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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성북동(城北洞) 나들이 '

▲  최순우 옛집


싱그러운 5월을 맞이하여 후배 여인네와 나의 시내 단골 답사지인 성북동(城北洞)을 찾았다.
성북동은 20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1년에 여러 번씩 들어가는 동네인데, 그렇게 질리도록 갔
음에도 돌아서면 또 가고 싶은 곳이 성북동이다. <부암동(付岩洞)과 북촌(北村)도 마찬가지>

성북동을 거론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성북동의 지형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
완사
명월형(浣紗明月形)'의 명당(明堂)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완사명월형이란 밝은 달빛 아래에
비단을 펼쳐놓은 형세로 그 명당의 기운을 받고자 돈 꽤나 주무르는 온갖 졸부(간송 전형필
은 제외)들이 몰려와 고래등 같은 집을 짓고 서식하면서 자연히 부자 동네를 형성하게 되었
다. 수레가 없으면 정말 다니기도 힘들 정도로 교통이 좋지 않고 걸어다니기에는 숨이 턱까
지 오르는 산동네인 성북동에 말이다. 게다가 동쪽을 빼고는 모두 산으로 막힌 궁색한 지형
이다.
졸부들이 그런 수고로움을 마다하고 성북동을 선호하게 된 것은 명당의 기운을 받고자 하는
그들의 부질없는 욕심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니 땅값만 천정부지로 치솟아 서민들은 들어갈
공간도 없다. 그래서 어떤 이는 우리나라의 1%가 아닌 0.1%가 사는 동네라고 꼬집기도 한다.

우리 같은 서민들이 오기에는 은근히 꺼림칙한 곳이 분명하지만 아름답고 의미가 있는 명소
들이 많아 그 거부감을 감수하고 발걸음을 한다. 아무리 졸부들의 집이 크고 대문이 성문처
럼 두터워도 위대한 대자연 형님 앞에선 일개 모래성에 불과하며, 나는 명소를 보고자 오는
것이지 졸부들의 하찮은 저택 따위를 보러 온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들러리일 뿐이다. 그러니 괜히 기죽지 말고 어깨와 가슴을 당당히 피고 관광객/답사객의 신
분으로 성북동을 둘러보자. 이곳에 서린 명당의 기운도 누리면서 말이다.

본글에서는 성북동을 거쳐간 2명의 위인,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과 혜곡 최순우의 최순우 옛
집, 그리고 조선시대 국가제단이던 선잠단터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들은 부촌과는 거리가
있는 곳에 위치해 있어 심적 부담은 크게 안가져도 된다.


♠  만해 한용운 선생이 독립을 염원하며 말년을 보낸 곳
심우
장(尋牛莊) - 서울 지방기념물 7호

간송미술관에서 삼청터널 방면 2차선 길을 10분 정도 가면 성북동 종점(1111, 2112번 종점) 못
미쳐에 심우장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그 이정표를 따라 달동네 언덕을 150m정도 오르면 오
른쪽에 문화유적 안내판이 있는 심우장이 답사객을 맞이한다. 심우장 주변은 달동네 집들로 가
득하여 대궐 같은 집으로 도배가 되어 성북로 북쪽과는 완전 대조를 보인다. 같은 성북동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크다니? 세상의 불공평함에 정말 치가 떨린다.


1933년에 지어진 심우장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조촐한 크기의 팔작지붕 건물로 고작 80년 밖
에 되지 않았고, 근래에 손질을 한 탓에 고색의 내음은 별로 없다. 그리 넓지 않은 뜨락에는 만
해가 심은 향나무가 어엿하게 성장하여 주인을 대신해 집을 지키고 있다. 심우장은 만해의 기념
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만해의 사상과 업적을 연구하고 기리는 만해사상연구소가 소유하고 있다.

