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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충민사


~~~ 여수 겨울 나들이 ~~~
(충민사, 석천사)

여수 충민사, 석천사
▲  여수 충민사, 석천사 모형도 (충민사 유물전시관)
 


겨울의 차디찬 바람이 옷깃을 더욱 여미게 하던 1월의 끝 무렵, 겨울 제국의 핍박에서 잠
시 벗어나고자 일행들과 따뜻한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햇님이 막 출근을 하던 이른 아침에 서울을 떠나 충북과 충남, 전북의 여러 곳을 두루 거
쳐 21시가 넘어서 여수(麗水) 땅에 들어섰다. 여수는 원래 계획에 없었으나 광양(光陽)에
서 저녁으로 광양불고기를 섭취할 때, 그곳 이야기가 나와 즉흥적으로 가게 되었다.

동광양에서 환상적인 야경을 자랑하는 이순신대교를 건너 여천공단을 가로질러 여수 시내
로 진입, 돌산대교와 가까운 봉산동에 여장을 풀고 과식에 가까운 여로(旅路)에 오지게도
고생한 몸을 뉘였다. 베게에 머리를 대기가 무섭게 잠이 들어 한 9시간 정도 달달하게 숙
면을 취했다.
여수는 향일암(向日庵)을 보러 4번이나 인연을 지은 아련하고도 달달한 추억이 있다. (향
일암을 4번이나 갔음) 그때(파릇파릇했던 20대 중~후반 시절)는 심야 무궁화호 열차를 5~
6시간이나 타고 내려갔었지. 허나 여수에서 하룻밤을 머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여수까지 즉흥적으로 오긴 했으나 정작 정처(定處)를 정하는데 많은 갈등이 생겼다. 딱히
땡기는 메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존재가 있어 그를 찾으니 바로 충
민사와 석천사였다.


♠  천하 최초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사당, 여수 충민사(忠愍祠)
- 사적 381호

▲  충민사의 정문인 숭모문(崇慕門)

전라선의 남쪽 종점인 여수, 의식과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격하게 떠오르는 존재가 하나 있
을 것이다. 바로 남해바다의 영원한 해신(海神)인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장군이다.
그는 1591년 여수에 설치된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좌수사(左水使)로 부임하여 왜군이 쳐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당시 여론을 과감히 무시하며 수군을 육성했다. 그 결과 전라좌수영
수군은 천하를 모두 씹어먹을 정도의 최강의 해군이 되어 임진왜란 때 거침없는 활약을 펼친
다.
특히 그 시절에 매우 흔했던 백병전(白兵戰) 대신 원거리 화포 공격을 중심으로 전쟁을 펼쳐
근대 해전의 효시로 격하게 추앙 받고 있으며, 그의 수군이 처리한 왜선은 800척 이상, 물고
기 밥으로 만든 왜군은 10만이 넘는다. 임진~정유란 때 조선에 투입된 왜군이 30만이 넘으니
1/3 가까이를 처리한 셈이다. 반면 이순신 수군의 피해는 아주 경미하다. (손상된 배는 없음,
전사자는 1,000명 이하, 그 유명한 한산도대첩 때 아군 사상자가 119명)

하늘도 놀라고 귀신도 울고 갈 전략으로 모든 해전에서 일방적에 가까운 연승을 거두어 왜군
은 그의 이름 3자에 오줌을 지리며 줄행랑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에 대한 왜인들의 두려움
이 얼마나 컸던지 이순신이 번개를 내리쳐 왜장을 죽이고 왜 수군을 격파했다고 했을 정도이
다.
이순신은 1598년 11월, 여수에서 가까운 남해 노량(露梁)에서 그의 마지막 작품인 노량해전(
露梁海戰)을 일구고 남해의 영원한 해신이 되었다.

그의 사당하면 아산 현충사(顯忠祠)가 대표적이다. 수학여행의 필수 답사지인 그곳 외에도 남
해 충렬사(忠烈祠), 고금도 충무사(忠武祠), 통영 충렬사 등 남해바다에 그의 사당이 여럿 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사당 중 제일 먼저 지어진 곳은 어디일까? 그 해답은 바로 여수 충
민사이다. 충민사는 현충사, 충렬사(통영, 남해)에 비해 인지도는 다소 떨어지나 충무공의 제
1호 사당으로 그 가치는 백두산에 붙어있을 정도로 크다.

체찰사(體察使)인 오성 이항복(李恒福)은 1601년 선조(宣祖)에게 충무공 사당 건립을 청했다.
