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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용궁사) '

용궁사 느티나무

▲  용궁사 느티나무

백운산 정상 백운산 산길

▲  백운산 정상

▲  백운산 산길

 


 

여름이 한참 물이 오르던 7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인천(仁川) 앞바다에 떠있는 영종도를
찾았다.
영종도(永宗島)는 천하 제일의 국제공항으로 찬양을 받는 인천국제공항을 품은 큰 섬으로
공항을 닦고자 영종도와 용유도(龍游島) 사이의 너른 갯뻘을 매립하고 삼목도(三木島) 등
의 여러 섬을 엮으면서 섬이 커졌다. 하여 영종도하면 기존의 영종도 외에 용유도와 삼목
도를 포함해서 일컬으며, 이들을 묶어 영종▪용유도라 부르기도 한다.

영종도에는 백운산이란 뫼와 용궁사란 오래된 절이 있는데 그곳에 살짝 마음이 가서 겸사
겸사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공항전철(서울역↔인천공항2터미널)을 타고
운서역이나 영종역에서 접근하는 것이 제일로 좋지만 운서역과 영종역은 환승할인 무적용
역이라 나 같이 서민들에게는 조금 부담이 된다. (공항전철의 영종도 구간은 수도권 환승
할인이 되지 않음)
그래서 집 앞에 있는 1호선을 쭉 타고 동인천역까지 이동하여 인천좌석버스 307번을 타고
영종도로 들어갔다. 시간도 좀 걸리고 영종도 강제투어가 조금 심하긴 하지만 환승할인의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조금 일찍 부지런을 떨면 된다.

영종도에 진입하여 백운산 그늘에 자리한 전소에 두 발을 내렸다. 전소는 영종동행정복지
센터와 초등학교, 고등학교, 우체국, 아파트 등을 갖춘 오래된 마을로 서쪽에는 백운산이
, 동쪽과 남쪽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 평지에 한참 개발의 칼질이 춤을 추고 있음)
백운산 나들이는 바로 이곳 전소에서부터 시작된다.


 

♠  전소마을에서 만난 오래된 비석 무리들

▲  전소마을 비석 무리들

전소에서 문득 생각나는 존재가 있어서 백운산을 잠시 접어두고 마을 북쪽에 있는 구립하늘어
린이집을 찾았다. 그 앞에는 오래된 비석들이 3열로 각각 4기씩, 총 12기의 비석이 늘어서 있
는데, 이들은 영종도 곳곳에서 수습한 옛 영종진(永宗鎭) 첨사(僉使)의 비석으로 주로 선정비
(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가 주류를 이룬다.
선정비는 첨사의 착한 행정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고, 불망비는 첨사의 덕을 기리고자 세운 것
인데, 백성들이 진심으로 세운 것도 있겠지만 선정은 쥐뿔도 없음에도 첨사가 강제로 세운 것
도 적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저런 비석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돈을 뜯어가
자신의 배때기를 채운 관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종진은 조선시대에 영종도에 설치된 군사 기지로 처음에는 남양부(南陽府, 화성시 남양) 소
속이었다가 1875년 운양호(雲揚號) 사건으로 된통 당하면서 인천부(仁川府)로 넘어갔다. 이후
영종진이 폐지되면서 섬 전체가 부천군(富川郡) 소속이 되었다가 이후 옹진군(甕津郡) 관할로
바뀌었으며, 1989년 인천 중구(中區)에 편입되어 인천의 그늘에 있게 되었다.

이들 비석 중에 제일 우측에 유리막에 감싸인 조그만 철비(鐵碑)가 있는데, 그것이 나를 이곳
으로 오게한 양주성금속비(梁柱星金屬碑)이다. 돌로 만든 비석은 참 많지만 철이나 금속으로
만든 비석은 흔치가 않은 편으로 수도권에서도 철비는 이것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그러다보
니 다른 석비는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이 철비에만 자꾸 눈길이 간다.


▲  비석 무리의 홍일점, 양주성 금속비 - 인천 지방기념물 13호

이 철비는 높이 91cm, 폭 31cm, 두께 3cm로 황동(놋쇠)을 녹여서 만든 것이다.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영종진이 큰 피해를 입자 흥선대원군은 인천부를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시키고 영
종진을 인천부 소속으로 넘겨 양주성을 영종진첨사<첨절제사(僉節制使)>로 파견했다.
양주성은 파괴된 진과 건물을 손질하고 방비를 튼튼히 했으며 전쟁으로 혼란해진 민심을 수습
해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서 떠나게 되자 백성들은 크게 아쉬
워하며 놋그릇을 모아 1877년 9월에 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그냥 석비(石碑)도 아닌 놋그
릇을 모아 철비를 세울 정도면 양주성의 선정이 제법 대단했던 모양이다.

