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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여름 산사 나들이, 울주 가지산 석남사(石南寺) '

▲  석남사에서 만난 한 송이 연꽃

물소리 깊은 골에 다소곳 앉은 암자
석양 고인 뜰에 모란은 홀로 듣고 
낭랑히 올리는 마지 메아리만 감돈다
일체를 외면한 젊음 먹장삼에 감싸는데
서리는 향연(香煙) 속 손이 고운 수자(修子)들
법탈(法脫)은 애정보다도 더 뜨거운 혈맥(血脈)일레

* 시인 이영도(李永道)가 석남사 수좌들의 삶을 그린 시


여름 제국의 삼복(三伏) 더위가 한참 절정을 이루던 7월 끝무렵에 울주군에 자리한 석남사를
찾았다.
아침 일찍 부산서부(사상)터미널에서 밀양(密陽)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천황산 얼음골로
들어가는 시내버스로 환승하여 피서의 성지(聖地)로 추앙받는 얼음골의 품으로 들어선다.
안하무인이던 여름의 제국도 그 앞에서는 꼬랑지를 내리고 피해간다는 얼음골. 여기서만큼은
무더위란 단어는 잊어도 좋다. 땀을 흘릴 일이 거의 없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더위를 느낄
여지도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겨울에는 따스한 기운이 흘러나와 겨울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
게 만든다. (☞ 얼음골 보러가기)

얼음골에서 거의 12시까지 더위를 잊으며 머물다가 자리를 털고 속세로 나왔다. 마침 석남사
로 가는 직행버스 시간과 맞아떨어져 그곳을 거쳐 울산(蔚山)시내로 넘어가려고 했다.
드디어 나타난 석남사행 직행버스, 얼음골에서 사람들이 싹 내려 차 안은 적막에 잠겼다. 버
스도 시원한 얼음골이 좋은지 출발시간을 5분이나 넘기고 나서야 출발을 했다.

얼음골에서 석남사로 가는 길은 예전에는 무척 험했으나 4차선 신작로와 터널이 뚫리면서 겨
우 20분 만에 석남사에 이른다. 버스에서 내려 석남사를 애써 외면하며 언양(彦陽)으로 나가
려고 했으나 가까이에 보이는 일주문이 정처 없는 내 마음에 진하게 동요를 일으키면서 나도
모르게 석남사로 뚜벅뚜벅 움직였다. 이곳은 10여 년 전에 가본 적이 있어서 통과하려고 했는
떼, 어느새 일주문 앞에 서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1년도 아닌 자그마치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정말 간만에 들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  석남사 가는 길

▲  석남사 일주문(一柱門)

일주문 앞에는 관람객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보는 매표소가 있다. 매표소에는 아저씨 대신에
중년으로 보이는 비구니<比丘尼, 여승>가 표를 팔고 있었는데, 소장 문화유산에 비해 쓸데없이
비싸게 책정된 입장료에 놀란 가슴을 간신히 쓸어 내리며, 혹여 대학생 할인이 되는지를 물어봤
다. (대학교 졸업한지는 여러 해 되었지만 만약에 대비하여 학생증은 고이 간직하고 있음)
허나 비구니의 답변은 승려답지 않게 꽤나 세속적이었다. 19세 이상은 무조건 어른 요금을 내야
된다며 인상을 쓴다. 그 정도의 돈을 기꺼이 내고 들어갈 만큼 땡기는 곳은 아니지만 마땅한 정
처도 없고 해서 씁쓸한 마음을 꿀꺽 삼키며 입장료를 내놓고 일주문을 들어선다.
 
청기와가 입혀진 일주문은 1984년에 법용(法涌)이 세웠다. 문 정면에는 절의 이름을 알리는 '가
지산 석남사(迦智山 石南寺)' 현판이, 뒤에는 '장엄적멸도량(莊嚴寂滅道場)' 현판이 있다.

