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봄맞이 산사 나들이 ~ 불암산 학도암(鶴到庵) '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꽃샘추위가 겨울 제국(帝國)의 잃어버린 영광을 꿈꾸며 천하를 지극히 어지럽히던 4월 초에 집
에서 가까운 불암산 학도암을 찾았다. 집에서 학도암까지는 5~6km 거리로 도봉중학교에서 마을
버스를 타고 창동역에서 1142번 시내버스(창동역↔중계본동)로 갈아타 노원우체국에서 내렸다.
여기서 현대그린아파트와 현대1,2차아파트 주변 길을 빙글빙글 돌아서 학도암으로 인도하는 산
길 입구에 이르렀다.

속세와 자연의 경계인 산길 입구에는 옥의 티처럼 거대한 교회가 뿌리를 내려 불암산과 학도암
의 시야를 가로막는다. 다른 공간도 많은데 왜 굳이 절과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 쓸데없
이 위엄을 부릴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곳을 허가해준 노원구청 관계자 돌대가리들과 그
자리를 고집한 교회 관계자들이 심히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자연과 경관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어야 될 자리와 피해야 될 자리를 가리지 못하는 작자들이 많으니 실로 이 땅의 앞날이 걱정
된다.

교회를 지나면 길 오른쪽에 너른 배밭이 펼쳐진다. 여름의 제국 시절에 왔더라면 잘 숙성된 배
들이 주렁주렁 나그네의 군침을 진하게 자극시켰을 텐데, 진정 봄은 저 멀리 있는지 여전히 뼈
만 남은 채, 웅크리며 몸을 사린다. 배밭을 지나 야트막한 오르막 길을 오르면 바로 가파른 길
이 나타난다. 살을 찌르는 차디찬 산바람에 번뇌를 부탁하며 길을 오르면 저 멀리 보이던 학도
암이 어느새 가까이 나타나 속세에서 온 손님을 맞이한다.


▲  여전히 겨울이 깃들여진 학도암 가는 길
속세처럼 차가운 산바람이 절과 산을 찾은 나그네를 에워싼다.

▲  겨울에 잠긴 학도암 계곡
봄이 오고 소쩍새가 그렇게 울건만 여전히 겨울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계곡의 물도 적어서 번뇌를 두둥실 띄워보낼 수량도 되지 못한다.
바위에 낀 이끼들은 이곳의 청정함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  절 입구에 자라난 거대한 돌탑
중생들이 소망을 빌며 차곡차곡 얹힌 조그만 돌들이 모이고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돌탑의 성장이 이제 한계점에 이르렀는지
더 이상 돌을 얹히지 말라는 안내문이 탑 옆에 붙어있다.


▲  산자락에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터를 닦은 학도암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계단을 타고 경내로 들어선다.


♠  불암산(佛岩山) 서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조그만 암자
조선 후기 마애불을 간직한 불암산 학도암(鶴到庵)

학도암은 불암산(507m) 서남쪽 자락 130m 고지에 포근히 안긴 조그만 암자이다. 숲이 무성하고
계곡이 흐르며, 멋드러진 바위가 주변에 포진해있어 아름다운 풍치를 자아낸다. 예로부터 빼어
난 경승지는 학과 관련된 전설을 필수로 간직하고 있는데, 이곳 역시 학이 날라와 머물렀다는
전설이 서려있다. 그리하여 학이 왔다는 뜻의 학도암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 절은 1624년(인조 1년) 무공화상(無空和尙)이 불암산 어딘가에 있던 옛 암자를 옮겨와 창건
했다고 한다. 허나 그 암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으며, 불암산에는 적당한 암자터
도 없다. 게다가 관련 기록도 남아있질 않아 창건 시기에 약간의 의구심을 품게 한다. 허나 절
주차장 부근 바위에 새겨진 부도(浮屠)에 '가경(嘉慶) 24년 기묘(己卯) 십월' 즉 1819년에 조성
되었다는 명문이 있어 19세기 초반에도 절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1870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시주로 절 뒤쪽 바위에 거대한 마애관음보살을 새겼으며, 1875년
벽운화상(碧雲和尙)이 절을 중창했다고 한다. 1878년 한씨(韓氏) 일가의 시주로 마애관음보살을
보수했고, 1885년 벽운화상이 수락산 흥국사(興國寺) 출신의 화승(畵僧) 경선(慶船)에게 부탁하
여 불상 1구를 개금(改金)하고 불화 6점을 봉안했으나 현재는 없다.