~~ 1.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의 생애 ~~
만해는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洪城郡)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유천(裕天)이며, 호(號)는 만해로 7살에 홍성읍 남문리로 이사를 갔다.
위대한 인물은 떡잎부터 확연히 다르다고 하더니만 어려서부터 천재, 신동이란 말을 많이 들었
고, 무슨 책이든 한번 보면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14세에 전영주의 3째 딸인 전정숙(全貞淑)과 혼인했으며, 16세
에 뜻을 품고 집을 나와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서 잠시 고용(雇傭)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2
년 뒤에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설악산이 몹내 그리웠는지 다시 길을 떠나 백담사(百潭寺)에 들어
갔다. 그리고 스승인 김연곡(金連谷)의 권유로 머리를 깎고 출가를 했는데, 스승은 그에게 만화
(萬化)라는 이름을 주었으며, 법명을 용운(龍雲)이라 하고 호를 만해라 했다.
 
1908년에는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1명으로 원흥사(
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
하고, 왜국을 시찰하고 왔으며, 191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갔다가 1913년에 귀국, 불교학원의 선
생이 되었다. 바로 그해에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하여,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해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했고, 1919년에 천도교의 손병희(孫秉熙), 최인(崔麟) 등이
몰래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고 긴밀히 연락을 취해 천도교(天道敎) 혼자서 할 것이 아
니라 각계 인사를 모아 거족적으로 하자고 제안을 했다. 그래서 민족대표 33인이 형성되었고 삼
일운동이 일어나던 그날 오후 2시에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에 서명을 하고 낭독을 했다.
그 이후 왜경에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했는데, 사식(私食)과 변호인을 거부했으며, 감옥에서
'독립의 서(書)'를 작성하여 독립선언서와 쌍벽을 이루기도 했다.

47세에 설악산으로 들어가 그 이름도 유명한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해 왜국에 저항하
는 저항문학에 앞장서고, 1927년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
城支會長)이 되었다. 1931년에는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해 청
년운동을 강화했으며, 같은 해에 여러 뜻있는 이들의 도움으로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했다.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했고, 1937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
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이후 왜정에 배타적인 자세를 꾸준히 유지하며 불교 개혁과 문학
활동을 계속하다가 광복을 겨우 1년 앞둔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그
때 그의 나이 65세였다.


▲  만해 한용운 선생 영정

~~ 2. 만해 한용운과 심우장 ~~
만해는 3.1운동으로 3년간 옥고(獄苦)를 치르고 도심과 가까운 성북동에 셋방을 얻어 빈곤하게
살았다. 만해를 평소 존경하던 승려 김벽산(金碧山)이 어느 날 찾아와
'성북동 송림(松林) 속에 구입한 52평의 땅이 있습니다. 그 땅을 선생님께 드릴테니 그곳에 집
을 짓고 사십시요'
하면서 지금의 심우장 자리를 주었다. 허나 땅만 있지 집을 지을 자금이 없
어 집을 짓지 못했다.
그래서 만해의 부인이 친일파로 악명이 대단한 조선일보의 방응모 사장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
에게 도움을 청해 금융조합에서 대출을 받아 1933년 지금의 건물을 지었다. 건물의 면적은 약
18평으로 조촐한 크기이다.

이 건물의 특징은 그 흔한 남향(南向)이 아닌 북향(北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남
쪽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있으므로(정확히는 서남쪽이다) 이를 불쾌하게 여겨 북쪽을 바
라보게 만든 것이다. 이를 통해 그의 굳센 독립 의지를 엿볼 수 있으며, 심우장이란 이름은 선
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이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10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되었다.

만해가 세상을 뜨자 그의 외동딸인 한영숙씨가 살았는데, 유감스럽게도 심우장 건너편에 일본대
사관저가 뜬금없이 들어서면서 이웃 동네인 명륜동(明倫洞)으로 이사를 가 버렸다. 역시 부녀간
의 질긴 피는 속이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사는 갔지만 여전히 한영숙씨 소유로 되어있음) 그런
데 어찌하여 심우장 부근에 일본대사관저가 들어섰는지는 심히 의문이다. 왜국이 싫어서 기껏
북향으로 집을 지었는데, 친일행위로 말썽이 많은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그런 것까지 배려를
하지 않고 방관한 모양이다.

