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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가탄신일 기념 절 나들이 ~ 서울 상도동 사자암(獅子庵) '

▲  상도동 사자암


올해도 변함없이 불교의 경축일인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다. 두근거리
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서울과 경기도에서 아직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 오래된 절을 대상으로 장
소를 정하다가 문득 상도동(上道洞)에 숨겨진 사자암에 딱 시선이 멈춘다. 이곳의 이름은 오래
전부터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단순히 역사만 오래되었을 뿐이지 오래된 볼거리도 없는 절로 생
각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던 곳이다.
게다가 사(寺)도 아닌 암(庵)을 칭하고 있으니, 주택가에 파묻힌 조그만 절집으로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조사를 해보니 이게 왠걸..?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조선 후기 불화를 4점이나
간직하고 있고 나름대로 숲에 묻힌 산사(山寺) 임을 알게 되면서
'사자암이 이런 곳이었단 말인가?? 꽤나 신선한걸! 서울 땅에서 대모산(大母山) 불국사(佛國寺
,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아직도 나를 놀라게 하는 절이 있었다니!!!'

그곳의 숨겨진 매력을 발견하고는 슬슬 구미가 당겨온다. 그래서 작년 초파일에 가려고 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가지 못했지. 하여 이번에 그곳으로 장소를 정하고 근처에 사는 친구와 같이
가기로 했다.

집 부근 방학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노량진(鷺梁津)에서 그를 만나 동작구마을버스 02번(노
량진↔사자암)을 탔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동작구청과 장승배기역을 지나 상도3동으로 진입하
여 주택가 언덕길을 1km 오르니 언덕길 정상부에 자리한 사자암 종점에 이른다.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사자암으로 인도하는 길이 나오고,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주차장이 나온
다. 주차장은 중생들이 가져온 수레들로 거의 만원 상태, 이럴 때는 정말 수레가 없는 것이 속
이 편하다. 주차장 너머로 담장과 나무에 속살을 가린 사자암이 보이고, 야트막한 언덕길을 잠
깐 오르면 맞배지붕 모양의 사자암 정문이 나오는데, 이 문이 바로 사자암의 일주문(一柱門)이
다. 보통 일주문은 경내와 멀리감치 거리를 두고 설치하는데, 여기는 그럴 공간이 없어서 경내
바로 앞에 둔 모양이다. 게다가 여닫는 문짝까지 있으니 기존 일주문의 형태를 다소 벗어났다.
그 일주문을 들어서면 조촐한 사자암 경내에 이르게 된다.


▲  4발 수레들로 가득한 사자암 주차장
주차장 뒤로 담장에 몸을 가린 사자암이 보인다.

▲  사자암 일주문
정문 옆으로 수레를 위한 통로를 내었으나 어느 문으로 들어가든 상관없다.


♠  국사봉 자락에 안긴 도심 속의 아늑한 암자
조선 초기에 창건된 상도동 사자암(獅子庵)

▲  고운 빛깔의 연등에 가린 극락보전 뜨락

도동 뒷산인 국사봉(國思峰, 186.3m) 북쪽 자락에 포근히 안긴 사자암은 조계종(曹溪宗) 소속
으로 1396년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왕사(王師)인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태조는 국도(國都)를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옮기고자 무학을 보내 풍수지리를 살펴보게 했는데,
만리현(만리동)이 밖으로 도망가는 백호(白虎)의 형상이고 삼성산(三聖山)의 일원인 호암산(虎
巖山)은 북쪽으로 달리는 호량이의 형국이라 풍수상 서울에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 기세를 막
고자 호암산에 호랑이를 누른다는 뜻의 호압사(虎壓寺, ☞ 관련글 보러가기)를 짓고 사자 형상
인 국사봉에 사자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허나 무학이 창건했다는 것은 확실한 근거와 자료는 없다. 다만 극락보전에 있는 아미타불이 조
선 초기 불상이라고 하니 1396년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선 초기인 15~16세기에 문을 연 것은 확실
한 듯 싶으며, 호압사와 더불어 서울을 지키는 비보풍수(裨補風水)에 일환으로 세워진 것은 분
명한 듯 싶다. 절의 이름인 사자암은 국사봉 바위가 사자처럼 생겨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창건 이후 18세기까지는 이렇다 할 사적(事蹟)이 없으며, 조선 후기에 이르러 1726년(영조 2년)
숙종의 6째 아들 연령군(延齡君, 1699~1719)의 부인 서씨가 일찍 죽은 남편의 명복을 위해 극락
보전 아미타불에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오르게 된다. 이후 1846년 지장
탱화와 신장탱화를 봉안하고 1880년 현왕탱화를 봉안하면서 조금씩 절이 커져 갔다.

