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상화와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넋이 깃들여진 도심 속의 포근한 산사 ~ 성북동 길상사(吉詳寺)
▲ 지장전에서 바라본 경내 - 절이 거의 숲을 이루다보니 나무에 가려 건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연등까지 가세해 그들의 숨바꼭질을 더욱 부추긴다. |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이자 아늑한 산사인 길상사는 졸부들의 저택과 고급 빌라가 홍수를 이루 는 성북동 북쪽에 자리해 있다. 비록 주택가에 터를 닦았지만 이곳이 북한산(北漢山, 삼각산) 남쪽 자락에 해당되어 '북한산(삼각산) 길상사'를 칭하고 있으며, 나무가 무성하고 계곡이 경내 를 가로질러 첩첩한 산골에 묻힌 산사의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자연과 인공이 같이 어우러진 사찰 풍경도 제법 아름답고 도심에 있음에도 북악산 백사골만큼이나 공기도 청정하다. 경내는 고요하고 아늑해 중생의 마음을 다독거려주고,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이채로운 볼거리가 두 눈을 호강시킨다.
길상사는 내가 좋아하는 고색의 내음이 서린 절도 아니고, 그렇다고 문화유산이 깃든 절도 아니 다. 역사는 겨우 16년, 절로 태어난 것은 18년으로 나보다 한참 나이가 적다. 이곳이 법등(法燈 )이 켜진 시간에 비해 유명세를 두드러지게 탄 것은 군사정권 시절 권력실세들이 들락거리던 고 급요정에서 누구나 의지할 수 있는 절로 거듭난 전대미문의 현장이며, 무소유(無所有)의 저자이 자 불교계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법정(法頂)이 가꾼 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급요정을 기증 한 김영한(길상화)의 이야기는 속인(俗人)들의 마음에 적지 않은 감동을 선사한다.
참고로 법정은 2010년 3월 11일 13시 52분께 78세의 나이로 길상사에서 입적했으며, 다음날 순 천 송광사(松廣寺)로 운구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입적을 애도했다.
|
▲ 창건주 김영한(길상화)의 영정 (극락전 내부 우측에 있음)
|
* 길상사의 창건주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의 생애와 고급요정에서 절로 탈바꿈된 길상사의 탄생 과정 길상사의 전신은 성북동 서쪽에 있는 삼청각(三淸閣)과 더불어 고급요정으로 악명을 떨쳤던 대 원각(大元閣)이다. 권력층과 부자들이 찾아와 기생을 끼고 놀던 요정으로 이곳을 세운 사람이 바로 김영한이다.
김영한은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이 일찍이 풍비박산이 났다. 그래서 16세에 궁중아악과 가 무(歌舞)를 가르치던 하규일(河圭一, 1867~1937)의 문하로 들어가 진향(眞香)이란 이름으로 기 생이 되었다. 그는 왜열도를 여행하다가 문학가로 유명한 백석(白石, 1912~1995)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당시 그는 조선일보 기자로 그녀를 자야(子夜)라 불렀다. 그들은 혼인을 약속했으나 백석의 부모가 쌍수를 들고 반대해 결국 이별하고 만다.
오기가 생긴 그는 악착같이 돈을 벌고 공부에 전념하여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으 며, 몇 편의 수필과 '내 사랑 백석','하규일 선생 약전' 등을 썼다. 또한 예전 기생을 했던 경 력을 바탕으로 고급 식당을 차리고자 도심과 가까운 곳을 물색하다가 계곡이 흐르는 지금의 길 상사 자리를 사들여 청암장(靑岩莊)이란 한식당을 냈다. <성북동에 서린 명당의 기운도 염두에 뒀을 것이다> 잠시 다른 사람에게 운영을 맡기기도 했으나 이후 대원각으로 이름이 갈아 자신이 직접 챙겼고 군사정권 시절에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정권 실력자와 졸부들이 구름처럼 몰려들면서 삼청 각, 청운각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고급 요정으로 명성을 날린다.