그렇게 왕의 허락을 맡아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된 이시언(
李時言, ?~1624)을 시켜 사당을 세우니 그것이 충민사의 시작으로 우부승지(右副承旨)인 김상
용(金尙容)이 왕에게 청해 '충민사'란 사액을 받으면서 국가 공인 충무공 사당 제1호가 되었
다. (아산 현충사보다 103년, 통영 충렬사보다 62년이나 빨리 세워졌음)
충무공 외에도 의민공(毅愍公) 이억기(李億祺)와 충현공(忠顯公) 안홍국(安弘國)도 봉안했으
며, 나중에 충민공 이봉상(李鳳祥)을 추가해 별도 신묘(新廟)에 봉안하고 석천재(石泉齋)를
세웠다.

1732년에 중수했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정리 사업 때 충민단(忠愍壇)만 남기고 모두
철거되었으며, 1873년 지역 유림들의 건의로 다시 사당을 세웠다. 이때 판서(判書) 윤용술이
충민사 현판을 작성해 사당에 내걸었다.

1919년 고약한 왜정(倭政)이 충민사를 철거하면서 그 옆구리에 자리한 석천사가 충민사의 역
할을 도맡았으며 1947년 지역 주민들이 2칸 기와집을 지어 명맥을 유지하다가 1975년 정화사
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매년 음력 3월 10일에 춘기 석채례(釋菜禮)를 지내고, 음력 9월 10일에 추기 석채례를, 양력
4월 28일에는 충무공 탄신제를 지낸다.


▲  겨울 햇살이 잔잔히 내려앉은 충민사 외곽 공원

충민사는 사당 본전과 석천사, 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당 앞에는 공원이 닦여져 있어 평
화로운 풍경을 선사하며, 정문 동쪽에는 유물전시관이 있다. 그리고 사당 뒤에는 마래산(馬來
山, 386m)이 넓게 나래를 펼치며 여수 시내와 한려수도(閑麗水道)를 굽어본다.

▲  익살스럽게 생긴 연등동 벅수 모조품

정문 안쪽에는 연등동 벅수의 모조품 1쌍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지킨다. 벅수는
이 땅에 흔한 돌장승으로 여수 지역에서는 벅수라고 부른다.
연등동 벅수는 1788년에 지어진 것으로 좌수영 서문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여 좌수영과 마을
을 지키는 수호신 및 이정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좌수영과도 관련이 조금 있어 전라
좌수영을 천하 제일의 해군기지로 키웠던 이순신 장군의 사당, 충민사에 그 모조품을 세워 사
당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  충민사 홍살문
다소 차갑게 생긴 홍살문이 이곳이 성역임을 알리며 엄숙함을 요구한다.
다른 곳도 아니고 충민사 정도면 홍살문의 당부를 100% 지켜야 된다.

▲  충민사 약수터
내가 갔을 때는 부적합 딱지를 받은 상태였다. 부적합 판정에도 불구하고 마래산은
속세를 향해 아낌없이 물을 베푼다. 오염 정도는 낮아 보여 약수터 주변을 잘
정화하고 비도 적당히 와준다면 언제든 회생이 가능하다.

▲  충민사 정화사적비
박정희 정권이 1975년 충민사를 정화한 기념으로 세운 비석이다.

▲  경내를 가리며 계단을 길게 늘어뜨린 충민사 외삼문(外三門)

▲  충민사의 심장을 머금고 있는 내삼문(內三門)

▲  충민사 본전(本殿)
내삼문 안에 자리한 충민사 본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조그만 팔작지붕 집으로
충무공 이순신과 이억기, 안홍국이 봉안되어 있다. 현재 건물은 1975년에
새로 지어진 것으로 고색의 내음은 아직 여물지 못했다.

▲  충민사의 중심,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亂中日記)나 시문 등, 글씨는 많이 남겼으나 정작 그의 생전에 모습
은 남기지 못했다. 하여 그의 영정은 오로지 100% 상상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이 영정에는 아
주 개 같은 진실이 숨겨져 있어 심히 암 유발을 유도하고 있으니 바로 친일파 화가인 김은호
(金殷鎬)가 그렸다.
이 나라가 해방 이후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탓에 더러운 친일파 화가가 거룩
한 해신의 영정까지 그려넣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인데, 물론 김은호는 조선 황실의 어진화가
로 활동했을 정도로 능력은 대단하나 문제는 왜정에 적극 빌붙었다는 것이다.

친일매국노의 후손과 그 추종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행정, 역사, 교육, 문학 등 참
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말기 암 환자의 암세포처럼 몸살 나게 뿌리를 내리고 있어 이 나라를
크게 좀먹고 있다. 그들을 모두 청산하고 처단해야만 나라가 바로 서거늘 시간이 흐를수록 점
점 산으로 가고 있는 것이 실로 한탄스럽다.


