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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동 길상사 나들이 '

▲  길상사의 명물, 관음보살상


봄과 여름의 경계인 5월의 한복판에 후배 여인네와 성북동 길상사를 찾았다. 간송미술관과
더불어 성북동(城北洞)의 대명사이자 꿀단지로 자리잡은 길상사는 2007년부터 문턱이 닳도
록 찾은 절이건만, 그곳에 제대로 퐁당퐁당 빠졌는지 성북동의 여러 명소와 더불어 자꾸만
손과 발이 가는 곳이다. 나는 묵은 내가 나는 오래된 절집을 좋아하는지라 역사가 짧은 절
은 어지간해서는 관심을 잘 주지 않는데, 길상사는 그 예외인 것이다. 매년 5~7번 정도 발
걸음을 하여 어언 30회가 넘게 찾았다.


길상사는 성북동 북쪽 구석에 자리해 있는데, 성북초교에서 선잠로를 따라 12분 정도 가면 길
상사가 뚜렷히 모습을 비춘다. 그 12분의 짧은 구간은 졸부들의 으리으리한 금입택(金入宅)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현장이다. 보기만 해도 주눅이 잔뜩 들고 마음 마저 편치 않게 만든다.
졸부들의 폐쇄성과 이 땅에서 나날이 심각해져 가는 빈부격차를 보여주듯이 담장은 높고 요새
같으며, 대문은 충차(衝車, 공성무기의 하나)로도 어림 없을 정도로 견고하게 보인다. 그것으
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방범장치가 겹겹이 설치되어 지나가는 나그네를 불편하게 응시한다.

저택과 고급빌라 뜨락에는 담장 밖으로 손을 내민 나무들로 삼삼한 숲길만큼이나 푸르름이 가
득하다. 도심과 가까움에도 분위기도 차분하여 산책 코스로도 아주 좋지. 그래서 나는 서울에
서 늦가을이 가장 아름다운 장소로 창덕궁 후원, 부암동과 더불어 성북동을 1순위로 꼽는다.
비록 나처럼 없는 사람들이 오기에는 조금 꺼림칙한 곳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주눅들 필요까지
는 없다. 제아무리 저택이라 한들 대자연 앞에선 모두 모래성만도 못한 하찮은 존재기 때문이
다. 괜히 기죽지 말고 당당히 가슴을 피며 산책을 즐기면 그만이다.
또한 성북동은 예로부터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의 명당자리로 명성이 자자했다. 성북동이 우
리나라의 0.1%가 산다며 우스개 소리가 나올 정도로 졸부들의 소굴이 된 것도 바로 명당의 기
운을 누리고자 함이다. 그러니 명당의 기운을 졸부들이 다 가져가게 두지 말고 성북동을 거닐
면서 그 기운을 조금이나마 챙겨가기 바란다.


♠  길상화와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넋이 깃들여진 도심 속의 포근한 산사
~ 성북동 길상사(吉詳寺)

▲  지장전에서 바라본 경내 - 절이 거의 숲을 이루다보니 나무에 가려
건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연등까지 가세해 그들의
숨바꼭질을 더욱 부추긴다.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이자 아늑한 산사인 길상사는 졸부들의 저택과 고급 빌라가 홍수를 이루
는 성북동 북쪽에 자리해 있다. 비록 주택가에 터를 닦았지만 이곳이 북한산(北漢山, 삼각산)
남쪽 자락에 해당되어 '북한산(삼각산) 길상사'를 칭하고 있으며, 나무가 무성하고 계곡이 경내
를 가로질러 첩첩한 산골에 묻힌 산사의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자연과 인공이 같이 어우러진
사찰 풍경도 제법 아름답고 도심에 있음에도 북악산 백사골만큼이나 공기도 청정하다. 경내는
고요하고 아늑해 중생의 마음을 다독거려주고,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이채로운 볼거리가 두
눈을 호강시킨다.

길상사는 내가 좋아하는 고색의 내음이 서린 절도 아니고, 그렇다고 문화유산이 깃든 절도 아니
다. 역사는 겨우 16년, 절로 태어난 것은 18년으로 나보다 한참 나이가 적다. 이곳이 법등(法燈
)이 켜진 시간에 비해 유명세를 두드러지게 탄 것은 군사정권 시절 권력실세들이 들락거리던 고
급요정에서 누구나 의지할 수 있는 절로 거듭난 전대미문의 현장이며, 무소유(無所有)의 저자이
자 불교계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법정(法頂)이 가꾼 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급요정을 기증
한 김영한(길상화)의 이야기는 속인(俗人)들의 마음에 적지 않은 감동을 선사한다.

