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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봉원사(奉元寺) 연꽃 나들이  '

▲  봉원사에서 만난 연꽃의 위엄

 


여름의 제국(帝國)이 한참 패기를 부리는 7~8월에는 연꽃을 주인공으로 한 연꽃축제가 천
하 곳곳에서 열린다.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도 아직 인지도는 낮
지만 연꽃축제를 하나 가지고 있으니, 바로 2003년부터 봉원사에서 열리고 있는 서울연꽃
문화대축제이다.

무더위가 한참 물이 오르던 7월 끝 무렵에 봉원사 연꽃 소식을 접했다. 여름이 왔으니 친
여름파인 연꽃의 향연은 한번은 봐줘야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하여 번
잡한 주말을 피해 평일 중에 날을 잡아 후배 여인네와 봉원사를 찾았다.
오후 2시에 서대문역(5호선)에서 그를 만나 봉원사 턱밑까지 올라가는 7024번 시내버스를
타고 안산(鞍山) 자락에 묻힌 봉원사 종점에 발을 내린다.

보기만해도 숨통이 질리는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그것을 통쾌하게 비웃듯 종점 주
변은 완전 자연에 감싸인 산골마을이다. 아무리 인구 1,000만의 서울이라고 해서 높은 건
물과 번잡한 거리, 무수한 인파들만 있는 것은 아닐진데, 서울에 대한 뿌리깊은 고정관념
때문일까? 서울 장안에서 그런 풍경과 대비되는 곳을 만나면 다들 왠 뚱딴지 같은 풍경인
가 눈부터 의심한다.
버스가 바퀴를 접고 쉬는 봉원사 주차장은 북쪽에 숲속한방랜드 찜질방이 자리해 있고 봉
원사로 가는 길목에는 민가들이 조촐하게 사하촌(寺下村)을 이룬다. 이 마을은 봉원사 승
려들이 주류를 이루며 살고 있는데 대부분 가족과 함께 산다. 이는 봉원사가 혼인을 허용
하는 태고종(太古宗)의 중심지라 그런 것인데 다들 별도의 집과 거처를 가지고 있어 절의
필수 요소인 요사와 선방 등 승려의 숙식공간은 매우 적다. 그러다보니 경내 밑까지 승려
들의 집이 형성되어 절과 마을의 경계가 참 애매모호하며, 집들 사이로 나무가 많아 첩첩
한 산주름 속에 묻힌 산골마을 같은 분위기가 물씬 묻어난다. (봉원사 주변은 개발제한구
역임)

종점에서 봉원사를 향해 몇걸음 가다보면 오른쪽에 승탑(僧塔)과 비석들이 즐비하게 늘어
선 부도전을 만나게 된다. 승탑<부도(浮屠)>은 승려의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석종형(石鐘
形) 승탑과 8각원당형(八角圓堂形)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의 승탑 7~8기가 있다. 비석
은 대략 9기로 다들 왜정(倭政) 이후에 만든 것이라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때깔이 무지
곱다.


▲  승탑과 비석이 옹기종기 모인 부도전(浮屠殿)


♠  봉원사 입문 (조낭자 희정 유애비, 보호수 느티나무)

▲  조낭자 희정 유애비(趙娘子 熺貞 遺哀碑)

부도전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야 바로 봉원사인데. 조그만 구멍가
게를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면 길 오른쪽에 하얀 피부의 조그만 비석이 눈길을 보낸다. 허나 구
석에 서 있어 정면만 쳐다보고 가는 중생의 심리상 태반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호기심이 많은 본인인지라 왠 비석인가 싶어 기웃거리니 비신(碑身)에 쓰인 내용 그대로 조낭자
희정 유애비이다. '조낭자 희정~~'이란 문구를 통해 조희정이란 여인과 관련된 비석임을 알 수
있는데, 보통 행적이나 절에 공헌한 것을 기리는 비석이 아닌 슬픔을 전한다는 뜻의 유애비(遺
哀碑)를 칭하는 것이 뭔가 애처로운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과연 이 비석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비석의 주인공인 조희정(趙熺貞)은 1904년 경남 진주(晋州) 인근에서 태어났다. 고명딸이던 그
녀는 8살 때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기생이 되었는데, 기생이 된 후 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살 때 첩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으나 그 생활도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남편은 사업
에 바빠 1년에 1~2번 정도만 그녀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구중궁궐의 버려진 능소화처럼 살
던 희정은 결국 21살이란 꽃다운 나이에 내세(來世)에 다시는 이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는 유
서 1장을 남기고 음독 자살을 하고 만다.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먹은 남편은 봉원사에서 그녀를 화장(火葬)하고 약간의 전답을 절에 시주
해 극락왕생을 기원했으며, 이 비석을 세워 그녀의 빈자리에 대한 슬픈 마음을 표현했다. 비신
뒷쪽에는 비석을 세운 이유가 쓰여 있는데, 단순히 기생이란 신분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했다
고 나와있다. 허나 실질적인 이유는 그녀의 순탄치 못했던 인생과 남편의 애정 부족이 아닐까
싶다.
비석 주변에는 네모난 주춧돌 4개가 놓여져 있는데, 이들은 비석을 씌우던 비각의 주춧돌로 비
각은 오래 전에(아마도 6.25 때 파괴된 듯) 사라지고 비석만 멀뚱히 남아있다.


