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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완도 약산항일운동기념공원 (약산항일운동기념탑)

섬이 많은 전남 완도군에는 조약도라는 큰 섬이 있다. 약산면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그는 한때 약산

도라 불리기도 했는데, 고금도와 약산연도교로 이어져 있어 완도읍과 육지(강진군)에서도 편히 접

근이 가능하다. <완도읍에서 신지도, 고금도 경유 조약도 당목항까지 들어가는 군내버스가 30분 간

격으로 운행하며 버스비는 무료 / 광주에서 약산 당목으로 운행하는 시외직행버스가 1일 2~3회 정

도 운행하며 강진, 고금, 약산도 장용리 경유>

 

약산면의 중심지인 장용리에는 약산항일운동기념탑이 자리해 지나가는 나그네의 마음을 잠시 숙연

하게 한다. 이곳은 장용리(약산면사무소, 약산중고교가 있는 곳)에서 당목항으로 넘어가는 길목 고

개로 약산면사무소에서 동쪽으로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완도 지역은 고약했던 왜정 시절,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고장이다. 1913년 사립중화학원 설

립, 1914년에 수의위친계 조직, 1920년 배달청년회, 1923년 사립소안학교 설립 개교, 1924년 소안

노농대성회, 1926년 살자회, 1927년 일심단 등이 대표적이며, 천하에서 독립유공자를 가장 많이 배

출했다.

완도 사람들의 독립운동은 국내는 물론 바다 건너 우리의 옛 영역인 왜열도와 중원대륙에서도 전개

되었으며, 완도 지역에서는 특히 조약도 사람들의 활동이 대단했다. 그들은 교육사업으로 민족의식

을 깨우쳤고, 비밀결사를 통해 요원을 곳곳에 파견하여 왜군과 싸웠으며, 왜정의 불법적 법률에 대

해서는 법정에서 맞서 싸웠다.

 

1920년대 후반, 사립약산학교에서는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을 지역 학생들에게 교육시켜 인재들을 양

성했는데, 1930년대 약산 항일민족운동의 주역이 바로 그 학교를 나온 사람들이다.

1933년 '전남운동협의회'를 결성했는데, 정후균, 김옥도, 정부균, 정문두, 김경태, 정병래, 이영식, 박

천세, 곽사길, 최선일 등이 그 운동을 진행하다가 1934년 2월 왜경의 대검거로 조직이 와해되고 많은

이들이 체포되었다. 하여 검거된 정후균, 김옥도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윗줄에 언급된 인물들)들은 '

전남운동협의회재건위원회'를 조직하여 청년반, 농민반, 소년반을 구성했다. 그리고 러시아혁명기념

일, 메이데이기념일, 망년회(송년회) 등의 모임을 통해 조직원들의 의식을 높이고 단결을 굳건히 했

으며, 외부활동보다는 내실을 다지는데 중점을 두었다.

 

1938년 복역하고 나온 정후균이 조직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독립운동의 궁극적 목표를

'호남ML회' 구성에 두고 재건위원회의 이름도 '조약도ML회건설준비공작그룹'으로 갈았다.

그들은 조약도 내의 많은 마을을 비롯해 강진, 장흥, 해남, 영암 지역까지 연락관계를 넓혀갔다. 허나

그들의 활동영역 확대는 큰 왜경에게 감지되었고, 1938년 10월 관산리 노동야학사건이 발단이 되어

전체 조직원이 검거되는 비운을 맞는다.

 

약산 독립운동의 특징은 왜정의 개난리가 극심했던 1930년대 중/후반에 교육과 동맹을 중심으로 조

직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야학을 개설해 국어(조선어), 산술, 창가, 작문, 농민가, 왜어를 학생

들에게 가르쳤고, 주민 상당수가 수산업을 겸하면서 구성된 조합을 적극 활용해 조직원들이 해태 양

식의 분급위원 혹은 해태어업조합의 총대가 되어 활동하거나 위친계, 갑계 등을 적극 이용하는 등 합

법적인 조직에 들어가 활동하는 방식으로 조직망을 견고히 했다.

그들의 업적을 기리고자 2019년 8월 약산면 중심지 동쪽 고개에 약산항일운동기념탑과 기념공원을

닦았으며, 지역 사람들이 아낌없이 재정을 지원하여 아주 근사한 탑을 마련했다.

 

약산도의 중심지인 조약도는 이번이 첫 인연이다. 완도읍에서 당목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이곳

에 들어와 그를 보고 바로 군내버스를 타고 고금도로 나갔는데, 조약도에 있는 명소 가운데 접근성이

가장 좋은 곳이 이곳이다. (섬의 다른 명소들은 접근성이 좋지 못하거나 산을 타야됨)

 

2. 옆에서 바라본 약산항일운동기념탑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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