▲  옆에서 바라본 비석 무리

▲  비석 무리 부근에 자리한 연자방아


▲  속세를 향해 길을 늘어뜨린 용궁사 숲길 ▼

비석 무리를 둘러보고 용궁사로 길을 향했다. 전소에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용궁사로 인도하
는 숲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용궁사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오르막길
이긴 해도 경사는 느긋하며, 숲이 매우 삼삼해 햇볕도 들어오기 힘들다.


 

♠  백운산에 안긴 영종도 유일의 오래된 절, 용궁사(龍宮寺)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15호

백운산(白雲山, 256m)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용궁사는 개발의 칼춤 소리로 요란한 영
종도의 별천지 같은 곳이다. 바로 절 밑에까지 개발의 칼질이 자행되어 온갖 개발 소음이 난
무하지만 용궁사는 백운산의 비호로 그 소음을 거의 모르고 살 정도로 산자락에 푹 묻혀있다.

용궁사는 영종도의 몇 안되는 문화유적으로 670년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원효는 그 시절 왕경<王京, 경주(慶州)>에 머물며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상
대로 불교 대중화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 원효의 창건설은 속세살이만큼이나 참 부질
없는 소리이며, 그의 창건설을 밝혀줄 기록이나 유물도 전혀 없다.
게다가 절에서는 1,300년 묵었다는 느티나무를 증거로 천년 고찰(古刹)임을 내세우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나무의 나이도 정확한 편이 아니며, 나무가 꼭 절 창건과 관련이 있다는 보장이
없다. 나무를 제외하면 오래된 것이라고 해봐야 요사와 관음전 정도로 19세기 중/후반에 조성
된 것이 고작이다. 또한 창건 이후 19세기까지 이렇다할 내력도 남기지 못해 오랜 내력에 의
구심을 던지게 한다. 다만 백운산 봉수대 관리와 바다 조망을 구담사(舊曇寺) 승려가 담당했
는데 그 구담사가 바로 용궁사의 옛 이름이며, 옥불 전설에는 옛 이름의 하나인 '백운사(白雲
寺)'가 등장해 그것을 통해 적어도 고려나 조선 초에 조촐하게 법등(法燈)을 켰던 것 같다.

절의 사적(事蹟)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중반으로 그것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과의 인연 덕분에 남게 된 것이다. 대원군은 불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부인 민씨(閔氏)가 불
교 신자라 자연히 절 출입이 잦았다. 하여 서울과 경기도의 여러 절(화계사, 흥천사, 수락산
흥국사, 안성 운수암 등)과 흔쾌히 인연을 맺으며 기도를 하고 여러 승려와 교분을 쌓았는데,
용궁사도 그런 절의 하나였던 모양이다.
배를 타고 들어가야 되는 섬인데도 어떻게 인연을 지었는지 이곳을 찾아 기도를 올렸다고 하
며, 1854년에 절을 중창했다. 이때 용궁사로 이름을 갈게 하면서 현판을 써주었는데 이는 관
음전 옥불이 바다 용궁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권한 것이라고 한다. 이후 대원군은
고종(高宗)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약 10년 동안 이곳에 머물며 기도를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용궁사와 대원군과의 인연은 요사에 걸린 그의 현판이 모든 것을 대변해주니 창건설은
몰라도 대원군 중창설은 더 이상 왈가왈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원군 이후 딱히 적당한 내력은 없으며, 영종도가 인천에 편입되자 절과 경내에 있는 느티나
무가 인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관음전, 칠성각, 용황각, 요사채 등 6~7동의 건
물이 있으며, 문화유산으로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수월관음도 등이 있다. 절 자체는 지방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절과 느티나무 때문
이다. (그것도 아니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음)

영종도 유일의 오래된 절로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며 그렇게 깊은 골짜기는 아니지만 절을 둘
러싼 숲이 삼삼하여 바쁘게 변해만 가는 영종도에서 이곳만큼은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다. 숲
이 속세의 소음을 걸러주니 산사(山寺)의 분위기도 그윽하며, 절이 조촐한 규모라 눈에 쏙 넣
고 살피기에도 별 부담이 없다.
근래에 절에서 백운산 정상을 잇는 산길을 손질하여 백운산 둘레길로 삼았는데 절을 둘러보고
둘레길을 따라 40분 정도 오르면 영종도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백운산 정상에 이른다. 절만
둘러보고 가면 많이 허전할 것이니 백운산도 같이 겯드린다면 영종도 여로(旅路)를 더욱 알뜰
하게 꾸며줄 것이다.