▲  봉원사로 올라가는 길 (유애비 주변)

▲  봉원사 회화나무 (1) - 서울시 보호수 13-7호
봉원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가 무려 5그루나 있는데, 가장 먼저 마중하는 것이
바로 이 회화나무이다. 나무의 높이는 18m, 둘레는 3m이며, 2000년 12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180년이라고 한다. (지금은 190여 년)

▲  봉원사 느티나무 (1) - 서울시 보호수 13-3호

유애비와 회화나무를 차례대로 지나 경내 직전에 이르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중생을 맞는다. 오
르막길에 있다보니 인간의 불안전한 눈의 착시로 풍채가 더욱 대단해 보이는데, 보호수 지정 당
시 추정 나이가 30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약 40년이 더해져 약 340~350살 정도 되었다. 높이는
18m, 둘레는 4.3m로 뒤에 있는 느티나무보다 늘씬하고 키도 크며 주변에 넓게 그늘을 드리워 무
더위의 패기를 잠재운다.


▲  봉원사 느티나무 (2) - 서울시 보호수 13-1호

앞서 느티나무를 지나면 비슷한 덩치의 느티나무가 또 나타나 속세의 기운과 번뇌를 다시 한번
털어준다. 이 나무를 지나면 비로소 봉원사 경내에 발을 딛게 된다.
봉원사가 서울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절이지만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도 갖추지 못했고, 절과
마을의 경계도 조금은 애매하며 이들 나무가 일주문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나무는 앞 나무보다 100년 정도 나이가 더 들었다고 한다. 보호수로 지정된 시기가 1972년으
로 약 440~450년 정도 묵었으며, 그보다 키가 좀 작고 몸집은 크다. 그 옆에는 삼천불전 밑에
지은 종무소(宗務所) 겸 다원(茶園)이란 찻집이 있는데, 갖은 전통차와 식혜를 팔고 있으며, 불
교용품과 공양물, 불교 서적도 판매한다.

               ◀  봉원사 연못
네모난 연못에 동그란 섬을 심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난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
하고 있다. 연못에 홀로 떠 있는 섬에는 조그만
소나무가 운치를 가득 자아낸다.

      ◀  연못 옆에 자리한 비각(碑閣)
비각에는 평생 모은 재산을 절에 시주한 전성기
(全星基)를 기리는 송덕비(頌德碑)가 들어있다.
비석도 모자른지 대웅전 옆에 그의 제사까지 지
내는 전씨영각까지 둔 것을 보면 시주액이 어마
어마했던 모양이다. (역시 돈이 최고!!)


♠  봉원사 16나한상, 범종각 주변

▲  연못 북쪽에서 만난 연분홍 연꽃의 자태

연못 윗쪽 라인에는 연꽃을 심은 통을 배치해 연꽃의 조촐한 향연을 선보인다. 붉은색과 흰색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연분홍 연꽃부터 한참 물이 오른 홍련(紅蓮)까지 늦여름에 나타나는 수련
(睡蓮)을 빼고는 거의 다 있다. 이쁜 꽃잎을 펼쳐보이며 부처의 마음을 표현하는 연꽃들은 정처
없는 중생들의 마음에 제대로 불을 지핀다.


▲  활짝 개인 연분홍 연꽃의 위엄

▲  평범한 물통 속에 뿌리를 내린 연꽃들

 ◀  16나한상 동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1967년에 목수인 이광규가 세웠다. 중생구제를
염원하는 부처의 애듯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이
들어 있으며. 종 밑에는 단지를 묻었는데, 이는
소리의 공명 정도를 길게 하고자 함이다.

