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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월리사, 백족사


~~~ 한겨울 산사 나들이, 청주 월리사~백족사 ~~~

청주 월리사

▲  월리사 경내

백족사 석조여래좌상 백족사3층석탑

▲  백족사 석조여래좌상

▲  백족사3층석탑

 


겨울이 무심히 깊어가던 1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청주(淸州)를 찾았다. 햇님이 출근하기
가 무섭게 서울을 출발해 남쪽으로 2시간 가까이를 달려 청주 땅으로 들어섰는데, 그날의
첫 메뉴는 청주 동남쪽 산주름에 숨겨진 월리사이다. 월리사를 먼저 찾은 이유는 별거 없
다. 그곳이 그냥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  청주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
청주 월리사(月裡寺)

▲  월리사와 속세를 이어주는 고갯길

충북의 중심 도시인 청주에서 가장 구석진 곳으로 꼽히는 문의면 샘봉산(461m) 산주름에 월리
사란 조그만 산사가 숨겨져 있다. 이곳은 보은군(報恩郡) 바로 직전으로 청주의 남부 지역을
맡고 있는 문의면(文義面) 중심지에서도 차로 30분 이상이나 떨어진 산골 벽지이다.

북쪽을 바라보고 앉은 이곳은 신라 중기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샘
봉산 밑에 절을 짓고 수도하다가 보름달의 청정함에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며, 그로 인해
절 이름을 월리사라 했다고 한다. 허나 이는 믿거나 말거나 창건설화일 뿐 이를 입증할 기록
과 유물은 전혀 없다.
절에 대한 공식적인 첫 기록은 조선 인조 때 제작된 호서승람(湖西勝覽)으로 그 불우(佛宇)편
에 월리초막(月裡草幕)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하여 빠르면 고려 후기~조선 초기, 늦어도 조
선 중기에 조그만 초암(草庵)으로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1645년 명현당(明玄堂) 원학대사(元學大師)가 절을 이곳으로 옮겨 중수했으며, 1665년에 절을
중건하고 그 기념으로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그리고 1657년 명현당 원학이 부근에 있던
신흥사(新興寺)를 가져와 대웅전을 지었다. 즉 신흥사와 월리초막 등 주변의 조그만 절들을
가져와 합친 것이 현재의 월리사이다.

월리사란 이름에 대해서는 사적비에 2가지가 적혀있다. '절이 높은 곳에 자리해 달과 가까우
므로 달 속에 있다는 뜻'
에서 그리 했다는 것과 절 밑에 '월동사'란 절이 있어 월리사라 했다
는 것이 그것이다. 어느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은 달님이 겨우 얼굴을 비출 수 있을
정도의 산골로 제아무리 찰거머리 번뇌라고 해도 여기까지 쉽게 따라오지는 못할 것이다. (굳
이 절까지 따라갈 필요도 없을 듯, 절 입구에서 기다리면 되니까~~)
게다가 워낙 구석진 곳이라 번잡함이 거의 없어 산사(山寺)의 이름값을 제대로 한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적은 건물에 비해 뜨락과 주차장
이 너무 넓어 여백의 미가 크게 파도를 칠 정도이다. 게다가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이나 천
왕문(天王門)도 아직 갖추지 못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해 조선 후기 부도탑과 사적비, 동종,
19세기 말에 조성된 대웅전 후불탱과 신중탱이 전하고 있다.


▲  팔작지붕를 지닌 요사(寮舍)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승려의 거처인 요사 외에 종무소(宗務所)와
공양간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추녀 곡선이 시원스러운 삼성각(三聖閣)
1998년에 마련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 등 3명의 성스러운 존재가
봉안되어 있어 삼성각이란 이름을 달게 되었다.

▲  월리사 대웅전(大雄殿) - 충북 유형문화유산

월리사의 상징이자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1657년 명현당 원학이 부근에 있던 신흥사를 가져와 지은 것으로 처마 끝에 있는 암막새기와
에서 '옹정경술(雍正庚戊)'이라 쓰인 글씨가 발견되어 1730년에 중수했음을 알려준다.