1922년 성담(聖曇)이 주지로 있으면서 개인소유로 넘어간 절 소유의 산림 10여 정보를 매입하여
절의 경계를 확장했으며, 1966년 주지 김명호가 법당을 중건했다. 1970년 영산회상도를 봉안하
고 1972년에 삼성각에 칠성탱과 산신탱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2000년에는 조그만 자연동굴을 넓
혀 석조약사3존불을 안치해 약사전으로 삼았으며, 2005년에는 법당 남쪽 공터를 닦아 지장보살
을 봉안해 지금에 이른다.


조그만 경내에는 법당(法堂)과 삼성각, 바위 동굴에 마련된 약사전 등 3~4동의 건물이 고작이며,
법당은 법당의 역할과 함께 종무소(宗務所), 요사(寮舍)의 역할까지 겸하는 복합적인 건물이다.
또한 법당 뒤쪽 커다란 바위에는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마애관음보살좌상이 노원구를 굽어보
고 있으며, 주차장 부근바위에는 선각(線刻)으로 만들어진 조선 후기 부도 2기가 있다.

비록 조그만 암자로 겉은 초라하지만 불암산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 노원구를 넓은 뜨락
으로 품어 뜨락만큼은 천하 제일이다. 덩치 불리기에 여념이 없는 수많은 절들과 달리 두 눈에
쏙 넣어도 부담이 없을 정도로 아담하여 정감이 진하게 들며, 조망(眺望)이 일품이라 마음마저
시원해진다. 바위에 둥지를 틀고 속세를 굽어보는 관음보살 누님의 미소에 속세의 상처를 받은
중생의 마음은 잠시나마 위안을 얻는다. 개발의 칼질로 아파트와 주거지가 절 500m 아래까지 치
고 올라와 속세와 무척 가까워졌지만 아직까지는 고즈넉하고 적막한 산사(山寺)의 멋과 여유로
움을 간직하고 있어 잠시 속세의 짐을 내던지고 안기고 싶은 절집이다.


이곳에서 40분 정도 오르면 불암산 남쪽 봉우리인 봉화대(420m)에 이르며, 다시 40분을 가면 불
암산 정상이다. 산은 비록 수락산(水落山), 관악산(冠岳山)보다는 작지만 정상 일대가 바위로
이루어진 암산(岩山)으로 장관을 이룬다. 정상에서는 상계역이나 당고개역, 덕릉고개, 불암사(
佛巖寺)로 내려가면 된다.

▲  석조지장보살좌상

▲  석굴사원 같은 약사전 내부

※ 학도암 찾아가기 (2012년 4월 기준)
* 1131, 1140, 1141, 1143번 시내버스를 타고 불암초교(노원문화예술회관) 하차 (1142, 1221번
  은 노원우체국 하차 / 1143번은 화랑대역이나 봉화산역에서 탈 경우 영신여고입구 하차)
* 지하철 1호선 월계역(2번 출구)에서 1131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1,6호선 석계역(1,4번 출구)에서 1131, 1141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7호선 하계역(4번 출구)에서 1131, 1140, 1141번 이용 / 3번 출구에서 1141, 1221번(
  노원우체국 하차) 이용
* 지하철 7호선 중계역(2번 출구)에서 1140번 이용
* 지하철 1,4호선 창동역(1번 출구)나 4,7호선 노원역(1,2번 출구를 나와서 뒤로 가면 있음)에
  서 1142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4호선 상계역(4번 출구) 대호프라자 건너편에서 1140, 1142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5번 출구)에서 1143번 이용 (1221번도 있으나 크게 돌아감)
* 불암초교(노원문화예술회관)에서 내릴 경우, 불암산이 보이는 왼쪽으로 길을 건너서 중계현대
  1차아파트 쪽(중계로14다길)으로 걸어들어간다. 그 길의 끝에 노원교회가 있으며, 교회 좌측
  으로 불암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그 길로 10분 정도 오르면 학도암이다.
* 노원우체국에서 내릴 경우, 불암산이 보이는 건너편으로 건너서 중계본동성당을 지나면 중계
  로12가 골목길이 나온다. 그 길을 타고 중계현대1차단지로 들어서 105동과 106동 사이를 지나
  면 불암산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노원교회를 지나 10분 정도 오르면 된다. 초행이거나 길치
  는 헤매기 쉬우므로 동네 사람들에게 길을 문의하기 바람 (은근히 헤매기 쉬움)
* 절까지 수레길이 닦여져 있어 수레 접근이 가능하며, 절 앞에 주차장이 있음