이후 만해사상연구소가 이곳을 지켰으며, 만해의 기념관으로 탈바꿈하여 그의 글씨와 저서, 여
러 문서를 전시하고 있다. 또한 2004년 이후 성북구청에서 말끔히 손질하여 심우장 내부를 공개
했다. (내부 관람 가능,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됨)


▲  일창 유치웅(一滄 兪致雄, 1901~1988) 선생이 쓴 심우장 현판의 위엄

▲  만해가 머물던 방, 주인이 가고 없는 방에는 그의 숨결이 진하게 배인
여러 유품과 글씨들, 그리고 그의 초상화가 빈 방을 지킨다.

▲  심우장 뒷뜨락
현역에서 물러난 굴뚝이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옛 시절을 회상하며 우수에 젖어있다.


▲  심우장 부엌
이제는 보기 힘든 정겨운 부뚜막 가마솥 안에 잘 숙성된 누룽지가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허나 막상 열어보면 누룽지 대신 무상한 세월이 입힌 먼지만이 털털 날린다.

▲  만해의 숨결이 고스란히 묻어난 그의 글씨들 - 마저절위(磨杵絶韋)
절구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들었다는 4자성어로 쉬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라는 뜻이다.

▲  만해(卍海)의 호가 적힌 전대법륜(轉大法輪)

▲  남국(南國)의 국화꽃 채 피지 않고 강호에
노는 꿈이 누대에 머물렀네. 기러기 그림자가
산하에 인간의 형상처럼 비추고 가이 없는 가
을나무 사이로 달이 뜨네~~

▲  양 언덕이 고요하여 일마다 한가하네. 은자
(隱者)가 자연에 도취되어 쉽게 돌아가지 못하
는구나. 산사에 미풍일고 해는 트는 듯 한데 헤
일 수 없는 짙은 가을 향기 선의를 때리누나~~


▲  만해의 온갖 저서와 관련 서적, 심우장과 그의 안내문이 있는 가운데 방

▲  심우장과 한용운의 말년을 묵묵히 지켜본 산증인들 (왼쪽은 향나무, 오른쪽은 소나무)

심우장 뜨락에는 그늘을 드리우는 오래된 나무 2그루가 자라고 있다. 왼쪽 사진의 나무는 향나
무로 수령(樹齡)이 80년이며, 성북구에서 지정한 아름다운 나무 46호이다. 오른쪽 나무는 소나
무로 수령이 90년,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1호이다. 향나무는 만해가 직접 심었다고 하며, 소
나무는 심우장이 있기 전부터 살아오던 터줏대감으로 서로 아름다움을 견주며 심우장을 수식하
는 아름다운 정원수가 되었다.

조국의 광복을 꿈꾸며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만해를 지켜보던 자연의 산물로 그의 벗이 되기
도 하고, 때로는 문학 소재가 되기도 했으며, 여름의 제국(帝國)에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겨울의 제국에는 추운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주던 그야말로 만해를 위해 모든 것을 베풀던 존재
였다. 만해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이들 나무는 여전히 살아 남아 그의 집을 지키며 이곳을 찾은
나그네에게 당시의 상황을 아련히 속삭인다.


※ 심우장 찾아가기 (2012년 10월 현재)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동 종점 하차,
  버스가 올라온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길 오른쪽에 심우장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 심우장은 아침 9시부터 18시(겨울은 17시 정도)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입장료는 없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22-1


♠  시민들이 지켜낸 시민문화유산 1호, 우리나라 고고미술에 평생을 바친
최순우(崔淳雨) 옛집 -
등록문화재 268호

한성대입구역(4호선) 5번 출구를 나와서 성북동 방면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왼쪽 골목에 빌라와
주택 사이로 별천지처럼 들어앉은 기와집 하나가 눈에 달려올 것이다. 그 집이 바로 우리나라
고미술에 평생을 바친 혜곡(兮谷) 최순우 선생(1916~1984)이 말년을 보냈던 집이다.

