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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 이웃 동네 나들이 ~ 서울 방학동의 명소들 '
(방학동 은행나무, 양효 안맹담/정의공주묘, 목서흠 묘역)
늦가을에 젖은 방학동 은행나무양효 안맹담 신도비
▲  방학동 은행나무                  ▲  양효 안맹담 신도비


늦가을이 절정을 이루던 10월의 마지막 주말, 이웃 동네인 방학동(放鶴洞)으로 마실을 갔
다. 방학동은 내가 사는 도봉동과 더불어 도봉구(道峰區)를 이루는 동네의 하나로 북한산
과 맞닿은 방학동 서부(방학3동)에는 연산군묘(燕山君墓)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
무를 비롯하여 속세(俗世)에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명소들이 많다. 이들은 모두 우리집에
서 도보 30분 거리로 무척이나 가깝지만 이웃 동네임에도 지금까지 겨우 3~4번 밖에 가지
못했다. (그에 비해 북촌이나 성북동, 부암동은 1년에 몇 번씩이나 갔음...)

본글에서는 서울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방학동 은행나무를 비롯하여 원당샘, 정의공주 부
부 묘역, 목서흠 묘역과 신도비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연산군묘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음)


♠  서울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830년 묵은 노거수, 가을이 이곳에 있었구나~~
방학동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0-1호

방학동 연산군묘 앞에는 도봉구(道峰區) 10대 명소의 하나이자 서울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방학
동 은행나무가 만추(晩秋)의 절정을 즐기고 있다. 지나가던 가을도 흠뻑 반하여 오랫동안 머물
렀다 가는 이 나무는 황금 옷으로 화사하게 갈아입으며 늦가을 은행나무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아무리 잘난 화가라 할지라도 그대로 흉내내지 못할 아름다운 은행잎들, 이제 가을이
꽤 깊어지고 겨울제국의 도래가 임박했음을 실감케 해준다. 

이 정도의 휼륭한 나무면 국가지정 천연기념물로 삼아도 전혀 손색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화양
리(華陽里) 느티나무처럼 지방기념물로 삼아도 문제가 되지 않을텐데, 어찌하여 아직까지 보호
수 등급에 머물러 있는 것인지 그저 고개가 갸우뚱할 따름이다.

이 나무의 나이는 무려 830살을 헤아린다고 한다. 그런데 1990년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안내문
에 800년이라 나와 있었는데, 2004년에 와보니 그새 30년이 더해서 830년이라 나왔다. 14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나무의 나이는 그 곱으로 더해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830년이라 나와있다.
정확한 나이까지는 헤아리기 어렵겠지만 대략 800년 이상 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의 높이는 25m, 둘레 10.7m에 이르는 거대한 나무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나무이다. 은
행나무는 대부분 사람들이 심은 것으로 누가 심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오로지 그만이 알 뿐이나
너무 어렸을 적이라 누가 심었는지 기억 조차 나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 이곳은 세종의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땅이 되면서 그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을
것이며, 그 이후 그의 후손과 외손인 신씨 집안의 나무로 부족함이 없이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의정궁주(義貞宮主)와 연산군 가족의 장례까지 말없이 지켜봤을 것이며, 묘역에 늘 시원한 그늘
을 드리워 그들과 함께 한다.

▲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본 방학동 은행나무의 자태
우리집 뜰로 몰래 가져오고 싶은 마음을 애써 삼키며 나무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허나 나무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해도 우리집에 그가 뿌리를 내릴 넉넉한 공간이 없다.


예로부터 지역 사람들이 특별히 아끼고 신성시하던 나무로 나무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큰 변
이 생긴다고 한다. 실례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서거하기 1년 전인 1978년에 큰 불이 나서
소방차를 동원해 간신히 불을 껐다고 한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 주변은 밭과 논두렁이 널린 시골로 은행나무가 여기서는 단연 규모가
큰 존재였다. 허나 2000년 이후 주변에 빌라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나무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정말 독보적인 존재였는데, 이제는 인간들이 지어놓은 높다란 아파트의 위세
에 눌려 조금은 애처로워 보이기도 한다. 또한 무분별한 주택 건설로 나무의 건강에 빨간 불까
지 켜지게 된다.
다행히 동네 주민들의 강력한 민원으로 나무가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도록 아파트의 구조가 변경
되었으며, 주변을 정비하여 나무 주위로 은행잎이 마음 놓고 내려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하지만 경관을 배려하지 못한 인간들의 성냥갑 건축물들이 나무 동쪽과 남쪽을 막고 있고, 북쪽
에는 연산군묘가 있는 언덕까지 있어 그야말로 사방이 막힌 답답한 형태가 되버렸다. 정말 햇볕
이라도 제대로 받고 있는지 걱정이 들 정도로 말이다.