* 학도암 기준 불암산 산행코스
① 학도암 → 봉화대 → 불암산 정상 → 덕릉고개 (2시간 40분)
② 학도암 → 봉화대 → 불암산 정상 → 천보사 → 상계역 (2시간 30분)
③ 학도암 → 봉화대 → 불암산 정상 → 석천암 → 불암사 → 불암동 (3시간)
④ 학도암 → 봉화대 → 불암산장 → 불암폭포 → 불암사 → 불암동 (2시간 20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본동 102 (☎ 02-930-6611)


▲  청동사리탑에서 바라본 천하
숲 너머로 노원구를 비롯한 서울 동북부 지역이 바라보인다.

          ◀  청동사리탑(靑銅舍利塔)
절을 받치는 석축과 거대한 바위 사이로 난 계
단을 2/3 오르면 오른쪽에 바위 꼭대기가 있다.
그곳에 청동(靑銅)으로 만든 사리탑이 터를 닦
고 뿌리를 내려 천하를 굽어본다.

이 탑은 원주 법천사(法泉寺)터에 있던 지광국
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을 모델로 한 것으로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근래에 만들었다.
특이하게도 돌탑이 아닌 청동으로 탑을 만들어
절을 찾은 중생의 이목을 단단히 끈다.

탑 옆에 올라서면 노원구를 비록한 서울 동북
부 지역이 두눈에 바라보인다. 비록 고색의 때
는 없지만, 위치만큼은 국보급이다. 법당 벽면
에 사용된 석재는 사리탑이 서 있는 이 바위에
서 떼서 만들었다고 한다.


▲  석조지장보살좌상(石造地藏菩薩坐像)

청동사리탑에서 한단 올라서면 왼쪽에 법당이 오른쪽에 석조지장보살좌상이 있다. 하얀 피부를
지닌 지장보살상은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앉아 어진 누님처럼 어여쁜 미소를 드리우며 중생
을 맞이한다. 이 불상은 2005년 승려 무이(無二)가 조성한 것으로 법당 오른쪽 공터를 닦아 지
장보살의 보금자리와 넓직한 기도처를 만들었다.


▲  석조지장보살 우측에 마련된 샘터

불암산이 중생에게 베푸는 약수가 바가지처럼 생긴 커다랗고 동그란 석조를 가득 채운다. 거북
이 입에서 줄줄 나오는 옥계수를 바가지에 가득 담아 마시면 몸 속에 낀 속세의 온갖 찌꺼기가
싹 내려간 듯, 마음이 시원해진다.


▲  학도암의 중심인 법당(法堂)

경내 중심부에 자리한 법당은 '┏┓'형 구조의 팔작지붕 건물로 법당 외에 선방(禪房), 종무소(
宗務所)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는 다용도 건물이다. 예전에는 정말 법당 하나만 달랑 있었는데,
지금은 삼성각과 약사전을 지어 예전보다는 허전함이 다소 줄어들었다. 절의 위치도 마음 놓고
건물을 지을 공간이 마땅치가 않다. 그래서 건물 하나를 크게 짓고 그 안에 절의 모든 기능을
집어넣은 것이다.

법당은 1966년에 중건했으며, 벽면에 만든 석재는 청동사리탑이 있는 바위를 깨서 사용했다. 건
물을 중건한 시기를 기록한 벽면 위 처마 밑에 '학도암'이란 편액(扁額)이 걸려있고, 예전 출입
문을 달던 곳에 학도암 3글자와 이곳에서 놀았다는 학 2마리를 새겨 놓았다. 불단(佛壇)에는 금
동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夾侍)한 아미타3존불이 모셔져 있고, 그 뒤
에 1970년에 만든 영산회상도를 걸었다. 그외에 신중탱(神衆幀)이 주변을 수식한다.