자연석으로 높게 다진 기단 위에 자연석의 주초석을 닦았는데, 우주(隅柱)가 평주(平柱)보다
굵고 높다. 처마는 겹처마로 건물 네 모서리에 활주란 기둥을 세워 시원스런 곡선으로 막 날
라갈 것 같은 추녀마루를 꽉 받치고 있다.
대웅전 내부의 내목도리 윗벽, 대들보 등에는 신선과 승려, 동자 등이 그려진 벽화가 있는데,
그림이 상당한 수준이고 상태도 양호하여 대웅전의 대표 매력으로 꼽힌다. 월리사가 바로 대
웅전 덕분에 비록 명성은 적지만 그 존재감을 천하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옆에서 바라본 대웅전

▲  대웅전 석가삼존상과 석가후불탱
후불탱은 1897년에 조성된 것으로 세로 500cm, 가로 220cm 규모이다.

▲  머리 위를 살펴보는 여유, 대웅전 우물천정
대웅전에 들어섰다면 정면만 뚫어지라 살피지 말고 머리 위쪽도 꼭 살펴보기
바란다. 수준급의 그림들이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두 눈에
적지 않은 감동의 도가니를 선사할 것이다.

▲  대웅전 천정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들

▲  온갖 그림으로 치장된 대웅전 천정과 대들보

▲  겨울에 잠긴 월리사 옆 계곡

월리사 경내를 둘러보며 적막한 산사의 내음을 마음껏 누리다가 다음 메뉴로 길을 떠났다. 그
때까지는 몰랐지만 부도탑과 사적비를 모두 놓치는 우를 범했는데, 부도탑은 승려 포윤(抱允)
의 사리탑으로 왜정(倭政) 때 도굴되어 쓰러져 있던 것을 인근 마을 신도들이 복원했으며, 월
리사의 빛바랜 일기장인 사적비도 경내 주변에 있다.
그저 대웅전만 알았지 그들의 존재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아무래도 다음에 또 오라는 월리사
의 지극한 주문이겠으나 그들을 만나러 다시 오기에는 너무 구석진 곳이며, 솔직히 그리 당기
지도 않는다. 억지로 인연을 짓는 것보다는 그냥 세월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월리사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문덕리5 (염티소전로 55-100, ☎ 043-221-
  7600)


♠  백족산(白足山) 자락에 깃든 특이한 이름의 절집
청주 백족사(白足寺)

▲  백족사로 인도하는 소나무 숲길 ①

월리사를 둘러보고 다른 고을로 넘어가려고 했으나 청주 땅을 바로 뜨기가 무지 허전하여 1곳
을 더 챙겨보기로 했다. 하여 간단하게 둘러볼 수 있는 미답처(未踏處)를 물색하다가 가덕면(
加德面)에 있는 백족사가 번개처럼 떠오르면서 그곳을 다음 메뉴로 정했다. 백족사는 작은 산
사로 지방문화재 2점을 지니고 있다.

월리사에서 백족사는 북쪽으로 20km 이상 떨어져 있다. 문의면의 산하를 지나 가덕면으로 진
입, 미원면(米院面)으로 뻗은 단재로를 달리다가 병암리에 이르러 백족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을 한다. 여기서 좌회전(북쪽)하여 한계리로 빠지는 '은행상야로'로 조금 들어서면 충북
교통연수원 직전에 백족사로 이어지는 숲길이 모습을 비추는데, 비록 차량들이 마음 놓고 바
퀴를 굴리게끔 절까지 포장길이 닦여져 있으나 걸어서 20여 분 거리라 차를 밑에 두고 흔쾌히
걷기로 했다.

백족사로 향하는 숲길은 납골탑공원까지 경사가 꾸준히 이어진다. 소나무에 묻힌 숲길이라 솔
내음과 그늘맛이 아주 좋으며, 경사는 조금 있지만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다.
하여 산에 대한 자존심을 곱게 접으며 묵묵히 길을 임하면 백족사 직전에 자리한 납골탑공원
이 알아서 모습을 비춘다. 여기까지 오면 절은 다 온 것이다.


