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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산, 망우역사문화공원 늦가을 나들이


' 망우산, 망우역사문화공원 늦가을 나들이 '

망우역사문화공원 사색의길 동쪽 구간
▲  망우역사문화공원 사색의길

송촌 지석영묘와 지성주묘

죽산 조봉암묘

▲  지석영 선생묘와 지성주묘

▲  죽산 조봉암 선생묘


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대표 성지(聖地)이자 서울의 동쪽 지붕인 아차산(峨嵯山) 산줄기
는 남쪽은 아차산(295.7m), 중간은 용마산(龍馬山, 348m), 북쪽은 망우산(忘憂山, 281m
)으로 이루어진 남북으로 길쭉한 산맥이다. <옛날에는 중랑구 북부에 자리한 봉화산(烽
火山)까지 아차산의 일원이었음>

아차산과 용마산은 나의 즐겨찾기 뫼로 아침부터 저녁(야간 등산)까지 고루고루 찾아가
안긴 횟수만 무려 300회가 넘는다. 허나 망우산은 이상하게도 몸과 마음이 그리 가지를
않아 찾은 횟수는 거의 손에 꼽는다. 그렇다고 망우산이 매력과 볼거리가 부실한가. 그
것도 전혀 아니다. 고구려가 남긴 보루 유적이 4곳(시루봉보루 포함)이 전하고 있으며,
망우산에 상당수를 차지하는 망우역사문화공원에는 20세기 초/중기 유명 인물의 무덤이
많이 깃들여져 있다. 그것으로도 망우산의 매력은 차고 넘친다.
하여 그동안 소홀했던 망우산을 제대로 익히고 그곳의 미답처(未踏處)도 많이 정리하고
자 늦가을이 절정을 이루던 11월 한복판에 그의 품을 찾았다.


▲  망우저류조공원에서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인도하는 숲길


♠  망우역사문화공원(망우리묘지) 입문

▲  무덤들이 수북히 쌓인 망우저류조공원 동쪽 (망우역사문화공원)

이번 망우산 나들이는 망우리고개 서쪽에 자리한 망우저류조공원에서 시작했다. 그 공원에서
무덤들이 즐비한 동쪽 숲길을 4~5분 오르면 망우리고갯길(망우로)에서 올라온 2차선 길이 나
오는데, 그 길로 들어서 남쪽으로 조금 가면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가벽이 나온다.


▲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가벽 직전 (사색의길 북쪽 시작점)

서울의 거대한 동쪽 지붕인 아차산 산줄기의 북쪽을 맡고 있는 망우산은 서울 중랑구와 경기
도 구리시(九里市)에 걸쳐있는 뒷동산 같은 뫼이다.
남북으로 길쭉한 그의 품에는 망우역사문화공원이 넓게 둥지를 틀고 있는데, 그는 832,800㎡
에 덩치를 지닌 큰 공원이다. 지금은 달달한 뒷동산 공원으로 살아가고 있으나 그의 정체는
이름만 들어도 염통이 후덜덜한 망우리공동묘지(망우리묘지)이다. 서울의 유일한 공동묘지로
망우리고개부터 망우산 남쪽 자락까지 7,400여 기의 무덤을 지니고 있는데, 망우리묘지가 생
겨난 사연과 내력은 대략 이렇다.

고약했던 왜정(倭政) 시절, 서울 주변에는 경성부(京城府, 서울시)가 관리하는 이태원(梨泰院
) 공동묘지와 미아동(彌阿洞, 미아리) 공동묘지가 있었다. 왜정은 미아리묘지 과부하에 대비
하고 이태원묘지 일대에 주택을 조성하고자 1933년 2월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땅인 망우산
일대 임야 75만 평을 확보했는데, 그중 52만 평에 묘역을 닦기로 하고 그해 5월 27일 문을 여
니 이것이 망우리묘지의 시작이다.

37,000여 기를 지닌 이태원묘지는 1935년부터 미아리와 망우리로 분산 이장되었는데, 연고자
가 있는 무덤은 망우리로, 연고자가 없는 28,000여 기는 은평구 신사동(新寺洞)으로 보내 화
장 처리하고 망우리묘지 북쪽에 합장하여 위령비를 세웠다. 그리고 1938년에는 신촌 노고산(
老姑山)에 있던 노고산공동묘지까지 이곳으로 옮기면서 망우산 전체가 거대한 공동묘지가 되
었다.
왜정이 망우산에 공동묘지를 닦은 것은 서울 시민들의 무덤 수요를 해결하고자 함이지만 망우
리고개 동북쪽에 있는 조선 최대의 왕릉군인 동구릉(東九陵)의 기운을 유린하려는 사악한 의
도도 짙게 깔려있었다.

1971년 8월 7일 건설교통부고시 제465호로 공원 결정고시가 떨어졌으며, 1973년 3월 분묘 한
계치인 28,500여 기(봉분 47,754기)에 이르자 그해 5월부터 무덤 쓰는 것을 금했다. 이후 이
장과 납골을 적극 장려해 지금은 7,400여 기가 남았으며, 지금도 방을 빼는 무덤들이 꾸준하
여 계속 빈 자리가 늘고 있다.

1977년 4월 도시계획시설 공원으로 지정되어 망우묘지공원(망우공원)으로 간판을 바꾸었으며,
1998년 8월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망우리공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리고 그해 공원 산책로
인 사색의길(4.7km)을 닦아 세상에 내놓았다.
2005년 12월 27일 서울시고시 제2005-403호로 망우묘지공원 조성 계획이 수립되었으며, 2013
년에 망우리묘지를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2015년에서 2016년까지 망우리공원 인문학길
을 조성했으며, 2020년 7월에는 공원 관리권이 서울시에서 중랑구로 넘어갔다. 그리고 2022년
4월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이름을 새롭게 갈아 지금에 이른다.


▲  사색의길 북쪽 시작점(인물가벽)에서 바라본 망우산
가운데에 봉긋 솟은 뫼가 망우역사문화공원을 온몸으로 품고 있는
망우산 정상이다.