절을 찾으면 보통 일주문이 가장 먼저 나와 중
생을 맞이하는데, 문이라고는 하지만 여닫는 문
짝이 없다. 모든 중생을 안고 가겠다는 부처의
마음이 담긴 것이다. 허나 바로 앞에 매표소를
두어 돈 내는 사람만 가려서 보내니 일주문의
열린 마음을 무색하게 만든다.

 

 

       ◀  일주문 '장엄적멸도량' 현판


▲  숲이 무성한 석남사 가는 길

일주문을 들어서면 녹음(綠陰)이 진하게 서린 숲길이 곧게 펼쳐진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시원
하여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마음이 싹 정화되는 듯 하다. 나무가 베풀어 준 청정한 기운
과 솔솔 불어오는 산바람에 번뇌(煩惱)와 무더위가 배겨나지 못하고 훨훨 털려간다. 허나 번뇌
가 무거워 저 멀리 날라가지 못하고 일주문 앞에서 떡 나를 기다리니 나도 어쩔 수 없는 속인(
俗人)인 모양이다.

삼삼하게 우거진 석남사 숲길은 정말 우리집으로 고이 훔쳐오고 싶은 아름다운 길이다. 여름이
저 정도로 속인의 마음을 앗아가니 늦가을은 오죽할까?


▲  석남사 승탑(僧塔) 무리들

길에 단단히 홀려 정면만 보고 가다가는 중간에 자리한 승탑군을 놓칠 수 있다. 일주문을 지
나 150m 거리에 자리한 이들 승탑은 넓게 다져진 기단(基壇) 위에 석종형(石鐘形) 3기와 석등을
닮은 독특한 모습의 네모난 승탑 1기, 그리고 승탑의 주인을 알리는 비석 3기가 자리를 메운다.
이들은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네모난 승탑은 지봉당 거기대사(智峰堂
巨機大師)의 탑이며, 비석을 갖춘 석종형 3기는 제월당 화백대선사(霽月堂 和伯大禪師)와 함월
당 덕휘대선사(含月堂 德輝大禪師), 시암당(矢岩堂) 세위대사(世位大師)의 탑이다.

▲  숲길 중간에 네모난 샘터

▲  석남사 계곡

승탑군을 지나면 가깝지만 숲에 가려 보이지 않던 석남사계곡이 속시원히 모습을 비춘다. 피서
의 성지로 명성이 높은 이곳은 일주문 부근까진 피서객들이 가득 진을 치며, 여름에 대항한다.
허나 그 위쪽(청운교 위쪽과 석남사 주변)은 석남사에서 식수원과 수행을 이유로 계곡 출입을
막고 있어 완전 대조를 이루는데, 그 덕분에 계곡 상류는 맑은 기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청운교를 건너면 석남사를 크게 일군 인홍선사(仁弘禪師)의 승탑과 비석이 나온다. 1957년부터
석남사 주지로 있으면서 영남 제일의 비구니 도량으로 일군 인홍은 목소리가 우렁차 고함을 지
르면 가지산이 쩌렁쩌렁 울렸다고 한다.


▲  경내를 가린 침계루(沈溪樓)

인홍선사의 승탑과 섭진교를 건너면 석축(石築) 위에 터를 다진 석남사의 모습이 떠오르듯 보이
기 시작한다. 잔잔한 물소리의 계곡을 길동무로 삼으며 조금 더 들어가면 경내로 인도하는 침계
루가 마중한다.

침계루는 2층 건물로 1974년 주지 인홍이 중건했다. 1984년 법희(法希)가 중수했으며, 대중의식
과 좌석, 공양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원래 1층은 건물로 막혀있었으나 가운데 칸을
뚫어 경내로 통하는 문으로 삼았다. 침계루 현판은 청남 오제봉(靑南 吳濟峯)의 글씨이다.

