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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성 허준(許浚)과 동의보감의 탄생지, 서울 가양동(加陽洞) 산책 '

▲  상상으로 재현된 양평군 허준 상 (허준박물관 소재)


겨울 제국의 위엄이 저물고 황사(黃沙)와 봄의 해방군이 천하를 두고 다투던 3월 중순 주말, 후
배와 가양동 나들이를 나섰다.

가양동은 한강 기슭에 자리한 동네로 1990년까지만 해도 김포평야의 동쪽 끝을 이루던 농촌이었
다. 허나 개발의 물결이 거치게 밀려오면서 인근 등촌동(登村洞)과 함께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어
조그만 신도시를 이루게 되었다. 지금은 강서구(江西區)의 일원이자 서울을 이루는 무수한 동의
하나로 무심히 지나치거나 자세한 사연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곳은 옛날 양천(陽川)
고을의 중심지이자 양천허씨의 영원한 고향으로 많은 명소를 품고 있다.

양천은 지금의 가양동을 중심으로 터를 닦은 고을로 삼국시대에는 제차파의(齊次巴衣)라 불렸다.
그러다가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전국의 지명(地名)을 당나라식으로 갈면서 공암
(孔巖)이 되었
다. 신라 후기에는 김해허씨 일가가 공암에 터를 닦고 살았는데, 김해허씨 시조 <가락국 김수로
왕의 부인인 허황옥(許黃玉)>의 30세손이자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이 구암공원 서쪽
에 있는 허가바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살다가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後百濟)를 치고자 한강을 건널 때
도움을 주고 군량까지 제공한 공으로 공암촌주(孔巖村主)가 되었다. 이후 태조는 장경공(莊景公
)의 작위(爵位)와 함께 공암을 본관으로 내리면서 허선문은 양천허씨의 어엿한 시조가 된다. 군
량도 지원하고 강을 건너는 것까지 도울 정도면 지역 지주(地主)였음이 분명하다.

공암 고을은 1301년(충렬왕 27년)에 양천(陽川)으로 이름이 갈렸으며, 고을의 중심지가 신정3동
연의골<연의동(延義洞)>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가양동 궁산 남쪽으로 중심지가 이전
되었다. 조선팔도 200여 고을 가운데 가장 작은 고을로 계속 현(縣)에 머물러 있다가 1895년 23
부 중심으로 행정구역을 바꿀 때 비로소 군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때 인천부(仁川府)에 속했다가
곧바로 13도제로 바뀌면서 경기도(京畿道) 양천군이 되었다. 그러다가 1914년에 김포군(金浦郡)
에 통합되면서 독립적인 고을, 양천은 사라진다.
1963년 옛 양천 고을 일대가 서울에 편입되어 영등포구의 일원이 되었으며, 1977년 강서구로 분
리되었다. 그러다가 1988년 강서구 남쪽 일대를 양천구(陽川區)로 분리시키면서 잊혀진 옛 이름
양천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양천 고을의 범위는 강서구와 양천구, 영등포구를 비롯하여 구로구 일부, 김포시 고촌면 일부로
매우 작았다. 김포평야 동쪽에 자리하여 드넓은 평야가 고을의 대부분을 이루었으며, 고을 북쪽
에는 한강이 흘러 서울을 드나들던 수많은 배들이 지나갔다. 양천허씨의 성지(聖地)인 허가바위
에는 주요 나루터인 공암나루가 있었고, 강변에는 광주바위와 소요정(逍遙亭), 소악루(小岳樓)
등의 멋드러진 경승지가 즐비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특히 진
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유명한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양천현감(縣監)을 지낼 때 양천의 아름
다운 풍경을 그림으로 듬뿍 남겼으며, 허준과 그의 저서인 동의보감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강변에 자리한 명소들은 한강 남쪽을 가르는 올림픽도로가 생기면서 탑산과 궁산 북쪽까지 넝실
거리던 한강은 북쪽으로 밀려났으며, 양천의 명물이던 광주바위는 구암공원 호수 구석에 처박히
는 신세가 되고 만다.

현재 가양동의 명소들은 양천허씨와 관련된 구암공원 주변과 양천고을과 관련된 궁산 일대로 나
눌 수 있다. 구암공원 구역에는 광주바위를 비롯하여 양천허씨가 특별히 여기는 허가바위, 허준
과 우리나라 한의학을 집대성한 허준박물관이 있으며, 궁산에는 서울 유일의 향교인 양천향교와
양천고성터, 소악루, 겸재정선기념관, 양천관아터가 있다. 이들 명소는 거리도 서로 가까워 4~5
시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본글에서는 구암공원 일대를 소개한다. (궁산은 나중에)


♠  가양동 주민들의 휴식공간, 광주바위를 품에 보듬은
구암공원(龜岩公園)