▲  충민사 본전 좌측에 자리한 의민공 이억기의 영정

이억기의 영정 역시 상상으로 그려진 것이다. 누가 그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장군 뒤로 푸른 하
늘과 구름까지 묘사되어 있어 마치 상반신 사진을 찍어 그림처럼 표현한 것 같다.

이억기(1561~1597)는 왕족 출신으로 자는 경수(景受)이다. 수영과 무예에 능했으며, 17살에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이 되고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번호(蕃胡)가 압록강을 침범하자 경
흥부사(慶興府使)가 되어 그들을 때려잡았으며, 임진왜란이 터지자 전라우도 수사(水使)가 되
었다.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의 협조 요청을 받아 전라우도 소속의 함선과 수군을 이끌고 공동작전을
펼쳐 5년 넘게 왜 수군을 때려잡았으며, 이순신과도 매우 사이가 돈독했다.

1597년 이순신이 원균(元均)에게 참소를 당해 하옥되자 이항복, 김명원(金命元)과 함께 이순
신의 무죄를 변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원균이 통제사가 되어 무리하게 왜군 토벌에
나서자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랐다.
허나 칠천량에서 방심하고 쉬는 동안, 이순신의 수군에게 5년 넘게 탈탈 털렸던 왜 수군은 작
심하고 파상적인 공세를 펼쳤고 방심한 조선 수군은 우왕좌왕하며 크게 참패를 당했다. 이때
이억기는 분전했으나 힘이 다해 물에 빠져 전사했으며, 원균 또한 이순신이 힘들게 길러놓은
수군을 거하게 말아먹고 지옥으로 떨어졌다.

이후 이억기는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완흥군(完興君)에 봉해지고 충민사(忠愍
祠)에 봉안되었다.


▲  충민사 본전 우측에 자리한 충현공 안홍국 영정

안홍국(1555~1597)은 순흥안씨 집안으로 자는 신경(藎卿)이다. 1583년 무과에 급제했으며, 임
진왜란이 터지자 선전관(宣傳官)으로 선조를 의주(義州)까지 호종(扈從)했다.
영흥(永興)에 있는 임해군(臨海君)에게 왕명을 전했고, 삼남 지역의 여러 진과 전쟁터를 돌며
왕명을 전하는 역할을 맡다가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온갖 해전에서 공을 세웠다.

보성군수로 있던 중,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터지자 원균으로 주인이 바뀐 통제영(統制營)으로
달려가 그 중군이 되었다. 안골포(安骨浦) 해전에서 승리했으나 가덕도 해전에서 패해 전사했
으며, 이때 원균은 칠천량으로 후퇴했다.
이후 좌찬성(左贊成)이 추증되었고 여수 충민사와 보성 정충사(旌忠祠)에 배향되었다. 안홍국
역시 이억기처럼 암균이라 손가락질 받는 원균의 어리석은 전략으로 허무하게 전사했다.

이곳에 봉안된 안홍국의 영정을 보니 얼굴이 충무공 이순신과 비슷하다. 옷과 포즈만 다를 뿐
서로 비슷한 것이다. 아마도 그의 영정도 김은호가 그린 듯싶다. 문화재청과 충민사는 생각
이란 것이 있다면 친일파가 그린 영정은 내다 버리고 옛 무인에 어울리게 새 영정을 만들어
봉안해야 될 것이다. 해신이 된 충무공과 충현공(안홍국)도 그걸 간절히 원하고 있을 것이다.

* 충민사 소재지 :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 산114-12 (충민사길 52-23, ☎ 061-666-5738)

▲  귀부와 비신(碑身), 이수를 갖춘
충민사 사적비(事蹟碑)

▲  충민사 뜨락에 배치된 커다란 돌들
돌의 생김새를 봐서는 옛 충민사의
주춧돌로 여겨진다.


♠  충민사 마무리, 석천사와 유물전시관

▲  석천사(石泉寺) 경내

충민사 서쪽에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석천사가 둥지를 틀고 있다. 충민사와 늘 한몸처럼
지낸 단짝으로 지금도 서로 바짝 붙어 둘의 깊은 인연을 과시한다.

석천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화엄사(華嚴寺)의 말사(末寺)이다. 여수 지역에서 흥국사
(興國寺) 다음으로 명성이 있는 절로 신도 규모는 여수 지역 사찰 중 제일이라고 한다.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창건설과 1601년 창건설이 있는데, 1195년에 보조국사가
인근 흥국사와 함께 창건했다고 전하나 신빙성은 거의 없으며, 1601년에 옥형(玉炯)과 자운(
慈雲)이 창건한 것으로 크게 무게를 두고 있다. (절 안내문에도 1601년에 창건되었다고 나와
있음)

자운과 옥형은 승장(僧將)으로 300여 명의 승군(僧軍)을 이끌고 충무공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
갔다. 자운은 충무공이 지휘하는 배에 승선하여 많은 공을 세웠고, 옥형은 군량미를 조달하며
충무공의 식사와 차를 직접 챙겼다.