지역 주민과 북한산 등산객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그는 동네 정자나무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으며,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 역할도 마다하지 않으니 정말로 아낌없이 베푸는 소중한 나무이
다. 내가 제일 흠모하는 나무로 집 근처에 이런 아름다운 나무가 있다는 것에 그저 고마울 따름
이다. 게다가 근래에 도봉산 둘레길이 앞을 지나가게 되면서 그를 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나무의 모습은 계절의 변화를 제외하고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 변함이 없다. 단 달라진 것이 있
다면 나무의 주변 풍경들, 그리고 나무를 찾은 사람들의 모습 정도, 우리나라 은행나무의 지존
으로 일컬어지는 양평 용문사(龍門寺) 은행나무도 시샘할 정도인 방학동 은행나무의 아름다운
자태는 나그네의 마음을 충분히 빼앗고도 남음이 있다. 인간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우쭐거려도
그 나무 앞에서는 일개 초라한 두발 동물에 불과하다.

은행나무가 지금까지 장수(長壽)를 누리며 별탈없이 살아온 이유는 자연에 순응하며 조용히 살
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도 이제 은행나무의 그런 철학을 배워야 되지 않을까? 겨울을 재촉
하는 바람이 불 때마다 은행잎들이 외마디 괴로운 소리를 지르며 별다른 저항도 못해보고 쓸쓸
히 땅으로 떨어진다. 사람들은 땅에 떨어진 그들 이른바 낙엽을 보며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하지
만, 귀를 접은 은행잎은 내년 봄을 기약하며 서서히 땅속으로 흡수된다. 그렇게 겨울제국의 시
련을 준비하는 은행나무의 모습은 한편으로 이제 곧 나이 1살을 먹는다는 우울감을 던져주기도
한다.


▲  은행나무의 아랫쪽에 둥글고 넓은 공간을 만들어 은행잎이 마음 놓고
떨어질 수 있도록 배려했다. 대지를 가득 뒤덮은 은행잎에 귀를 기울이면
세월과 겨울을 원망하는 그들의 조용한 절규가 들려올 것 만 같다.

▲  은행나무에서 만난 알록달록 묘공(猫公)
그도 나무 구경을 하러 온 것일까? 나무 주변을 한참 어슬렁거리다가 몹내
지쳤는지 한쪽 구석에 쭈그려 앉아 낮잠을 청한다.


▲  옛 원당마을 사람들의 식수였던 원당샘(元堂泉) <2011년 이전>

은행나무 우측에는 원당샘이란 조그만 우물이 있다. 일명 '피앙우물'로도 불리는 이 우물은 은
행나무보다 약 200년이 적은 6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오래된 것으로 이곳에 있었던 원당마을 주
민의 식수였다. 원당(元堂)마을은 600여 년 전에 파평윤씨가 터를 닦았던 마을로 우물과 나이가
비슷하며. 방학동 은행나무와 원당마을의 전답들도 이곳의 물을 먹고 자랐다.

시흥동 호암산(虎巖山)에 있는 한우물과 더불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우물로 손꼽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자 생활유적으로 예전에는 서울 동북부 지역에서 제일 잘나가던 우물이었다. 아무리
가뭄이 극심해도 물이 마른 적이 없었다고 하며, 언제나 비슷한 수온을 유지했다고 한다. 1979
년 우물을 손질했으며, 2008년 6월에도 정비를 했다. (위/아래 사진처럼 정비됨)
 
이곳에 있던 원당마을은 개발의 무자비한 칼질에 산산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아파트와 빌라들
이 마구잡이로 들어섰다. 다행히 원당샘은 자리를 지켜 우물의 역할을 계속 해왔으나 2009년 식
수불가 판정을 받게 되었고. 지하 수맥(水脈)마저 이상이 생겨 물이 거의 나오지 않게 되면서
거의 껍데기만 남은 죽은 우물이 되었다.