1910년 경암(敬庵)이 극락전과 산신각, 요사채를 중수했으며, 1936년 성월이 극락전을 보수했다.
1977년 원명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조실당을 짓고 1985년 극락보전(極樂寶殿)과 단하각(丹霞閣),
수세전(壽世殿), 요사채 2동을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단하각, 수세전, 요사 등 7~8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우
고 있으며, 자리가 협소하여 극락보전과 요사 뒤쪽에 가파른 언덕 부분을 닦아서 단하각과 수세
전을 두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장시왕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0호), 신중도(지방유형문
화재 287호), 영산회괘불도(지방유형문화재 288호), 현왕도(지방유형문화재 289호)
등 지방문화
재 4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영산회괘불도(靈山會掛佛圖)는 1909년 순종(純宗) 황제 내외와 영친
왕(英親王)의 장수를 기원하고자 조성했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신중도 외에는 관람이 거의 어렵
다. 그 외에 극락보전에 조선 초기 불상으로 전하는 아미타불이 있다.


▲  극락보전 뒤쪽

국사봉이란 조그만 산 북쪽에 둥지를 틀어 상도동이 개발되기 이전에는 그야말로 숲속에 진하게
묻힌 산사였다. 허나 1960년 이후 속인(俗人)들이 파도처럼 몰려오고 서울의 몸집이 커짐에 따
라 변두리던 상도동과 봉천동(奉天洞) 일대에 개발의 난도질이 이루어지면서 국사봉 중턱까지
주거지가 밀려왔다. 다행히 개발의 칼질은 사자암 앞에서 꼬랑지를 내리면서 사자암과 절 뒤쪽
국사봉 중턱 이상 부분은 그나마 자연의 공간으로 남게 되었고, 사자암은 국사봉과 주거지 경계
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비록 옛날 만큼의 운치는 아니지만 국사봉의 푸른 숲이 절을 감싸고 있어 산사의 분위기를 그런
데로 우려내고 있다. 도심 속의 그야말로 조그만 산사로 온통 주거지로 도배가 된 상도동에 이
런 오래된 절이 박혀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간만에 나를 제대로 놀라게 만든 서울
의 숨겨진 명소로 그동안 사자암을 과소평가하고 오랫동안 일말의 관심도 비추지 않던 내 자신
이 그저 미안해질 따름이다.

절을 이루는 건물은 근래에 새로 지은 것들이라 겉으로 보이는 고찰의 내음은 시들시들하다. 허
나 신중도와 아미타불을 통해 오랜 내력을 가늠해 볼 수 있으며, 시내와 무척이나 가까워 접근
성도 나름대로 괜찮다. 국사봉이 아직까지는 건재하여 산사의 분위기를 느끼기에 그리 부족함은
없으며, 암(庵)이란 이름에 걸맞게 절의 크기도 조촐하여 두 눈에 넣어 살피기에 부담이 없다.