가양동 사람들의 포근한 휴식처인 구암공원은 가양2단지와 3단지 사이에 터를 닦은 근린공원이
다. 28,943㎡의 넓은 공원으로 1992년 가양동에 대단위 아파트를 심으면서 조성되어 1993년 10
월에 문을 열었다. 가양동 출신으로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저술한 허준을 기리고자 그의 호<구
암(龜岩)>를 따서 구암공원이라 했으며, 다른 말로는 허준공원, 구암허준공원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한강 남쪽을 가르는 올림픽도로에 막혀 한강이 보이질 않는다. 물론 강까지의 거리는 2~
3분 정도로 지척에 있다. 허나 이곳은 개발의 칼질이 자행되기 전에는 한강물이 넝실거리던 강
변으로 탑산(塔山)의 북쪽 절벽이 경치를 이루던 곳이다. 공원 남문 서쪽에 탑산의 절벽 일부가
남아있는데, 그 이북이 예전에는 한강이었다. 절벽 앞 강중(江中)에는 가양동의 명물인 광주바
위가 솟아나 한폭의 절경을 자아냈다. 허나 올림픽도로가 뚫리면서 한강은 북쪽으로 180m 가량
밀려나게 되고 개발의 난도질 앞에 탑산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이곳의 아름다운 풍경은 모래성처
럼 사라지고 말았다. 간신히 광주바위만 공원 조성으로 만들어진 호수 동쪽에 남아있다.

산책과 운동을 즐기는 시민들로 평온한 분위기의 구암공원에는 한강에서 끊어진 물줄기를 손질
한 호수를 비롯하여 정자와 광장, 어린이놀이터, 산책로가 있으며, 환자를 보살피는 모습의 허
준 동상과 호수 동쪽에 자리한 광주바위가 있다.

가양동 및 강서구의 주요 명소로 인지도는 낮지만 부근에 허가바위를 비롯하여 허준박물관, 공
암나루터 등의 명소가 있어 같이 둘러보면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공원 자체는 다른 근린
공원과 비슷하지만 광주바위와 허준 동상은 이곳만의 매력이니 꼭 눈으로 살피기 바란다.

※ 구암공원 찾아가기 (2012년 3월 기준)
*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3번 출구)에서 1002, 6630. 6631, 6645, 6657번 시내버스를 타고 한
  보구암마을아파트 하차, 길 건너편으로 건너서 탑산 옆으로 난 허준로5길로 3분 정도 들어가
  면 공원 서문이다. (중간에 허가바위와 공암나루터 표석이 있음)
  그리고 1002, 6631, 6645번 버스를 탔을 경우 한보구암마을아파트에서 1정거장 더 간 허준박
  물관(공진중교) 하차, 길 맞은편 탑산초교 서쪽에 공원으로 가는 길이 있다. 도보 2분
* 지하철 9호선 가양역 1번 출구를 나오면 가양3,5단지 4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5분 정도
  가면 가양3단지 3거리인데, 3거리에서 왼쪽(허준로)으로 꺾어 5분 정도 가면 공진중학교와 탑
  산초교가 나온다. 여기서 탑산초교를 지나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구암공원이다.
* 지하철 5호선 발산역(5번 출구)에서 6630, 6712번 시내버스 이용, 6630번을 탔을 경우 영등포
  공고 하차, 6712번을 탔을 경우 허준박물관(공진중교) 하차
* 지하철 5호선 발산역(3번 출구)에서 1002, 6630번 시내버스 이용, 1002번을 탔을 경우 허준박
  물관 하차, 6630번을 탔을 경우 한보구암아파트 하차
* 지하철 2호선 당산역(1,13번 출구)에서 6631번 시내버스를 타고 허준박물관(탑산초교) 하차

★ 구암공원 관람정보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 제한 없음
* 호수에 심어진 음악분수는 슈베르트의 빌헬름텔을 비롯하여 11곡의 음악에 따라 분수가 춤을
  춘다. 야간에는 282개의 조명이 조화를 이루며 환상적인 파노라마를 연출하여 가양동의 명물
  로 명성이 자자하다. 음악분수 운영시간은 매년 4월부터 10월까지 12시, 14시, 16시, 19시,
  20시, 21시 총 6회로 각각 30분 동안 분수쇼가 열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1471


▲  정온한 분위기의 구암공원 산책로 (공원 서문)

▲  호수를 수식하는 바위들

구암공원의 약 1/3을 차지하고 있는 호수는 면적이 5,100㎡, 수심이 2m로 여러 바위들이 다리를
담구고 있는데, 저 끝에 보이는 그늘진 바위가 광주바위다. 호수에는 인공섬과 음악분수대가 있
으며, 오리 가족이 한가로이 호수를 순찰한다. 봄이 오고 여름의 제국이 천하를 호령하면 기나
긴 겨울잠으로 기운을 충전한 음악분수대는 여름 제국의 시련에 대항하며 시원한 분수쇼를 펼칠
것이다.