※ 영종도 용궁사 찾아가기 (2018년 12월 기준)
* 공항전철 영종역(1번 출구)에서 중구 지선 3번, 4번을 타고 용궁사입구 하차. 이 방법이 제
  일 최적이나 배차간격이 허벌나게 길고 영종역에서 서로 타는 곳이 틀리다.
* 공항전철 영종역(1번 출구)에서 203번, 598번 시내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598번은 크게 돌
  아가므로 203번이 나음)
* 서울 1호선 동인천역(4번 출구)에서 307번 좌석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 인천 1호선 동막역(3번 출구)에서 304번 좌석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 승용차
①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 금산나들목을 나와서 영종하늘도시 방향 → 운남교차로에서 우회
   전 → 용궁사입구에서 우회전 → 용궁사 주차장
② 인천대교 → 영종나들목을 나와서 영종하늘도시 방향 → 운남로 → 전소 → 용궁사입구에
   서 좌회전 → 용궁사 주차장
* 소재지 : 인천광역시 중구 운남동 667 (운남로 199-1 ☎ 032-746-1361)


▲  용궁사 샘터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샘터가 마중한다. 산사에 으레 있는 샘터이건만 요즘처럼 더울 때
는 보물급 문화유산보다 100배 더 반가운 존재이다. 네모난 석조(石槽)에는 백운산이 내린 약
수가 가득 담겨져 있는데,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목구멍이 시원해진
다.

▲  용왕의 공간, 용황각(龍皇閣)

▲  용황탱과 관음보살탱화

샘터를 지나면 석축 위에 세워진 용황각이 나온다. 용황각이란 이름은 여기서 처음 만나는데
일반적인 용왕(龍王)을 용황으로 격을 높여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왕을 황제로 높인 것
과 같은 이치~) 아무래도 섬이다보니 바다를 터전으로 삼은 섬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우상인
용왕을 봉안한 것인데 용왕을 용황으로 높여 특별 대접을 하며 주민들의 용왕신앙을 돕고 있
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용황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로 밑에는 약수터가
있는데, 이 샘터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샘터 위에 석축(石築)을 다지고 건물을 세운 터라 주
춧돌의 키가 높으며, 북쪽에 트인 문을 통해 용황각으로 들어서면 된다. (동쪽 문 바깥은 허
공이라 추락 주의 요망)
용황각 불단에는 용황이 담긴 용황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용황의 머리에는 두광(頭光)이 반짝
반짝 윤을 내고 있으며, 용황탱 옆에는 관음보살(觀音菩薩) 누님이 그려진 탱화가 나란히 자
리해 있다.


▲  용궁사 느티나무(할아버지나무) - 인천 지방기념물 9호

요사 앞에는 용궁사의 오랜 자연산 보물이자 이곳의 터줏대감인 느티나무 2그루가 넓게 그늘
을 드리우고 있다.
이들 나무 가운데 요사 동쪽에 자리한 나무는 나이가 무려 1,300년을 헤아린다고 한다. 나무
의 덩치가 참 크긴 하지만 1,300살로는 보이지 않고 훨씬 젊어보이는데, (한 600~700살 정도)
요즘 하도 거품이 많은 세상이라 나이 재측정이 필요해 보인다. 실제 예로 서울에서 가장 오
래된 나무로 손꼽히던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도 나이가 830년을 호가한다고 했지만 2013년
에 지방기념물로 지정되면서 다시 나이를 재본 결과 600년 정도 된 것으로 나왔다. 그러니까
230년 정도의 적지않은 거품이 끼어있던 셈이다.