끝으로 사자암을 안고 있는 국사봉(國思峰)은 세종의 큰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이곳에 올라
경복궁(景福宮)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나라와 임금(세종)을 걱정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사자암 창건설화에 나오는 무학대사를 국사(國師)로 높여 한자만 달리한 국사봉(國師峰)
이라 했다는 설도 있으나 무학대사는 왕사(王師)였지 국사가 아니었으므로 <관련기록에는 모두
왕사, 대사(大師)로 나옴> 양녕대군 쪽이 더 신뢰가 높다.


▲  사자암에서 바라본 조그만 천하 (동작구 상도동, 대방동 일대)

※ 상도동 사자암 찾아가기 (2012년 5월 기준)
* 1,9호선 노량진역(1번 출구를 나와서 오른쪽, 2번 출구)에서 동작02번, 동작11번 마을버스를
  타고 사자암 하차
* 7호선 장승배기역(5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쪽으로 돌아 50m)에서 동작 02번, 11번 마을버
  스 이용
* 7호선 신대방3거리역(4번 출구)에서 동작19번 마을버스 이용
* 2호선 봉천역(2호선) 5번 출구를 나와서 바로 오른쪽으로 가면 큰 길이 나온다. 거기서 왼쪽
  으로 건너서 5538번 시내버스를 타고 재넘이고개 종점에서 내리면 바로 사자암입구이다.
* 절 밑에까지 수레 접근이 가능하며 주차장이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3동 280 (☎ 02-825-1046)


♠  사자암 둘러보기

▲  사자암 강당(講堂)

일주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서니 왠지 모를 답답함이 밀려온다. 워낙 터가 작은 절이라 그 비좁
은 공간에 건물을 꾸역꾸역 심은 탓에 여백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극락보전도 강당과 좁은 간
격을 두고 자리해 있어 탑이나 석등을 세울 공간도 없으며, 거기에 연등을 가득 달아놓아 하늘
을 가리고, 초파일이라 사람까지 많으니 좁은 서울 도심(都心)의 축소판을 보듯, 답답한 것이다.
절이 산자락에 위치해 있어 경내를 넓히기도 힘드니 사자암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극락보전 맞은편에 자리한 강당은 대방(大房)이라 불리는데 정면 7칸, 측면 3칸에 경내에서 가
장 큰 건물이다.


▲  강당 뒷쪽과 경내와 속세를 가르는 담장

4월 초파일에 절에 왔으니 절밥을 한번 먹어야겠지. 그것이 바로 초파일 절 나들이의 주요 백미
(白眉)가 아닌가..? 오후 3시임에도 우리는 아직 점심도 먹지 못해 무척 시장한 상태라 먹을 장
소가 어딘지 기웃거리니 마침 요사(寮舍)에서 공양을 제공하고 있었다.
요사에는 넓은 방이 있는데, 날이 날인지라 공양을 하거나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들로 가득하
다. 사자암을 메운 사람의 절반이 이곳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공양밥 배식
을 하는 곳으로 가니 배식 담당 아줌마들이 젊은이들은 많이 먹어야된다며 쌀밥과 나물을 푸짐
히 안겨주는데, 옆을 보니 튀김과 전도 있는 것이다. 보통 절에서 공양을 하면 밥과 나물, 채소,
국만 먹었는데, 전에다가 튀김류까지 접한 것은 처음이라 너무 신선하다. 튀김이라 하여 생선이
나 고기가 들어간 것이 아닌 감자 등의 채소로 만든 튀김이다.


▲  사자암 공양밥의 위엄

그릇이 터져라 밥과 나물, 전을 담고 튀김을 별도의 그릇에 담아 비어있는 구석 자리로 가서 즐
거운 공양시간을 갖는다. 절집 공양에서는 나물과 밥을 보통 한그릇에 담아 비벼먹으니 공양밥
은 자연히 비빔밥이 된다. 말끔히 비벼서 입에 넣으니 정말 꿀맛이다. 집에 쌀이 떨어져 아침도
못먹고 점심도 이제서야 먹으니 꿀맛의 정도는 더욱 증가된다.
간신히 그릇을 비우고 튀김을 먹으니 이 또한 맛이 좋다. 튀김까지 모두 처리하니 포만감의 행
복에 잠시 극락을 누비는 기분이다. 그때를 타고 졸음이 몰려와 배 깔고 한숨 자라고 나를 희롱
한다.