침계루로 가는 길 주변 돌난간과 난간줄, 꽃과 풀에는 잠자리가 가득했다. 심심해서 절을 앞둔
시점에서 잠자리 사냥을 잠시 즐기니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잡힌다. 물론 어린 시절부터 단
양(丹陽) 시골에서 갈고 닦은 잠자리 사냥 기술도 한몫 한다. 그들을 잡으면 미련 없이 바로 풀
어주고 다시 사냥에 들어가는 식으로 약간의 시간 만에 50마리를 넘게 잡았다. 물론 잡힌 것들
이 또 잡힌 경우도 있을 것이다. 다 비슷해서 생겼으니 말이다.
몇몇 잠자리들은 높은 곳 대신 땅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데, 길바닥에 처참하게 뭉게진 잠자
리 시체가 여기저기 보인다. 그들은 빠르게 다가오는 수레의 바퀴를 피하지 못하여 참변을 당했
는데, 빈대떡이 된 그들의 비참한 말로를 보니 어두운 기분이 잠시 나를 엄습한다. 잠자리들이
좀더 깨어있었더라면 그 피해는 훨씬 줄일 수 있었을텐데, 그렇다고 절에서 그들의 안전까지 지
켜주는 것은 힘든 일이다. (관심도 없을테고..)

그들의 극락왕생을 마음 속으로 기원하며 침계루의 아랫도리로 경내로 들어서면 담장과 침계루
에 가려진 석남사의 속살이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석남사의 내력을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우리나라 최대의 비구니 도량, 가지산 석남사(迦智山 石南寺)
가지산에 안긴 석남사는 우리나라 비구니 사찰의 중심지이자 비구니 수행도량의 성지로 공부가
매우 엄하기로 유명하다.

이 절은 신라가 한참 기울어가던 824년<신라 헌덕왕(憲德王) 16년> 도의선사(道義禪師)가 창건
했다고 한다. 도의는 이 땅에 처음으로 선종(禪宗)을 들인 인물로 784년 당(唐)나라로 넘어가
오랫동안 선종을 익히고 821년에 귀국했다.
그는 이곳에 석남사를 세웠는데, 경내에 만든 화관보탑(華觀寶塔)의 빼어남과 각로자탑(覺路慈
塔)의 아름다움이 영남 제일이라 하여 절 이름을 석남사(石南寺)라 했다고 하며, 다른 설로는
가지산의 별명이 석안산(碩眼山)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따서 석안사라 칭했다고도 한다. 허나
도의의 창건설은 신뢰하기가 어려운 실정으로 울산시에서 펴낸 '울산광역시시사(市史)'에는 도
의의 제자이자 진골(眞骨) 출신인 진공(眞空, 855~937)이 창건했다고 나와있다.
다만 경내에 도의국사승탑이라 우기고 있는 신라 후기 승탑과 3층석탑이 있어 적어도 신라 말기
에 창건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도의의 제자나 도의와 관련된 가지산문(迦智山門) 파에
서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창건 이후 700년 동안 적당한 바퀴자국을 남기지 못했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74년(현
종 15년)에 언양현감 강옹(姜甕)의
시주로 탁령(卓靈), 자운(慈雲), 의철(義哲)이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때 진혜(振慧), 쌍원(雙遠), 익의(益儀) 등이 단청을 칠하고 종과 북을 만들었다.

1736년(영조 12년) 김언창(金彦昌)의 시주로 대웅전 영산회상도가 조성되었으며, 1803년(순조 3
년)에는 침허(枕虛)와 수일(守一)이 가람을 중수하고 미타탱과 지장탱을 조성했다. 1863년(철종
14년)에는 대웅전의 신중탱과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1889년에는 독성탱을 만들었다.