참고로 법정은 2010년 3월 11일 13시 52분께 78세의 나이로 길상사에서 입적했으며, 다음날 순
천 송광사(松廣寺)로 운구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입적을 애도했다.


▲  창건주 김영한(길상화)의 영정 (극락전 내부 우측에 있음)

* 길상사의 창건주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의 생애와 고급요정에서 절로 탈바꿈된 길상사의
탄생 과정
길상사의 전신은 성북동 서쪽에 있는 삼청각(三淸閣)과 더불어 고급요정으로 악명을 떨쳤던 대
원각(大元閣)이다. 권력층과 부자들이 찾아와 기생을 끼고 놀던 요정으로 이곳을 세운 사람이
바로 김영한이다.

김영한은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이 일찍이 풍비박산이 났다. 그래서 16세에 궁중아악과 가
무(歌舞)를 가르치던 하규일(河圭一, 1867~1937)의 문하로 들어가 진향(眞香)이란 이름으로 기
생이 되었다. 그는 왜열도를 여행하다가 문학가로 유명한 백석(白石, 1912~1995)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당시 그는 조선일보 기자로 그녀를 자야(子夜)라 불렀다. 그들은 혼인을
약속했으나 백석의 부모가 쌍수를 들고 반대해 결국 이별하고 만다.

오기가 생긴 그는 악착같이 돈을 벌고 공부에 전념하여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으
며, 몇 편의 수필과 '내 사랑 백석','하규일 선생 약전' 등을 썼다. 또한 예전 기생을 했던 경
력을 바탕으로 고급 식당을 차리고자 도심과 가까운 곳을 물색하다가 계곡이 흐르는 지금의 길
상사 자리를 사들여 청암장(靑岩莊)이란 한식당을 냈다. <성북동에 서린 명당의 기운도 염두에
뒀을 것이다>
잠시 다른 사람에게 운영을 맡기기도 했으나 이후 대원각으로 이름이 갈아 자신이 직접 챙겼고
군사정권 시절에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정권 실력자와 졸부들이 구름처럼 몰려들면서 삼청
각, 청운각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고급 요정으로 명성을 날린다.

대원각 단골들이 정/재계에서 죄다 잘나가는 작자들이라 포크레인으로 돈을 쓸어담을 정도로 대
박 수입을 자랑했던 김영한, 허나 그는 혼인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돈과 명예를 위해 악착
같이 살았던 그였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그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서서히 깨달았고 그 와중에 법
정의 '무소유'를 읽고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친견해 여러 법문을 들었고, 결국 모든 것을 내놓기로 결심, 1987년 법정에게 절집
으로 써달라며 대원각을 통채로 기증했다. 허나 갑작스런 거액의 기증에 법정은 크게 펄펄 뛰며
거절했다. 당시 대원각의 면적은 7천여 평, 시가는 무려 1,000억원을 헤아렸다.

김영한은 그에 굴하지 않고 8년 동안 끈질기게 기증의 뜻을 보였고, 결국 1995년 법정은 그곳을
받아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넘겼다. 송광사는 대원각을 대법사(大法寺)로 이름을 고치고 송광
사의 말사(末寺)로 삼았으며, 1997년 송광사의 옛 이름인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그해 12월 14
일 개원법회를 열었다.
법회에는 천주교의 고(故)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시민, 불자 4,000여명이 구름처
럼 참석했는데, 법정의 이끌림에 대중 앞에 선 그는 자신의 부질없는 삶을 이렇게 드러내며 대
중의 심금을 진하게 울렸다.
'저는 죄가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쪽에 보이는 팔각정을 보면서)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요정시절 기생들)이 옷을 갈아입던 곳이었습니다. 제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상사의 창건주가 된 김영한은 법정으로부터 길상화(吉祥花)란 법명과 함께 염주를 받
았으며, 옛 사랑인 백석을 기리고자 2억 원을 내놓아 백석문학상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불교에 귀의하며 말년을 지내던 그는 1999년 11월 14일 83세의 나이로 외로운 삶을 마감
했다.
그가 죽기 하루 전날, 절에 들어와 목욕재계하고 예불을 올리며, 길상헌에서 인생의 마지막 밤
을 보냈는데, 당시 길상사 주지 청학(靑鶴)에게
'내가 죽으면 눈이 내릴 때 절 마당에 뿌려주세요'
유언을 했다.