▲  좌측 16나한상

▲  우측 16나한상

16나한상은 부처의 열성제자인 16명의 나한(羅漢)으로 2001년 6월에 봉안했다. 나한상 북쪽에는
그들을 조성한 이유를 소상히 적은 16나한 조성연기문(造成緣起文) 비석이 있다.
그럼 여기서 연꽃은 잠시 접어두고 봉원사의 내력을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봉원사 경내

※ 도심과 가까운 포근한 산사이자 서울 연꽃축제의 성지(聖地) ~ 봉원사(奉元寺)
서울 도심에서 서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
왕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함> 서남쪽 자락에
서울 장안에 이름난 고찰(古刹) 봉원사가 포근히 터를 닦았다.

봉원사는 태고종(太古宗)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
금의 연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은 전혀 없고 그나마 조선 초에 정도전(鄭道傳)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이 가장 오래
된 것이라 하니 창건 시기에 대한 신뢰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된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愚
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
고 전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스
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했는데, 그 내용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을 멀리한 삼은(三隱)의 1명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조선 건국 이전에 그리했거나(그래도 한
때 가까웠던 사이이니) 또는 잘못된 기록이 아닐까 싶다.
1396년(태조 4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삼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세상을
뜬 이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여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어 1651년에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나 동/서 요사채가 불타면서 극
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다. 이후 1748년 영조(英祖)가 절을 옮기라며 지금의 땅을 하사
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절을 이전했고, 그 기념으로 영조가 친히 봉원사란 친필 현판
을 하사했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그리고 기존 자리에는 그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
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역<수경원(綏慶園)>을 만들었다.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이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 지
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또한 수경원이 연세대에 들어선 이후 그곳의 원찰(願刹) 역
할까지 도맡게 되면서 법등(法燈)이 꺼질 일은 거의 없게 된다.

1788년에는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설치되었으며, 1856
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2개의 현판이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였던 이동인(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는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되어 창립총회를 열기도 했다.

▲  봉원사 염불당(대방)

▲  봉원사 대웅전

1911년에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를 벌였고 땅을 더 확보하여 가람(伽藍)을 넓혔다. 1945년에는
해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으며, 6.25가 터지자 초반에는 절이 무
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9월 28일 무심한 총탄과 폭탄 세례로 광복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물들의 유물이 덩달아 화마(火魔)의 먹이가 되어 한줌의 재
가 되고 만다. (그나마 대웅전과 몇몇 건물은 살아남음)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 공덕동(孔德洞) 동
도공고(현 서울디자인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
하여 충당했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매국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자 봉원사에 헐값으로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무리를 하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한 지
정문화재인 대웅전을 홀라당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임한 주
지 혜경이 신도의 지원을 모아 1994년 대웅전을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을 보았다.
2009년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
고, 2011년에 전통사찰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천불전, 명부전, 염불당(대방), 극락전, 만월전, 미륵전,
칠성각, 운수각, 전씨영각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빼곡히 자리를 메우고 있으며, 대웅
전이 화재로 지방문화재의 지위가 박탈되면서 지정유형문화재는 오랜 내력에 걸맞지 않게 하나
도 없는 실정이다. 허나 중요무형문화재 48호인 단청장(丹靑匠)의 기능 보유자인 만봉이 주석하
고 있고, 중요무형문화재 50호인 영산재(靈山齋)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후학을 기르고 있어
영산재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그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대방 아미타불, 19세
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화가 여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
이 좋게 그늘을 드리운다.

이 절은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서울 4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고찰이다. 접근성과
교통도 모두 착한 수준으로 도시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거나 속세에 유린된 마음을 가다듬고
싶을 때 언제든 찾아와 안기고 싶은 곳이다. 절을 둘러싼 숲이 무성해 첩첩한 산골에 들어선 듯
한 즐거운 기분을 선사하며, 공기 또한 청정하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1주 동안 펼쳐보이며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서울 장안 유일의 연꽃축제로 그 이름하여 '서울연꽃문화대축제'라 부른다. 허나 '봉원사 연꽃
축제'라 간단히 일컬어도 상관은 없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대웅전 뜨락을 비롯해 절 전체가 연
꽃 향연의 장으로 화려하게 변신하는데, 다른 연꽃축제와 달리 연꽃을 연못이나 논두렁에 가꾸
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에 심어 경내에 배치한다.