1912년 우운(友雲)이 중수했으나 6.25전쟁 때 폭격으로 폐허가 되고 만다. 1957년 인홍(仁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망해가던 석남사는 중흥의 기운을 맞게 된다. 1958년 청화당을 짓는 것을 시
작으로 대웅전과 극락전 등을 일으켰으며, 1963년 심검당과 침계루 등을 신축했다.
그리고 꾸준히 불사를 벌여나가 20여 동의 건물을 싹틔웠으며, 우리나라 으뜸의 비구니 선원도
량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2001년에는 옛 동인암터에 금당(金堂)을 지어 선원을 늘렸으며, 100여 명이 넘는 비구니들이 상
주하면서 엄격한 계율을 지키는 종립특별선원(宗立特別禪院)이 되었다.

석남사는 다양한 방식의 선원(禪房)을 운영하는데, 그중의 하나인 정수원(正受院)은 보통의 선
방처럼 결제와 해제를 지키지만, 금당은 해제가 따로 없이 1년과 3년씩 정진하는 수좌(首座)들
만 모여 있다. 또한 심검당(尋劒堂)은 노승(老僧)들이 자유롭게 수행하는 곳이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극락전, 조사전, 금당, 심검당, 강선당 등 2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승탑을 비롯하여 지방문화재인 3층석탑과 수조 등의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비록 건
물들은 고색의 내음이 싹 씻겨 내려갔지만 승탑과 3층석탑은 신라 후기 석조물이며, 수조는 고
려 후기(또는 조선 초기) 것이라 석남사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또한 비구니 사찰이라 경
내가 무척 깔끔하고 정갈하며, 지세를 이용해 건물들이 알맞게 배치된 점이 눈에 띈다.

가지산의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심산유곡의 절집으로 경관이 아름답고 석남사계곡이 절의 곁을
감돌아 그야말로 명당이다. 속세와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어 복잡한 마음이나 번뇌를 가다듬
기에 좋다. 또한 얼음골과 호박소계곡을 비롯하여 배내계곡, 간월산 등이 가까운 곳에 포진해
있어 이들을 겯드리면 정말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석남사에서 가지산 정상까지는 2시간 30분 정도 걸리며, 운문산이나 남명, 호박소계곡으로 내려
갈 수 있다.

※ 석남사 찾아가기 (2013년 9월 기준)
* 태화강역(옛 울산역), 울산시외터미널(터미널4거리 서쪽 정류장), 공업탑, 신복로터리, 언양
  터미널(내부)에서 석남사행 1713번 좌석버스 이용 (15~40분 간격)
* 태화강역, 울산시외터미널(터미널4거리 서쪽 정류장), 울산시청, 울산역(고속전철), 언양터미
  널(바깥)에서 807번 시내버스 이용 (20~30분 간격)
* 울산시내에서 갈 경우에는 1713번이 807번보다 훨씬 빠르다.
* 울산역(고속전철)에서 328, 807번 시내버스 이용
* 밀양터미널에서 석남사행 직행버스가 60~90분 간격으로 운행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경부고속도로 → 언양나들목에서 밀양 방면 24번 국도 → 궁근정 → 석남사주차장
② 대구~부산고속도로 → 밀양나들목에서 울산 방면 24번 국도 → 산내 → 호박소터널 → 덕현
   교차로에서 석남사 방면 → 석남사주차장

★ 석남사 관람정보 (2013년 9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1,700원 (단체 1,500원) / 청소년과 군인 1,300원 (단체 1,000원) / 어린이
  1,000원 (단체 800원) <단체는 30인 이상>
* 소재지 -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1064 (☎ 052-264-8900)
* 석남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석남사 승탑에서 바라본 석남사의 뒷모습


♠  석남사 둘러보기 (대웅전 주변)

▲  대웅전(大雄殿)과 3층석가사리탑

침계루를 들어서면 경내의 중심인 대웅전 구역이 나온다. 뜨락에 심어진 3층석탑을 중심으로 북
쪽에 대웅전, 양 옆구리에 서래각, 강선당이 마주하고 있으며, 남쪽은 침계루이다.