비록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이름과 성격이 세탁되었으나 공동묘지의 기능과 성격은 여전하다.
하여 산 도처에서 무덤들이 아주 쉽게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숲이 매우 삼삼하여 무덤을 포
근히 감싸고 있으며, 사색의길 등 상큼한 숲길이 많고, 풍경도 고와서 거닐기에 아주 좋다.
그러다 보니 무덤은 시각과 마음에 부담이 되는 존재가 아닌 대자연의 수채화에 살짝 녹아든
존재처럼 다가와 그리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게다가 두 귀가 쫑긋 반응을 보일 정도로 명성이 높은 20세기 초/중기 애국지사와 문학가, 정
치인들의 무덤이 30여 기가 전하고 있고, 그중 9기가 국가 등록문화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너른 대륙을 경영했던 고구려가 남긴 보루 유적 4곳(시루봉보루 포함)이 전하고 있어
오래된 볼거리도 넉넉하다.

또한 서울둘레길2코스가 사색의길 서쪽 길을 타고 남북으로 흘러가며, 중랑둘레길, 구리둘레
길, 용마산자락길 등 다양한 숲길이 앞다투어 닦여져 있다. 산세도 거의 완만하고 조망도 일
품이며, 볼거리도 풍부해 걷는 길이 썩 지루하지가 않다. 아니 지루할 틈도 주지 않는다.

* 망우역사문화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 02-2094-
  6800~6803)
* 망우역사문화공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늦가을에 잠긴 사색의길 동쪽 구간

사색의길 북쪽 시작점에는 이곳에 묻힌 유명 인사를 소개한 '인물가벽'이 있다. 여기서 길은
동/서로 갈라지는데, 이들 길은 망우역사문화공원의 대표 숲길인 사색의길(망우순환로, 4.7km
)로 순환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삼한 숲에 묻힌 느긋한 숲길로 이름 그대로 온갖 사색에 잠
겨 거닐기에 아주 좋으며, 유명 인사들의 무덤 대부분이 사색의길 주변에 머물고 있어 이 길
을 중심으로 그들을 찾아 나서면 된다.
나는 망우산2/3보루를 첫 메뉴로 정해서 그곳으로 접근하기 쉬운 사색의길 동쪽 길로 들어섰
다.


▲  은행나무 밑을 지나는 사색의길 동쪽 구간

▲  그윽하게 펼쳐진 사색의길 동쪽 구간

▲  송촌 지석영(松村 池錫永)묘와 지성주(池成周)묘

사색의길 동쪽 구간으로 들어서 야트막한 고갯길을 지나면 망우산2/3보루를 알리는 이정표가
손짓을 한다. 그 길은 망우산2/3보루와 정상으로 이어지는 망우산 능선길로 산길 주변으로 무
덤들이 즐비한데, 안내문을 지닌 무덤이 툭하면 나타나 내 취향을 저격한다. 그중 처음 등장
한 무덤이 종두법으로 유명한 송촌 지석영선생 묘이다.

지석영(1855~1935)은 충주지씨로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 태원(太原)이다. 종두법(種痘
法)으로 워낙 유명하여 의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는 벼슬을 지냈던 문신(文臣)이었으며,
국문학자로도 크게 활동했던 팔방미인의 인물이다.

10대 시절에는 개화사상가인 강위(姜瑋) 밑에서 유길준(兪吉濬)과 함께 공부했으며, 그때 청
나라에서 건너온 서양의학 번역서를 많이 익혔는데, 특히 E. 제너가 발견한 우두접종법(牛痘
接種法)에 큰 관심을 가지며 천연두 박멸을 위한 기초를 닦는다.
1876년 수신사(修信使)의 수행원으로 왜열도에 간 박영선(朴永善)이 종두법을 배우고 '종두귀
감(種痘龜鑑)'이란 서적을 입수하여 돌아오자 그에게 이를 전수 받았으며, 1879년 10월 부산
으로 내려가 제생의원(濟生醫院) 원장인 마쓰마에(松前讓)와 군의(軍醫) 도즈카(戶塚積齊)에
게 종두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해 12월 말, 두묘(痘苗)와 종두침(種痘針)을 얻어 서울로 오다가 처가 고향인 충주
덕산면에 들려 2살 애기였던 처남에게 종두를 처음으로 실시해 성공을 했다. 하여 처가 마을
어린이 40여 명에게도 접수해 그 동네는 천연두 공포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1880년 조선 조정이 왜열도로 2차 수신사를 파견하자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따라갔으
며, 왜국 내무성 위생국 우두종계소장(牛痘種繼所長)인 기쿠치(菊池康庵)에게 두묘의 제조와
저장법, 독우(犢牛. 송아지)로부터의 채장법(採漿法), 독우사양법(犢牛飼養法) 등을 배우고
두묘까지 얻어 귀국했다.
귀국 후 왜국공사관 의사와 접촉하며 우두 보급에 힘을 기울였으나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이 터지자 왜인(倭人)으로부터 의술을 배웠다는 죄로 체포령이 떨어져 급히 피신했다. 하지
만 그가 설치했던 종두장은 성난 군사들에게 파괴되고 말았다.
그해 10월 개화(開化)를 주장하는 국내외 인사들의 서적을 수집하여 간행하고 각 지방에서 추
천된 사람들에게 각종 문물을 익히게 할 것을 역설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883년 전라도암행
어사로 내려갔던 박영교(朴泳敎)의 요청으로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종두를 실시하면서 종
두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충청우도암행어사 이용호(李容鎬)의 요청으로 공주에도 우두국을 설
치했다.


▲  정면에서 바라본 지석영(왼쪽)묘와 묘비, 그리고 지성주(오른쪽)묘

1883년 3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
으며, 1885년에 그동안 쌓은 경험을 토대로 이 땅 최초의 우두 관련 서적이자 서양의학서인 '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했다.
1887년 개화당 인사들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신지도(薪智島, 전남 완도)로 유배되자 그곳에서
'중맥설(重麥說)'.'신학신설'을 저술했으며, 1892년 서울로 돌아와 이듬해 우두보영당(牛痘保
堂)을 설립하고 접종을 실시했다. 그리고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내무아문(內務衙門)
내에 위생국이 설치되자 종두를 관장하게 되었다.
이후 형조참의(刑曹參議)와 우부승지(右副承旨), 대구판관, 동래부사, 동래부관찰사 등을 역
임했고, 1897년 중추원(中樞院) 2등의관이 되었으나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한
이유로 이듬해 황해도 풍천으로 유배되었다.