▲  길상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법정스님의 영정

중생의 오열 속에 그의 육신은 산산히 화장(火葬)되고 유골은 49재 이후 유언에 따라 첫눈이 절
을 하얀 수채화로 채색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그 자리에는 조촐하게 공덕비를
세워 그를 기리며, 매년 음력 10월 7일에 기제(忌祭)를 올린다. 또한 절은 그의 뜻을 받들어 대
중에 널리 문을 열었고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해마다 30여 명의 중고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김영한은 막대한 재산을 가진 부자였지만, 돈을 신으로 받들며 사람 무시를 예사로 여기는 우리
나라 졸부들과 달리 모든 것을 내버리고 빈털털이가 되어 인생을 마무리했다. 공수래 공수거의
진리를 일찍 깨달은 것이다. 그는 자손도 남기지 못했고 한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 지
10여 년이 넘었지만, 그의 눈물 어린 사연과 함께 아름다운 넋과 마음은 여전히 그의 유작(遺作)
이라 할 수 있는 길상사에 고이 깃들여져 속세에 오염되고 상처받은 중생의 메마른 마음에 감동
의 싹과 눈물을 틔우게 한다.
또한 그가 속세에 준 커다란 선물(길상사) 덕분에 졸부들로 진흙탕이 된 성북동 부촌(성북길 북
쪽) 한복판에 진흙탕에 피어난 한송이 연꽃처럼 중생들이 편안히 찾아와 안길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길상사가 아니었다면 이곳은 걸어다니거나 행색이 초라한 행자를 이상히 여겨 경
찰에 신고를 하는 요지경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  길상화 공덕비

▲  김영한(길상화)이 숨을 거둔 길상헌

* 길상사의 현재
길상사의 불전(佛殿)은 지장전을 제외하고 기존 요정시절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경내에는 법당
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지장전, 설법전, 종무소, 범종각, 길상선원, 유마선방, 침묵의집, 진영각
, 등 2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오래된 절이 아니다 보니 문화유산은 딱히 없으나 오
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보호수의 지위를 누리며 뜨락에 그늘을 드리운다.

또한 시민운동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根本道場)으로 매년 5월에 법회와 길상음악회를 연
다. 법회 때는 고(故) 법정이 자주 법회를 주관했으며, 그를 보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었다. 길상음악회는 다양한 테마의 음악을 선보이는 자선음악회로 여기서 나오는 수입은 어려운
이들을 위해 쓴다.

휴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넓은 경내에 빈 공간이 없을 지경이며, 평일에도 적지 않게들
찾아와 길상사의 높은 인기를 보여주는데, 그 방문객 수는 서울 굴지의 고찰인 조계사, 봉은사
(奉恩寺), 도선사(道詵寺), 진관사(津寬寺) 정도는 될 것이다.

* 속인(俗人)들을 위한 다양한 참선 프로그램
1. 길상선원(吉詳禪院) - 상설 시민선방으로 길상사에서 하는 1박 2일 선수련회에 3회 이상 참
여하거나 3박 4일 여름 특별 선수련회 참여자, 또는 다른 절의 선수련회에 참여한 뒤 길상사 1
2일 선수련회에 1회 참여한 사람에 한해 방부<房付, 선방에 안거(安居)를 청하거나 승려가 다
른 절에 가서 잠시 있기를 청하는 것>가 가능하다.
기존 이용자는 매월 25~31일까지, 신규 이용자는 매월 1~3일에 방부를 들일 수 있다. 방부가 승
인된 사람은 일정액의 방부비를 내고 이용하며, 한달에 5일 이상은 출석해야 된다. 선원 출입시
간은 매 정시에서 10분 사이이다.

2. 침묵의집 - 길상사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침묵의집은 '침묵의집에서 침묵을, 침묵 속에
서 고요함을, 고요함 속에서 평화를'
이란 테마로 누구나 자유롭게 명상과 좌선을 할 수 있는 공
간이다. 이용시간은 오전 10시부터 17시까지이며, 일요일은 16시부터 17시까지만 이용이 가능하
다. (특별행사가 있는 날은 거의 이용 불가)

3. 템플스테이(Temple Stay) - 1달에 2번 열리는 주말선수련회는 수련형 템플스테이로 1박 2일
일정으로 이루어진다. 사찰예절과 경내 탐방, 예불습의, 발우공양, 참선, 108배, 차담, 자유포
행 등을 하며, 108배가 가능한 사람만 참여할 수 있다. 참가비는 5만원이다. (기타 여름선수련
회와 2~4시간 일정으로 이루어지는 템플라이프도 있음)
자세한 정보는 길상사 홈페이지 참조 (아래 사진들을 클릭바람)