대원각 단골들이 정/재계에서 죄다 잘나가는 작자들이라 포크레인으로 돈을 쓸어담을 정도로 대 박 수입을 자랑했던 김영한, 허나 그는 혼인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돈과 명예를 위해 악착 같이 살았던 그였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그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서서히 깨달았고 그 와중에 법 정의 '무소유'를 읽고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친견해 여러 법문을 들었고, 결국 모든 것을 내놓기로 결심, 1987년 법정에게 절집 으로 써달라며 대원각을 통채로 기증했다. 허나 갑작스런 거액의 기증에 법정은 크게 펄펄 뛰며 거절했다. 당시 대원각의 면적은 7천여 평, 시가는 무려 1,000억원을 헤아렸다.
김영한은 그에 굴하지 않고 8년 동안 끈질기게 기증의 뜻을 보였고, 결국 1995년 법정은 그곳을 받아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넘겼다. 송광사는 대원각을 대법사(大法寺)로 이름을 고치고 송광 사의 말사(末寺)로 삼았으며, 1997년 송광사의 옛 이름인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그해 12월 14 일 개원법회를 열었다. 법회에는 천주교의 고(故)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시민, 불자 4,000여명이 구름처 럼 참석했는데, 법정의 이끌림에 대중 앞에 선 그는 자신의 부질없는 삶을 이렇게 드러내며 대 중의 심금을 진하게 울렸다. '저는 죄가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쪽에 보이는 팔각정을 보면서)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요정시절 기생들)이 옷을 갈아입던 곳이었습니다. 제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상사의 창건주가 된 김영한은 법정으로부터 길상화(吉祥花)란 법명과 함께 염주를 받 았으며, 옛 사랑인 백석을 기리고자 2억 원을 내놓아 백석문학상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불교에 귀의하며 말년을 지내던 그는 1999년 11월 14일 83세의 나이로 외로운 삶을 마감 했다. 그가 죽기 하루 전날, 절에 들어와 목욕재계하고 예불을 올리며, 길상헌에서 인생의 마지막 밤 을 보냈는데, 당시 길상사 주지 청학(靑鶴)에게 '내가 죽으면 눈이 내릴 때 절 마당에 뿌려주세요' 유언을 했다. |
▲ 길상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법정스님의 영정
|
중생의 오열 속에 그의 육신은 산산히 화장(火葬)되고 유골은 49재 이후 유언에 따라 첫눈이 절 을 하얀 수채화로 채색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그 자리에는 조촐하게 공덕비를 세워 그를 기리며, 매년 음력 10월 7일에 기제(忌祭)를 올린다. 또한 절은 그의 뜻을 받들어 대 중에 널리 문을 열었고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해마다 30여 명의 중고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김영한은 막대한 재산을 가진 부자였지만, 돈을 신으로 받들며 사람 무시를 예사로 여기는 우리 나라 졸부들과 달리 모든 것을 내버리고 빈털털이가 되어 인생을 마무리했다. 공수래 공수거의 진리를 일찍 깨달은 것이다. 그는 자손도 남기지 못했고 한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 지 10여 년이 넘었지만, 그의 눈물 어린 사연과 함께 아름다운 넋과 마음은 여전히 그의 유작(遺作) 이라 할 수 있는 길상사에 고이 깃들여져 속세에 오염되고 상처받은 중생의 메마른 마음에 감동 의 싹과 눈물을 틔우게 한다. 또한 그가 속세에 준 커다란 선물(길상사) 덕분에 졸부들로 진흙탕이 된 성북동 부촌(성북길 북 쪽) 한복판에 진흙탕에 피어난 한송이 연꽃처럼 중생들이 편안히 찾아와 안길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길상사가 아니었다면 이곳은 걸어다니거나 행색이 초라한 행자를 이상히 여겨 경 찰에 신고를 하는 요지경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
|
|
▲ 길상화 공덕비 |
▲ 김영한(길상화)이 숨을 거둔 길상헌 |
* 길상사의 현재 길상사의 불전(佛殿)은 지장전을 제외하고 기존 요정시절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경내에는 법당 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지장전, 설법전, 종무소, 범종각, 길상선원, 유마선방, 침묵의집, 진영각 , 등 2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오래된 절이 아니다 보니 문화유산은 딱히 없으나 오 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보호수의 지위를 누리며 뜨락에 그늘을 드리운다.