공양을 하고 잠시 쉬다가 마침 잘 익은 수박을 갈라서 나눠주길래 수박도 먹고, 사과도 먹으면
서 후식까지 아주 기분 좋게 처리했다.


▲  사자암에서 접한 신선한 그림 조왕탱화(竈王幀畵)

수박을 먹고 우연히 북쪽 벽을 보니 현란한 색채의 그림 하나가 내 눈길을 붙들어 맨다. 처음에
는 사자암에 있는 지방문화재 불화인줄 알았는데, 색채가 너무 진하고 묵은 티가 안나니 그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얕은 지식에 현왕도의 일종이 아닐까 싶었는데, 알고보니 뜻밖에도 부엌지
킴이 조왕신<竈王神 = 조왕(竈王)/조왕대신(竈王大神)>이 그려진 조왕탱화(조왕탱)이다.

전국에 200곳이 넘는 절을 들락거렸지만 조왕탱은 사실상 처음 보는 불화(佛畵)라 무척이나 낯
선데. 조왕이란 우리나라의 고유 신으로 부엌을 지키는 존재이다. 부엌을 관리하던 여인네들이
숭상하던 존재로 불교가 산신(山神)과 칠성 등의 민간신앙을 죄다 흡수하면서 호법신중(護法神
衆)의 일원이 되어 그 모습도 다른 신이나 보살에 못지 않게 화려하게 변했다. 허나 기존 호법
신중과 조왕과는 성격이 너무 달라 신중탱(神衆幀)에서 별도의 조왕탱으로 독립했다고 한다. 조
왕탱은 그 성격을 고려해 요사나 공양간에 둔다.

조왕탱을 보면 제왕(帝王)의 복장을 한 조왕신이 수염을 어루만지며 조식취모가 바치는 후식을
기다리고 있고, 노란 천이 깔려 고급의 이미지를 선사하는 책상에는 여러 서적과 찻잔이 놓여져
있다. 그의 왼쪽에는 땔감 조달을 담당하는 담자역사(擔紫力士)가 항아리와 도끼를 들고 서 있
고. 오른쪽에는 공양간을 관리하는 조식취모(造食炊母)라 불리는 여자가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과일 쟁반을 조왕신에게 바친다.

부엌지킴이가 여자도 아닌 남자란 것이 매우 눈길을 끄는데, 조왕신이 꼭 남자만 있는 것은 아
니며, 속세에서는 조왕할머니를 조왕신으로 많이 받는다.


▲  연등에 가려 간신히 고개만 내민 극락보전(極樂寶殿)

강당과 마주하며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극락보전은 사자암의 법당(중심 건물)이다. 허공을 구름
처럼 메운 연등의 물결 앞에 간신히 고개만 내민 극락보전의 모습은 마치 두터운 구름 위에 꼭
대기를 드러낸 봉우리처럼 보인다.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붕 양쪽에 '卍' 마크가 그려져 있다. 1910
년에 중건했다고 하니 조선 후기부터 있던 건물인 듯 싶으며, 1936년과 1985년 중수했다. 건물
안에는 극락전의 주인인 아미타3존불을 비롯하여 신중도, 지장목각탱 등이 내부를 수식하고 있
으며, 바깥 벽에는 심우도와 함께 달을 보면서 자신의 본성을 찾아서 본다는 간월견성(看月見性)
과 팔을 짤라 믿음을 강하게 비친 혜가대사(慧可大師)의 이야기를 다룬 벽화가 있다.