◀  돌로 외벽을 두룬 법당 정면

 


▲  법당 툇마루에서 만난 묘공(猫公)의 위엄

학도암에는 고양이들이 참 많다. 절에서 기르는 고양이도 있을 것이고, 그들과 어울리는 야생고
양이도 있을 것이다. 내가 다가가자 다른 고양이들은 다 도망갔지만 유독 툇마루에 앉은 검은털
고양이만이 자리를 지킨다. 근심 어린 눈길로 북쪽을 바라보는 고양이, 그에게 무슨 근심거리가
있는 것일까? 혹 바위에 새겨진 관음보살 누님을 그리는 것일까? 아니면 나라 걱정에 자리를 뜨
지 못하는 것일까?


▲  법당 뒤쪽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약사전 우측에 자리한 삼성각은 우리에게 친근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1972년에 만든 칠성탱과 산신탱,
1974년에 만든 아미타후불탱화와 지장시왕탱이 모셔져 있다.

▲  바위 동굴에 터를 잡은 약사전(藥師殿)

마애관음보살과 삼성각 사이에 동굴을 품은 웅장하고 준수한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바위 동굴
에 약사전이 아늑하게 둥지를 틀었다. 원래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만 동굴이었
으며, 그 안에 기도처가 있었다. 그러다가 2000년에 동굴을 넓혀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과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봉안하고 약사전으로 삼았다. 약사전은 석굴 불전(
佛殿)으로 한여름에는 시원하고 한겨울에는 따스하다.


▲  약사전 불단에 봉안된 약사3존불
연꽃 무늬가 새겨진 대좌(臺座)에 앉아 왼손에 약합(藥盒)을 들며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한 약사불을 중심으로 보관(寶冠)을 눌러쓴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좌우를 지킨다.


♠  학도암의 오래된 보물이자 얼굴,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磨崖觀音菩薩坐像)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4호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학도암의 자랑인 마애관음보살을 품은 거대한 바위가 있다. 약사전을
품은 바위보다 2배 이상이나 커다란 바위로 그 서쪽 면을 닦아 마애관음보살이 둥지를 틀었다.
이 마애불은 바위만큼이나 웅장하여 높이가 13.4m에 이른다. 그의 위엄 앞에 아무리 대단한 사
람이라도 주눅이 들 지경이다.

이 마애불은 1870년 명성황후의 시주로 조성되었다. 보통 고려시대 마애불은 각기 개성이 넘치
고 거대한 모습을 자랑하는데 반해 조선시대 마애불은 규모가 대체로 작다. 허나 이 불상은 고
려 마애불처럼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여 명성황후의 커다란 야망이 마애불에 고스란히 깃들여진
듯하다. 왕실의 지원으로 조성된 불상으로 1878년 한씨 일가의 시주로 마애불을 보수했으며, 불
상 왼쪽 벽면에 그와 관련된 50여 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서울에서는 북한산 승가사(僧伽寺)에 있는 고려시대 마애석가여래좌상에 버금가는 장대한 규모
로 암벽에 선각(線刻)으로 새겨진 선각 마애불이다. 140여 년 밖에 안된 한참 나이라 선의 아름
다운 미가 느껴지며, 건강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선 하나하나 확인이 가능하다.

보통 마애불은 석가불이나 미륵불을 많이 만들지만 이곳은 관음보살을 그 대상으로 하였다. 우
리나라에 마애불이 수백 개가 있지만 관음보살이 주인공인 마애불은 매우 드물다.


▲  마애관음보살의 얼굴

마애불의 얼굴은 가늘고 볼에 살이 좀 있어 보인다. 길쭉한 두 눈은 살포시 감겨져 있고 그 위
에 무지개처럼 구부러진 눈썹이 떠 있다. 그 눈썹 사이에 동그란 백호가 박혀있고, 코는 두툼하
여 복스럽게 보인다. 불상이 선각으로 얕게 조성되었지만 코만큼은 돋음새김으로 두드러지게 표
현했다. 약간 비뚤어진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으며, 전체적인 얼굴 표정은 편안해 보인다. 눈을
감고 아비규환의 중생을 걱정하는 관음보살 누님의 표정으로 정감이 많이 든다.