1899년 의학교가 설치되자 초대 교장이 되어 교육에 힘썼으며, 종두 및 전염병 예방과 관련된
각종 관제와 규칙을 공포하도록 힘썼다. 그리고 1907년 의학교가 폐지되고 대한의원의육부(大
韓醫院醫育部)로 개편되자 교장직에서 물러나 학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스승 강위의 영향으로 한글(국문)에도 꽤 지식이 깊었다. 하여 국문학교(國文學校) 설립
에 크게 기여했으며, 의학교 학생 모집 때도 국문을 시험과목으로 채택했다. 1905년 '신정국
문(新訂國文)' 6개조를 상소하여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를 설치하게 하고 그 연구위원이 되었
으며, 1909년에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자전석요(字典釋要)'를 간행했다.
그리고 그해 4월 통감부(統監府)가 의학교육을 왜어(倭語)로 할 것을 요구하자 즉각 의견서를
제출하여 반대했으며, 국채보상연합회(國債報償聯合會) 부소장,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평의
원,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부회장 등으로 활발하게 애국 관련 사회활동을 벌였다. 하여 고
종(高宗)은 그의 공을 인정해 태극장(太極章)과 팔괘장(八卦章) 등을 수여했다.

1910년 8월 이후, 공직에서 물러나 왜정을 등지며 집에서 독서 등으로 여생을 보내다가 1935
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무덤은 작은 봉분과 1962년에 세운 묘비가 전부인 소박한 모습으로 그 옆에는 아들인 지
성주의 묘가 있는데, 비슷한 크기의 봉분과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을 지녔다.

지성주는 경성의전을 나와 내과의사로 활동했으며, 손자인 지홍창은 서울의대 출신으로 박정
희대통령의 주치의를 지냈다. 증손자 또한 내과를 경영해 한의사였던 지석영의 부친부터 무려
5대가 의사로 활동한 뼈대있는 의사 집안이다.


▲  망우산 능선길 (지석영 선생묘~망우산3보루 구간)

▲  망우산 역사의 전망대

지석영선생묘를 지나 망우산 능선길을 더듬으면 조망이 좋은 곳에 '역사의 전망대'란 전망대
가 마중을 한다.
아차산~용마산~망우산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닿아놓은 보루 유적과 백제가 쌓은 것으로 전해지
는 아차산성(阿且山城), 영화사와 범굴사(대성암) 등의 늙은 절, 아차산3층석탑과 온달샘석탑
등의 소소한 늙은 존재들, 그리고 근현대 인물이 많이 묻힌 망우리묘지도 품고 있다. 하여 아
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오랫동안 켜켜히 쌓인 역사의 상징성을 기리고자 '역사의 전망대'란
근사한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  역사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구리시 남부 지역과 한강, 강동구, 하남시, 남양주 와부읍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망우산 능선길 (망우산2,3보루)

▲  화가 이인성(李仁星) 묘

역사의 전망대를 지나면 이인성묘가 모습을 비춘다. 이인성(1912~1950)은 대구(大邱) 출신 화
가로 16세 때 방정환 등의 색동회가 주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 나가 '촌락의 풍경'이란 그
림으로 특선에 뽑혀 화가로 진출했다.
왜열도 유학 시절이던 19살에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수채화 '여름의 어느날'로 입선했으며, 23
살 때 조선미술박람회에서 '경주의 산곡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37
년 제16회 선전에서 최연소 추천작가가 되었다.

1945년 이후 이화여중과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가르쳤으며, 1949년 가을 국전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했으나 1950년 38세의 한참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월간미술 1998년 2월호에는 그를 근대
유화가 1위로 꼽았으며, '경주의 산곡에서','가을 어느 날'을 각각 공동 1위와 7위로 선정해
그를 기렸다.

그의 무덤에는 호석이 둘러진 봉분과 상석, 검은 피부의 묘비, 후학들이 세운 '근대 화단의
귀재'라 쓰인 표석이 있어 외롭지는 않은 모습이다.


▲  애국지사 김봉성(金鳳性) 묘터

김봉성(1900~1943)은 도산 안창호(安昌浩)의 조카사위(도산의 형인 안치호의 사위)이다. 그는
1919년 3.1운동 때 평북 선천군(宣川郡)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해 옥고를 치루었으며, 출옥 후
왜열도로 건너가 1922년 주오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넘어가 1927년 남캘
리포니아대학 경제학과를 수학했으며, 1930년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해 활동했다.

1933년 동아일보 선천지국 기자가 되었고, 1934년 3월에 안치호의 딸인 안맥결(安脈潔, 1901~
1976)과 혼인하여 부부가 안창호가 세운 점진학교의 교사로 일했다. 1938년 동우회(同友會)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으며, 1943년 12월 18일 불의의 연탄가스 중독사고로 딸 김자영과 정
말 허무하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도산과의 인연으로 그의 묘 오른쪽에 안장되었으며, 2005년에 이르러 늦게나마 건국포장을 추
서받았다. 그리고 2016년 4월 28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되면서 낙엽이 뒤덮힌 묘터와 비
석만 허전하게 남아 옛 무덤 자리를 지킨다.

김봉성의 부인인 안맥결은 독립운동가 출신의 경찰관으로 숙부인 도산의 뜻을 따라 평생 나라
를 위해 살았으며, 이 땅 최초의 여성경찰서장으로 위엄을 날리기도 했다.


▲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묘터와 묘비 (2022년 이전)

김봉성 묘터 옆에는 안창호의 묘비와 묘터가 있다. 그의 무덤 또한 이곳을 떠난 상태로 지금
은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에 머물고 있다.