▲  가양동의 명물, 광주바위<광주암(廣州岩)>

호수 동쪽에 그늘진 모습으로 자리한 광주바위는 2개의 바위가 나란히 함께한 모습으로 워낙 가
깝게 붙어있어 하나의 바위로 보인다. 높이가 12m인 커다란 바위로 원래는 탑산 북쪽 강물에 떠
있거나 잠겨 있었으며, 비록 옛 정취는 아침 이슬처럼 허무히 지고 말았지만 그 자태만은 고색
창연한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며 아련히 왕년을 그리워한다.

광주바위는 한강에 수많은 배가 드나들던 조선시대에 뱃사람과 뱃놀이객들이 바위 앞에 잠시 길
을 멈추고 넋이 빠지라 구경했던 현장이다. 지금은 호수 한쪽에 박혀있어 옛 정취의 절반도 우
러나오질 않아 실감이 나질 않지만 옛날에는 정말 대단했던 모양이다.

이 바위는 광주바위 또는 광제(廣濟)바위라 불리는데, 그 이름처럼 원래는 경기도 광주(廣州)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큰 홍수로 양천까지 떠내려왔다는 것이다. 고을에서 애지중지
하던 바위가 갑자기 시야에 안보이자 광주고을은 발칵 뒤집히고, 광주현감(縣監)은 바위의 행방
을 서둘러 수소문하여 양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광주현감은 양천현감을 찾아가
'우리 고을 바위가 당신 고을에 자리잡아 좋은 경치를 보여주고 있으니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내시오'

생각이 짧았던 양천현감은 해마다 바위에서 나는 싸리로 만든 싸리비 3자루를 광주에 세금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얼마 뒤 양천현감은 억울한 기분이 들어 세금을 받으러 온 광주 관리
에게
'우리는 저 바위가 필요없소. 그러니 당신네 고을로 당장 가져가시오!!'
그 말을 들은 광주 관리는 면목이 없는지 더 이상 세금을 뜯지 못했다고 한다. 양천고을이 원해
서 가져온 것도 아닌 홍수로 떠내려온 바위를 가지고 우리 바위가 여기있으니 세금을 내라고 하
는 것도 참으로 어이가 없다. 이런 전설은 단양8경의 으뜸인 도담3봉(島潭三峯)에도 진하게 서
려있는데, 저런 커다란 바위가 홍수에 무책임하게 떠내려올 정도로 우리나라 바위는 절대 허약
하지 않다. 옛 사람들은 수면 위에 보이는 바위만 생각했지 수면 밑에 가려진 바위 뿌리는 크게
생각치 않아서 저런 우스개 전설이 생겨난 것이다.

바위에 전설과 함께 광주란 이름이 있는 것을 보면 광주에서 정말 흘러온 것이 아닌 광주나 혹
은 광주 사람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광제바위라 불린 것을 나중에 광주로 이름
이 변경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광제는 넓은 나루터란 뜻이다.


▲  가까이서 바라본 광주바위의 위엄

한강을 오가던 뱃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던 광주바위의 위엄과 정취는 개발의 칼질 앞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올림픽도로가 뚫리면서 탑산 아래까지 흐르던 한강은 지금의 올림픽도로 이북으로 밀
려나고, 탑산을 밀어 아파트단지를 만들면서 광주바위는 가루가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허나
다행히도 서울시의 생각이 바뀌면서 구암공원 호수 동쪽으로 바위를 옮기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
었다.
옛날처럼 넓은 강에 뜬 바위섬이 아닌 땅에 붙어있는 물가의 바위가 되었지만 개발이란 미명아
래 닥치는대로 부시고 밀어버리는 이 땅의 현실에서 이렇게 목숨이라도 부지한 것도 참으로 다
행이 아닐 수 없다. (개발로 사라진 서울의 명물 바위가 무지 많음..)

허나 넓은 강에 있던 그가 좁은 호수에 박혀 있는 모습이 동물원에 갇힌 호랑이마냥 몹시나 답
답하고 안스러워 보인다.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바라보며 우수에 잠긴 광주바위, 옛날처럼
다시 한강에 띄워 예전의 정취를 재현할 수는 없는 것일까? 아무리 봐도 그는 호수가 아닌 넓은
강이 더 어울린다.

우리 민요의 바위타령 가운데 바로 이 바위를 주제로 한 광주바위 타령이 있는데, 유난히 곡이
구성져 나그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  호수를 순찰하는 압공(鴨公, 오리)들의 위엄
오리까지 살 정도면 물의 수질도 제법 괜찮은 모양이다. 저들이 있기에
오늘도 공원 호수는 무탈하다.