관음보살은 수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이 마애불 역시 보관을 가지고 있다. 얼굴 주변
을 밝히는 동그란 두광(頭光) 안에 보관을 표현했는데, 하얀 돌에 조각해서 실감이 안나서 그렇
지 정말로 호화찬란한 보관이다. 이마 위쪽에는 연화대좌를 갖춘 조그만 석가불의 모습도 보인
다. 보관에 따로 불상까지 갖춘 관음보살은 처음이라 눈길을 단단히 부여 잡는다. 보관 양쪽으
로 뻗어나온 관대(冠帶) 양쪽에 구슬처럼 달린 마름모 모양의 사슬 장식이 어깨에 닿을 정도로
주렁주렁 달려 있어, 보관에 대한 욕심을 진하게 자극시킨다. 그가 잠시 보관을 내려놓는 사이
에 살짝 가져가 머리에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  마애관음보살의 가슴 부분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으며, 대의(大衣)를 걸친 어깨는 당당한 모습이다. 안쪽의 옷은
가슴과 어깨가 드러나게 입고 입고 그 아래를 띠 매듭으로 표현했으며, 두 손은 엄지와 3째 손
가락을 맞대고 있는데, 오른손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다리 위에 얹혀놓고 왼손은 가슴 앞에
대고 있다.

특히 가슴 부분을 보면 네모난 조그만 홈이 보이는데, 복장(腹臟) 감실(龕室)의 흔적으로 보인
다. 복장이란 불상의 배 안에 사리와 불경, 발원문(發願文), 기타 여러 유물을 넣는 것으로 보
통 불단에 모셔진 불상에 많이 한다. 허나 마애불에 복장을 한 경우는 매우 희귀하여 고창 선운
사(禪雲寺) 도솔천(兜率庵) 마애불에서 볼 수 있다.


▲  마애관음보살의 아랫 부분

불상은 활짝 핀 연꽃대좌 위에 앉아있는데, 대좌 위로 오른쪽 발이 발가락, 발바닥과 함께 보인
다. 왼발은 옷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왕실의 발원으로 조성된 마애불로 조각 솜씨는 섬세하고 화려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마애불
로 꼽힐 만하다. 게다가 조성 관련 명문이 새겨져 있어 마애불의 가치를 더욱 끌어올려준다. 인
지도가 낮아서 그의 존재를 아는 이는 서울 바닥에서 손에 꼽을 정도라서 그렇지 어디에 내놓아
도 손색이 없는 수려한 마애불이다. 참고로 서울에 100년 이상 묵은 오래된 마애불이 8개가 전
하는데, 학도암 마애불은 7번째로 나이가 많다. <막내는 창신동에 있는 안양암(安養庵) 마애불,
맏이는 북한산에 있는 삼천사(三千寺) 마애불>

마애불 앞에는 기도처가 마련되어 있으며, 석등(石燈) 2기가 마애불 주변을 밝힌다.


▲  마애관음보살에서 바라본 서울
노원구를 비롯한 서울 동북부 지역이 바라보인다.


마애불을 끝으로 50분에 걸친 학도암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절보다는 마애불을 보러온 터라
마애불에 할애한 시간이 거의 40분이다. 관음보살 누님과 절을 뒤로하며 아비규환의 속세로 무
거운 발걸음을 하는 동안 자꾸 미련이 가는지 계속 뒤를 돌아봤다. 집에서 가까워 언제든지 발
을 들일 수 있는 곳이지만 그것도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글 비석
이윤
탁(李允濯) 한글영비(靈碑) - 보물 1524호

▲  이윤탁 묘역 (오른쪽 비각에 한글영비가 있음)

학도암을 둘러보고 하계역으로 나가다보면 중계주공8단지 지나서 길 왼쪽 산자락(불암산 서남쪽
줄기)에 오래된 무덤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그 무덤은 16세기에 살았던 이윤탁(
) 내외의
무덤으로 그 곁의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비석이 소중히 담겨진 비각이 있다.

이 비석은 이윤탁의 묘갈(墓碣)로 일종의 묘비이다. 그는 중종(中宗) 시절에 승문원(承文院) 부
정자(副正字)를 지냈으며, 지금의 태릉(泰陵) 자리에 무덤을 썼다. 그러다가 1535년 그 자리가
왕릉(태릉) 자리로 선정되면서 강제로 지금의 자리로 떨려났다. 그때 그의 부인인 고령 신씨의
묘와 합장(合葬)을 했다.