이름도 꽤 익은 안창호(1878~1938)는 평남 강서(江西) 출신으로 1894년 상경하여 구세학당에
서 공부했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했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발전함에 따라 평양에
서 관서지부를 세우고 쾌재정(快哉亭)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백성들에게 자각(自覺)을 호
소했다.
1899년 강서군 화리에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고 황무지 개간사업도 병행해서 추진했으며,
1902년에 미대륙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친목회(韓人親睦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
출되었다. 1905년에 한인친목회를 발전시킨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이 되었
으며, '상부상조 조국광복'을 협회의 목적으로 삼고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행했다.
1907년 귀국하여 양기탁(梁起鐸), 안태국(安泰國), 이승훈(李昇蕓)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新
民會)를 조직하여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세웠으며, 주요 도시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두고, 자기회사(磁器會社)를 차려 다양한 방법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09년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세워 청년운동을 전개했는데, 안중근(安重根) 의거에 관련
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용산헌병대에 수개월 수감되기도 헸으며, 1910년 통감부의 도산내
각(島山內閣) 조직 권유를 거절하고 거국가(去國歌)를 남긴 후, 청나라로 망명했다.
1911년 북만주에서 무관학교를 세우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다시 미대륙으로 넘어갔으
며, 191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 중앙총회를 조직하
고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흥사단 조직에 착수하여 무실역행(務實力行), 건전인격(健
全人格), 단결훈련, 국민개업(國民皆業) 등 정신개조를 목표로 한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했으며
, 공립신문을 신한민보(新韓民報)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9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국민회(國民會) 대표를 파
견할 계획을 추진했으나 고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해(上海)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그를 초청하자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가 된다.
그는 연통제(聯通制) 실시, 독립신문 발간 등을 지도했으며, 그해 7월 2일에 임시사료편찬회
를 구성하고 그 총재가 되어 한일관계사료 전4권을 편찬 발행했다. 또한 임시정부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임시정부후원회를 조직하여 외국 교포들로부터 군자금을 지원받았으며, 1920년에
는 흥사단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를 설치하고 '대(對)미국의원시찰단준비위원장'이 되어 북
경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그해 8월에는 지방선전총판(地方宣傳總瓣)이 되어 민족의 단합을 호소하는 격문을 만주 등지
에 배포했으며, 임시정부의 세력 통일을 위해 노력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국무위원을
인책 사임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추진했다.
1921년 서울에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 평양에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를 설립했으며, 나중
에 이들 단체를 통합해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라 했다.

1923년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그는 부의장에 선임되었다. 허나 임시정부에
서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創造派)가 대립하자 이에 염증을 느끼고 북만주에 독립운동기지
인 이상촌(理想村) 건립을 추진했으며, 1924년 남경(南京)에서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해
실력배양운동의 기초를 다졌다.
군자금 확보를 위해 다시 미대륙으로 건너갔다가 1926년에 돌아와 만주 일대를 둘러보며 이상
촌 후보지를 물색하고 민족유일당 조직과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 발기 등을 추진했으나 여러
가지로 영 좋지 못한 일(독립군 간부 체포, 김좌진 암살, 만주사변 등)로 이상촌 건설은 실현
되지 못했다. 이후 상해로 돌아와 1930년 협동상조, 소비합작, 신용생산(信用生産) 등으로 생
활역량을 넓히고자 동인호조사(同人互助社)를 조직해 상해 지역 한인의 합심 협력을 계획했다.

1931년 1월 흥사단 제17회 원동대회를 주재하여 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흥사단보(興士團報
)를 발행했다. 그리고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가 흥사단의 취지에 따라 군자금 모집 계획을
세우자 설립목적이 동일한 동인호조사와 합병하여 공평사(公平社)로 개칭하고, 그 이사장에
취임해 생활 역량을 증강시키고자 소비, 신용, 생산 등의 합작운동(合作運動)을 추진했다.

바로 그해 만보산(萬寶山) 사건으로 한국 사람과 중원대륙 애들간의 충돌이 생기자 병인의용
대(丙寅義勇隊)와 노병회(勞兵會), 교민단(僑民團), 학우회(學友會), 여자청년동맹, 애국부인
회, 청년동맹 등의 한인 단체들이 연합해 상해한인단체연합회(上海韓人團體聯合會)를 조직했
다. 이에 안창호는 흥사단 대표로 참가해 중원대륙 애들을 설득하여 그들과 함께 왜군 토벌에
주력했다.

1931년 10월 이시영(李始榮), 김사집(金思潗), 김철(金澈)과 함께 교민단 심판원(僑民團 審判
員)으로 활동했으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로 뚜껑이 뒤집힌
왜경은 프랑스 조계 경찰의 협조를 받아 독립운동가 검거를 실시했다.
도산은 이런 정보를 알고 있음에도 어린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상해 하비로(霞飛路)에 있
는 이유필(李裕弼) 집을 찾았다가 잠복했던 왜경에게 체포되었으며, 바로 서울로 압송되어 그
해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았다.

1935년 2월 대전감옥에서 출옥하여 왜경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지방을 돌며 계몽 강연을 하였
으며, 평남 대보산(大寶山)에 은거하여 이상촌 건설을 계획했으나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관
계로 다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중병이 들어 그해 12월 보석으로 나왔다. 허나 건강은
악화되어 1938년 3월 세상을 떴으며, 그의 유언에 따라 아들처럼 아끼던 유상규묘 옆에 무덤
을 썼다.

1962년 정부에서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으며, 1973년 강남구 한복판에 도산
공원을 닦으면서 도산의 무덤과 1955년에 세운 묘비는 그곳으로 이장되었다.
2005년 도산 묘 앞에 새 비석을 세우자 이전 비석을 서울시와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도산기념
사업회가 협의하여 2016년 3월 1일 제자리인 이곳으로 가져왔으며, 2022년에 봉분을 새로 만
들어 지금은 가묘(假墓) 봉분과 지붕돌 묘비가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  태허 유상규(太虛 劉相奎)묘 - 국가 등록문화재 691-8호

유상규(1897~1936)는 평북 강계(江界) 출생이다. 경신중학를 거쳐 1916년 경성의전 1기로 입
학했으며, 1919년 3.1운동 때 경성의전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상해임시정부로 넘어가 도산 안창호의 비서관으로 활동했으며, 이때 흥사단에 가입했다.
도산의 권고로 귀국하여 1925년에 경성의전에 복학, 1927년 졸업하여 경성의전 강사 및 부속
병원 외과의사로 근무했으며, 동아일보사에서 주최한 강연회에 꾸준히 연사로 참석했다. 그리
고 잡지와 신문에 많은 글을 실어 민중의 의학적 계몽활동에 나섰고, 1930년에 조선의사협회
창설을 주도했다.
허나 1938년 중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안타깝게 단독에 감염되어 불과 39세의 나이로 병사
하고 만다.