이곳은 삼청각(三淸閣)과 더불어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성북동의 샛별로 속세에 이름을 날린지
는 이제 5~6년 정도이고 내가 여기에 처음 온 것은 2008년이다. 아직은 간송미술관이나 길상사
등 성북동의 이름 꽤나 굵은 선배 명소에 비해 인지도는 낮지만 짧은 시간 동안 크게 부상하여
이제는 성북동의 필수 코스로 자리매김하였다.
또한 최순우 옛집은 자칫 개발의 칼질 앞에 이슬로 사라질 뻔했던 것을 뜻있는 시민들이 발벗고
나서 개인마다 1평씩 구입하여 지킨 문화유산으로 매우 의미가 깊다. 시민들이 지키고 가꾼 시
민문화유산 1호로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문화유산기금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 집에 살았던 최순우는 1916년 4월 27일 경기도 개성(開城)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희순
(熙淳)으로 개성 송도(松都)고보를 나와 1943년 개성박물관에 입사했다. 그는 당시 개성박물관
장인 고유섭(高裕燮)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면서 고미술에 뜻을 굳혔다고 한다.

194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학예관과 미술과장, 학예연구실장을 지냈으며, 1950년
6.25가 터지자 한강인도교 폭파로 인해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북한군에게 잡히고 만다. 서울을
접수한 북한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당시는 북단장(北壇莊)과 보화각(葆華閣)이라 불림>에
있던 문화유산에 군침을 흘리고 박물관에서 일했던 최순우와 소전 손재형(孫在馨)을 불러 그것
을 모두 포장해 지정된 곳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최순우와 손재형은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이 힘들여 수집한 문화유산의 북송만은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기가 막힌 눈속임작전을 감행했는데, 마침 감독관으로 온 공산당원 기(奇)씨란 사람
은 어벙벙한 작자였다.

그들은 기씨에게 왜국(倭國) 판화로 된 춘화(春畵, 미성년자 관람불가급 그림)를 보여주고, 보
화각 지하실에 있던 화이트호스 위스키를 권해 허구헌날 술에 쩔게 만들었다. 또한 문화유산 선
별기준에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속이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면 이건 아니
라고 다시 싸게 하고, 목록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다시 하게 했다.
포장이 진행되면 감독관에게 상자를 사와라, 목수가 없다 등으로 자꾸 태클을 걸고 손재형은 일
부러 생다리에 붕대를 매면서 다리가 아프다고 연극까지 하면서 9월 28일 서울수복까지 포장되
어 상자에 담긴 것은 하나도 없었다.

3달이 다되가도록 아무런 진척이 없자 뚜껑이 열린 북한당국은 사람을 보내 그들을 추궁하게 했
다. 허나 그때 우리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공격하여 점령하면서 북한군은 서둘러 줄행랑을 쳤다.
그들의 재치와 하늘의 보살핌으로 간송미술관의 유물은 모두 북송을 면할 수 있었다. 그 인연으
로 간송 전형필과도 가까운 사이가 된다.

6.25 이후 서울대와 고려대, 홍익대에서 미술사 강의를 했으며, 1967년 이후 문화재위원회 위원
과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 한국미술사학회 대표를 역임하고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되어
박물관을 크게 발전시켰다. 1981년 홍익대 대학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4년
12월 16일 성북동 자택(지금의 최순우 옛집)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때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는 고미술 외에 현대미술에도 조예가 깊었고, 우리나라 박물관사에 큰 업적을 끼쳤다. 주요논
문으로 '단원 김홍도 재세연대고(檀園金弘道 在世年代攷)','겸재 정선론','한국의 불화(佛畵)',
'혜원 신윤복론','이조(李朝)의 화가들' 등이 있고 저서는 삼척동자도 다 안다는 '무량수전(無
量壽殿)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와 '한국미술사'가 있다.