▲  나그네의 심금을 때리는 감동의 현장, 허준 동상
동상 왼쪽에 있는 표석은 허준의 일대기가 적혀있고, 오른쪽의 넓직한
표석에는 허준이 동의보감에서 의원의 자세를 적은 글귀가 담겨져 있다.


호수 북쪽 언덕에는 환자를 돌보는 모습의 허준 동상이 나그네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보통 동상(銅像)은 꼿꼿하게 서 있거나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 주류를 이
루는데, 이곳 허준 동상은 방에 앉아 누워있는 병자(病者)를 정성껏 보살피는 모습으로 마치 조
부(祖父)가 손주를 돌보는 것 같은 자애로운 인상이다.

허준은 그의 동의보감에서 '옛날 뛰어난 의원은 사람의 마음을 잘 다스려 미리 병이 나지 않도
록 했는데, 지금의 의원은 사람의 병만 다스리고 사람의 마음은 다스릴 줄 모른다. 이것은 근본
을 버리고 끝을 쫓으며 원천(源泉)을 캐지 않고 지류만 찾는 것이니 병이 낫기를 바라는 것이
어리석지 않은가?'
하였다. 돈과 출세를 밝히지 않고 단순히 병만 살피지 않으며 병에 신음하는
환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다스려 최선을 다하라는 후대의 귀감이 되는 내용이다. 오늘날 저런 마
음가짐으로 환자를 돌보는 의사가 과연 얼마나 될까..?


▲  옆에서 본 허준 동상
환자의 이마에 손을 대며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의 마음과 고통을 읽는 허준,
그의 마음이야말로 의사(의원)가 필수적으로 갖춰야 될 정신적인 소양이다.
그의 우측에 놓인 두툼한 책 4권은 동의보감이다.


♠  양천허씨의 영원한 성역(聖域), 허준이 동의보감을 쓴 현장
허가(許家)바위 -
서울 지방기념물 11호

▲  측면에서 바라본 허가바위

▲  허가바위의 또다른 이름인 공암바위 표석

구암공원을 둘러보고 공원 서문에서 왼쪽으로 가면 허준박물관 후문이 나온다. 후문 바로 곁에
는 나무가 우거진 제법 높은 언덕이 있는데, 그 언덕이 바로 일부만 남아있는 탑산이다. 그 산
의 아랫도리에는 자연동굴을 지닌 두꺼운 바위가 있는데, 그곳이 허가바위다.

이 바위는 그리 수려한 모습이 아닌지라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바위나 동굴로 여길 수 있
다. 특징이 있다면 바위 밑에 조그만 동굴이 하나 있다는 것 뿐이다. 하지만 바위에 얽힌 옛 이
야기를 접한다면 사뭇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게 바로 알고 모름의 차이다.

허가바위는 양천허씨의 영원한 성역(聖域)이자 고향으로 그들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이 바로
이 바위 동굴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그래서 양천허씨의 발상지로 일컬어진다. 정말로 동굴에
서 태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가양동에서 태어나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러다가 고려 태조
를 도운 일로 공암촌주로 승진되고 양천을 본관으로 하사받아 양천허씨를 이루게 되었다.
허선문은 이 동굴을 창고나 제사 공간, 기타 특별한 용도로 사용한 듯 싶으며, 그 인연으로 양
천허씨에서는 그들의 성역이자 시조의 발상지로 특별히 옆구리에 끼고 살피고 있다. 그래서 허
씨 일가의 바위란 뜻의 허가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이다.

가양동이 개발되기 전에는 한강물이 바위까지 조금 들어왔는데, 그런 위치 때문에 신석기시대(
新石器時代)부터 사람들이 생활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바위 밑에 뚫린 자연동굴은 크기가 가로
6m, 세로 2m, 높이 5m 정도로 최대 2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만 규모이다. 양천허씨의 발
상지라 하여 동굴 안에 딱히 뭐가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평범 속에 묻힌 작은 동굴일 뿐
이다.

이 바위는 공암(孔巖)바위라 불리기도 하는데, 바위 밑에 큰 구멍(동굴)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양천 고을의 옛 이름인 제차파의현()의 '제차'는 차례 또는 갯가, '
파의'는 바위를 뜻한다고 하는데, 그 이름이 바로 이 바위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  허가바위 밑에 뚫린 동굴
큰 구멍이 뚫려 공암바위란 이름도 간직한 허가바위 아랫도리 동굴은 출입이 가능하다.
유난히도 가혹했던 겨울 제국의 기억을 간직한 낙엽들은 화려한 윤회(輪廻)를 꿈꾸며
쓸쓸히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  허준이 동의보감을 쓴 허가바위 동굴 내부

도시 속의 동굴이 되버린 허가바위 동굴, 구암공원 가는 길목에 있어 사람의 왕래가 많다. 이곳
이 삼성산 석수동 석실고분(石室古墳,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속세와 단절된 외딴 곳에 있었
다면 몰래 며칠 정도 머물고 싶다.