요사 동쪽 느티나무는 높이 20m, 나무둘레 5.63m에 이르는 장대한 나무로 여기서는 할아버지
나무라 불린다. 그리고 요사 북쪽 느티나무는 할머니나무라 불리는데 덩치는 할아버지나무보
다 작으며, 그 나무보다 후대에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할아버지나무는
할머니 나무쪽으로만 늘 가지를 뻗는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옛부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
낙네들의 치성 장소로 애용되었는데, 절이 있기 전부터 기자(祈子) 신앙의 현장으로 널리 쓰
인 듯 싶다.
이후 절이 들어서면서 예불을 먼저 올리고 용황각 밑의 약수를 마신 다음 할아버지나무에 기
원을 하는 순서로 변경되었으며,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낳는다고 전한다.

▲  서쪽에서 바라본 느티나무
(할아버지나무)

▲  요사 북쪽에 자리한 느티나무
(할머니나무)


▲  용궁사 요사(寮舍)

두 느티나무 그늘에 자리한 요사는 대원군이 1854년에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관음전과 더불
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데 승려의 생활공간 및 공양간,
대중방(大衆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건물 동쪽에는 툇마루 2칸을 두었으며, 서쪽을 제외한 나머지는 벽으로 막았다. 정면 가운데
칸에는 용궁사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절 이름을 용궁사로 바꿀 것을 제
안하며 친히 써준 것으로 그의 호인 석파(石坡)가 쓰여있어 대원군과의 진한 인연을 가늠케
한다. 그는 어찌하여 바다 건너 이곳까지 애써 인연을 지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  흥선대원군이 1854년에 남겼다는 '용궁사' 현판의 위엄
용궁사에서 느티나무 다음으로 애지중지하는 존재로 이 현판이 없었다면
대원군 중창설도 자칫 신뢰를 잃을 뻔 했다.

▲  두목 포스가 느껴지는 묘공(猫公)의 위엄

요사에는 용궁사에서 기르는 누런 털의 묘공(고양이)이 있었다. 요사와 할배나무 주변을 순찰
하면서 여름 오후를 보내고 있는데,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니 묘공 특유의 관심 소리를 내며
내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하여 잠자리를 잡아서 조공(?)으로 바칠려고 했으나 이곳 잠자리는
눈치가 100단인지 하나도 잡지 못했다. 한때 외갓집이 있는 단양(丹陽) 시골의 잠자리 씨를
거의 마르게 할 정도로 잠자리를 잘 잡았는데, 이젠 나도 늙은 모양이라 오히려 그들에게 희
롱을 당할 판이다.

묘공 하나가 요사 툇마루에 앉아있다가 더운지 아랫 돌에 벌러덩 누워 강렬한 포스를 보이니
마치 두목 포스 같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꼬랑지를 살랑거리며 경내를 지키는 그들이 있기에
용궁사는 오늘도 무탈하다.


▲  대웅보전(大雄寶殿)

용황각 뒤쪽에는 가건물로 된 대웅보전이 있다. 이곳은 관음도량을 칭하는지라 정식 법당(法
堂)은 관음전으로 2000년 이후 합판으로 대웅보전을 지어 새로운 법당으로 삼았으나 건물의
볼품은 많이 떨어진다.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지장보살상, 신중탱 등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 우측 부분은 종무소(
宗務所)로 쓰이고 있다.

▲  포근한 인상의 석가3존불

▲  조금은 빛바랜 신중탱(神衆幀)

▲  한참 몸단장 중인 관음전(觀音殿)