절에서 안산으로 오르다보면 봉원사의 또다른 명물인 관음바위가 있고, 안산 정상에는 서울 지
방기념물 13호
로 지정된 무악산 동봉수대(東烽燧臺)가 있다. 봉수대는 1994년에 복원된 것으로
정상에서 연희동이나 홍제동, 독립문, 서대문역(천연동) 방면으로 내려가면 된다.

※ 봉원사 찾아가기 (2014년 8월 기준)
* 서울역(1,4호선 9-1번 출구), 5호선 서대문역(6번 출구), 2호선 신촌역(3/4번 출구)에서 7024
  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원사 하차
* 3호선 경복궁역(1번 출구)을 나와 적선동 정류장에서 272, 606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대부고(
  봉원동) 하차, 봉원사길로 10분 정도 걸어가거나 GS25시 앞(봉원동4거리)에서 7024번 버스로
  환승한다.
* 매년 한여름(7월 말~8월 말 사이)에 '서울연꽃문화대축제'가 열린다. 축제 시작일과 마지막날,
  주말에는 영산재를 비롯해 각종 공연, 불화 전시 등 다양한 볼거리가 열리며 굳이 축제기간이
  아니더라도 7~8월 내내 연꽃을 선보인다. (☞ 2014년은 8월 17일부터 23일까지 열림)
* 봉원사 승려는 거의 출퇴근을 한다. 이른 아침에 출근하여 일몰 직후에 퇴근하는데, 퇴근 이
  후에는 모든 건물을 잠궈두며 경비인 서넛이 절을 지킨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어찌 꿈엔들 잊으리요 ~ 연꽃의 즐거운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과 대방

▲  연꽃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은 연꽃축제장의 심장으로 연꽃을 머금은 수조들이 가득 널려 거대한 연꽃 숲을 이
룬다. 천하의 연꽃을 모두 소환한 것일까? 갖은 연꽃들이 서로 아름다움과 맵시를 견주며 물결
을 이루니 연꽃축제의 열기를 여름보다 더욱 뜨겁게 만든다. 속세에서 아무리 오염되고 상처받
은 안구와 마음이라도 연꽃의 즐거운 향연을 보면 금세 정화가 될 것이다.


▲  삼삼하게 우거진 푸른 연잎들 - 이렇게 보니 연지(蓮池) 한복판에
퐁당 빠진 기분이다.

▲  여인의 앵두 입술보다 더 진한 홍련 -
'어서 꽃잎을 펼쳐보여야 될텐데!!' 허나 몸은 그의 마음처럼 잘 따라주질 않는다.

▲  활짝 핀 홍련

▲  대방에서 바라본 대웅전 뜨락

▲  대웅전 뜨락 연꽃축제장 사이에 놓인 길 -
마치 연꽃 논두렁길을 걷는 기분이다. 허나 축제가 끝나고 수조가 모두
사라지면 원래의 모습(대웅전 뜨락)으로 돌아간다.

▲  이제 막 피어난 홍련과 전성기를 누리고 너덜너덜해진 홍련

▲  활짝 웃는 백련과 심기가 편찮은 홍련

▲  인당수(印塘水)에 몸을 던진 심청이 저 연꽃에서 환생하는 것일까?
보기만 해도 마음이 콩닥콩닥..

▲  미소가 아름다운 백련

▲  연을 담은 수조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앉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르고 싶다.

▲  방긋 웃는 홍련 - 하루살이보다 못한 찰라와 같은 삶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이곳을 찾은 중생들을 격려한다.

▲  서쪽에서 본 연꽃축제장

▲  대웅전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 -
대웅전 바로 앞에도, 계단에도 죄다 연꽃 수조를 갖다 놓아
연꽃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었다.