충무공이 전사하자 자운은 백미 600석을 마련하여 노량에서 수륙재(水陸齋)를 열었고, 음식을
성대하게 차려 충민사에 제를 올렸다. 옥형도 충무공을 따라다니며 큰 신임을 받았으며 그 은
혜를 조금이나마 갚고자 충민사 옆에 작은 초당을 짓고 그의 인품과 충절을 추앙하며 매일 사
당을 쓸고 닦고 제사도 직접 챙겼다. 바로 그 초당에서 석천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향교 교리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했던 박대복(朴大福)은 혼자서라도 충무공
에게 제향을 올리고 싶어서 충무공이 운동 삼아 물을 마셨던 마래산 자락 석간수(석천) 주변
에 두어 칸의 사당을 지었으며, 옥형이 그 옆에 작은 초당을 지어 충무공의 영정과 일생을 같
이 했다고 전한다.

석천사란 이름은 충민사 뒤쪽 큰 바위 밑에 있던 석간수에서 비롯되었으며, 왜정 때 충민사가
파괴되자 충민사의 역할을 임시로 맡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충민사를 손질하는 과정에서 일주문(一柱門)이 철거되고 대웅전과 요사(寮
舍)의 위치도 강제로 바뀌어 본래 모습을 많이 잃었으며, 경내 건물도 1980년대 이후 것들이
라 고색의 내음은 모두 말라버렸다.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의승당(義僧堂), 종각,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400년을 묵
은 절임에도 소장문화유산은 하나도 없다.

* 석천사 소재지 :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 1830 (충민사길 52-21, ☎ 061-662-1607)
* 석천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 흔쾌히 클릭한다.


▲  하얀 피부의 석조관세음보살입상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맨들맨들한 하얀 피부를 지닌 고운 보살상으로
근래 장만했다.

▲  석천사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  대웅전 앞에 놓인 석조(샘터)
마래산이 베푼 물이 풍부하게 쏟아져 나와 나그네의 갈증을 아낌없이
해소해 준다.

▲  경내 앞에 무성하게 자라난 동백나무
동백은 친 겨울파의 꽃이라 한겨울에도 푸른 녹음(綠陰)을 자랑한다.

▲  충민사 유물전시관

충민사 공원 동쪽에는 유물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전라좌수영과 충민사의 역사, 충무공 이
순신 관련 자료와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주로 복제품이 주류를 이룬다. 허나 충민사 유
허비 등 일부를 제외하고 딱히 두드러지는 전시물은 없어 일부만 본글에 소개한다.
(9시부터 18시까지 운영함, 겨울에는 17시까지, 입장료 없음)


▲  유물전시관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반기는 존재
충민사 성격에 걸맞게 제일 앞에 칼을 높이 든 이순신 장군을 비롯하여 승병,
군사, 의병, 화포, 거북선 등이 담겨져 있다.

▲  왼쪽부터 계사일기(1593년), 갑오일기(1594년), 병신일기(1596년),
정유일기(1597년) 2권, 무술일기(1598년)
저 일기 중 정유일기만 진품이고 나머지는 복제품이다.

▲  수군절도사가 사용했던 귀도(鬼刀)와 참도(斬刀)
저들도 모두 복제품임

▲  충민사 유허비(遺墟碑)

충민사 유허비는 진품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10세손(이름 부분은 마멸되어 확인 불가)이 병술
년(丙戌年, 1826년인듯?) 9월에 세운 것으로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정리 사업으로 충민사
가 문을 닫자 유허비도 손상을 당했다.
여수향교에서 이 비석을 수습해 66년간 품으면서 단비제(斷碑祭)를 지냈으며, 왜정 때 충민사
가 다시 파괴의 고통을 입자 왜정이 이 비석까지 괴롭힐까 우려하여 충민사 앞뜰에 몰래 묻어
버렸다.
이후 1975년 충민사를 손질했을 때 화단에서 분리된 채, 발견되었으며, 복원과정을 거쳐 유물
전시관에 전시하고 있다. 비석의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나중에 충민사 뜨락으로 옮길 계
획이라고 하며, 비석의 높이는 124cm, 폭 57.5cm, 두께 11.5cm이다.

충민사와 석천사를 간만에 둘러보고 여수와의 인연을 싹둑 정리하며, 보성(寶城), 고흥(高興)
지역으로 서둘러 넘어갔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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