▲  백족사로 인도하는 소나무 숲길 ②

▲  백족사로 인도하는 소나무 숲길 ③

▲  백족사 납골탑공원을 지키고 있는 석조아미타불입상

백족사 직전에는 부도탑(승탑) 스타일의 납골탑을 지니고 있는 납골탑공원이 있다. 이곳은 백
족사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망자(亡者)들이 깃든 부도탑 앞에는 하얀 피부의 잘생긴 석조아미
타불이 자리해 있는데, 보통 이런 곳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두어 망자들을 맡겨두기 마련이
나 백족사는 특이하게 아미타불을 두어 이곳을 책임지게 했다.


▲  온갖 모습의 석탑들이 마중을 하는 백족사

납골탑공원에서 북쪽 길을 내려가면 그 길의 끝에 백족사가 있다. 이 절은 백족산 남쪽 자락
350m 고지에 둥지를 튼 작은 절로 절 바로 뒷쪽이 백족산 정상이다.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백
족산 산신도 새카맣게 모르는 실정이나 경내에 고려 때 것으로 보이는 석불과 석탑이 있어 고
려나 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원래 이름은 심진암(尋眞庵)이었다. 조선 7대 군주인 세조(世祖, 재위 1455~1468)가 속
리산 법주사(法住寺)를 찾고자 청주 땅을 지나던 중, 백족산 밑 계곡에서 잠시 쉬었는데, 그
는 발냄새가 진동하는 두 발을 꺼내 계곡에 씻었다. 그랬더니 발이 백옥(白玉)처럼 깨끗해진
것이 아닌가.
이에 기분이 너무 좋아진 세조는 이곳 산에 백족산이라 이름을 내렸다고 하며, 심진암도 덩달
아 백족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한다. 그래서 하얀 발의 절이란 특이한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이
다.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이 쓴 '동악선생집(東岳先生集)'에 백족사 관련 내용이 들어있
어 최소 17세기까지 법등(法燈)을 유지했음을 알려주며, 조선 후기에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는
데, 절이 망한 이유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것은 없다.

절터란 우울한 모습이 되어버린 백족사는 고된 세월에 헝클어진 석조여래좌상을 밖에 내밀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다가 1930년대에 이르러 옛 백족사를 잇는 절이 세워졌다. 그와 관련된 믿
거나 말거나 이야기에 따르면 1920년대에 백족산 밑이 고향인 송씨가 어느 날 꿈속에서 백족
산을 거닐고 있는데, 갑자기 산신령이 나타나
'백족산에 쓰러진 법당이 있는데, 그곳에 부처님이 파묻혀 있으니 당신이 그를 구해주면 소원
이 이루어질 것이오!'
하였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고향으로 달려가 백족산을 뒤적거리다가 절터와 다 쓰러진 건물을 발견했
고, 그 건물 안에 석불이 있었다. 하여 그곳에 돈과 시간을 들여 대웅전을 짓고 석불을 봉안
하여 정성을 들여 기도를 올렸더니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1940년대에 옛 석탑의 석재들을 발견하여 그것을 끼워 맞춰 다시 세웠으며, 승려 승근이 주지
로 들어와 2010년대까지 꾸준히 불사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해 요사와 산신각 등 5~6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3층석탑과
석조여래좌상 등의 지방문화재 2점을 지니고 있다. 절 남쪽에는 망자와 절의 재정을 위해 납
골탑공원을 만들어 조금씩 덩치를 늘리고 있으며, 3층석탑과 대웅전 주변 공간에는 돌로 간단
하게 빚은 작은 탑들과 여러 모습의 석불을 주렁주렁 배치해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다. 특히
탑은 늙은 3층석탑부터 1995년에 세운 7층석탑, 승근의 3층 사리탑, 그런데로 형태만 갖춘 석
탑까지 다양하여 절은 비록 작지만 탑 갯수만큼은 천하 제일이다.

* 백족사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한계리 1 (은행상야로 441-122)


▲  경내 한쪽에 옹기종기 모인 돌탑 무리들

▲  칼과 삼지창을 든 어느 석불

절을 지키고자 손수 칼과 창을 쥐어든 모양이다. 석불보다는 인왕상이나 장군상의 변형 버전
같으며, 둥근 넓적한 얼굴과 두상을 지닌 조금은 해학적인 모습이다. 피부에 고색의 기운이
느껴져 꽤 늙어보이지만 현실은 20세기 중반 이후에 마련된 것이다.