▲  극락보전 아미타3존불

극락보전 불단(佛壇)에는 머리가 유난히 큰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좌우로 녹색머리의 지장보살(地藏菩薩)과 화려한 보관(寶冠)의 관음보살(觀音菩薩)을 거느리며
중생들의 끊임없는 하례를 받는다. 온후한 표정의 아미타불로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이라 전하
며, 사자암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자 사자암의 600년 역사를 밝혀주는 산증인이다.
허나 그보다 한참 이후에 태어난 신중도 등의 불화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지위를 보장받
고 있는데 그보다 오래된 아미타불은 아직도 그 흔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지도 못했으니 그저
의문스러울 따름이다. 서울 관내에서 왠만큼 오래된 불상들은 지방문화재나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데 말이다.

이 불상은 1726년 연령군의 부인 서씨가 먼저 세상을 뜬 남편과 다시 만날 것을 꿈꾸며 시주를
하여 금칠을 한 것으로 1974년 연화개금이 있었으며, 1980년에 다시 개금(改金)을 하여 지금에
이른다. 원래는 나무로 만든 목불(木佛)로 높이는 108cm이며,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의 수인을
보이며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했다.
몸을 가린 대의(大衣)의 옷주름이 배 아래부분에서 크게 'U'자형을 그리고 있고, 두툼한 옷주름
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얼굴과 머리 부분이 좀 커 보인다. 머리 중앙에는 육계가 두툼히 솟아
있고,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다.

그들 뒤에는 아미타불이 서방정토에서 설법을 하는 장면을 담은 붉은 색채의 아미타후불탱화가
든든하게 후광(後光)처럼 자리한다.


▲  사자암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7호

아미타3존불 좌측에는 사자암 만큼이나 빽빽하고 여백이 없는 신중도가 액자에 고이 담겨져 있
다. 이 그림은 1846년(헌종 12년)에 조성된 것으로 불교를 지키는 호법신장(護法神將)들이 가득
그려져 정신이 없다. 법당에 신중도를 두는 것은 법당 내부를 청정케 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
다. 그래서 예불을 하기 전에 신중도에 먼저 예를 올린다.

그림을 가만히 살펴보면 금강저(金剛杵)를 높이 든 위태천(韋太天) 동진보살이 그림의 상단 오
른쪽에 독수리깃이 달린 투구를 쓰고 있다. 연꽃가지를 들고 있는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은 화면의 상단 좌측 중앙에 두고 토속신을 곳곳에 배치했으니 이는 기존 토속신을 받아들여 성
장한 우리나라 불교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가로 223cm, 세로 162cm의 크기로 지포(紙布) 위
에 그려졌으며, 그림을 그린 이는 송은당 수찬(松隱堂 守讚)이다.

사자암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가 4점이 있지만 속시원하게 공개된 것은 신중도가 유일하다.
나머지는 어디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어 왠만하면 구경도 못한다고 한다. 문화재로 지정되기 이
전부터 그런 듯 싶으며, 경내를 살펴보니 요사 외에는 공개하여 둘 만한 공간도 딱히 없어 보이
니 나중에 따로 불전을 하나 만들어서 봉안하면 어떨까 싶다. 다만 영산회괘불도(靈山會掛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8호)는 4월 초파일이나 기타 행사일에 공개될 수 있어 그나마 볼 확률은
있겠으나, 보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  극락보전 지장 목각탱(木刻幀)
아미타3존불 우측에 자리한 돋음새김의 목각탱화로 지장보살과
염라대왕 등의 10왕,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새겨져 있다.

▲  범종각 앞에 마련된 관정의식의 현장

극락보전 우측에는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梵鍾)의 보금자리 범종각이 자
리해 있다. 사자암에서는 이 범종각을 사자후(獅子吼)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모든 사람이 깨
달음의 길에 오를 수 있도록 원음(圓音)의 사자후를 토하란 의미가 담겨져 있다. 또한 절의 창
건 설화와 절의 이름도 범종각이 사자후란 이름을 지니게 된 이유 중의 하나이다.