▲  2012년 11월에 지은 길상보탑

▲  설법전

※ 길상사 찾아가기 (2013년 4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초교 하차, 내
  린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가면 바로 성북초교3거리가 나오는데, 거기서 왼쪽 선잠로를
  따라 들어간다. (이정표가 갈림길마다 설치되어 있어 찾기는 쉬움)
* 길상사 셔틀버스가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 동원마트(6번 출구를 나와서 50m 직진)에서 1일 8
  회 운행한다. 출발시간은 8:30, 9:20, 9:40, 10시, 12시, 13시, 15시, 16:30분이다.
* 매년 음력 10월 7일에는 길상화 기제가 열린다.
* 매년 음력 1월 26일에는 법정의 추모 법회가 열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323 (☎ 02-3672-5945)
* 길상사 홈페이지는 위의 길상보탑과 설법전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길상사 일주문, 설법전

▲  길상사 일주문(一柱門)

속세에서 길상사로 들어서려면 '三角山 吉詳寺(삼각산 길상사)'라 쓰인 중층 구조의 일주문(정
문)을 들어서야 된다. 이 문은 2000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되었으며, 정문을 들어서면 초록
의 싱그러운 아름다움이 풍기는 길상사 내부가 펼쳐진다.


▲  생전 처음 본 일주문 천정 그림 (봉황일까? 극락조일까?)

일주문은 경내로 들어서려면 꼭 거쳐야되는 문이기에 별 생각 없이 드나들었는데, 생각해보니
문 천정을 한번도 못봤다. 천정에 무엇이 있겠나 싶어 별다른 기대 없이 고개를 90도 올려보았
는데, 글쎄 그곳에는 소용돌이치는 구름 무늬 사이로 하얀색의 긴 꼬랑지를 가진 새 2마리가 장
엄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난데없는 그림의 등장에 나의 눈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그곳에 그려진 새를 거의 봉황과 비슷하다. 그래서 봉황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이곳이 절이다보
니 딱히 봉황을 키울 이유는 없어 보인다. 만약 봉황이 아니라면 불교에서 많이 키우는 극락조
<極樂鳥, 가릉빈가>가 아닐까 싶으며, 그림이 꽤 수작(秀作)이라 어떻게 저런 곳에 교묘하게 숨
어 지나가는 중생의 머리통을 보고 있었는지 정말 등잔 위/아래가 어두웠다.


▲  정랑(해우소) 부근에 자리한 소각장
축문(祝文)을 비롯한 여러 문서를 불태우는 곳으로
그의 상반신 피부가 검게 그을려져 있다.

▲  일주문을 들어서 설법전 방면으로 바라본 모습

      ◀  길상사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
일주문에서 오른쪽 길을 오르면 설법전 앞에 늘
씬한 모습의 관음보살상이 자리해 있다. 길상사
를 상징하는 명물로 꽤나 명성이 높은 존재인데,
그 흔한 관음보살처럼 생기지 않아 고개를 갸우
뚱하게 만든다.

이 관음보살은 네모나게 다듬은 돌을 대좌(臺座)
로 삼아 소박하고 늘씬한 모습으로 곧게 서 있
으며,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긴 했지만 유럽
왕이 쓰던 왕관과 비슷한 모습이다. 머리결은
목 뒤쪽까지 내려왔으며, 얼굴은 자애로운 성모
(聖母)의 얼굴인데, 거의 천주교 성모 마리아와
비슷하다. 오른손은 번쩍 들어 시무외인(施無畏
印)을 취했고, 왼손에는 보관과 더불어 관음보
살의 필수 요소인 감로수가 든 정병(政柄)을 들
고 있으며, 손 아래쪽은 아무런 조각이 없다.

그렇다면 길상사는 왜 관음보살상을 그 흔한 모습으로 만들지 않고 낯선 모습으로 한 것일까?
이 보살상은 천주교 신자이자 우리나라 조각계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최종태씨가 만든 것이다.
그러다보니 순수한 관음보살로 만들지 않고 성모 마리아를 적지 않게 섞어 보살이 아닌 거의 불
모(佛母)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길상사만의 독특한 서양식 관음보살상이 생겨난 것이다.
2000년 4월 28일에 이곳에 봉안되었으며, 높이는 1.8m이다. 비록 불상의 면모는 떨어지나 불교
와 천주교가 서로 돕고 교류하여 이루어낸 상징물로 그 가치는 크며, 대좌에는 다음의 메세지가
적혀있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길상사의 뜻과 만든 이의 예술혼이 시절인연을 만나 이 도량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모습을 보는 이마다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원력으로 이 세상 온갖 고통과 재난에
서 벗어나지이다. 나무관세음보살'