▲  늘씬한 맵시를 지닌 석조미륵불입상
20세기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그 옆에는 거북이 화사석(火舍石)을
받쳐들고 있는 독특한 모습의 석등이 있다.

▲  백족사3층석탑 - 충북 문화유산자료

석조미륵불입상 앞에는 옛 백족사의 흔적인 3층석탑이 있다.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덩치로 고려 때 것으로 보이는데, 탑 높이는 2m, 1층 탑신(塔身) 높이 31cm, 폭 41.5cm 크기
로 조선 후기에 절이 사라지면서 산산조각난 것을 1940년대에 조각난 석탑 덩어리들을 발견하
여 그들을 조각 맞추듯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분실된 부분이 무지하게 많아서 1층 부분은 시멘트로 만들어 때웠으며, 머리장식 같은
경우는 새로 만들었다. 그런 연유로 탑의 왕년 시절의 크기와 모양새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
들다.

바닥돌로 보이는 판석 위에 탑신형의 중대석과 갑석을 지니고 있으며, 탑신석에는 우주가 모
각되어 있고 옥개석(屋蓋石)에는 4단의 층급 받침과 낙수홈이 조각되었다.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한 편이며, 3층 옥개석은 파손이 심해 처마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  3층석탑 스타일로 지어진 승근 사리탑

탑의 주인공인 승근(1924~2015)은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9살에 동자승으로 출가했다. 18살에
구족계를 받았으며, 1943년 백족사에 들어와 여기서 70년 넘게 머물면서 백족사를 지금의 모
습으로 일으켜 세웠다.
2015년 8월 4일(음력) 백족사에서 열반에 들었는데, 금색과 은색, 흑색, 옥색, 분홍색, 초록
색 무지개빛 사리 48과가 나왔다고 한다. 또한 절에 큰 도움을 주었던 최정화 보살이 2015년
7월 17일에 입적했는데, 그의 몸에서는 무려 8과의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사리가 나오는 이
유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들이 분분함)

2016년 작은 키의 3층 사리탑을 마련해 그들의 사리를 봉안했는데, 그 흔한 부도탑이 아닌 3
층석탑 모습으로 만든 점이 이채롭다.

▲  백족사 산신각(山神閣)
1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산신의 공간이다.

▲  길쭉한 모습의 요사(寮舍)
선방과 종무소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  백족사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이곳의 법당이다. 건물 내부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이 있으니 꼭 친견하기 바란다.

▲  백족사 석조여래좌상 - 충북 문화유산자료

대웅전의 주인장인 석조여래좌상은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예전에는 석불 앞쪽 부
분이 백회(白灰)가 거의 떡칠 수준으로 칠해져 있어서 원래 모습을 파악하기 힘들었는데, 21
세기 이후 백회를 벗겨내고 불단을 손질하면서 석불의 원래 모습은 물론 불단에 가려졌던 연
화대좌까지 모두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석불은 어느 세월이 댕강했는지 절단되어 있던 것을 시멘트로 붙였으며, 접합 부분에 시멘트
를 두껍게 덧칠하면서 많이 부어올랐다. 또한 눈과 입도 근래에 보수하면서 다소 변형되었으
며, 양쪽 귀도 매우 짧아지는 등, 강제 성형을 꽤 당했다.
머리는 곱슬머리의 나발로 정수리에는 육계가 솟아있고, 상호는 전체적으로 원만하다. 목에는
삼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시멘트로 보수하면서 가려졌으며, 어깨와 무릎 등 아래로 갈수
록 폭이 넓어지고 있다.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옷주름이 비교적 유려하게 표현되었으며, 오른
쪽 팔과 무릎 전체를 덮고 있다. 그리고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했다.