범종각은 1985년에 지어졌으며, 범종은 1987년에 조성되었다. 그 앞에는 아기부처에게 관정(灌
頂)의식을 행하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는데, 온갖 꽃으로 치장된 단(檀) 안에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부처가 중생들의 하례를 받으며, 북쪽을 바라본다. 그 현장 앞에는 레드카펫을 깔아
그 관정의식의 숭고함과 아기부처의 위엄을 높였다.


▲  꽃으로 수려하게 치장된 관정의식의 현장
꽃속에 파묻힌 아기부처가 부러울 따름이다.

▲  간만에 외출을 나와 시원하게 관정을 받는 아기부처의 희열(喜悅)
친구로 하여금 관정의식을 하게 하여 그 장면을 살짝 사진에 담았다.

▲  범종각의 옆모습과 종이 등을 태우는 소각로(이름을 모르겠음)
기와를 얹히고 황토로 빚어진 소각로의 모습이 참 어여쁘다.

▲  사자암 단하각(丹霞閣)

요사 뒤쪽 언덕배기에는 이름도 낯선 단하각과 수세전이 높다랗게 터를 잡아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이들은 좁은 공간을 다지고 화강석으로 기단을 쌓아 만든 것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단촐한 모습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단하각은 1910년에 중수했다고 하니, 그 이전부터 있었던 모양이다. 현재의 건물은 1985년 원명
이 중건했다. 단하각이라 하니 도대체 누굴 위한 공간인지 궁금하다. 어떤 특별한 존재가 봉안
되어 있길래 이름부터가 생소할까? 그래서 내부를 살펴보니 우리에게 무척 친숙한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봉안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산신각(山神閣)과 독성각(獨聖閣)의 역할을
하고 있는 공간으로 보면 되겠다.


▲  단하각에 봉안된 산신탱(왼쪽)과 독성탱
세월의 때가 좀 끼어서 그런지 조금은 오래되어 보인다.
허나 저들은 20세기에 그려진 탱화이다.

▲  사자암 수세전(壽世殿)

단하각과 비슷한 모습의 수세전은 누구의 공간일까? 바로 인간의 목숨과 수명, 무병장수를 관장
한다는 칠성(七星)의 보금자리이다. 칠성(치성광여래)을 봉안한 건물을 보통 칠성각이라 부르는
데, 여기서는 칠성각 대신 인간의 수명을 뜻하는 수세전이란 이름을 취해 좀 돋보이게 했다.
이 건물은 1985년에 세워진 것으로 내부에는 같은 해에 조성된 칠성탱이 걸려있으며, 산신과 독
성이 봉안된 단하각처럼 수세각이라 하지 않고 수세전이라 불리니 칠성이 그들보다 1단계 높은
대우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  색채의 조화가 두드러진 수세전 칠성탱

▲  비가 오는 관계로 범종각과 강당, 극락보전 사이로 천막을 설치했다.
사자암은 뜨락과 건물 주변 공간에 하얀색과 검은색의 보도블록을 깔아
경내의 정갈함을 꾀했으나, 저렇게 블록으로 밀어버리는 것보다는
흙이 잔잔히 입혀진 뜨락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작지만 그런데로 알찬 사자암에서 1시간 남짓 머문 것 같다. 절이 작아서 보통 사람은 10분이면
다 보고 나오겠지만 하나라도 놓치는 것이 없도록 구석구석 살피니 그 정도의 시간이 흘러간 것
이다. 그중에서 30분을 공양하는데 썼으니 관람시간은 30분 정도 된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
화를 친견하지 못해 몹내 아쉽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다. 다른 사람도 못보니까 말이다.
그저 초파일의 신명나는 분위기를 누리러 왔고, 그 분위기를 좋아하며, 맛있는 공양밥도 먹고,
다채로운 볼거리도 보고 여기저기 사진에 담았으니 이곳에 온 목적은 충분히 달성하고도 남았다.

이렇게 잠시나마 정들었던 사자암을 뒤로하며, 도심 속의 조그만 암자, 사자암 초파일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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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5월 3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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