▲  안채 거실에 걸린 최순우 왕년의 사진과 그의 일대기가 적힌 안내문

최순우 옛집은 1930년대에 지어진 한옥으로 경기도 지방 한옥 양식을 띄고 있다. 'ㄱ'자의 본채
와 'ㄴ'자의 사랑채, 행랑채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ㅁ'자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본채 뜨락에
는 닫혀진 우물이 있고, 그 옆에는 작은 우물이 있다. 최순우는 1976년에 이 집을 구입해 1984
년 숨을 거둘 때까지 살던 곳으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그가 사라진 이후, 개발의 칼질이 슬슬 압박을 가해오면서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태로운 신세
가 되고 만다. 이 집을 밀어버리고 빌라를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뜻있는 사람들이 시민운동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를 창단해 그 집을 매입하면서 개
발의 무자비한 칼질은 그들에 의기(意氣) 앞에 보기 좋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허나 주인이 사라진 옛집은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그래서 내셔널트러스트는 2003년부터 2004년
까지 돈을 모아 복원하고 뜨락을 꾸미면서 그 집에 '시민문화유산1호'란 별칭을 주었다. 우리나
라 최초로 민간에서 문화유산을 구입해 지킨 유서 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현재 안채는 전시 공간과 최순우기념관으로 쓰이고 있고, 동쪽 행랑채는 사무실, 서쪽 행랑채는
회의실과 휴식공간으로 꾸몄다. 그리 넓지 않은 뜨락은 전통식으로 아기자기하게 손질하여 나무
와 풀, 꽃이 뜰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으며, 안채 앞뜰 중앙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그늘을 드
리운다. 뒷뜨락과 모서리 공간에는 기증을 받거나 수습해온 동자상과 문인석, 맷돌, 석구(石臼)
등 다양한 석물을 배치해 간송미술관의 뜨락을 꿈꾼다. 구석마다 그들이 자리를 채우니 넓고 알
찬 느낌을 선사한다. 게다가 뒤뜰에 야외도서관을 두어 최순우가 쓴 글과 여러 서적, 그와 관련
된 서적들을 읽으며 독서의 여유도 누릴 수 있으며, 뒷뜰 뒤쪽에는 높은 담벼락으로 그늘이 가
득해 시원하다. 아무리 여름 제국(帝國)의 강렬한 햇살도 여기서는 고개를 숙이고 만다.

안채 내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어 사무실에 허가를 구하면 들어가게 해주며, 툇마루에 앉아 한
옥의 미와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며 쉬어갈 수 있는 도심 속의 새로운 오아시스이다. 또
한 주말과 휴일에는 다양한 공연과 전시회 등의 이벤트가 열려 어린이와 학생, 가족단위 나들이
객들이 많이 찾는 대중적인 명소이자 살아있는 한옥 공간으로 위엄을 날리고 있다.
 
길상사의 창건주인 길상화(김영한)가 자신이 일군 고급요정을 절로 바꾸어 속세에게 선물했듯이
이 집 또한 최순우와 그의 집을 지키던 뜻 깊은 이들이 속세에 남긴 소중한 선물이자 작품이다.
또한 2006년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당당히 누리고 있다.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잠시 길을 멈춰 최순우 선생의 체취를 느끼며 툇마루
에 걸터앉아 잔잔한 불어오는 바람을 디저트로 삼으며 한옥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며 쉬어가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 최순우 옛집 찾아가기 (2012년 10월 현재)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2112번 시내버스나 성북구마을버스 03번을 타
  고 홍익중고 하차, 또는 5번 출구로 나와서 도보 10분, 길가에 최순우 옛집을 알리는 이정표
  가 있어 찾기는 쉽다
* 관람기간 : 4월 ~ 11월
* 관람요일 : 매주 화요일 ~ 토요일 (축제기간에는 일요일도 개방)
* 관람시간 : 10시 ~ 16시 (15시 30분까지 입장 가능 / 축제기간에는 17시까지 개방)
* 관람료 : 공짜 / 20인 이상 단체는 사전 예약 요망
* 옛집 내부에서는 음식 섭취 행위는 통제하고 있으며, 관리사무실에서 간단하게 전통차를 판매
  한다. (가격은 그리 착하지는 않은 편)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126-20 (☎ 02-3675-3401~2)
* 건물 면적 - 대지 395.042㎡, 건평 101.92㎡, 한옥 2동
* 내셔널트러스트 최순우 옛집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밋밋하게 솟은 빌라와 주택들 사이에 고풍스럽게 들어앉은
최순우 옛집의 위엄 - 개발의 칼날도 고개를 숙인 현장이기도 하다.