▲  관음보살상 맞은편에 자리한 샘터

산사(山寺)에는 어김없이 샘터가 있기 마련이다. 완전한 산사는 아니지만 길상사도 나름 산사의
분위기가 자욱한지라 인근 계곡물을 끌어와 범종각 밑에 조촐하게 샘터를 냈다. 길상사를 찾은
중생의 목마름을 쿨하게 해소해주는 고마운 샘터로 졸고 있는 나무 바가지를 깨워 물을 담아 목
구멍에 넣으니 몸과 마음 속에 낀 떼와 번뇌가 말끔히 씻겨 내려간 듯, 속이 시원하다. 샘터 위
쪽에는 바로 범종각(梵鍾閣)이 자리해 있다.


▲  설법전, 관음보살상 앞뜨락 (겨울 풍경)

▲  오색구름을 이룬 연등 위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이곳에는 길상화가 시주하여 만든 범종이
있었으나 지금의 종은 2009년 9월에
다시 만든 것이다.

▲  관음보살 옆에 조그만 석불(마애불)
커다란 돌에 새겨진 추상화 같은 선각마애상
(線刻磨崖像)이 꽤 이채롭다. 이 불상은
예전에 극락전 좌측에 있었다.


▲  길상사 느티나무 (사진 가운데 나무) - 서울시 보호수 8-6호

관음보살상 주변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가 있다. 나누는 기쁨 동쪽에 자리한 느티나무와
더불어 길상사 이전부터 이 자리를 지키던 터줏대감으로 마르지 않는 샘인 세월을 양분으로 삼
아 제법 어엿하게 성장했다. 후배 나무들과 함께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여름의 제국도
그의 기세 앞에선 고개를 숙인다.
그의 나이는 170여 년(안내문에는 165년이라 나옴), 높이는 12m, 둘레는 2.5m이다.


▲  길쭉한 모습의 설법전(說法殿)

길상사 좌측 높은 곳에는 서쪽을 바라보고 선 설법전이 자리해 있다. 설법전은 일종의 강당(講
堂)으로 교육과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기존 요정 건물을 개조한 탓에 불전의 이
미지보다는 거대한 한옥 민박집이나 강당 같은 이미지가 강해 보인다.
깔끔하게 정비된 설법전 내부는 연병장처럼 매우 넓고 깨끗하며, 금동석가불좌상이 제일 앞쪽에
봉안되어 있는데, 중생의 시주로 하나씩 올린 수백 개의 조그만 옥불(玉佛)이 석가불을 석굴처
럼 동그랗게 에워싸 대장관을 이룬다. 이들은 인도에서 가져온 옥으로 만들었다.


▲  깔끔하고 넓은 설법전 내부

▲  미소를 한가득 품은 금동석가불좌상과 조그만 옥불의 대물결

볼살이 푸짐한 석가불의 표정이 너무나 환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두근거린다.
그의 모든 것이 산듯하게 금동으로 장엄되어있으며, 이 불상은
2000년 8월에 조성되었다.

▲  설법전 앞뜨락을 가득 메운 하얀 연등의 물결
소복을 입은 듯한 하얀 연등은 망자(亡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연등이다.

▲  설법전 남쪽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성북동 동부와 동선동(東仙洞), 낙산(駱山)이 바라보인다. 조망은 썩 좋은 편은 아님~~

▲  바람 속 향기 (2012년 버전)

설법전 남쪽에 자리한 바람속 향기 쉼터는 이름 그대로 바람에 번뇌를 흩날리며 일다경(一茶頃)
의 향기를 누리는 공간으로 길다방 커피와 음료수 자판기가 있었다. 현재 이 자리에는 2012년
11월에 만든 길상보탑(吉祥寶塔)이 자리해 있으며, 쉼터는 그 모습 그대로 정랑 서쪽으로 밀려
났다.
길상보탑은 4사자 7층석탑으로 길상화와 법정의 높은 뜻을 기리고 길상사와 성북성당, 덕수교회
가 함께 한 종교간 교류의 의미를 널리 전하고자 영안모자 회장이 탑을 무상으로 지어준 것으로
길상사의 유일한 석탑이다. 탑 안에는 복장봉안품이 들어있으며, 탑은 보통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극락전(법당) 대신 경내 동쪽 구석에 세웠다. 그렇다고 극락전 뜨락이 좁은
편도 아닌데, 장차 다른 탑을 염두에 두고 그리 했는지도 모르겠다.