가양동을 근거지로 삼던 양천허씨에는 다양한 인물이 나왔는데, 조선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허종(許從)과 동의보감을 쓴 허준이 이곳 출신이다. 또한 홍길동전(洪吉童傳)으로
유명한 허균과 그의 누이로 문학가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은 고향은 강릉이지만 양천허씨 일가이
다. 속설에는 그들이 허가바위의 신성한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이곳은 허
준이 천하 최대의 의서인 동의보감을 쓴 유서 깊은 현장이기도 하다. 그가 여기서 집필을 한 것
은 조상의 정기가 서린 동굴에서 그 기의 도움을 받고자 함일 것이다. 그만큼 동의보감 편찬은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만큼이나 어려웠다.

가양동이 서울에 편입된 이후, 오랫동안 시골로 있다가 올림픽도로가 뚫리면서 한강과 멀어지게
되었으며, 1992년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조성하면서 바위 앞에 도로가 놓여 동굴을 가리게 되면
서 조금은 답답한 형태가 되었다. 허나 도로와 바위와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어 건강에는 별
로 문제는 없어 보인다.

바위를 간직한 탑산은 소요정(逍遙亭)이란 명소를 간직한 산으로 산 남쪽에 허선문의 묘역이 있
었다고 하며, 소요정에서 바라보는 한강은 바다처럼 넓고 아름다워 문인들의 발길이 잦았다고
한다. 바위 동쪽에는 공암나루터를 알리는 표석이 멀뚱히 서 있는데, 서울에서 행주, 강화를 잇
던 중요한 나루터로 투금탄(投金灘)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곳이 바로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등장
하는 금을 버리고 형제의 우애를 지킨 이조년(李兆年), 이억년(李億年) 형제의 이야기가 깃들여
진 그 유명한 현장이다.


▲  공암나루터 표석
배들의 왕래가 잦던 공암나루는 장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 휩쓸려 사라지고
나루터를 알리는 표석만이 이곳에 나루터가 있었음을 아련히 알려줄 뿐이다.


초,중등학교 교과서에서 나오는 유명한 투금탄 설화는 다음과 같다.
고려 후기에 우애(友愛)가 좋기로 명성이 자자한 이조년, 이억년 형제가 있었다. 그들은 5형제
로 맏이의 이름은 이백년(李百年)이고 순서대로 이천년, 이만년, 이억년, 이조년이다. 형제 이
름이 세월 단위 돌림이다.

이조년과 이억년 형제가 젊었던 시절, 길을 가다가 동생인 이조년이 황금 2개를 주웠다. 하나를
형인 이억년에게 주고 공암나루에서 한강을 건너고자 배를 탔다. 배가 한참 강을 건널 때, 동생
이 갑자기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져버린 것이다. 엉덩이에 불난 말처럼 깜짝 놀란 형이
'야 이놈아~ 왜 그 귀한 황금을 물에 던졌냐?'
그러자 동생이
'나는 형님을 위한 마음이 두터웠소. 그런데 형에게 금을 나눠주고 나서는 자꾸 욕심이 들더군
요. 자칫 그까짓 금덩어리 때문에 우리 형제의 우애가 금이 갈 것 같아서 미련없이 물에 던진
것이오'
그 말을 들은 형은 크게 감탄하며 '너의 말이 옳구나. 내 생각이 짧았다'
그러면서 금을 강물에 던졌다.

그들이 금을 버린 곳이 지금의 가양동 앞 여울로 그런 연유로 금을 던진 여울이란 뜻의 투금탄
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김포시(金浦市)의 이름도 금을 물가에 던졌다는 뜻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잔잔한 이야기는 돈을 신으로 모시는 오늘날 인간들에게 한줄기 교훈을
선사한다. 허나 인간들은 하나같이 돈에 쩌들어 사니 만약 투금탄의 이야기가 재현된다면 동생
이나 형이나 나머지 하나의 금을 차지하고자 서로를 강에 던지려고 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21세기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  허가바위를 간직한 탑산(塔山)

한강과 살을 맞닿으며 소요정과 공암나루터 등의 명소를 간직했던 탑산, 이곳에서 바라보는 한
강 풍경은 천하 일품이었다고 한다. 허나 무자비한 개발의 난도질은 탑산의 명성을 산산히 아작
을 냈고, 산줄기까지 밀어버리면서 지금은 허가바위 쪽만 간신히 남아 이곳이 산이었음을 알려
줄 따름이다. 산 동쪽에는 허준박물관 약초원이 있다.