▲  관음전 뒤쪽에 자리한 석조관음보살입상

요사 바로 뒤쪽에는 이곳의 법당인 관음전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관음전은 대원군
이 세운 것으로 전해지며 요사와 함께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내가 갔을 때는 마침
보수공사 중으로 불단에 있던 관음보살상은 칠성각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으며, 김규진(金圭鎭
)이 쓴 주련(柱聯)도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관음전에는 바다에서 건졌다는 옥불(玉佛)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사연이 아련하게 전해온
다.
때는 조선 중기(또는 후기)의 어느 평화로운 날, 영종도 월촌에 어부(漁夫) 손씨(또는 윤씨)
가 살고 있었다. 거의 매일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로 입에 풀칠을 하며 살고 있었는데, 그날도
바다로 나가 그물을 치며 대어를 기대했다. 허나 원하는 물고기는 없고 왠 옥불 하나가 걸려
든 것이 아닌가? 이에 어부는 단단히 흥분하여
'물고기는 하나도 없고 왠 이런 게 걸리고 앉았냐!'
투덜거리며 옥불을 바다에 내던지고 다시 그물을 쳤다. 그런데 그물을 건져올리니 아까 옥불
이 또 걸려든 것이다. 그래서 육두문자 요란하게 내뱉고 다시 내던졌으나 이후에도 계속 옥불
만 그물에 걸려든다. 이에 어부는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 불상을 백운사(白雲寺, 지
금의 용궁사)에 넘겼다.
그 이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백운사 앞을 말이나 소를 타고 지나가면 무조건 멈춰서 움직
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절 앞을 지날 때는 말과 소에서 내려서 지나갔으며,
불상의 영험이 있다는 이야기가 주변에 퍼져 육지에서도 많은 이가 찾아와 불전함이 매일 터
져나갈 정도였다. 또한 불상을 발견하여 절에 넘긴 어부도 이후 풍어(風魚)를 누리면서 부자
가 되었다고 전한다.

19세기 중반 용궁사를 찾은 대원군은 이 사연을 전해듣고 불상이 바다 용궁(龍宮)에서 나왔으
니 절 이름을 용궁사로 고칠 것을 제안하며 현판을 써주었다. 그 현판이 바로 요사에 걸린 그
것이다.
바다에서 건졌다는 옥불은 인근을 지나다가 침몰한 배에 있던 것이거나 절이 파괴되면서 버려
져 바닷속을 방황한 불상으로 여겨진다. 그 옥불이 있었다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느티
나무 제외)이 되었을 것인데, 왜정(倭政) 때 도난을 당해 지금은 없으며, 새로 만든 조그만
관음보살상이 그 자리를 조금이나마 대신한다.


▲  날렵한 처마선이 인상적인 칠성각(七星閣)

관음전 옆에는 근래에 지어진 석조관음보살입
상과 칠성각이 자리해 있다. 칠성각은 칠성(七
星)을 봉안한 건물이지만 칠성 외에 산신(山神
)과 독성(獨聖)도 함께 담고 있어 삼성각(三聖
閣)의 역할을 하고 있다. (관음전 중수로 그곳
에 있던 관음보살상과 수월관음도가 이곳의 신
세를 지고 있었음)

칠성각에 봉안된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탱은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고색의 기운이
제법 역력하다.

▲  다른 산신탱과 달리 꽤 젊어보이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등이 담긴 산신탱

▲  독성과 동자가 그려진 독성탱

▲  칠성 가족을 빼곡히 머금은 칠성탱


▲  관음보살상과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76호
관음보살상 뒤에는 수월관음도가 후불탱으로 걸려있다. 그 탱화는 1880년에 축연
(竺演)과 종현(宗現)이 그린 것으로 3폭의 비단을 이어서 만들었는데 화폭
규모는 세로 135.5cm, 가로 174.3cm으로 가운데 화폭은 102.2cm, 향좌폭
29.3cm, 향우폭 33.5cm으로 화폭이 제일 넓다.

▲  경내 뒤쪽에 자리한 소원바위

용궁사의 다른 명물로는 소원바위가 있다. 관음전 뒤쪽 산자락에 있는 이 바위(바위라기보다
는 커다란 돌판~)는 소원을 빌면서 바위 위에 작은 돌을 시계 방향으로 돌려 자석에 붙는 듯
한 무거운 느낌이 들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가볍게 돌아가면 꽝~!!) 바위 앞에 하는
요령이 적혀있는데 우선 바위 뒤쪽에 놓인 불상 앞에 조공(돈)을 바치고 (역시나 돈이다~!!)
그런 다음 생년월일과 소원을 말하며 3배를 올리고 돌을 돌리라고 나와있다.
나는 조공을 바치지 않고 (절이 나보다는 경제 사정이 훨씬 좋으니~~) 그냥 소원을 빌고 3배
를 하며 돌을 돌렸다. 기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이 순간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소원이 접수된 모양이다. 하여 다시 한번 해봤는데 역시나 무거웠다. 혹여 접수 대상이 아니
더라도 돌의 무거움은 누구나 같은 것이 아닐까? 아니면 기분상일까? 과연 소원 성취가 이루
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소원이 꼭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를 잠시 들뜨게 한다. (허나
현실은 소원 성취 그딴거 없음~~~)


 

♠  안개 낀 백운산(白雲山)을 오르다.