▲  봉원사 대방<(大房) = 염불당(念佛堂)>

대웅전 뜨락 좌측에 자리한 대방(염불당)은 넓직한 팔작지붕 건물로 공덕동 동도공고(현 서울디
자인고)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의 본채 건물을 업어와 만든 것이다.
1960년대에 6.25로 파괴된 대방을 다시 짓고자 궁리하던 중, 이병도의 친일매국패거리들이 대원
군의 흔적을 부시고자 아소정을 헐값에 내놓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여 당시 봉원사 주지 영월
은 아소정 본채를 구입, 그 목재로 도화주 김운파와 함께 1966년 대방을 재건했다.
그래도 아소정의 유일한 흔적인데, 내부는 좀 절스타일에 맞게 변형을 하더라도 외형은 원래 모
습을 유지했으면 좋으련만 당시 인식 부족으로 기존보다 축소/변형한 점이 몹시 아쉽다. 비록
왕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지 못하고 적지않게 모습이 바뀌었지만 건물 자재는 대부분 아소정
것이며, 대원군 시절의 현판이 걸려있어 그런데로 대원군 할배의 향기를 뿜어낸다. 게다가 경내
에서 삼천불전 다음으로 큰 건물로 그것도 기존 크기에서 축소했다고 하니 원래 모습은 대원군
의 생전의 위엄처럼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대방에 봉안된 하얀 피부의 아미타불

대방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손님들의 숙식, 유가족을 위한 49재, 그리고 영산재를 지도하는 공
간으로 범패(梵唄)를 비롯한 영산재를 배우는 이들의 음악 소리가 늘 끊이지 않고 구수하게 새
어나와 영산재의 성지임을 실감케 한다. 또한 주불(主佛)로 매우 조그만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는 17~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철원 심원사(深源寺)에서 옮겨온 것이며, 예
로부터 영험이 깃들여져 있다고 전한다.

건물 내부는 딱히 방을 가르는 벽이 없어 하나의 거대한 방을 이르고 있는데, 추사 김정희(金正
喜)가 쓴 현판을 비롯하여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승려의 신장도(神將圖, 부엌문에 있음) 등이 외
부를 아낌없이 수식한다.

▲  대방에 걸린 봉원사 현판의 위엄

▲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추사 김정희가 쓴 산호벽루(珊瑚碧樓)

▲  대방 앞에 놓인 연꽃무늬 석조물

추사체(秋史體)의 주인공인 김정희는 말년에 불교에 크게 관심을 가지며 많은 절을 찾았다. 방
문한 절마다 친필 현판을 남겼는데, 봉원사에도 그의 현판 2개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파란 글씨
로 쓰인 그의 필체는 16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며, 추사는 비록 가고 없지만
그의 힘찬 필력을 느끼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  봉원사 대웅전(大雄殿)

봉원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연세대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1748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조
금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 중반 건축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8호로 지정되었는데,
1990년대 초반까지 서울에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린 사찰 건축물은 화계사(華溪寺) 대웅전과
흥천사(興天寺, ☞ 관련글 보러가기) 극락전, 명부전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일찌감치 서울 지역
조선 후기 사찰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봉원사 대웅전은 1991년 삼천불전을 무리하게 짓는 과정에서 전기 누전으로
홀라당 말아먹었다. 그때 영조가 내린 봉원사 현판을 비롯해 내부에 있던 조선 후기 탱화들이
죄다 검은 가루가 되었으니 6.25시절 피해만큼이나 그 안타까움은 실로 크다 할 것이다. 봉원사
가 축적한 많은 보물들이 그렇게 또 사라진 것이다.
건물이 쓰러지자 2년 동안 공사를 벌여 1993년에 생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재건은 했지만 떠나간
지방문화재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으며, 승려 이만봉이 탱화와 단청 대부분을 그려 건물 내부가
매우 화려하다.

대웅전 안에는 조그만 종이 하나 있다. (종의 위치는 바뀔 수 있음) 이는 흥선대원군이 부질없
는 명당(明堂) 욕심에 예산 덕산(德山)에 있던 가야사(伽倻寺)를 강제로 불지르게 하고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그 자리로 이전했는데, 그때 타지 않고 남은 종을 이곳으로 가져온 것이
라고 한다.
가야사터 자리가 명당은 명당이라 그의 아들이 제왕이 되었지만 결국 자신을 포함 3대 만에 나
라를 말아먹었으니 거참 명당의 숨겨진 가시라고나 할까..?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이 3존불을 이룬다.
색채가 고운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으며, 붉은 지붕의 닫집이
매우 호화롭기 그지없다.

▲  대웅전 좌측을 꾸며주는 신중탱을 비롯한 여러 탱화들

▲  대웅전 우측을 꾸미는 극락9품도와 현왕도 등의 여러 탱화들

▲  대웅전 천정을 바라보는 여유 ~ 용이 새겨진 금빛찬란한 천정보개(寶蓋)
저들이 있는 한 대웅전은 더 이상 화마(火魔)의 덧없는 반찬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들 하기에 나름이지만 말이다.