▲  굳게 닫힌 최순우 옛집 대문
대문 현판이 복잡한 한문대신 한글로
쓰여져 매우 친숙하게 다가온다.

▲  안채 앞뜰에 높이 솟아 옛집에
한줄기 그늘을 드리우는 소나무


▲  최순우 옛집 관리사무실로 쓰이는 동쪽 행랑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나는 내것이 아름답다' 등의 최순우 저서와
전통차를 판매한다.


▲  소나무 옆에 뚜껑이 닫힌 죽은 우물
최순우와 이전 주인 일가의 식수를 제공했던 네모난 우물,
허나 지금은 뚜껑이 닫힌 채 겉모습만 남아있다.

▲  수풀 사이에 고개를 내민 조그만 동자상
최순우 옛집을 복원하면서 우리나라 어딘가에서 가져온 것이다.

▲  여러 석물과 방석, 여러 서적들이 놓인 뒷뜨락 남쪽(야외도서관)
돌의자에 놓인 책은 마음껏 볼 수 있으며, 돌의자나 안채 뒷쪽 툇마루에
걸터앉아 독서에 임하면 된다.

▲  조그만 맷돌과 빗물을 머금은 석구(石臼, 돌통)

▲  돌이 박힌 뒷뜨락 돌길과 장승 2기

돌길이 우리네 인생처럼 너무 짧다.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끝나기 때문이다. 그 앞에는 재미있
게 생긴 장승 2기가 돌길을 지킨다. 이곳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나쁜 기운도 그들의 얼굴을 보
고 자신의 본분도 잊은 채 발길을 돌릴 것이다.


▲  탁자가 중심이 된 뒷뜨락 북쪽

둥그런 탁자 주변에는 머리에 방석을 쓴 키 작은 돌의자 7개가 둘러져 있다. 저들은 독서와 이
야기꽃을 피우는 공간으로 탁자에는 최순우 옛집과 내셔널트러스트 관련 자료가 놓여져 있다.
탁자 주변에는 장독대와 조그만 돌통이 있는데, 장독대에는 무언가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으리
라 생각하겠지만 저들은 속이 빈 장식용이다.


▲  옛집의 서쪽 모서리를 지키는 2기의 조그만 문인석(文人石)
저들의 표정에 부질없는 세월의 고된 모습이 묻어난 듯 하다.

▲  시민들의 조촐한 휴식 공간 안채 뒤쪽 툇마루

▲  최순우 선생의 기품과 학식이 고스란히
묻어난 안채 내부 - 복원하는 과정에서
꾸며진 부분도 적지 않다.

▲  주말 오후에는 어린이와 학생, 가족단위
손님들로 툇마루가 무너질 지경이다.


▲  마루에 놓인 함지박

▲  서쪽 행랑채에 진열된 도장과 조그만 자기들
혜곡의 손떼가 묻어난 그의 유품들이다.

◀  최순우 옛집의 뒷통수 (안채 서쪽 담장길)
흙으로 만든 토담과 시냇물의 징검다리처럼 박
석(薄石)이 박힌 정겨운 담장길, 담장 너머가
자연의 공간이거나 한옥이었다면 그 운치는 곱
배기가 되었을텐데, 빌라와 슬레이트 지붕이 그
자리를 대신하니 그나마 우러난 정겨움과 운치
도 절반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지우개가 있다
면 담장 밖 풍경을 싹싹 지우고 싶을 뿐이다.