우물 우측에는 배추가 심어진 밭두렁이 넓게 펼쳐져 전원 풍경을 진하게 자아냈으나 서울시청에
서 연산군묘와 은행나무, 도봉산 둘레길 등을 어우른 공원을 만든다며 2010년부터 상당수를 밀
어버렸다. 원당샘도 지역 주민들의 복원 요구에 힘입어 샘 주변을 철거하고 샘을 잠시 묻어두었
으며, 2011년 12월 13일 공원이 완성되면서 원당샘도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다행히
우물의 원초적인 기능인 식수 기능이 회복되어 마음 놓고 물을 떠 마실 수 있게 된 점은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다.

※ 방학동 은행나무, 원당샘 찾아가기 (2011년 12월 기준)
* 지하철4호선 쌍문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30번 시내버스를 타고 연산군/정의공주묘 하차
* 지하철1,4호선 창동역(1번 출구)에서 1119, 1161번 시내버스를 타고 연산군/정의공주묘 하차
* 지하철4호선 미아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30, 1144번 버스 이용
* 지하철7호선 하계역(2,5번 출구)에서 1144번 시내버스 이용
* 연산군/정의공주묘 정류장에서 연산군묘 쪽으로 도보 2분
* 도봉산 둘레길이 연산군묘와 방학동은행나무를 지나간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3동
547


▲  2011년 이전 원당샘의 초라한 모습

샘물이 모인 부분이 마치 쭈그려 앉아 일을 보는 뒷간처럼 생겨 접근하기가 좀 뭐하다. 게다가
샘터가 움푹 들어간 부분에 숨겨진 듯 자리해 있으니 버려진 뒷간이라 착각해도 이상할 것이 없
다. 예전 2004년에 왔을 때는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2008년 정비를 할 때 우물의 이미지를 고
려하지 않고 그냥 대충 손질을 한 모양이다.


▲  2011년 12월 장대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원당샘의 위엄
(네이버 콸님 사진)


♠  양효공 안맹담(良孝公 安孟聃), 정의공주(貞懿公主)묘역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0호

연산군묘로 들어가는 정의공주묘 버스정류장 북쪽에는 품위가 깃든 잘 정비된 묘역이 있다. 바
로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부부의 묘역이다. 묘역 주변에는 문화재 보호를 위해 녹색 철책을
둘렀는데, 묘역 전체가 밖에서도 훤히 바라보이므로 굳이 울타리를 넘을 필요는 없다.

이곳에 누운 안맹담(1415~1462)은 죽산안씨(竹山安氏)로 호는 덕수(德壽)이며, 1415년 가선대부
(嘉善大夫) 안망지(安望之)의 아들로 태어났다. 1428년 세종의 2번째 딸이자 동갑내기인 정의공
주와 혼인하여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다. 1432년에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지고, 1450년에 연
창위(延昌尉)가 되었다.
1457년 수록대부(綏祿大夫)가 되고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그해 8월에 원종공신(原從功臣)이
책봉되었으며 1462년 47세의 나이로 병사하니 세조(世祖)는 매형인 그에게 양효공(良孝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는 활을 잘 쏘았다고 하며, 음악과 서예에도 매우 능했다고 한다.

안맹담의 부인인 정의공주(1415~1477)는 세종의 2째 딸로 세조의 누님이다. 소헌왕후(昭憲王后)
의 소생으로 훈민정음 프로젝트 때 큰 공을 세웠는데, 다음의 일화가 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을 끝내지 못하여 왕자들에게 보내 풀어보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풀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정의공주에게 풀라고 하니 공주가 바로 풀어서 보냈다는 것이
다. 이에 부왕은 크게 칭찬하고 노비 수백 명을 내렸다.
남편이 죽은 이후 1469년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상,중,하를 간행했다. 이후에 뚜렷한
족적(族籍)은 없으며, 1477년 62세의 나이로 남편을 따랐다.

안맹담 부부의 묘역은 쌍분(雙墳)으로 봉분 앞에 묘비와 상석(床石), 장명등을 각각 두었고, 문
인석(文人石) 2쌍을 무덤 앞에 벌려 세웠으며, 그 바로 밑에는 아들인 안상계의 묘를 두었다.