※ 허가바위 찾아가기 (2012년 3월 기준)
* 교통편은 위의 구암공원 참조, 영등포공고 정문 맞은편에 있으며, 버스에서 내릴 때는 영등포
  공고나 한보구암마을아파트에서 내리는 것이 더 가깝다.
* 동굴 내부 관람이 가능하다. 문화재로 지정된 지체 높은 바위이므로 허튼 짓은 하지 말도록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산1-2


♠  의성 허준과 한의학을 담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의학 박물관
허준박물관(許浚博物館)

▲  허준박물관 옥상에 박힌 박물관 이름
(허준박물관 홈페이지는 위의 사진을 클릭)

구암공원 서쪽이자 탑산 동쪽에 터를 닦은 허준박물관은 허준 선생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고 한
의학에 대한 이해를 위해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한의학 테마 박물관이다. 이곳은 사립박물관
으로 오인하기 쉽지만 엄연히 서울시와 강서구청에서 만든 일종의 시립박물관이다.

강서구청에서는 허준이 강서구 출신임을 내세우며 허준과 그가 평생 업으로 삼았던 한의학을 주
제로 한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1999년 10월 허준기념관 건립계획이 수립되었다. 이
듬해 5월 건립 부지를 매입하고 설계용역과 시공업체 선정을 거쳐 2003년 4월 10일 첫삽을 떴다.
2004년 11월 20일 준공되어 2005년 3월 23일 정식 박물관으로 개원되기에 이른다. 그해 5월에는
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록되었으며, 대지 면적은 1,725평, 건축 면적은 543평이며, 사업비는 141
억원이 들었다.

박물관 건물은 1동으로 지상 3층 규모이다. 1층에는 관리사무실과 창고, 주차장 등의 부대시설
이 있으며, 2층에는 박물관 로비와 매표소, 휴게실, 뮤지엄 샵, 옛 양천고을을 재현한 모형도가
있다. 전시실은 3층에 몰려 있는데, 허준기념실과 약초약재실, 의약기기실, 체험공간, 내의원과
한의원 등 5개의 전시실이 있다. 그중에서 허준기념실이 가장 크며 동의보감과 언해두집창요를
비롯한 허준의 저서와 여러가지 자료, 동의보감 제작 과정과 집필 과정을 재현한 디오라마, 한
의학 관련 옛 서적 등이 진열되어 있다. 내의원과 한의원실에는 한의원과 내의원의 모습을 재현
하여 눈길을 잡아맨다.
옥상에는 다양한 약초가 자라는 약초원이 있으며, 약초원의 범위는 박물관 서쪽에 자리한 탑산
동쪽 자락까지로 옥상에서 탑산까지 다리가 이어져 있어 한덩어리로 둘러볼 수 있다. 탑산 북쪽
밑에 양천허씨의 성지인 허가바위가 있으며, 옥상에서는 한강과 하늘공원이 바라보인다.

박물관 옆에는 한국한의학연구소와 대한한의사협회가 자리해 있어 우리나라 한의학의 중심지 역
할을 한다.

▲  허준박물관 정문

▲  허준박물관 본관 (정문 북쪽)

박물관 전시실은 체험공간을 제외하고는 유물 보존을 이유로 촬영이 통제되어 있으며. 전시실을
일일이 다룬다는 것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본글에서는 전시실 일부 유물과 체험공간, 약초원이
있는 옥상 부분만 취급한다. 그 이전에 허준의 일대기를 간략히 짚어보도록 하자.

* 한의학의 대부, 허준(許浚, 1537~1615)의 생애
허준은 1537년 무관 출신으로 평안도 용천군수(龍川郡守)를 지낸 허론(許碖)의 서자(庶子, 첩의
소생)로 강서구 등촌2동 능안마을(가양동 남쪽)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양천으로 호는 구암(龜巖
), 자는 청원(淸源)이며, 생모는 영광 김씨이다. 그의 이복 형인 허옥(許沃)은 내금위(內禁衛)
에 있었고, 허징(許澄)은 서자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 등을 지내는
등, 집안이 꽤나 잘 나갔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경전과 사서에 밝았다고 하며, 의학(醫學)에 소질이 있어 일찍부터 의학 공
부를 했다고 한다. 동의보감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는 생모와 부인을 데리고 경상도 산음(山陰,
산청)으로 내려가 유의태(柳義泰)의 문하에서 의술을 공부했다고 한다. 허나 그것은 가상일 뿐
사실이 아니다. 당연히 스승의 몸을 해부하여 5장6부의 생김새를 터득했다는 것도 거짓이다. 유
의태는 허준의 의학 수준을 끌어올려주는 역할을 하는 가공의 인물로 18세기에 어의(御醫)로 천
거된 적이 있는 유이태(劉以泰)를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태어나고 32년 동안 이렇다 할 행적이 없으니 아마도 속세에서 의술 활동을 하며 지낸 듯 싶다.
동의보감 소설처럼 인술(仁術)을 펼쳤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동의보감에서 의원의 바른 자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봐서는 인덕(仁德)까지 두루 갖춘 의원임은 분명한 것 같다.
1569년 유희춘(柳希春)이 이조판서 홍담(洪曇)에게 그를 내의원(內醫院)에 천거하면서 본격적으
로 수면 위로 오른다. 그래서 1571년 바로 종4품 내의원 첨정(僉正)에 올랐는데, 동의보감 소설
과 달리 국가 기술직을 뽑는 시험인 취재(取才)에 붙어 내의원에 들어간 것이 아닌 천거나 빽으
로 들어간 모양이다. <양천허씨 세보(世譜)에는 1574년 의과(醫科)에 급제했다고 나옴> 허나 이
는 그의 능력과 인덕에 따른 천거로 등용된 것으로 바로 4품으로 직행한 것을 보면 그의 의술이
매우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천거로 관직에 들어간 인물이 제법 많았음, 조광조(趙光祖)나 토정
이지함(李之菡)이 대표적>