▲  용궁사에서 백운산으로 오르는 백운산둘레길

용궁사에서 50분 정도를 머물다가 절을 등지며 백운산둘레길에 발을 들였다. 백운산 정상까지
오를까 말까 궁리를 하다가 일몰까지는 아직 시간도 넉넉하고 용궁사와 둘레길만 보고 철수하
기에는 너무 싱거워 흔쾌히 정상까지 가기로 했다.

백운산둘레길은 영종도의 지붕인 백운산 주위를 도는 산길로 4.4km 정도 된다. 시작점은 접근
성이 좋은 용궁사에서 하는 것이 좋은데, 용궁사에서 25분 정도 오르면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여기서 둘레길과 작별하고 15분 정도 오르면 정상으로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대체로
경사는 느긋한 편이다. 수목이 울창하여 햇볕이 들어올 틈이 거의 없으며 산바람도 넉넉히 불
어 땀을 제대로 털어간다. 다만 약수터가 없기 때문에 용궁사에서 물배를 채우거나 물통을 채
워 산행에 임하기 바란다.


▲  쉼터로 조성된 6각형 정자 (용궁사 부근)

▲  둘레길에 왠 연자방아?
1981년 12월에 용궁사 신도가 기증한 연자방아로 왜 아무런 필요도 없는 이곳에
두었는지 모르겠다. 절에 두거나 산 밑에 두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  잠시 미친 경사를 보여주는 둘레길

▲  백운산 봉수대(烽燧臺)터

둘레길과 정상 방면 산길이 갈리는 곳에 백운산 봉수대가 있었다. 이 봉수대는 서해바다의 동
태를 살피며 위급시 봉화를 피워 인천 철마산(鐵馬山)과 백운산(白雲山)에 알렸는데, 구담사(
용궁사) 승려(1명 또는 3명)와 봉수지기 2명이 봉수대를 지켰다고 한다.

서해를 지키던 당당한 모습의 봉수대는 세월의 장대한 흐름에 사라진지 오래이고 이곳과 정상
으로 가는 길목에 약간의 돌무더기가 남아있다. 여기서는 두께 1cm 정도의 경질와편 등이 나
오고 있어 봉수대의 옛 흔적을 희미하게 더듬을 수 있다.


▲  정상 동쪽에 자리한 헬기장

▲  헬기장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

▲  백운산 정상 전망대

용궁사에서 40분 정도 오르면 영종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백운산 정상에 도달한다. 정상
에는 전망대를 두어 조망(眺望)의 나래를 누리게 했는데, 가는 날이 문닫는 날이라고 안개가
자욱히 끼어 100m 전방도 보이지를 않는다. 보물급 조망을 기대하고 올라왔건만 서해바다가
빚은 안개의 심술에 그 기대는 산산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전망대에는 인천국제공항과 공항신도시, 용유도(龍游島), 서해바다,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섬
들이 보인다는 전망 안내문과 사진이 있지만 오리무중과 같은 안개가 그 모든 것을 다 앗아가
버려 전망 안내문이 참 무색하게 되었다.

▲  우두커니 서 있는 백운산 정상 표석

▲  백운산 정상 전망대


▲  안개 속에 몸을 가린 백운산 남쪽 봉우리

▲  정상에서 전소로 내려가는 산길 (1)

▲  정상에서 전소로 내려가는 산길 (2)

진한 안개에 털려 정체성을 잃은 정상 전망대를 벗어나 전소 쪽으로 내려갔다. 어차피 보이는
것도 없으니 더 머물러봐야 의미도 없고, 시간도 어느덧 18시가 넘었다.
내려갈 때는 동남쪽 전소 방향으로 내려갔는데 이 길도 대체로 완만한 편이다. 안개가 자욱해
도 전방 50m 까지는 보이기 때문에 하산에 별로 무리는 없었다. 야속한 안개를 뚫고 20분 정
도 내려가니 산속에 묻힌 집이 나오고, 군사 훈련시설을 지나니 울퉁불퉁했던 흙길은 끝나고
신작로가 앞에 펼쳐진다.

신작로를 따라 시골스러운 전소마을 서쪽을 지나면 영종자이아파트와 영종국제물류고등학교가
나오고 영종동의 주요 간선도로인 운남로가 나타난다.

이렇게 하여 영종도 백운산 나들이는 바다 안개를 뒤로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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