안상계(安桑鷄)는 호가 전은()으로 작은 삼촌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
을 일으키자 저자도(楮)에 은거했다. <저자도는 압구정동과 옥수동(玉水洞) 사이 한강에 떠
있던 섬이었으나 강남 개발로 폭파되어 사라짐> 그는 수양대군(세조)과 사이가 좋지 못해 그의
재위 시절에는 시와 술을 벗삼아 숨어 지냈으며, 성종 때는 수원부사와 돈녕부 도정(
)을 지냈다.

그의 묘는 비석과 상석, 망주석이 전부인 단촐한 모습으로 묘역 동남쪽에는 안맹담의 행적을 적
은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다.


▲  양효공 안맹담 신도비

신도비는 보통 무덤의 동남쪽에 세우는데, 그것은 묘의 동남쪽이 풍수지리적으로 신도(神道)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도비란 존재는 왕족과 고위 관리의 무덤에만 쓸 수 있었던 정말로
특권층의 비석이다.

이 비석은 1466년에 세운 것으로 비신(碑身)에 새겨진 비문(碑文)의 내용은 정인지(鄭麟趾)가
짓고 글씨는 안맹담의 4번 째 아들인 안빈세(安貧世)가 새겼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약 5m, 귀
부(龜趺)의 높이 약 1.6m, 길이 약 1.7m로, 비석을 등에 맨 거대한 거북이 고개를 앞으로 쑥 내
밀며 서쪽의 북한산을 바라보고 있다.

귀부는 시원스레 뻥 뚫린 콧구멍이 인상적이며,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고, 눈은 약간 동그랗게
뜨고 있다. 머리 아랫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선이 새겨져 있고 땅바닥과 마주하는 양쪽 모퉁이
에는 거북의 발이 새겨져 있으나 축 늘어진 듯, 발과 다리가 몸에 너무 붙어버려 발가락의 일부
만 확인이 가능하다.

아무런 무늬가 없는 육중한 그의 등껍데기에는 비신이 세워져 있다. 비신 위에는 2마리의 이무
기가 여의주(如意珠)를 두고 다투는 모습이 새겨진 이수(螭首)가 있다. 이수의 이무기는 여의주
를 우러러 보며 이렇게 외치는 듯 하다.
"저건 내꺼야, 너는 건드리지 마라, 오직 나만이 하늘로 승천할 수 있다"
그들의 표정은 그런 희망으로 가득 부풀어 올랐다. 허나 저들은 죽었다 깨도 여의주를 차지하지
못한다. 그저 열심히 노려보며 신경전만 벌이다가 인생을 종치기 때문이다. 결국 여의주는 허공
에 떠 있는 허구일 뿐이다.

보주를 둘러싼 이무기들의 다투는 모습을 보니 오늘날 생존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서로 아옹다옹
거리는 오늘날 인간들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성공의 자리에 오르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 이들 모두 허공에 뜬 저 여의주와 같거늘.. 그저 티끌의 욕심도 없이 동글동글하게 살다 갔
으면 좋겠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3-1


♠  충정공 목서흠 묘역(忠貞公 睦叙欽 墓域) - 서울 지방기념물 27호

▲  충정공 목서흠 묘

정의공주 부부 묘역에서 도봉산 둘레길로 인도하는 좌측 흙길로 들어서면 커다란 기와집이 나온
다. 그 집은 사천목씨(泗川睦氏)의 재실(齋室)로 그 재실로 들어가지 말고 그 우측에 넓은 공터
로 쭉 들어서면 재실 뒤쪽에 목서흠 신도비가 모습을 내민다. 그 신도비에서 왼쪽, 그러니까 북
쪽을 보면 묘들이 주렁주렁 자리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목서흠 일가의 묘역으로 묘역 제일 위
쪽에 목서흠의 묘가 묘역을 굽어보고 있다.

목서흠(睦叙欽, 1571~1652)은 사천목씨로 자는 순경(), 호는 매계(), 시호는 충정(
)이다. 이조참판을 지낸 목첨(睦)의 아들로 1603년 음보(蔭補)로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
고, 1610년 알성시(謁聖試)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었다.