  양잠(養蠶)의 번성을 기원하던 조선시대 제단의 흔적
선잠단지(先蠶壇址) -
사적 83호

▲  선잠단터 표석과 누런 잔디

성북초등학교 3거리 동쪽 모퉁이에 조선시대 주요 제단이었던 선잠단이 있다. 지금은 잔디로 뒤
덮인 옛 제단터와 표석, 근래에 세운 홍살문, 그리고 무성하게 자라난 뽕나무만이 이곳이 신성
한 장소였음을 보여줄 뿐, 장엄했던 제단의 흔적은 사라졌다. 마침 우리가 갔을 당시는 선잠제
례가 열렸던 날이 선잠단이 간만에 빗장을 열어 처음으로 내부에 들어갔다.

선잠단은 누에를 관장하는 잠신(蠶神)인 서릉씨(西陵氏)에게 양잠의 번성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
내던 제단으로 그 제례를 선잠례(先蠶禮)라고 한다. 선잠례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어 조선 개국
이후, 8년 정도 중단되었다가 1400년(정종 2년) 3월 초사일(初四日)부터 다시 행해졌다.

세종은 각 도에 괜찮은 땅을 골라 뽕나무를 심고, 잠실(蠶室)을 지어 누에를 키우게 했으며 중
종(中宗)은 각 도의 분산된 잠실을 지금의 서울 송파구(잠실)와 서초구(잠원동) 일대로 집합시
켰다.
<서울 잠원동 한신신반포16차아파트 부근 도로변에 그 당시 재배하던 수령(樹齡) 400년의
뽕나무 1그루가 유일하게 남아있으나 오래 전에 숨을 거두어 지금은 몸뚱이만 남았음>

1471년 성종은 선잠례를 지내기 위한 장소로 동소문(東小門, 혜화문) 밖 지금의 자리에 선잠단
을 세웠는데. 단을 쌓은 방법은 사직단(社稷壇)과 비슷하나 남쪽으로 한 단(段) 낮은 댓돌이 있
고, 그 앞쪽 끝에 상징적인 뽕나무를 심어 궁궐 잠실(蠶室)에서 키우는 누에에게 먹였다. 1477
년에는 창덕궁 후원에 채상단(採桑壇)을 만들어 누에치기를 장려하는 차원에서 왕비가 직접 누
에를 길러 실을 뽑는 이른바 친잠례(親蠶禮)를 지냈다.

선잠례는 매년 3월 초사일(初四日)에 지내는데 신하를 보내 제례를 주관했으며, 풍악을 울리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일조의 제례악(祭禮樂)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의식은 순종 시
절까지 이어져 오다가 1908년 7월(순종 융희 원년), '칙령(勅令) 제50호 <향사리정(享祀
釐整)에
관한 건>'에 의해 국가에서 관리하는 사당과 제단을 정리하면서 선잠단과 선농단(先農壇, 서울
제기동)의 신위(神位)는 모두 사직단(社稷壇)으로 옮겨지고 선잠단은 그 몸뚱이만 남게 되었다.
허나 왜정 때 왜인(倭人)들이 사직단에 버금가는 규모를 자랑하던 선잠단을 말끔히 파괴시켰고,
그 터마저 민간에 팔아 먹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뒤늦게 조선의 문화재를 조사하면서 1939
년 그 터를 보물 17호로 지정해 앞과 뒤가 전혀 안맞는 행동을 보였다,

해방 이후, 터만 황량하게 남아 오던 것을 1960년대에 약 4만원의 돈을 들여 제단터를 정비하고
표석을 세웠으며, 그 이후 성북구청에서 선잠단 주변 528평을 매입해 홍살문을 세우고 뽕나무를
무성하게 심었다. 특히 이곳 뽕나무는 나이가 60~7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
무로 지정되어 그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낸다.