그는 도산과 거의 부자(父子) 사이처럼 각별했는데, 자신의 아들 이름에 도산의 필명인 산옹
(山翁)의 '옹'을 넣어 '유옹섭'이라 했다. 태허의 사망 소식에 도산은 크게 통곡하면서 그의
장례를 직접 주관했으며, 2년 후 그의 무덤 오른쪽 위에 묻히면서 죽어서도 서로의 끈끈한 정
을 보였다. 그러다가 1973년 도산 묘가 강남구 도산공원으로 이장되면서 서로 떨어지게 된다.

유옹섭은 부친 묘와 도산 묘를 같이 돌보았는데, 2007년 보훈처로부터 부친 묘의 국립현충원
이장 허가를 받았으나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분과위원장이던 김영식의 권유와 부친의 도산
선생에 대한 마음을 헤아려 이장하지 않고 도산 묘터 복원에 힘쓰다가 2014년 사망했다.

무덤은 봉분과 상석, 향로석, 지붕돌 묘비로 이루어진 단출한 모습으로 '망우 독립유공자 묘
역 - 유상규묘소'란 이름으로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태허 유상규묘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  망우산3보루터

유상규묘를 지나면 망우산3보루터를 알리는 안내문이 마중을 한다.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일
대에서 늙은 보루터가 20곳 이상 발견되었고, 망우산에서 3개(시루봉보루를 포함하면 4개)가
나왔는데, 망우산 보루 3형제 중, 상태가 조금 나은 1보루만 국가 사적('아차산일대 보루군'
이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 455호로 지정됨)의 지위를 누리고 있고, 2보루와 3보루는 상태가 너
무 우울하여 아직까지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다.

망우산3보루는 망우리묘지를 닦는 과정에서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그로 인해 원래 형태와 규
모를 파악하기 어렵게 되었다. 다만 보루터 남쪽 비탈면에 무너진 석축 일부가 있고, 돌을 다
듬은 기법과 주변에서 고구려 토기 조각과 민무늬토기 조각이 나와 고구려가 조성한 것은 확
실하다.
이처럼 중요한 유적이 무덤에 자리를 내주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고, 1973년 이후 무덤들이 적
지 않게 빠져나가면서 자연 공간으로 많이 풀렸으나 아직도 무덤이 여럿 있어 그들이 모두 옮
겨진 이후에나 제대로 된 조사를 받을 수 있다. 하여 빠르면 내 다음 세대에서나 가능할 것이
다.

▲  숲과 산길, 무덤에 묻혀버린 망우산3보루터

▲  망우산2보루터

망우산 정상부 북쪽에는 망우산2보루가 폐허의 상태로 살짝 깃들여져 있다. 이곳은 망우리묘
지에게 철저히 희생되어 원래의 형태와 규모는 알 수가 없는 실정인데, 무덤 조성 때 쓰였던
보루터 석재와 주변에서 나온 고구려 토기 조각을 통해 고구려 보루로 여기고 있다.
보루터는 능선길과 그 주변에 희미하게 남아있는데, 무덤들이 적지 않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
어서 그들을 모두 옮기고 이곳을 싹 뒤집어야 이곳의 구체적인 정체를 캘 수 있을 것이다.


▲  망우전망대 (망우산 정상)

망우산2보루터 남쪽이 망우산의 정상(281m)이다. 이곳은 아차산 산줄기의 북쪽 지붕으로 2층
규모의 전망대가 닦여져 있는데, 여기서는 서울 동부와 북부 지역,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
불암산, 구리시, 하남시, 강동구, 한강이 그윽하게 두 눈에 들어온다.

* 망우산 정상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  망우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중랑구와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지역과 도봉산, 북한산(삼각산),
불암산, 봉화산 등이 시야에 들어와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망막이 제대로 위로를 받는다.

▲  망우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한강과 아차산 산줄기를 비롯해 강동구, 하남시, 남한산성, 검단산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망우산 정상에 작게 박힌
국가기준점(삼각점)


♠  망우산 마무리 (사색의길 동쪽 구간)

▲  다시 안긴 사색의길 동쪽 구간

망우산 정상에서 남쪽 능선길을 7~8분 내려가면 동락정 쉼터가 나온다. 이곳은 망우산 능선길
과 사색의길 동쪽 구간. 용마산과 시루봉 방향 산길이 만나는 요충지로 포장길로 닦여진 길이
사색의길이다. 마음 같아서는 시루봉과 사색의길 서쪽 길까지 범위를 넓히고 싶었으나 햇님의
퇴근시간이 임박하여 욕심을 버리고 아까 거닐다가 말았던 사색의길 동쪽 구간으로 빠져 북쪽
으로 내려갔다. (산은 도시보다 일찍 해가 짐)

사색의길 동쪽 구간에는 많은 무덤이 둥지를 틀고 있고, 그 사이사이에 안내문을 지닌 인사들
의 무덤이 섞여있다. 특히 만해 한용운과 조봉암, 오세창, 방정환 등 귀가 쫑긋 반응을 보일
정도로 유명한 인물도 많아 나들이의 재미를 더해준다. 하여 일몰까지 최대한 살피면서 망우
산의 여로(旅路)를 풍부히 살찌웠다.


▲  왜인 사이토 오토사쿠묘

망우리묘지에는 왜인들도 약간 자리를 축내고 있는데, 그중에는 사이토 오토사쿠(1866~1936)
란 자도 있다. 그는 이곳에 묻힌 왜인 중 가장 높은 벼슬을 했던 자로 왜정 칙임관(勅任官)
이상 관료 중 유일하게 이 땅에 묻힌 왜인이기도 하다.