    ◀  대웅전 계단 좌우에 배치된 해태상
대웅전을 화마로부터 굳게 지키고자 계단 양쪽
에 귀여운 해태상을 두었다. 연꽃에 둘러싸인
탓에 해태상의 표정이 씨익~ 해맑기 그지 없어
대웅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그의 표정
에 넘어가 이곳에 온 소임도 잊고 돌아갈 것이
다.


▲  대웅전 우측 계단에 진열된 연꽃들

▲  운수각(雲水閣)

▲  영안각(靈晏閣)

대웅전 좌측에는 조그만 건물 3동이 연이어 자리해 있다.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은 운수각
으로 고참 승려의 생활 공간이며, 그 옆에 조금은 낡아보이는 맞배지붕 건물은 일정기간 동안
혼백(魂魄)을 봉안하는 영안각으로 아미타불을 봉안했다. 19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겉 연
령은 100년은 되어 보인다.
그리고 바로 좌측에 있는 1칸 건물은 전씨영각으로 평생 모은 재산을 절에 시주한 전성기 부부
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기일(忌日)에 절에서 제를 지낸다. 역시 절이나 속세나 돈 앞에서는 어
쩔 수 없는 모양이다. 봉원사에서는 그들을 부처 시절의 급고독장자로 비유까지 하고 있으니 말
이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관음보살상
이글거리는 두광(頭光)을 지닌 관음보살이
용선을 타고 있다.

▲  9마리의 용조각
수각(샘터) 옆 바위에 놓인 특이한 조각품으로
9마리의 용이 모여 작전 회의를 하는 것 같다
.


▲  봉원사 수각(水閣, 샘터)
대자연이 내린 옥계수로 연꽃 석조(石槽)는 늘 마를 날이 없다. 여름의 제국 시절에는
연꽃보다 샘터가 더 반갑지. 메마른 목에 한줄기 빛이 되어주니 말이다.


♠  봉원사 삼천불전(三千佛殿)

경내 우측에 자리한 삼천불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름 그대로 3,000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곳에는 1945년에 지은 46칸의 광복기념관이 있었으나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둘러싼 우
리군과 북한군과의 싸움에서 무심한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고, 그때 영조의 봉원사 현판과 이동
인, 김옥균의 유물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이후 터만 남아오다가 1988년 지금의 삼천불전을 짓기 시작하여 1997년 간신히 완성을 보았
다. 무려 9년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210평 규모로 대들보 무게만 7톤을 헤아린다고 하며, 알래
스카에서 227년 이상 묵은 나무를 수입하여 만들었다. 또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본
건물의 특징인데, 삼천불전을 짓는 것까지는 좋으나 이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누전으로 소중한
대웅전을 떠나보내는 어이없는 비극을 겪었다.

건물 중앙에는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가 이 건물의 주인장이다. 그를
중심으로 좌우에 애기같은 조그만 금동불(金銅佛) 3,000불을 가득 채워 두 눈을 부시게 하는데,
모두 중생의 시주로 만든 원불(願佛)이다. 그외에 내부 우측에는 조그만 납골당이 있어 영가(靈
駕)를 위한 공간을 두었으며, 건물 내부가 워낙 넓어서 1,000명은 능히 넣을 수 있다.


▲  삼천불전의 주인장인 비로사나불의 위엄

▲  삼천불전 내부 우측

▲  삼천불전 내부 좌측


▲  괘불(掛佛) 제작 현장

16세기부터 전국에 번지기 시작한 괘불은 석가탄신일과 영산재 등 불교의 주요 행사 때 거는 큰
불화이다. 그러다보니 아무 때나 만날 수 없는 비싼 몸으로 200곳이 넘는 고찰을 기웃거린 나도
겨우 10번 남짓 친견했다. 마침 삼천불전 내부에서 괘불 제작을 하고 있어 잠시 지켜보았는데,
그림이 얼마나 큰지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 아이처럼 보일 정도이다. 처음으로 보는 괘불 제작
현장, 저들의 갖은 정성에 의해 불교미술사의 한 획을 그을지도 모를 괘불은 그렇게 눈을 뜬다.