1536년 이윤탁의 아들인 이문건(李文楗)이 화강암으로 묘갈을 세워 무덤 전방에 세웠는데, 묘비
앞뒤와 양 측면에 비문(碑文)을 썼다. 그 당시 비석 4면에 모두 비문을 쓴 경우는 거의 없는데,
비석 앞면에는 무덤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고비묘갈음지()'라는 제
목 아래 무덤 주인 내외의 생애가 적혀 있다. 비석의 측면에는 무덤의 훼손을 경계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비석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한문이 쓰여있다. 만약 비문이 여기
서 끝났다면 이 비석은 서울에 수없이 널린 조선시대 사대부(士大夫)의 묘비로 그 흔한 지방문
화재로도 지정되지 못했을 것이다.


▲  이윤탁 한글영비가 담긴 영비각(靈碑閣)

이 비석의 백미(白眉)이자 꿀단지는 바로 비석 오른쪽 측면에 있다. 오른쪽 측면에는 한글로 비
석의 훼손을 경계하는 내용이 적혀있는데, 그 당시 한글은 세종대왕(世宗大王)이 집현전(集賢殿
) 학자들과 만든 천하 최고에 빛나는 글자임에도 양반들은 언문(諺文)이라 부르며 멸시하고 거
의 쓰지도 않았다. 그래서 주로 백성과 하급관리들, 그리고 여인들이 배워서 사용했다. 바로 그
잘난 사대부의 묘비에 흔쾌히 한글을 쓴 것이다. 비석을 만든 이문건이 비석 왼쪽 측면에 한글
을 넣은 것은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에게 무덤 훼손을 경계하고자 함이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부모의 묘를 자손만대 지키고 싶었던 그의 간절한 효심이 빚어낸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근대 이전까지 한글이 새겨진 비석은 이곳 외에 문경새재에 있는 산불됴심비, 포천에 있는 인흥
군(仁興君, 선조의 아들) 묘역의 묘표 등 고작 3개에 불과하다. 그중에서도 이윤탁 영비가 가장
오래되었다. 즉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비석인 것이다. 그 덕분에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고 특히
국문학(國文學) 분야에서 옆구리에 끼고 모실 정도로 매우 소중한 유물이다.

▲  무덤의 주인을 알리는 비석 앞면

▲  무덤 주인의 생애가 적힌 비석 뒷면

비석 오른쪽 측면에 새겨진 한글의 서체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체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서체의 중간형으로 16세기 한글의 형태를 진하게 보여준다. '영비(靈碑)' 2글자를 빼고는 순 한
글로 쓰여 있는데, 한글로만 쓰인 서책이 18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데 반해 이 비석은 이미 16세
기부터 순우리말로 쓰였다. 즉 200년 이상 빠른 것이다. 또한 사용된 글이 언해문(諺解文)이 아
닌 원(原) 우리말 문장이다. 한글은 주로 한문을 번역하는 용도로 많이 쓰였는데, 이 비석은 사
람의 생각과 느낌을 전달하는 도구로 한글이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 비석이 세워지던 16세
기 중반 한글이 백성들에게 상당히 보급되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  한글이 새겨진 비석 오른쪽 측면
비문의 내용은 오른쪽 사진을 보면 된다.

▲  영비를 재현한 새 묘비 오른쪽 측면에
한글 비문의 내용이 쓰여있다.

비석 꼭대기 부분에 한자로 영비(靈碑)라 쓰여있다. 영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글로 쓰여 백성
들에게 제발 무덤을 건드리지 말 것을 경고한다. 천하에 널린 사대부의 묘비지만 조선 중기 시
절 한글이 쓰여있다는 개성 때문에 군계일학(群鷄一鶴)이 되버린 보물이다. 만약 한글이 쓰여있
지 않았다면 아무도 주목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이윤탁이란 존재도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산산히 잊혀졌을 것이다. 그런 것을 본다면 이문건이 머리는 정말 잘 쓴 것 같다. 효심 때문에
나온 욕심이 자신과 자신의 부모를 후대에 영원히 알리고 비석의 가치를 무한대로 높였으니 말
이다.