사이토는 야마나시현 출신으로 동경대 임학과를 나와 농상무성 산림국에 취직, 대만과 야마나
시현을 거쳐 부해도 임정과장을 거쳤으며, 1909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농공상부 기사로 들
어왔다. 그 이듬해 왜정 초대 산림과장이 되었으며, 식목일을 만들고 미루나무와 아까시나무
를 이 땅에 도입했다.
1915년 영림창장을 거쳐 1918년에 퇴직했으나 조선에 계속 남아 사이토임업사무소를 세워 산
림위탁경영사업을 통해 녹화사업을 펼치며 배때기를 불렸다. 그에 대해서는 임업 근대화에 기
여했다는 평가와 산림 수탈에 앞장선 자라는 비난이 존재하나 후자에 더 무게를 두는 것이 진
리일 것이다. 어디까지나 왜정 중심으로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1936년에 사망했는데, 왜열도로 가지 않고 망우리묘지에 묻혔으며, 지금도 여전히 자리
를 축내고 있다.

이 무덤은 뚱뚱해 보이는 비석이 전부로 비석 밑에 화장된 유골을 묻은 전형적인 왜열도 무덤
스타일이다. 왜정 고위 관리의 무덤이라 해방 이후 적지 않게 고통을 당해 비석에 쓰인 글씨
까지 뜯겨져 나갔는데, 이는 왜정 시절 그들이 이 땅에 저지른 개짓거리에 대한 당연한 보복
이라 할 것이다.
비록 무덤 주인은 그 정도가 약했다고 하나 그건 사후에도 이 땅에 남은 그의 팔자이며, 비석
옆에는 꽃이 담긴 돌통(다른 인사의 무덤에도 모두 돌통이 있음)이 있는데, 이곳까지 온 기념
으로 돌통을 발로 뻥 넘어트리고 하얀 액체의 침을 여러 번 투하하며 자리를 떴다.


▲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巖)묘

이름도 꽤 익은 조봉암(1898~1959)은 강화도 출신이다. 1911년 강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강화군청 고원(雇員)으로 근무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하여 1년간 옥고의 고통
을 겪었다.
이후 출옥하여 YMCA 중학부에 입학했으며, 왜열도로 건너가 세이쏘꾸(正則) 영어학교에서 영
어를 익혔다. 중앙대학(中央大學) 정경학부에서 공부를 하다가 동경 유학생들이 조직한 사회
주의~무정부주의계열의 흑도회(黑濤會)에 들어갔는데, 그로 인해 그의 한때 본업이었던 공산
주의에 푹 빠지게 된다.

흑도회가 해산되자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항일단체인 조선노동총동맹 문화부책을 맡아 노
동운동을 했다. 1922년 소련령 웨르흐네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합동회의에 국내파 대표로
참가하여 공산당 파벌 통일에 노력했으나 실패했으며, 이후 통합대회 결렬 사유를 모스크바
코민테른대회에 보고했다.
1924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공산주의지도자 양성기관인 모스크바 동방지도자공산대학 단기과정
을 이수했으며, 그 뒤 귀국하여 신사상연구회, 북풍회 등 사회주의단체에서 활동했다. 이 두
단체는 화요회(火曜會)로 통합되었는데, 그 창설 주역으로 활동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조직에 참여했으며, 조선공산당 1차당 창당을 주도했다.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을 수습 조직하고 5월에 만주로 넘어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
하고 그 책임비서가 되었으며, 코민테른의 지시로 상해로 넘어가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의
조선대표도 겸직했다.
1926년 6.10만세운동으로 제2차 조선공산당 조직이 왜경에 의해 해체되자 제3차당인 ML당조직
에 참여했으나 국내당과 마찰을 빚어 지도 기능을 잃었다. 그 뒤 코민테른의 결정으로 1국1당
주의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들어갔다.

1932년 상해에서 왜국 영사경찰에 붙잡혀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옥살이를 했으며, 왜정에게
요시찰인물로 찍혀 1945년까지 대외활동을 못했다. 하여 이때 고향에서 김조이(金祚伊)와 혼
인하여 인천에서 조용히 은거했다. 그러다가 1945년 2월 왜경에 검거되어 수감되었다가 광복
으로 풀려난다.

광복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에 들어갔다가 1946년 사회주의계열인 민족전선에서 활동
했으며, 그해 5월 박헌영(朴憲永)의 공산주의노선을 공개서한을 보내 비판했다. 그리고 그 다
음 달(6월)에 '민족 전체의 자유생활보장'을 내걸고 노동계급의 독재, 자본계급의 전제를 다
같이 반대하는 중도통합노선을 주장하고는 조선공산당과 영원히 결별했다. 즉 공산당 노선에
서 자유민주주의로 갈아탄 것이다.
그해 8월부터 미군정의 좌우파합작을 지지하고 협력했으며, 1948년 5.30선거 때 인천에서 제
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직도 맡았다. 이승만 정권이 수립되자 초대 농
림부장관이 되었는데, 농지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허나 1949년 농림부장관 관사 수리비
를 농림부 예산으로 때운 것이 걸려서 그 책임을 지고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부의장에 선임되었다.

1952년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 나갔다가 이승만에게 밀려 낙선했으며, 1956년 11월 책임 있
는 혁신정치, 수탈 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의 3대 정강을 내걸고 사회민주주의 정당
인 진보당(進步黨)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 제3대 정/부통령선거에 박기출(朴己出)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우고 자신은 대통령에 출마했으나 또 낙선했다.
1957년 진보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1958년 5월 국회의원 선거에 지역구 후보
를 내세워 원내에 진출했다. 허나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정권 유지를 위해 그를 북한 간첩
으로 내몰아 1958년 1월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으며, 1959년 11월에 서둘러
처형시키고 말았다.

이후 1992년 10월 여야 국회의원 86명이 서명한 조봉암의 사면 복권 청원서가 국회에 제출되
었으며, 2007년 9월 27일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그가 연루된 진보당 사건이
이승만 정권의 반인권적 정치탄압이라 결론을 내리고, 국가에게 유가족에 대한 사과와 독립유
공자 인정, 판결에 대한 재심 등을 권고했다. 그리고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
를 선고 받으면서 간첩으로 몰려 오랫동안 고통 받은 그의 명예가 다소 회복되었다.