푸른색 기와가 입혀진 대웅전은 석남사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
붕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66년에 언양현감 강옹의 지원으로 재건했으며, 6.25시
절에 소실된 것을 1974년에 중수했다. 그런 대웅전 앞에는 1973년에 복원된 3층석탑 1기가 자리
해 있어 1금당 1탑 양식의 가람(伽藍)배치를 이루고 있다.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대웅전 내부에는 화려한 꽃과 서수로 수식된 불단(佛壇)을 설치하고 그 자리에 18세기에 조성된
석가3존불을 봉안했다. 이들은 돌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1736년 후불탱화 조성 때 같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허나 1716년 청월추연(靑月秋演)이 쓴 석남사적(石南寺蹟)을 통해 17
세기 후반에 만든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보관(寶冠)을 쓴 미륵불(彌勒佛)과 제화갈라보살(提和竭羅菩薩)을 두
었으며, 표정은 조금 인상을 쓴 듯 보이기도 하나 그런데로 미소를 띄우고 있다.

석가3존불 뒤에 든든히 자리한 후불탱화는 1736년 금어 임한(任閑), 민휘(敏煇)가 그린 영산회
상도이다. 색채가 서로 조화를 이룬 우수한 작품으로 불단 동쪽에는 1893년에 그린 지장탱화가,
서쪽에는 1863년에 그린 신장탱화가 있다.

▲  종무소로 쓰이는 서래각(西來閣)

▲  3층석탑과 선열당(禪悅堂) 뜨락

       ◀  대웅전 뜨락 3층석가사리탑
대웅전 뜨락에 심어진 3층석탑은 폐허를 딛고 일
어선 석남사의 도약을 상징하듯 웅장한 자태를
자랑한다.
이 탑은 824년 도의국사가 세웠다고 전하나 신
뢰도는 없으며, 원래는 15층의 장대한 탑이었다
고 전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경주 정혜사지(淨
惠寺址) 13층석탑을 뛰어넘는 이 땅 최대의 다
층(多層)탑이 되는 셈이다.
허나 아쉽게도 이 역시 믿기가 곤란하며, 임진
왜란 때 파괴되어 기단부(基壇部)만 남아있다가
1973년 주지 인홍이 3층석탑으로 다시 세웠다.
그러니까 기단 위쪽은 그때 새롭게 만들어진 셈
이다.
탑의 높이는 11m, 기단부의 폭은 4.57m로 2중의
기단 위에 탑을 세운 것과 상층기단의 탱주가 1
개인 점은 전형적인 신라 후기 석탑 양식으로
비록 824년은 아니더라도 빠르면 신라 후기, 늦
어도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탑 내부에는 스리랑카 사타시싸가 기증한 부처의 진신사리 2과가 담겨져 있다. 그래서 석가사리
탑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  수조(水槽) - 울산 지방문화재자료 4호

침계루 뒤쪽에는 석남사의 식수를 제공하는 화강암 수조가 있다. 수조는 옛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조(石槽)로 대부분 네모난 모습이나 이 수조는 모서리 부분의 안과 밖을 둥글게 다듬고
연꽃봉우리 문양을 새겨 보기는 좋게 만들었다. 고려 후기나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
는데, 원래는 공양간 내부에 있었다. 그러다가 대웅전 뜨락 침계루 뒤쪽으로 꺼내 만인이 보게
끔 공개했다.

석조의 길이 2.7m, 높이 0.9m, 너비 1m로 가지산이 베푼 옥계수로 늘 마를 날이 없다. 물도 담
백하여 바가지에 한가득 담아 마시니 목구멍이 시원하다고 쾌재를 외친다. 수조 바닥에는 중생
들이 무책임하게 내던진 동전들이 빛을 잃어가며 잠들어 있다.