♠  길상사 극락전(極樂殿) 주변

▲  길상사 극락전

길상사의 법당인 극락전은 옛 대원각의 중심 건물로 'ㄷ'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방이 꽤 많은데, 가운데 칸에는 극락전의 주인장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봉안했고, 그 우측 칸
에 길상화와 법정, 절에 의탁한 망자들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좌측 칸은 중생들이 예
불을 올리거나 쉬어가는 쉼터로 방이 꽤 넓다. 여기서 챗바퀴처럼 돌아가는 속세를 잠시 잊으며
쉬는 재미가 꽤 쏠쏠한데, 미닫이씩 방문을 조금 열고 밖을 바라보면 마치 집 주인이나 마님이
된 기분이다.
극락전 앞뜰을 가득 메워 하늘을 가린 고운 빛깔의 연등은 속세와 천상 세계(혹은 부처의 세계)
를 가르는 구름처럼 신비롭기만 하다.


▲  극락전 금동아미타3존불

극락전 중앙 불단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은 길상사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1997년 11
월에 조성되어 12월에 봉안되었다. 길상사의 창건을 지켜본 불상으로 인자함이 가득 깃들여진
표정으로 중생을 맞는다. 그 오른쪽에는 육환장(六環杖) 지팡이를 든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서
있으며, 왼쪽에는 보관을 쓴 관음보살이 나란히 자리해 아미타3존불을 이룬다. 두 협시불 역시
자애로운 표정은 아미타불 못지 않으며, 그들 뒤로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금니후불탱화가 있다.


▲  극락전 뜨락에 자라난 느티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호
60년 정도 묵은 느티나무로 대원각 초창기나 그 이전에 싹을 틔운 것으로 여겨진다.

하늘을 가린 연등의 위엄이 대단해 극락전 좌측 칸에서 사진에 담았다.

▲  극락전 우측의 돌문
궁궐이나 고급 한옥에서 볼 수 있는 품격 높은 돌문으로 옛 요정시절의
화려하면서도 어두웠던 시절을 아련히 전해준다.

▲  길상사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자 봄의 절정을 누리는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5호

나누는 기쁨 동쪽에는 길상사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인 느티나무가 둥지를 틀었다. 이 나무는 나
이가 무려 270년에 이르며 높이 12m, 둘레는 3.2m에 이른다.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어엿하게 성
장하여 삼삼한 숲속에 들어선 기분을 선사한다.


▲  길상사 지장전(地藏殿)

경내 서쪽에는 '나누는 기쁨'이란 찻집과 지장전이 자리해 있다. 설법전과 극락전 등이 기존 요
정 건물을 손질한 건물인데 반해 지장전은 새롭게 지은 것으로 2004년 10월 17일에 상량식(上樑
式)을 가져 2005년 5월 8일에 완성을 보았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우람한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은 밥을 먹는
공양간인 선열당(禪悅堂), 2층은 도서관, 3층은 지장전이다. 건물 앞에는 보름달을 닮은 동그란
연못이 놓여져 있고 주위로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으며, 건물 뒤에는 주차장이 있다.


▲  지장전 지장보살상

지장전 불단에는 선운사(禪雲寺) 도솔암의 지장보살상을 모델로 삼아 만든 지장보살이 밝은 미
소로 중생을 맞이한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염라대왕이 그를 협시(夾侍)하고 있으
며, 붉은 색의 지장후불탱화가 그들의 든든한 후광이 되어준다.

◀  아미타불 염불이 하루 종일 잔잔히 울리는
지장전의 숨겨진 복도 (영가들의 공간)

지장보살 불단과 그 앞에 펼쳐진 공간이 지장전
의 전부는 아니다. 불단 좌우로 보이는 문을 들
어서면 불단 뒤쪽에 숨겨진 복도가 마치 보물이
묻힌 비밀의 석실(石室)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죽은 이들, 즉 영가(靈駕)들의 공간으로
그들의 이름이 적힌 위패가 빼곡히 자리를 채운
다. 물론 이들도 돈을 받고 해주는 것이다.
동쪽 벽에는 고운 색채로 치장된 석가3존불 벽
화가 그려져 있는데, 복도의 폭이 조금 좁다보
니 꽤 장엄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
의 심금을 자극시키며 잔잔히 흘러 나오는 아미
타불 염불(念佛)은 엄숙한 분위기를 유도해 나
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지장전 영가들의 공간에 그려진 벽화
황홀한 색채를 자아내는 벽화에 석가불과 아리따운 모습의 관음보살이 그려져 있다.
월출산 무위사(無爲寺) 극락전의 후불벽화나 내소사(來蘇寺) 대웅보전의
후불관음탱화, 세계 최고의 불화로 손꼽히는 고려불화처럼
현란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  지장전 뜨락과 연못
장차 다가올 여름의 향연을 준비하는 연(蓮)들이 막바지 와신상담 중이다.