그의 무덤은 호석이 높이 둘러진 봉분과 지붕돌 묘비, 망주석, 장명등, 상석, 혼유석을 지니
고 있으며, 묘비에는 특이하게도 글씨가 없어 오랫동안 그의 누명을 침묵의 소리로 항변하고
있다.


▲  죽산 조봉암의 어록을 머금은 견고한 돌덩어리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허냐'

▲  만해 한용운(
萬海 韓龍雲) 묘 - 국가 등록문화재 519호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충남 홍성(洪城) 출생으로 본명은 유천(裕天, 어렸을 때 쓴 이름),
정옥(貞玉, 장성해서 쓴 이름)이며, 호는 만해이다.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웠으며 14세에 혼인을 했으나 1896년 홀연히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
암(五歲庵)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절의 허드렛일을 돌보다가 출가해 승려가 되었으며,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홀로 여행하다가 1905년 다시 설악산에 들어와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
을 스승으로 삼아 득도에 나섰다. <'만해'란 이름은 스승 만화(萬化)가 지어줌>

1908년에는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1명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
립하고 왜열도를 시찰하고 왔으며, 191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갔다가 1913년에 귀국, 불교학원
선생이 되었다. 바로 그해에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하여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
)에 입각해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했다.

1916년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했고,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하나로 독립선
언서(獨立宣言書)에 앞장 서서 서명했다. 그리고 3.1운동 이후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했다.
1926년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님의 침묵(沈默)'을 출간해 왜에 저항하는 저항문학에 앞장섰
으며, 1927년 신간회에 가입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이 되었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해 청년운동을 강화했으
며, 같은 해에 여러 뜻있는 이들의 도움으로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했다. 이후 많은 논
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했고, 1937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
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이후 왜정에 배타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불교 개혁과 문학활
동을 계속하다가 광복을 겨우 1년 앞둔 1944년 6월 29일,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쓸쓸히
눈을 감는다.

이곳에는 부인이 같이 묻혀있는데, 2기의 봉분과 지붕돌 묘비, 상석, 혼유석을 지니고 있으며
, 묘비에는 '부인유씨재우'라 쓰여 있으니 이는 부인이 만해 오른쪽에 묻혀있다는 뜻이다. 여
기서 오른쪽은 바라보는 입장이 아니라 만해가 머리를 북으로 하고 누운 상태에서의 오른쪽을
뜻한다고 한다. ('구리 한용운 묘소'란 이름으로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음)

* 만해 한용운묘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  박희도(朴熙道)묘

박희도(1889~1951)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종교인, 교육가이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에서 활동하다가 3.1운동 때 기독교계 대표 영입과 학생들의 참여에 크게 힘을 썼고 독립선언
33인 중 최연소자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복역하고 최초의 사회주의계 잡지 '신생활'을 발간해 독립운동에 진력
했으나 러시아혁명 기념 필화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서 2년간 징역살이를 했다. 1928년 중앙보
육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지내는 등 기독교 교육계의 지도층으로 활동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자치론의 길을 걸었다.
1949년 반민특위(反民特委)에 잡혀가 조사를 받고 풀려났으며, 육군정훈학교 출강 외에는 활
동을 하지 않다가 왜정 시절 옥고 휴유증으로 1951년에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봉분과 하얀 피부의 묘비, 상석, 혼유석을 지니고 있으며, 옆에 부인 묘가 있고
윗쪽에 부모 묘가 있다.
참고로 그의 동생인 박희성(1896~1937)은 연희전문(연세대) 출신으로 광복군 비행장교 1호로
미국에서 훈련을 받다가 안타깝게 순직했으며, 2010년 대전현충원에 안정되었다.


▲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묘 - 국가 등록문화재 691-1호

오세창(1864~1953)은 서화가이자 언론인으로 서울 출생이다. 부친 오경석(吳慶錫)은 청나라에
서 많은 서적을 가져와 개화에 앞장섰던 역관으로 오세창도 그런 부친의 영향으로 20세에 역
관이 되었다.
1888년 박문국(博文局) 주사로 있으면서 이 땅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 기자를 겸
임했으며, 우정국 통신국장 등을 거쳐 1897년에 1년간 왜열도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 교
사로 일했다. 

개혁당 사건으로 1892년 왜열도로 넘어갔으며, 거기서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에 들
어가 의암 손병희의 참모로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 대표로 독
립선언서에 서명했으며, 1922년에 손병희가 죽고 천도교 내부 갈등이 심해지자 그는 왜정에
비타협적인 보수파 노선을 지켰다. 그리고 왜의 감시를 피하며 독립운동가들과 수시로 교류를
했다.
1945년 이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고, 1946년 8월 15일에 민족대표로 왜국으로
부터 대한제국의 국세를 돌려받았다. 그리고 1949년 백범 김구의 장의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서화가이자 서예가로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있는 노고산천골취장비과 방정환묘비,
설태회 묘비에 글씨를 남겼으며,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의 스승으로 그에게 많은 도움과
가르침을 주었다.

무덤은 호석을 두룬 봉분과 지붕돌 묘비, 상석을 지니고 있으며, '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오
세창 묘소'란 이름으로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위창 오세창묘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  명온공주(明溫公主)와 김현근(金賢根)묘

망우역사문화공원에 깃든 7,400여 기의 무덤 중에서 제일 계급이 높은 무덤, 그리고 가장 늙
은 무덤은 무엇일까? 그 정답은 바로 명온공주(1810~1832)와 김현근(1810~1868)의 묘이다.

명온공주는 순조(純祖)의 딸이고 동갑내기 남편인 김현근은 안동김씨 집안으로 김상용(金尙容
)의 8대손이다. 김현근은 어려서부터 말과 글이 똑똑했다고 하는데, 순조가 명온공주의 남편
을 물색하고자 1824년에 12~15세 남성을 대상으로 간택령(揀擇令)을 내렸다. 그래서 그해 5월
22일 17명 후보 중에서 8명을 추렸고, 5월 25일에 다시 3명으로 줄였으며, 6월 2일 3번째 간
택에서 진사 김한순의 아들인 김현근이 최종 합격되어 동년위로 봉하고 그해 7월 17일 혼인을
했다.