1573년 정3품 내의원정(內醫院正)에 올랐으며, 1575년 어의 안광익(安光翼)을 도와 선조 임금을
진료했으며, 1587년 태의(太醫) 양예수(楊禮壽)와 함께 선조의 건강을 지킨 공으로 사슴가죽(어
떤 자료에는 호랑이 가죽)을 하사받았다. 1590년에는 광해군(光海君)의 두창(痘瘡, 천연두)을
치료한 인연으로 그와 무척 가까워지며,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작위를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왕을 호종했고, 1596년 광해군의 병을 치료한 공로로 정2품 정헌대부
(正憲大夫)의 지위에 오른다. 1597년 선조가 의서 500권을 내리며 조선 실정에 맞는 어서를 쓰
라고 명을 내리면서 동의보감 편찬에 들어갔으나 정유재란 발발로 보류되고 1600년에 본격적인
작업이 이루어졌다.

1600년에는 내의원 수의(首醫)가 되었으며, 1601년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 언해두창집요(諺解
痘瘡集要),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를 완성했다. 1604년에는 임진왜란 시절 왕을 호종한 공
로로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되어 양평군(陽平君)의 작위와 함께 종1품에 해당되는 보국
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승진되었으나 의원인 중인(中人) 신분에 과도한 벼슬이라며 대간(臺
諫)들이 개거품을 물며 반대하여 잠시 보류되기도 했다.

1607년에는 언해태산집요를 펴내고 언해구급방과 언해두창집요를 세상에 펴냈으나 1608년 선조
가 승하하자 그 책임을 지고 평안도 의주(義州)로 귀양을 가야했다. 다행히 광해군의 은혜로 1
년 만에 귀양에서 풀려나 그의 어의가 되었으며, 허가바위에서 두문불출 동의보감 마무리에 매
진하다가 1610년 드디어 완성하여 광해군에게 바쳤다.

동의보감은 25권 25책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의서로 의방유취(醫方類聚),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 의림촬요(醫林撮要)와 중국 의서 86종을 참고하여 직접 발로 뛴 경험을 발판삼아 편찬한 것
이다. 보감의 내용은 내경(內景), 외형(外形), 잡병(雜病), 탕액(湯液),침구(鍼灸) 등 5편으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청나라와 왜국에도 전해져 국제적인 의서로 위엄을 떨쳤다. 특히 청나라판
서문(序文)에는 '천하의 보(寶)를 천하와 함께한 것'이라 했고, 왜국판 발문(跋文)에는 '보민(
保民)의 단경(丹經)이요. 의가(醫家)의 비급'이라 평하면서 앞다투어 동의보감의 가치를 칭송했
다. 현재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적인 보물이 되었다.

1612년에는 찬도방록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를 내고, 1613년에 동의보감 25권 25책을 간행,
벽역신방(辟疫神方)과 신찬벽온방(新纂辟瘟方)을 간행했다. 1615년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뜨니
그의 나이 78이었다. 광해군은 크게 통곡하며 그에게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을 추증
했다.


▲  박물관 2층 로비에 마련된 옛 양천고을 모형
오른쪽 가까이에 보이는 울타리가 쳐진 곳이 목동(木洞)에 있던 국영 목장으로
지금의 목동신시가지 자리이다.

▲  3층으로 올라가면서 담은 옛 양천고을 모형 전경
오른쪽의 길다란 물줄기가 안양천이며, 왼쪽으로 중간에 끊긴 물줄기의
하류 동쪽 산지가 양천고을의 중심지였던 궁산이다.