성북구는 매년 5월 초,중순에 열리는 성북구의 주요 축제, 아리랑축제에 맞춰 선잠제(先蠶祭)를
거행한다. 제례가 열리는 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문은 굳게 닫혀있으며, 내부로 들어가고 싶다면
성북구청 문화체육과에 문의한다.

참고로 선잠단터 북서쪽인 성북초교 뒤쪽에는 농업을 관리하는 별인 영성(靈星)에게 제를 지내
던 조선시대 제단인 영성단(靈星壇)이 있었다. 이 역시 1908년에 순종의 칙령에 따라 선잠단과
더불어 폐쇄되었다.


▲  선잠단 홍살문과 간만에 빗장을 연 정문
나라에서 신성시 하던 제단은 사라지고 홍살문의 위엄은 녹아내린지 오래지만
근래에 다시 솟아난 홍살문은 예전의 위엄을 내보이고자 애써 안간힘을 쓴다.

▲  뽕나무가 무성한 선잠단터 내부

▲  선잠단터 표석에서 바라본 모습

간송미술관과 가까워 그곳을 찾을 때마다 후식으로 꼭 둘러보는 선잠단터. 역사의 뒤안길로 초
라하게 사라진 이곳에는 그저 쓸쓸함만이 가득하다. 무성하게 우거진 뽕나무는 이곳의 허전함을
조금이나마 덮어준다.
 
※ 선잠단터 찾아가기 (2012년 10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초교 하차, 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2분 걸으면 성북초교3거리가 나오는데, 길 건너 홍살문이 있는
  곳이 선잠단터이다, 도로변에 있어서 홍살문이 어떻게 생겼는지만 안다면 찾기는 매우 쉽다.
* 선잠제례는 매년 5월 초/중순에 아리랑축제 기간에 열리며 자세한 일정은 성북구청 문화관광
  홈페이지(여기를 클릭)를 참조한다. 문의는 ☎ 02-920-3048
* 선잠단터는 선잠제례 때만 공개한다. (가끔 랜덤으로 공개되는 경우도 있음) 관람을 원할 경
  우에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02-920-3413)에 문의하면 되며, 인근 선잠단 지킴이가 와서 문을
  열어 주거나 상황에 따라서는 월담(?)도 허가해준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64-1


▲  성북동집에서 먹은 칼국수와 만두 ▼

간송미술관에서 심우장으로 가는 길목에 '성북동집'이란 조그만 식당이 있다. 마치 시골이나 시
장의 어느 식당처럼 조촐한 인테리어로 자칫 지나치기는 쉽지만 여러 길손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정도로 칼국수와 만두가 일품이다.
이곳은 성북동의 주요 맛집의 하나로 칼국수는 양이 좀 많아 만두를 겯드릴 경우 하나만 주문하
여 나눠먹어도 된다. 반찬은 김치와 열무김치가 전부이며, 칼국수와 만두의 가격은 7,000~8,000
원 선으로 성북동에서는 그런데로 저렴한 편에 속한다.

♣ 성북동 추천 명소와 맛집
* 추천 명소 - 선잠단터, 이종석별장, 수연산방<壽硯山房, 이태준가(家)>, 심우장(尋牛莊), 삼
  청각, 길상사(吉祥寺), 최순우 옛집,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북악산 산행(숙정문,
  백악마루, 촛대바위), 와룡공원, 정법사, 한국가구박물관, 성락원(城樂園, 관람 거의 불가),
  최사영 고택(십주원, 관람 불가)
* 맛집
- 성북동집(만두와 만두국, 02-747-6234), 쌍다리식당(돼지불고기 백반, 02-743-0325),
  성북동돼지갈비집(돼지불고기 백반, 02-764-2420), 금왕돈까스(02-763-9366), 서울돈까스(02-
  766-9370), 성북동메밀수제비/누룽지백숙(02-764-0707), 수연산방(찻집, 02-764-1736)


* 성북동 관련 본인 작성 기행문들

① 간송미술관 ☞ 보러 가기  
② 길상사 ☞ 보러 가기
③ 삼청각 ☞ 보러 가기
④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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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10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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