연꽃 무늬가 새겨진 연화대좌는 석질이 불상과 달라서 입자가 거칠며, 넓은 판석을 지대석(址
臺石)으로 삼았으나 원래 것은 아니다. 하대석(下臺石)에서 연꽃잎이 아래로 향한 복련화문(
伏蓮花紋)이, 그리고 상대석(上臺石)에는 연꽃잎이 위로 향한 앙련화문(仰蓮花紋)이 서로 대
칭적으로 조각되었으며, 중대석(中臺石)은 팔각주형으로 문양은 없다.
석불의 크기는 높이 86㎝, 좌대 높이 94㎝, 머리 높이 29㎝, 무릎 넓이 69㎝로서 광배(光背)
는 없으나 연화대좌와 불상의 원형은 그런데로 잘 남아 있다.

앞서 백족사 내력에서 언급한 것처럼 백족산 밑이 고향인 송씨의 꿈에 백족산 산신이 나타나
산속에 버려진 석불(현재 석조여래좌상)이 있으니 그를 구제하면 소망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
고, 그 꿈에 따라 산속에서 석불과 절터를 발견해 현재의 백족사를 세웠다. 이후 석불에게 소
망을 빌었더니 아들을 얻었다고 전한다. 그런 연유로 이 석불에게 간절하게 기도하면 아들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아들을 원하는 여인들의 발길이 제법 있었다.


▲  대웅전 동쪽 3층석탑 주변에 닦여진 여러 석물들 (막돌탑과
석조미륵불입상, 석탑 등)

▲  백족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①

백족사를 둘러보고 바로 뒷쪽에 있는 백족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정상까지 1시간 거리도 아니
고 겨우 10분 남짓 거리라 청주에서의 여로(旅路)도 좀 살찌울 겸, 올라간 것인데, 중간에 깔
딱 비슷한 구간이 있으나 그것만 빼면 무난한 수준이다.
며칠 전에 겨울 제국이 투하한 눈으로 산길과 능선에 눈이 조금 쌓여있어 좀 긴장했지만 그렇
게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  백족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②

▲  백족산 정상에 세워진 육각형 2층 정자

백족산은 해발 413m의 뫼로 청주 가덕면에 자리한다. 백족산이란 이름은 하얀 발의 산이란 뜻
으로 조선 세조가 청주를 거쳐 속리산 법주사로 순행을 가다가 백족산 밑에서 잠시 쉬었는데,
백족산 계곡에서 발을 씻었더만 발이 아주 깨끗해졌다고 한다. 이에 감동한 세조는 이곳 산에
백족산이란 이름을 내렸다고 전한다.

백족산에는 계곡들이 여럿 있지만 다들 작다. 세조가 어느 계곡에 발을 담궜는지는 모르겠지
만 청주에서 보은으로 갈 때 보통 백족산 남쪽과 미원을 경유해서 가므로 산 밑에서 잠시 길
을 쉬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여름 제국 시절에 왔더라면 세조를 흉내내어 산에 깃든 작은
계곡이나 산 남쪽에 흐르는 무심천에서 나의 꼬질꼬질한 발을 담구고 싶지만 차디찬 겨울이라
그러지는 못했다.

* 백족산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한계리


▲  산 이름과 다르게 검은 피부를 지닌 백족산 정상 표석

▲  백족산 정상에서 바라본 청주의 산하 (서쪽 방향)
백족산 정상은 수목이 삼삼하고 주변으로도 비슷한 높이의 산주름이
겹겹이 둘러져 있어 조망의 질은 별로이다.


백족산 정상에서 10분 정도 머물며 정상의 기분을 누리다가 백족사를 거쳐 다시 충북교통연수
원 직전 백족사 입구로 내려왔다.
백족사는 원래 메뉴에 없던 것을 급하게 콩 볶듯 들린 곳이고, 백족사의 문화유산 외에는 정
보가 부족해 백족산에 깃든 메아리바위와 선반바위, 육송, 삼지송 등의 자연 명소를 모두 놓
쳤다. 그래도 백족사와 백족산 정상을 찍었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나머지는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미루고 다시 인연을 기다리면 된다. 물론 인연이 또 닿는다는 보장은 없다. 게
다가 그들을 보러 또 오기에는 천하에 목마른 미답처(未踏處)들이 너무 많다.

이렇게 하여 한겨울에 찾아간 청주 산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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