♠  길상사 마무리

▲  계곡 건너 숲속에 묻힌 길상헌(吉詳軒)
고참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요정 시절에는 길상화와 요정 식구들이 생활했다.
김영한이 마지막 밤을 지내며 인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며, 건물 주위를
돌담으로 둘러싸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알려준다.


경내 우측(일주문을 들어서는 기준으로 왼쪽)은 좌측과 달리 자연의 비중이 높은 공간이다. 나
무가 무성하게 숲을 이루고 있으며, 북한산 남쪽 줄기(정릉 뒤쪽 산줄기)에서 발원한 계곡은 길
상사 서쪽을 가로질러 성북천(城北川)으로 흘러간다. 언덕에는 조그만 집들이 가득한데, 이들은
옛 요정의 흔적으로 지금은 승려의 참선 및 처소로 쓰인다.

제법 풍치가 깃들여진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3개 있는데, 먼저 다리를 건너면 길상헌이, 그 다
음 다리를 건너면 길상화의 공덕비를 만나게 되며. 그 다음 다리는 나무그늘과 조그만 집들로
이어진다. 그리고 극락전 뒤쪽에는 침묵의집, 길상선원, 유마선방 등이 빼곡히 자리를 메운다.


▲  길상화 공덕비로 인도하는 나무 다리

▲  창건주 길상화(김영한) 공덕비

길상화 공덕비는 창건주 길상화를 기리고자 그의 2주기인 2001년에 세운 것이다. 비석을 칭하고
있지만 앞서의 관음보살상처럼 기존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며, 비석 머리에는 사발 2개를 포개
놓은 듯한 장식물이 눈길을 끈다.
길상화가 1999년 11월 숨을 거두자 그의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한겨울에 이곳에서 그의 유
골을 뿌렸다.

나도 나중에 졸부들 못지 않은 부자가 된다면 길상화가 그랬던 것처럼 말년에 모든 것을 세상을
위해 내놓을 수 있을까? 그 물음에 대해 '그렇다'는 대답은 자신이 없다. 그보다는 우선 돈좀
왕창 벌어 정승처럼 써보고 싶다. 부자가 되야 길상화를 따라하지 지금 같은 서민 신세에 그렇
게 따라하면 큰일난다. 뱁새가 괜히 황새를 따라하다가는 가랭이가 절단나는 법이다.

◀  길상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

이 계곡은 정릉 뒷산에서 발원하여 성북천으로
흘러가는 것으로 약간의 인공이 더해졌을뿐, 자
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야말로 길상동천(吉詳
洞天)을 칭해도 손색이 없는 수려한 풍경이다.
김영한은 바로 이 계곡에 매료되어 이곳에 대원
각을 세웠다고 한다.

계곡 바위는 신선의 세계에서 몰래 슬쩍한 듯
멋드러진 모습을 자랑한다. 비록 작지만 폭포가
2개나 있는데, 물줄기가 실타래처럼 가늘어 속
세의 삶처럼 너무 답답하기만 하다.


▲  경내 서쪽 언덕에 터를 닦은 집들
요정 시절 접대 공간으로 지금은 승려의 참선 및 처소로 쓰인다.

▲  숲속의 오솔길 같은 경내 서쪽 산책로 ▼

경내 서쪽에는 자연의 내음이 진하게 풍기는 산책로가 그림처럼 펼쳐져 번뇌의 염통을 잠시나마
쫄깃하게 만든다. 보통은 절로 들어가는 길이 멋드러진 경우<월정사 전나무 숲길, 내소사 전나
무숲길>는 많으나 이곳처럼 경내에 어여쁜 길을 둔 경우는 그리 흔치는 않다. 자연이 어우러진
이 산책로야말로 길상사의 자랑거리이자 얼굴이다,