▲  봉원사 3층석탑(진신사리탑)

1991년 7월 봉원사 승려와 신도 75명이 스리랑카의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에 있는 강가라
마사(寺)를 방문했다. 그때 그곳 대승정인 그나니사라가 부처 사리 1과를 선물로 주면서 봉원사
도 어엿한 진신사리 보유 사찰의 하나가 되었는데, 그 사리를 봉안하고자 삼천불전이 세워진 이
후에 신도들의 지원을 받아 석가탑(釋迦塔)을 닮은 3층석탑을 세웠다. 법당 앞에 탑을 세우는
원칙에 따라 대웅전 앞에 세우면 좋으련만 삼천불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그 앞에 세워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를 마음껏 드러낸다.

▲  3층석탑 옆에 세워진 석가모니
진신사리탑비

▲  조선후기 선각자인 이동인이 이곳에 있던
것을 기리고자 세운 두 손가락 조형물


▲  삼천불전 앞에 배치한 연꽃들

▲  이동인 손가락 조형물 주변에 피어난 연꽃의 분홍물결~~


♠  봉원사 마무리

▲  봉원사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칠성각은 그 이름 그대로 칠성(七星)의 건물이다. 허나 이상하게도 칠성(
치성광여래)이 아닌 하얗게 피부를 다듬은 약사여래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건물의 이름을
무색하게 만든다.

칠성각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빛이 바랜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로 삼아도 손색은 없어 보이는데, 내부에는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칠성탱이 그 뒤를 지켜주고 있으며,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八相圖)
와 신들의 무리가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산신(山神)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등이
있다.


▲  칠성각에 봉안된 약사여래좌상
붉은색의 약합(藥盒)을 쥐어들며 흐릿한 눈빛을 보내는 그 뒤에 칠성탱이 걸려있다.
보통 존상과 탱화는 일치하기 마련
인데, 여기는 서로가 따로 논다.

▲  칠성각 우측 - 산신탱과 팔상도의
4폭이 걸려있다.

▲  칠성각 좌측 - 신중탱과 팔상도의
나머지 4폭이 걸려있다.


▲  한글학회 창립 기념비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다. 1908년 8월 주시경
(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국어연구학
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였던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를 열어 봉원
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이후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하여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석을 세워 그날을 기억을 기린다.


▲  봉원사 명부전(冥府殿)

삼천불전 뒷쪽에 자리한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를
봉안하고 있다. 명부전 현판은 조선 태조 때 정도전(鄭道傳)이 친히 쓴 것이라고 하는데, 현판
을 보니 고색의 기운은 그리 짙어보이진 않는다. 허나 만약 정도전이 쓴 것이 맞다면 거의 620
년을 묵은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 된다.

명부전은 정도전의 현판으로도 빛이 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다고 기둥에 달린 주련 4개
가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라고 한다. 1945년 이후 친일파를 제대
로 척결하지 못한 휴유증으로 나날이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이 매국노의 흔적
을 남겨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봉원사도 생각이 있다면 속히 이들을 뜯어내 장작으로 쓰기 바
란다.


▲  명부전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

녹색 승려머리의 지장보살과 좌우에 봉안된 저승의 10왕(十王)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나
름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다. 10왕 끝에는 당찬 패기의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서 있어 저승의
식구들을 지킨다.

▲  지장보살 좌우에 늘어선 저승의 10왕과 여러 영가들의 영정
인간은 죽으면 저승으로 내려가 10왕의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특히 염라대왕(閻羅大王)의
입김이 커서 그에게 심판을 받는 7주에 염라대왕에게 잘 보이려는 뜻에서 49재를 지낸다.
물론 49재를 지낸다고 해서 무조건 극락으로 빠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  봉원사 미륵전(彌勒殿)

칠성각 뒷쪽에 있는 미륵전은 기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마치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모습이
다. 건물 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彌勒佛)이 서 있는데, 건물도 그를 닮아서
죄다 하얀색이라 조촐하게 순백(純白)의 세계를 자아내고 있다. 미륵불 주위에는 기름을 이용한
인등(引燈)이 가득 자리해 건물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데, 인등으로 인해 인등각이라 불
리기도 한다.


▲  미륵전 미륵불입상

부처가 사라지고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륵불, 이 땅은 점점 아비규환 이상으로 흘
러가고 있는데, 중생의 고통을 나몰라하며 어딘가에 숨어있을 미륵불이 그저 밉기만 하다. 그렇
게 나오기 싫으면 다른 이를 보내 구제해 주던가. 꼭 56.7억년을 채워야 되는가? 미리 땡겨서
나오는 센스좀 보여주기를.. 자꾸 숨어있는 것도 미륵불의 엄연한 직무유기이다.