▲  조사전(祖師殿)

대웅전 뒤쪽 높다란 곳에 터를 다진 조사전은 호진당(護眞堂)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1905년 남
호선사(南湖禪師)가 중건했다.
1961년 인홍이 중수했고, 1974년 다시 지을 때 도의국사의 진영을 새롭게 제작했다. 이후 2003
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으며, 절을 창건했다는 도의국사를 비롯해 석남사와 인연이 깊은
승려 11명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다.


▲  극락전(極樂殿)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극락전은 1674년 정우선사가 지었다고 전하며, 지금 건물은 1974년 인홍
이 새롭게 지었다. 불단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조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석정(石
鼎)이 그린 아미타후불탱화가 그들의 든든한 뒷배경이 되어준다. 그외에 1994년에 만든 신중탱
과 독성탱, 산신탱 등이 있는데, 이들은 인법(印法)의 작품이다.


▲  극락전 석조아미타3존불
조선 후기에 조성된 아미타3존불로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협시(夾侍)하고 있다.

◀ 석남사 3층석탑 - 울산 지방유형문화재 5호
극락전 앞에는 고운 맵시의 3층석탑이 서 있다.
이 탑은 원래 대웅전 앞 3층석탑 자리에 있었는
데, 1973년 극락전 뜨락에 있던 연못을 메우고
그 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원래 자리에는 오랫
동안 버려져 있던 옛 석탑의 잔해를 가져와 복
원하면서 중심 탑(3층석가사리탑)으로 삼았다.

탑의 높이 5m, 폭 2.3m로 바닥돌 위에 2중의 기
단(基壇)을 두고 3층의 탑신과 상륜부를 얹힌 신
라 후기 탑으로 탑의 꼭대기인 상륜부(相輪部)는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으며, 탑신 옥개석(屋蓋石)
의 층급받침이 5단이라 9세기 후반 정도에 조성
된 것으로 여겨진다.

오랜 세월의 때가 곳곳에 끼어 중후한 멋을 선사하며, 적절한 높이와 체감률로 안정감이 돋보인
다. 맵시와 선의 미가 아름다워 비슷한 시대에 태어난 국보/보물급 석탑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
이 없다. 보물로 지정된 승탑 다음으로 오래된 이곳의 보물로 기억마저 희미해진 옛 석남사의
존재를 아련히 일깨워준다.


▲  대웅전 뒤쪽에 누운 엄나무 구유

대웅전 뒤에는 엄나무를 깎아서 만든 길쭉한 구
유가 누워있다. 구유는 나무나 돌의 속을 깎아
서 만든 통으로 절에서 공양밥을 담거나 쌀을
씻어 담는 용도로 쓰이며, 길이 6.3m, 폭 72cm,
높이 62cm의 큰 규모이다.

이 구유는 적어도 500년 이상 된 것으로 원래부
터 석남사에 것은 아니다. 구유 한쪽에 '간월사
(肝月寺) 유(柚) 임○(壬○)'이란 명문이 있어
언양 부근 간월사에 있던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 절이 망하면서 가까운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구유에 밥을 담으면 가히 1,000명이 공양을 할
수 있다고 하니 그 크기가 가히 대단한데, 부엌
이 현대화 되기 전에는 저 통을 사용해 쌀을 씻
고 공양용으로 썼겠지만 그 이후는 석남사의 오
랜 기념물로 바래지면서 대웅전 한쪽에 누워 한
가로운 노후를 보낸다. 구유 바닥에는 쌀 대신
먼지만이 수북하니 현대판 식기에 밀린 노장의
쓸쓸함이 비춰진다.