비석의 오른쪽 측면에 쓰인 내용을 오늘날 한글로 쓰면 다음과 같다.
'부모를 위해 세우노니 세상에 누가 부모가 없을 것이며, 누가 차마 묘비석을 해칠 것이며, 비
를 해치지 못하면 묘도 감히 넘보지 못할 것이다. 천추만세에 이르기까지 보존되리라'
비석을 보는 이로 하여금 당신들도 부모가 있으니 나의 마음을 알 것이다. 그러니 묘를 해치지
말라는 부모의 묘를 걱정하는 자식의 효심이 우러나오면서도 무덤에 해꼬지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늬앙스도 진하게 불러일으킨다. 이 비문을 읽으면 정말 무덤을 도굴하러온 사람
들도 식은땀을 흘리고 삽을 던질 것이다. 그 덕분인지 오랫동안 무덤에 대한 해꼬지가 없었다고
한다. 다만 1990년 이후, 중계동과 하계동 일대에 개발의 칼질이 자행되면서 무덤 앞에 수레가
달리는 도로가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덤 전방 15m에 당당히 서 있던 묘갈은 지금의 자리로
강제로 이전되었으며, 그의 건강을 위해 비각인 영비각을 씌워 지금에 이른다.


▲  이윤탁 내외 묘역과 묘비

이윤탁 내외의 무덤은 조촐하고 소박하다. 적당한 크기의 봉분(封墳) 앞에 근래에 만든 상석(床
石)이 놓여져 있고, 그 앞에 기존 묘비(한글영비)를 재현한 새 묘비가 있다. 영비에 쓰인 내용
은 모두 새 묘비에 고스란히 쓰여 있으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무덤 앞에는 2기의 문인석을 세
워 사대부 묘역의 품격을 갖추었다.


▲  이윤탁 묘역 우측 문인석(文人石)
홀을 들고 맞은편 문인석을 바라보는 그의 몸에는 오랜 세월의 때가
가득 피어나 중후함을 선보인다.

▲  이윤탁 묘역 좌측 문인석
양쪽 눈이 조금 치켜 올려져 조금은 매섭게 보인다. 세월에 지쳐 그런 것일까?


이윤탁 묘갈은 1974년 '한글고비(古碑)'란 이름으로 서울지방유형문화재 27호로 지정되었다. 그
러다가 2007년 보물로 승진되면서 '이윤탁 한글 영비'로 이름이 다소 어렵게 변경되었다. 허나
여전히 한글고비로 많이 불린다.

예전 이곳은 산골에 논두렁이 널린 시골이었지만 개발의 난도질이 노원구를 휩쓸면서 무덤 앞에
도로가 생기고 그 건너편에는 멋대가리 없는 아파트들이 우후죽순 들어서 주변 풍경을 많이 저
하시켰다. 다행히 무덤이 안긴 산자락(불암산의 서남쪽 줄기)은 영비의 경고가 무서웠는지 눈에
뵈는 것이 없다는 개발의 칼질도 푹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언덕 일대는 한글고비 자연공원으로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이 공원의 범위는 남쪽으로 공릉2동, 동쪽은 중계본동, 북쪽은 중계
주공7단지에 이른다.
또한 한글영비에서 남쪽으로 500m 정도 가면 충숙공(忠肅公) 이상길(李尙吉, 1556~1637)의 묘역
이 나온다. 이곳은 서울지방유형문화재 70호로 지정되었는데, 묘역 서쪽 사당에는 그의 생전의
모습이 담긴 영정(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9호)이 봉안되어 있다.

※ 이윤탁 한글영비 찾아가기 (2012년 4월 기준)
* 지하철1,6호선 석계역(1,4번 출구)이나 6,7호선 태릉입구역(7,8번 출구), 7호선 하계역(3,4번
  출구)에서 1141번 시내버스를 타고 중계주공9단지후문에서 하차, 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
  으로 2분 정도 가면 이윤탁묘역이 나온다. 무덤 입구에 이정표가 있어 찾기는 쉬움
* 지하철1,6호선 석계역(1,4번 출구), 6,7호선 태릉입구역(7,8번 출구), 4,7호선 노원역(1,2번
  출구 사이)에서 113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서라벌고등학교 하차, 여기서 남쪽(하계동 방향)을
  보면 바로 막다른 3거리가 나온다. 3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서라벌고교3거리인데, 여기서 왼
  쪽을 보면 이윤탁 묘역이 보인다.
* 지하철 7호선 하계역(3번 출구)에서 도보 20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 12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0일까지만 수정, 보완 등이 이루어집니다.
   <블로그는 1달까지, 원본은 2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 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 (12pt 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메일,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글을 읽으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댓글 하나씩 꼭 달아주세요.

 * 공개일 - 2012년 4월 3일부터


Copyright (C) 201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