◀  미륵전 앞에 세워진 날씬한 7층석탑
왜정 이후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식으로 언제
무슨 이유로 세웠는지는 모르겠다.


▲  극락전(極樂殿)과 자애수(慈愛樹)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그리 오래된 존재는 아닌데, 건물 우측에는 자애수란 이쁜 이름을 지닌 아
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나이는 150~200년 정도 된 것으로 여겨지며, 왜 자애수라
불리는 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극락전에 그늘을 제공하는 것 때문은 아닌 듯 싶다.

▲  극락전 아미타불과 문수,보현보살

▲  만월전(滿月殿)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외진 숲속에 만월전이 있다. 이 건물은 약사불을 봉안하고
있는데,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그의 곁에 둔 것이 특징이다. 1904년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독
성탱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우리가 갔을 당시는 애석하게도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내부
는 살피지 못했다.


▲  내려가는 길에 만난 어여쁜 홍련

▲  봉원사를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힘없는 발걸음을 하다

봉원사에 펼쳐진 연꽃 세상을 구경하며 그들의 향기에 취해 1시간 30분 정도 머물렀다. 연꽃이
완전 시간 도둑인 셈이다.
속세로 나온 우리는 저녁을 먹고자 삼청동(三淸洞)으로 이동했다. 바로 삼청동으로 간 것은 아
니고 나의 즐겨찾기 명소인 북악산 백석동천(白石洞天, 백사실/백사골 ☞ 관련글 보러가기)에
들어가 잠시 여름 제국의 기운이 늦춰지길 기다렸다가 삼청동으로 이동했다.


▲  우물집에서 먹은 뚝배기불고기와 반찬의 위엄

삼청동은 맛집의 성지(聖地)답게 온갖 식당과 찻집/까페가 즐비하다. 게다가 청와대나 국무총리
공관 등의 국가 시설이 많아 고위 공무원과 상류층들이 자주 찾아 맛도 괜찮은 편이다. 다만 가
격이 썩 착하지 않은 것은 큰 함정.
이번에는 기존에 갔던 식당들은 모두 제쳐두고 새로운 집을 개척하기로 했다. 그래서 발견한 집
이 삼청동 가장 북쪽 구석에 자리한 우물집이다. 이곳은 삼청공원과도 가깝고, 삼청동 마을버스
종점에서 칠보사(七寶寺) 방면으로 도보 1분 거리로 2층 양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물집은 냉면과 한우고기로 유명한 식당인데, 한우고기는 너무 비싸서 우리 같은 서민이 먹기
에는 겁이 나고, 그렇다고 냉면을 먹자니 뭔가 허전하여 우리는 뚝배기불고기를 주문했다. 면보
다는 밥이 배를 채우는 데 좋기 때문이다. 냉면은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허전하다. 그래서 만두
같은 부식물을 시키게 되고 그것이 자금난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집은 냉면과 뚝배기불고기의 가격이 7,000원선(지금은 다를 수 있음)으로 다른 식당보다 가
격이 좀 착하다. 서울 장안 유명 냉면집의 냉면은 거의 8천원~1만원대, 뚝배기불고기도 6~8천원
대니 말이다.

냉면 전문집에서 뚝배기불고기를 시킨 탓에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밥을 기다리니 제일 먼저
반찬이 깔린다. 그런데 반찬이 생각 외로 푸짐한 것에 놀라고 말았다. 무려 6가지나 되기 때문
이다. 게다가 특이하게 상추와 고추, 쌈장까지 나오며, 특히 감자조림이 맛있어서 1번 더 리필
을 했다.
반찬이 나오고 얼마 뒤 본메뉴인 뚝배기불고기와 쌀밥이 차려진다. 뚝배기불고기는 내 입맛에는
그런데로 괜찮았는데, 상추에 쌈장을 듬쁙 바르고 고기와 밥을 담아 입에 쏙 넣으니 목구멍이
정신을 못차린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인사동으로 넘어와 전통찻집에서 차 1잔의 여유를 즐기다
가 저녁 늦게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여 봉원사 연꽃 나들이는 연꽃의 찰라와 같은 인생처럼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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