저 구유를 저렇게 놀게 하는 것보다는 구유 공양 체험 행사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통이야 요즘
청결제가 잘 나오니 깨끗하게 빡빡 씻으면 되는 것이고, 그 안에 모락모락 밥을 담아서 4월 초
파일이나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법회일에 한번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  석남사 승탑으로 가는 길


♠  석남사 승탑 - 보물 369호

▲  길 끝에 자리한 석남사 부도

대웅전 좌측에는 기와 담장에 둘러싸인 계단길이 있다. 석남사 제일의 보물인 승탑을 알리는 이
정표가 계단 앞에 있는데, 그 계단을 오르면 평탄한 길이 나타나며, 그 길의 끝에 맵시가 아름
다운 석남사 승탑이 중생을 기다리고 있다.
승탑으로 가는 길은 비구니의 손길 덕분에 매우 정갈하고 이쁘다. 차곡차곡 입혀진 석축 위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살랑거리며, 한줌의 티끌도 없이 깨끗한 길은 발을 무책임하게 내딛는 것
조차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자 성지라 할 수 있는 석남사 승탑은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경
내에서 유일하게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지니고 있다. 넓은 대지에 터를 닦고 팔각원당형(八
角圓堂形)의 형태를 취한 이 탑은 높이가 3.53m로 탑의 주인은 절을 세운 것으로 막연히 여겨지
는 도의국사(道義國師)라고 전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절에서는 안내문과 홈페이지를 통해 '도
의국사부도'라고 강하게 우기고 있음) 다만 탑의 양식을 볼 때 후삼국시대인 10세기 초반에 조
성된 것으로 보이며, 정확한 주인은 설만 있을 뿐, 탑비(塔碑)나 명문(銘文) 등의 물증이 없는
실정이다.

하대석(下臺石) 주위에는 사자와 구름무늬를 돋게 새기고, 중대석(中臺石) 8각의 각 면에는 안
상(眼象)을 조각했으며, 그 안에 꽃모양의 띠를 둘렀다. 중대석은 북을 세로로 세워놓은 모습으
로 가운데 받침돌에는 상하좌우에서 안쪽을 향해 낮게 솟은 꽃모양의 안상을 투각(透刻)하고 그
안에 꽃모양의 띠를 둘렀는데, 이는 신라 후기 승탑의 특징이다.

8각의 앙련(仰蓮) 받침대 위에 탑신을 두고 각 8면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얇게 새겼으며, 앞,뒷
면에는 문짝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그 중 앞면에만 자물쇠가 새겨져 있다. 문의 양 옆으로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배치되어 있어 문비와 함께 탑을 수호하려는 장식임을 알 수 있다.
지붕돌인 옥개석은 추녀가 짧고 서까래와 기왓골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어, 그 당시 목조건축 양
식까지 덤으로 살펴볼 수 있으며, 지붕 꼭대기에는 앙화(仰花)와 보개(寶蓋), 보주(寶珠)로 이
루어진 상륜(相輪)이 남아 있다.

지금은 저렇게 멀쩡하고 뛰어난 조각과 수려한 미를 보이고 있지만 왜정(倭政) 때 도괴되는 아
픔을 겪었으며, 그 이후 복원은 했으나 너무 대충해서 석재의 위치가 바뀌는 우를 범했다. 그래
서 1962년 복원을 하여 지금에 이른다. 그에게도 나름대로의 우여곡절이 있는 셈이다.


▲  다시 속세로

석남사 승탑을 끝으로 석남사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경내에 건물이 많긴 하나 넓게 퍼져있고,
수행공간인 선원이 많은 터라 둘러볼 수 있는 범위는 대웅전과 승탑, 침계루 주변이 고작이다.
솔직히 일반인은 그 이상 살펴볼 필요까지는 없지, 대웅전 주변과 3층석탑, 신라 후기 승탑만
봐도 석남사의 알맹이는 모두 본 것이다.

10여 년 만에 찾은 석남사를 1시간 정도 둘러보고 제자리로 가기 싫은 마음을 살살 달래며 무거
운 발걸음을 옮긴다. 언제나 부처와 관음보살이 염원하는 그런 세상이 올까? 그런 세상이 과연
있기나 하는 것일까? 이렇게 하여 성하(盛夏)의 석남사 나들이는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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