▲  신찬벽온방(新纂辟瘟方) - 보물 1087-2호
1612년 광해군의 의뢰로 허준이 작성한 전염병 치료에 관한 의학 서적이다.

▲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 - 보물 1236-2호

구급 의방(救急 醫方)을 집대성한 민간용 한방 사전으로 1489년(성종 20년)에 간행되었다. 백성
들도 알기 쉽게 한글로 번역되어 편찬되어 국어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구급간이
방은 우리나라에 2권 남아있는데 하나는 충북 음성에 있는 한독의약박물관에 있다.


▲  약재를 갈던 약맷돌 3형제
손잡이인 어처구니를 잡아 직접 돌릴 수 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은 바로
맷돌에서 나왔다고 한다. 어처구니가 없으니 어찌 맷돌을 돌릴 수 있겠는가..?

▲  약재를 갈던 배 모양의 도구인 약연(Mortar)

▲  약재를 찧던 약절구

▲  하얀 피부의 약사발

▲  허준박물관의 백미(白眉)인 내의원(內醫院) 모형도
건물 모습은 물론 내부까지 세세히 재현되어 보는 나그네의 눈을 단단히 잡아맨다.

▲  허준박물관 옥상에서 바라본 천하
한강에 다리를 담군 가양대교와 수도권 쓰레기를 발판으로 어엿한 산이 된
난지도 하늘공원이 보인다.

▲  옥상에 마련된 기념 촬영장
붉은 조복(朝服)을 입은 허준 모형과 녹색 옷의 상궁(尙宮) 모형에
얼굴을 살짝 대고 기념촬영을 하는 곳이다.

▲  박물관 옥상과 이어진 탑산 동쪽의 약초원(藥草園)

허가바위를 지닌 탑산 동쪽 자락에 터를 닦은 약초원은 동의보감에 수록된 70여 종의 약초가 무
럭무럭 싹을 띄우는 곳이다. 약초에 대한 이해를 돕는 자연학습장으로 쓰이고 있으며, 박물관의
옥상과 이어져 있다. 이미 3월 중순이건만 겨울 제국 잔당들의 건재로 자태를 선보인 약초가 하
나도 없어 황량하기 그지없다. (봄의 절정기나 여름, 가을이 적당한 시기)


▲  봄을 꿈꾸는 인삼(人蔘)의 보금살이

▲  겨울에 잠긴 약초원

※ 허준박물관 찾아가기 (2012년 3월 기준)
*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3번 출구)에서 1002, 6631, 6645번 시내버스를 타고 허준박물관(공
  진중교) 하차, 길 맞은편 가양2동주민센터 옆에 허준박물관이 있다.
* 지하철 9호선 가양역 1번 출구를 나오면 가양3,5단지 4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5분 정도
  가면 가양3단지 3거리인데, 3거리에서 왼쪽(허준로)으로 꺾어 공진중학교와 탑산초교를 지나
  면 허준박물관이다.
* 지하철 5호선 발산역(5번 출구)에서 6630, 6712번 시내버스 이용, 6630번을 탔을 경우 영등포
  공고 하차, 6712번을 탔을 경우 허준박물관(공진중교) 하차
* 지하철 5호선 발산역(3번 출구)에서 1002, 6630번 시내버스 이용, 1002번을 탔을 경우 허준박
  물관 하차, 6630번을 탔을 경우 한보구암마을아파트 하차
* 지하철 2호선 당산역(1,13번 출구)에서 6631번 시내버스를 타고 허준박물관(탑산초교) 하차
* 주차공간이 넉넉치 못하므로 대중교통 이용 요망

★ 허준박물관 관람 정보 (자세한 정보는 허준박물관 홈페이지 참조)
* 관람시간 - 하절기(3~10월) 10시~18시 / 동절기 10시~17시 / 토요일과 일요일은 10시~17시
  (매표는 문닫기 1시간 전까지 /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과 추석은 휴관)
* 관람료 - 어른 800원(20인 이상 500원) / 초,중,고,군인 500원 (20인 이상 300원)
* 매월 2,4주 토요일과 어린이날, 설날과 추석 연휴, 삼일절과 광복절, 개천절은 무료이다.
* 7세 미만과 65세 이상은 공짜이며, 20인 이상 단체관람시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예약 요망
* 매년 10월 초/중순에 의성허준축제가 조촐하게 열린다. 축제기간은 2일로 한방체험 테마파크
  와 어의/의녀복 입고 사진찍기, 한방차 시음 등의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며, 구암공원에서는
  허준 추모제례, 허준 뮤지컬/음악회, 동의보감 진서 재현극 등 다양한 공연이 열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2동 26-5 (허준로 87) ☎ 02-3661-8686
* 허준박물관 홈페이지는 이곳을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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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3월 2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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