또한 시민운동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根本道場)으로 매년 5월에 법회와 길상음악회를 연 다. 법회 때는 고(故) 법정이 자주 법회를 주관했으며, 그를 보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었다. 길상음악회는 다양한 테마의 음악을 선보이는 자선음악회로 여기서 나오는 수입은 어려운 이들을 위해 쓴다.
휴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넓은 경내에 빈 공간이 없을 지경이며, 평일에도 적지 않게들 찾아와 길상사의 높은 인기를 보여주는데, 그 방문객 수는 서울 굴지의 고찰인 조계사, 봉은사 (奉恩寺), 도선사(道詵寺), 진관사(津寬寺) 정도는 될 것이다.
* 속인(俗人)들을 위한 다양한 참선 프로그램 1. 길상선원(吉詳禪院) - 상설 시민선방으로 길상사에서 하는 1박 2일 선수련회에 3회 이상 참 여하거나 3박 4일 여름 특별 선수련회 참여자, 또는 다른 절의 선수련회에 참여한 뒤 길상사 1 박2일 선수련회에 1회 참여한 사람에 한해 방부<房付, 선방에 안거(安居)를 청하거나 승려가 다 른 절에 가서 잠시 있기를 청하는 것>가 가능하다. 기존 이용자는 매월 25~31일까지, 신규 이용자는 매월 1~3일에 방부를 들일 수 있다. 방부가 승 인된 사람은 일정액의 방부비를 내고 이용하며, 한달에 5일 이상은 출석해야 된다. 선원 출입시 간은 매 정시에서 10분 사이이다.
2. 침묵의집 - 길상사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침묵의집은 '침묵의집에서 침묵을, 침묵 속에 서 고요함을, 고요함 속에서 평화를'이란 테마로 누구나 자유롭게 명상과 좌선을 할 수 있는 공 간이다. 이용시간은 오전 10시부터 17시까지이며, 일요일은 16시부터 17시까지만 이용이 가능하 다. (특별행사가 있는 날은 거의 이용 불가)
3. 템플스테이(Temple Stay) - 1달에 2번 열리는 주말선수련회는 수련형 템플스테이로 1박 2일 일정으로 이루어진다. 사찰예절과 경내 탐방, 예불습의, 발우공양, 참선, 108배, 차담, 자유포 행 등을 하며, 108배가 가능한 사람만 참여할 수 있다. 참가비는 5만원이다. (기타 여름선수련 회와 2~4시간 일정으로 이루어지는 템플라이프도 있음) 자세한 정보는 길상사 홈페이지 참조 (아래 사진들을 클릭바람) |
|
|
▲ 2012년 11월에 지은 길상보탑 |
▲ 설법전 |
※ 길상사 찾아가기 (2013년 4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초교 하차, 내 린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가면 바로 성북초교3거리가 나오는데, 거기서 왼쪽 선잠로를 따라 들어간다. (이정표가 갈림길마다 설치되어 있어 찾기는 쉬움) * 길상사 셔틀버스가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 동원마트(6번 출구를 나와서 50m 직진)에서 1일 8 회 운행한다. 출발시간은 8:30, 9:20, 9:40, 10시, 12시, 13시, 15시, 16:30분이다. * 매년 음력 10월 7일에는 길상화 기제가 열린다. * 매년 음력 1월 26일에는 법정의 추모 법회가 열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323 (☎ 02-3672-5945) * 길상사 홈페이지는 위의 길상보탑과 설법전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