 성리학과 시문(詩文)에 능했다. 그는
벼슬에는 관심이 거의 없어 팔자 좋게 산수(山水)를 즐겼는데, 1689년에 일어난 기사환국(己
巳換局)으로 부친 김수항이 처단되고, 모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뜨자 세상에 대한 염증이 심해
졌다.
하여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설악산으로 들어갔고, 백담계곡 하류에 집을 지어 3년의 공사 끝
에 1707년 완성을 보았다. 그는 그 집을 벽운정사(碧雲精舍)라 부르며 속세에 지친 몸을 기댔
으나 1708년 화재로 날려먹고 만다.
그렇게 다시 염증을 느낀 그는 더 깊숙한 곳으로 발길을 재촉, 현재 영시암 자리에 퐁당퐁당
빠져 암자를 짓고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란 뜻의 영시암이라 했다. 즉 속세를 영원히 떠나 은
거하겠다는 자신의 굳은 의지를 이름에 담은 것이다. <사대부의 집이나 별서에 '암(庵)'이란
이름을 많이 썼음>

그 시절 영시암의 모습은 김창흡이 쓴 포음집(圃陰集)의 동유기(東遊記)에 잘 나와있다. 집은
북향을 한 판자집으로 위치한 곳이 꽤 높으며, 남쪽은 복실이고 북쪽은 작은 다락이라 시원함
과 따뜻함을 갖추었다. 집에서 서남쪽 위로 200보 거리에 무청정(茂淸亭)이란 정자를 세웠는
데, 한유(韓愈)의 반곡서(盤谷序)에 나온 말에서 따왔다. 나무를 다듬지 않아 예스러운 모습
이다.

그는 거사 최춘금(崔春金)과 같이 살았는데, 1714년 10월 그가 볼일을 보러 속세로 나갔다가
그만 호랑이에게 물려 죽고 만다. 이에 다시 실의에 빠졌고 그의 장례를 치루고는 다시는 오
지 않을 기세를 보이며 영시암과 설악산을 떠났다.
허나 설악산을 잊지 못해 금방 다시 찾았고, 백담계곡 하류에 갈역정사(葛驛精舍)를 짓고 머
물렀다. 거기서 수렴동계곡과 영시암은 가까운 거리이나 다시는 찾지 못했으며, 그렇게 인생
을 마감하게 된다. 또한 그가 세운 영시암도, 갈역정사도 주인을 따라 모두 사라지고 만다.

1749년 인제현감 이광구(李廣矩)가 오랫동안 버려진 영시암의 자취를 찾았고, 그 자리에 유허
비(遺墟碑)를 세워 그 자리를 추억했다. 이후 승려 설정(雪淨)이 이곳에 반해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1760년 현재 영시암을 짓게 된다. 영시암은 그렇게 사대부의 거처에서 불교 사찰로
바뀌게 된 것이다. 1925년에 중건을 했으며, 근래에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비로전, 삼성각, 요사 등 6~7동 정도의 건물이 있어 절이 갖출 건
물은 거의 지니고 있다. 오래된 문화유산은 전하지 않으나 절 앞에 수렴동계곡이 흐르고 주변
풍경이 고와 인간 세상의 풍경 같지가 않다.

이곳은 백담사에서 봉정암, 오세암, 대청봉으로 가는 길목이라 지나가는 수요가 많다. 게다가
인심도 후해 나그네들에게 믹스 커피와 뜨거운 물, 사탕 등의 간식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쉼
터를 갖추고 있어 잠시 휴식 겸 망중한에 잠기기에 좋다.

* 영시암 소재지 :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1720 (백담로 1125 ☎ 033-462-6677)

▲  범종 등의 사물을 지닌 2층 크기의
범종루(梵鍾樓)

▲  근래 장만한 비로자나불의 거처
비로전(毘盧殿)

◀  삼성각(三聖閣)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건물로
칠성(치성광여래)과 독성(나반존자),
산신의 공간이다.

▲  삼성각에 봉안된 산신과 칠성, 독성

▲  팔작지붕을 지닌 선방(禪房)


▲  영시암 현판을 내건 법당(대웅전)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영시암의 중심 건물이다.

▲  금동 피부를 자랑하는 대웅전 석가여래삼존상과 지장보살상
설악산의 좋은 기운을 늘 누리고 살아서일까? 다들 표정들이 맑고 명랑하다.

▲  영시암의 넉넉한 마음
지나가는 나그네를 위해 뜨거운 물과 커피믹스, 사탕 등을 흔쾌히 제공하고 있다.
바로 앞에는 의자와 탁자를 갖춘 쉼터가 닦여져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영시암을 둘러보고 아쉽지만 여기서 길을 돌렸다. 마음 같아서는 봉정암, 오세암, 그리고 대
청봉까지 쭉쭉 올라가고 싶었지만 시간도 문제이고 거기까지 올라갈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특히 봉정암과 대청봉은 1박을 해야 무리가 없을 것이다.
봉정암과 오세암으로 인도하는 길에서 왜 이렇게 시선이 떨어지질 않는지 '저기만 더 올라가
면 봉정암인데, 오세암인데' 너무나 아쉽다. 허나 이번 인연은 여기까지라 여기서 쿨하게 길
을 접고 영시암 이후 구간은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내던지며 백담사로 내려왔다.


▲  빽빽하게 우거진 수렴동계곡 산길
겨울이라 그렇지 봄이나 여름, 가을에 왔으면 하늘을 보기가
정말 어려웠을 것이다.

▲  박석이 입혀진 수렴동계곡 산길

▲  계곡 바위에 심어진 산악신앙의 소박한 현장, 돌탑들

▲  돌탑의 거대한 세상, 백담사 옆 백담계곡

백담사로 내려왔으나 벌써 철수하기에는 50% 아쉬워 다시 백담사로 들어갔다. 마침 불교용품
파는 곳에서 절을 찾은 사람들에게 새해 기념으로 '백담사 법요집(法要集)'을 나눠주고 있어
서 기념으로 하나 챙겨왔다. (가져오긴 했으나 거의 읽지도 않은 것은 함정)

절을 나오니 속세로 나가는 마을버스가 바퀴를 접고 승객을 태우고 있다. 매표소에서 버스표
를 구입하여 버스에 탑승했고, 버스는 2/3 정도를 채우고 구불구불한 길을 10여 분 달려 백담
사 주차장에 사람들을 내려놓는다. (중간에 2~3명이 탔는데 그들은 설악산국립공원 직원이었
음)
여기서 백담사입구로 나와 수도권으로 가는 시외직행버스를 타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
렇게 하여 오랜만에 찾은 설악산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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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4년 1월 1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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