명온공주는 일찍 병을 얻어 22세 때 사망하면
서 김현근은 20대의 한참 나이에 홀아비가 되
는 비운을 겪는다.
그는 청나라 사신 업무, 판의금부사(判義禁府
事) 등을 지내다가 58세에 사망했는데, 고종은
명온공주의 오라비인 효명세자<추존 익종(翼宗
)>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명온공
주와 김현근은 그의 고모와 고모부가 된다.
명온공주 묘는 합장분으로 이루어진 봉분 1기
와 지붕돌 묘비, 장명등, 상석을 지닌 조촐한
규모로 원래 종암동(鍾岩洞) 고려대 앞쪽에 있
었으나 1936년 이곳으로 이장되어 서민들 묘역
속에 들어앉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무덤의 사
이즈가 많이 왜소해졌다.
6.25 시절 망우리고개 일대가 격전지가 되면서
무심한 총탄에 장명등과 묘표의 지붕돌이 깨지
고 심지어 장명등은 통구이가 되는 등 크게 고
통을 당했으며, 상석 위에 꼬부랑 알파벳이 쓰
여 있는데, 이는 이곳 전투에 참여했던 어느
철딱서니 없는 양이(洋夷) 군사가 남긴 낙서이
다.

▲  명온공주와 김현근 묘표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있는 묘비 중
가장 늙은 존재이다.

▲  상석에 흉하게 새겨진 영문 낙서
세상에 낙서할 곳이 없어서 남의 무덤
상석에다가 저런 짓을 했단 말인가.

▲  지붕돌이 시커먼 장명등
6.25 때 지붕돌이 총탄으로 불에 탔고
추녀 귀퉁이도 크게 깨졌다.


▲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묘 - 국가 등록문화재 691-3호

명온공주묘 북쪽에는 어린이날로 유명한 소파 방정환(1899~1931)의 묘가 있다. 그는 서울 당
주동(唐珠洞) 출신으로 1913년 선린상업학교에 들어갔으나 2년 뒤 중퇴했으며 1917년에 비밀
결사로서 청년구락부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천도교에 들어가 손병희의 3째 딸인 손용화와 혼인했으며, 19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해 '신
청년','신여자','녹성' 등의 잡지 편집을 맡았다. 3.1운동 때는 손병희 밑에서 천도교 청년회
의 회원으로 3.1운동 준비에 나섰고, 오일철과 함께 집에서 '독립신문'을 등사하여 배포하던
중 왜경에 붙잡혔으나 석방되었다.
3.1운동 이후 왜열도로 건너가 동양대학 문학과에 진학하여 아동문학을 중심으로 공부했으며,
1921년 여름방학 때 잠시 귀국하여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어린이에 대한 존대말쓰기 운동
을 벌였다. 그리고 1922년에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간행했다.

1923년에 어린이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그해 3월 20일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으며, 고
한승(高漢承) 등과 '색동회'를 조직하여 어린이날을 만들어 5월 1일을 그날로 삼았다.
1924년 전국 소년지도자 대회를 개최하여 어린이단체의 단합을 추진했으며, 잡지 '별건곤(別
乾坤)'과 '신여성'을 발간하고, 동화대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1925년에는 소년운동협회를 조
직했고, 1927년에 조선소년총연맹의 발족으로 소년운동의 방향이 달라지자 일선에서 은퇴하여
강연회와 동화대회, 라디오 방송 등에서 주로 활동했다.
1928년 10월 2일부터 1주간 서울에서 세계아동 미술전람회를 개최했으며, 1931년에 새로운 월
간잡지인 '혜성'을 발간했으나 지나친 과로로 그만 큰 병을 얻어 쓰러지고 만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벗들에게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네' 유언을 남겼고, '여보게 밖
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

란 마지막 말을 남기며 32세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지금 많이 사용하는 '어린이'란 이름은 소파가 만든 것으로 그가 활동하던 시절까지 어린 아
이를 지칭하는 좋은 표현의 이름은 없었다. 그리고 어린이날을 제정해 이 땅의 어린이들에게
큰 선물을 주었으며, 그 짧은 인생을 어린이를 위해 모두 쏟아부을 정도로 어린이에 대한 사
랑과 관심은 실로 대단했다. 이후 한참의 세월이 흐른 1990년, 정부에서 그의 공훈을 기리고
자 늦게나마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소파의 유골은 홍제동(弘濟洞) 화장터에서 화장되어 그곳에 있었으나 1936년 후배 최신복(崔
信福, 1906~1945) 등이 모금 운동에 나서 현 자리에 무덤을 마련해 안착했다. 최신복은 소파
와 함께 개벽사에서 어린이 잡지를 만든 인물로 수원에 집안 묘역이 있음에도 자신의 부모 무
덤을 소파 묘 밑 왼쪽에 썼으며, 자신도 부인과 함께 그 밑에 묻혀 죽어서도 그와의 인연을
끈끈히 이어가고 있다.

무덤은 흙 봉분 대신 특이하게 쑥돌을 표석처럼 세워 해관 오긍선(海觀 吳兢善) 묘와 더불어
망우역사문화공원에서 개성파 무덤으로 꼽힌다. 비석 글씨는 위창 오세창이 썼으며, 표석 앞
에는 묘비와 상석을 두었는데, 다른 무덤에 비해 헌화된 꽃도 많은 편이라 그의 높은 인기를
보여준다.
(소파의 무덤은 '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방정환 묘소'란 이름으로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
었음)

* 소파 방정환 묘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방정환묘를 둘러보니 햇님은 완전히 퇴근하고 땅거미가 짙게 드리워져 세상은 검은색 도화지
가 되었다. 이것 외에도 유명 인사의 무덤을 여러 기 더 둘러보았으나 일몰 직전이라 사진이
나의 침침한 두 망막처럼 흐리멍텅하게 나와서 여기서는 생략했다.

이렇게 하여 망우산 늦가을 나들이는 나름 큰 성과를 거두며 기분 좋게 마무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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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11월 1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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