▲  진영각<眞影閣, 예전 행지실(行持室)>

경내 가장 서쪽에 자리한 진영각은 법정의 진영을 봉안한 건물로 그의 손때가 묻힌 저서와 유품
들이 전시되어있다.
원래 이곳은 고참 승려의 생활공간인 행지실이었다. 그러다가 2013년에 법정의 진영각으로 삼아
속세에 공개했으며, 저번 3월 7일 그의 3주기를 맞이하여 김호석 화백이 그린 진영을 봉안했다.
길상사를 야무지게 키운 인물이고 현대 불교의 한획을 그은 고승이니 그를 기리는 공간은 당연
있어야 될 것이다. 그래야 법정의 정통을 이었다는 자부심도 드높이고 법정을 좋아하는 팬들의
성원에도 보답하며 그들의 추모를 길이길이 이어갈 수 있다.
그런데 뭔가 좀 허전하다. 길상사하면 법정과 더불어 진하게 생각나는 인물. 길상화를 위한 건
물이 없는 것이다. 절은 법정이 키웠어도 절을 탄생시킨 1등 주역은 길상화인데, 그를 위한 건
물도 있어야 되지 않을까? 길상화 공덕비로는 많이 부족해 보인다. 그의 영정과 유품을 전시해
법정과 더불어 두고두고 기렸으면 좋으련만, 너무 법정만 띄우지 말고 길상화도 그와 동등한 비
율로 띄워주기 바란다.


▲  길상선원(吉祥禪院)
길상선원은 시민들을 위한 참선 공간으로 선원장(禪院長) 승려의 지도로
참선이 이루어지는 좌선방(坐禪房)이다.

▲  여염집 분위기의 적묵당(寂默堂)
신행단체 법회장소 및 석가탄신일 연등작업과 여러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예전에는 유마선방(維摩禪房)이라 불렸으나 2012년에 적묵당으로 간판을 갈았다.

▲  적묵당 앞에 동그란 연못
물이 태산처럼 고인 연못에는 개구리의 운동장인 연잎이 장차 여름의 향연을 꿈꾼다.

▲  침묵(沈默)의 집

침묵의집은 중생들이 자유롭게 참선/명상을 하며 쉬어가는 열린 공간이다. 오전 10시부터 17시
(일요일은 16~17시)까지 이용할 수 있으며, 최대 인원은 8명 정도이다.

◀  침묵의집에 걸린 불화
불화 앞 탁자에는 송광사 목조3존불감의
모조품이 자리를 지킨다.


▲  길상사에서 누린 일다경의 여유 (매실차와 오미자차)

길상사 관람을 마무리하고 지장전 옆에 자리한 '나누는 기쁨' 찻집(길상사 찻집)에서 기분 좋게
차 1잔의 여유를 누렸다. 예전과 달리 리필이 안된다고 하여 많이 달라고 했더니 곱상하게 생긴
찻잔 대신 키다리 음료수 컵에 가득 담아 내준다. 보통 찻잔의 2배 이상의 양을 담아준 것이다.
차에는 잣 2~3덩어리를 조각배처럼 띄워주어 차의 맛을 높여주며, 차와 커피의 가격은 2,000~
4,000원 선으로 인사동이나 삼청동에 비해 절반에서 1/3 정도 저렴하다.

전통차를 마시며 담소를 즐긴 시간이 거의 30분 정도이다. 차의 솔솔한 향기와 차와 함께 즐긴
담소의 재미에 길상사 기둥이 썩어 문드러지고 해가 뉘엿뉘엿 꽁무니를 숨긴 것도 모르고 머물
렀던 것이다. 그야말로 찻값 본전을 제대로 뽑은 셈이다.


▲  성북동 돼지갈비집에서 먹은 돼지갈비의 위엄

속세로 나오니 어느덧 모락모락 저녁밥이 그리운 시간이다. 그래서 성북동 맛집에서 먹을 수 있
는 음식을 두고 궁리하다가 성북동 돼지갈비집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말그대로 돼지갈비를 겯드린 백반을 내놓는 식당으로 30여 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원래 택시기사가 많이 찾던 기사식당이나 성북동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져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늘어나자 그 후광을 단단히 받았다. 바로 옆에는 같은 메뉴를 다루는 쌍다리식당이 있어 경쟁이
대단하며, 돼지고기와 갈비백반은 1인 6~7천원으로 가격도 괜찮다. 밑반찬은 상추와 김치, 마늘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맑은 조개국이 백미로 국물이 시원하다.
한때 손님의 폭풍 증가로 배때기가 부른 나머지 불친절이 대단했다고 하나, 내가 갔을 때는 나
름 친절을 보였다. 허나 식후 커피는 무료 제공에서 100원으로 바뀌었는데, 왠만한 집은 동전이
없다고 하면 흔쾌히 제공하나 여기는 잘 안준다. 그거 원가가 얼마나 한다고 참..

길상화의 숭고한 뜻과 법정의 무소유 정신, 중생구제를 향해 고행도 서슴치 않았던 부처와 관음
보살 누님의 고귀한 뜻에 따라 세상이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 오로지 중생을 위해 헌신하며, 세
속과 겉멋에 물들지 않는 순수의 불교 도량이자 도심 속의 극락, 길상사로 남기를 고대하며 이
만 본글의 펜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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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4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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