1623년에 함경도선유어사()가 되어 인조반정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살폈으며, 광
주목사(使)와 좌승지(左承旨)로 승진,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인조를 호종했다.
그 이후 참찬관(參贊官), 우승지(右承旨), 한성부 좌우윤(左右尹)을 지내고 1642년 개성유수(開
城留守)로 있으면서 병자호란 뒷수습에 나섰다. 또한 상소를 올려 붕당(朋黨) 정치의 폐해를 지
적했다.
1650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70세 이상의 관원만 들어갈 수 있는 기로소(耆老所)의 당상관
이 되었다. 그는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고 청렴하기 그지 없던 인물로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
났다.

목서흠 묘역은 조선 중기 무덤양식이 잘 반영된 점이 인정되어 2009년 6월 신도비와 함께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목서흠 묘역 외에도 방학동과 도봉동(道峰洞)의 도봉산 자락에는
조선 왕족/귀족들의 무덤이 엄청나게 많다. 예로부터 명당자리로 명성이 나있기 때문이다. 목서
흠묘는 그중에 하나일 뿐이고, 그보다 더 괜찮은 묘역도 많은데 왜 이곳만 문화재로 지정되었는
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곳 묘역의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목서흠묘는 그의 부인인 연일정씨와 같이 묻힌 합장분(合葬墳)으로 봉분의 크기는 조촐하다. 봉
분 앞에 묘의 주인을 알리는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있고, 그 좌우로 작은 동자상(童子像) 1쌍
이 두손을 가슴 앞에 모으며 서 있는데, 그 모습이 귀엽다. 무덤 좌우로 망주석이 1쌍 있을 뿐,
그 흔한 문인석도 없어 간소하기 그지 없다.


▲  400년 나이에도 정정한 모습을 자랑하는 목서흠 신도비

묘역 아래 재실 뒤쪽에는 목서흠의 신도비가 있다. 비문은 그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명문장가
조경(趙絅)과 이정영(李正英), 조위명(趙威明)이 쓴 것으로 그들의 글씨를 확인할 수 있는 소중
한 비문이다.
앞에 나온 안맹담 신도비와 달리 귀부가 없고, 그냥 비석을 세우는 비좌(碑座)만 있다. 지붕도
현란한 조각의 이수 대신에 지붕돌로 조촐하게 마무리를 지어 청렴했던 그의 명성을 가늠케 해
주며, 비신 밑부분이 좀 검게 그을려진 것을 제외하고는 건강상태도 양호하다.


▲  정면에서 바라본 목서흠묘 (묘비와 상석, 동자상)

▲  목서흠묘에서 바라본 사천목씨 묘역
늦가을이 곱게 봉숭아물을 들인 숲 너머로 방학동 신동아아파트가 보인다.

▲  목서흠의 선조인 목진공(睦進恭)의 묘

목서흠묘 아래쪽에는 그의 조상인 목진공의 묘가 있다. 그는 조선 초기에 활동했던 인물로 태종
때 우부대언(右副代言)과 참판(參判)울 지냈다. 1417년 부평부사(富平府使, 인천 부평)를 지낼
때 우희열(禹希烈)과 함께 들판을 개간하여 농업에 크게 기여했으며, 그 당시 부평(富平) 지역
의 논이 450결에서 1,000결로 크게 늘어났다.

목진공의 묘는 목서흠의 묘와 비슷하나. 동자석 대신 조그만 문인석이 있다는 것이 다르다. 600
년 세월의 떼가 입혀진 문인석과 비석에서 무덤이기에 앞서 고색의 멋이 풍긴다.


▲  목림일(睦林一)의 묘

목서흠의 묘에서 우쪽 산길로 들어가면 목림일의 묘가 있다. 목림일은 목서흠의 아들로 그의 딸
은 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李重煥)의 생모이다. 무덤의 구조는 앞의 2개의 묘와 비슷하며,
동자석이 없다.


▲  사천목씨 시조단소(始祖壇所)

목진공의 묘 왼쪽으로 숲으로 들어가는 산길이 있다. 그 길로 들어서면 비석 6개가 늘어선 공간
이 나오는데, 사천목씨 시조에게 제를 지내는 단소이다. 모두 근래에 만든 것으로 비석 앞에 길
쭉한 상석을 눕히고 문인석 1상과 망주석 1쌍, 장명등을 세워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목서
흠 묘역과 단소가 있는 이곳은 그야말로 사천목씨의 성지(聖地)와 같은 곳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방학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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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1년 12월 1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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