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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 가까운 바다 포구, 인천 소래포구 나들이 '

▲  옛 수인선의 아련한 흔적, 소래철교


 

겨울 제국(帝國)의 한복판이자 새해 첫 무렵에 친한 후배와 인천 동남부 끝으머리에 자리
한 소래포구와 논현포대를 찾았다.

햇님이 하늘 한복판에 걸려있던 오후 2시에 신도림역(1,2호선)에서 후배를 만나 개봉역(1
호선)에서 광명시내버스 1번(개봉역↔거모동)으로 바꿔타고 광명4거리, 계수동, 은행지구
, 삼미시장을 두루 거쳐 월곶포구에서 두 발을 내렸다.

월곶(月串)은 경기도 시흥시(始興市)이 일원으로 서해 갯벌을 사이에 두고 북쪽으로 인천
관할인 소래포구와 마주보고 있다. 월곶이란 이름은 육지에서 바다로 내민 모습이 반달처
럼 생겼다고 해서 유래된 것으로 달을 뜻하는 '달월'이라 불리기도 했다. (수인선에 달월
역이 있음)
조선 후기에는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설치되어 인근 바다를 지켰으며, 1991년까지 갯벌로
전해오다가 1992년 8월 시흥시가 이 일대 564,938㎡의 갯벌을 생매장시키고 그 위에 위락
시설과 아파트단지, 항구를 갖춘 해안 마을을 만들었다.

월곶은 소래포구와 함께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해안 포구로 종합어시장과 활어회, 조개구
이 등을 취급하는 식당들이 즐비하며, 한때는 소래포구의 염통을 쫄깃하게 건드릴 정도로
잘나갔으나 소래와 오이도(烏耳島)에게 밀려 예전만은 못한 실정이다.
월곶포구의 구조를 보면 북쪽에 2012년에 개통된 수인선 월곶역이 있고, 서쪽에 풍림아이
원1~2차 아파트, 동쪽에는 풍림아이원3~4차아파트가 있다. 그리고 중앙에 월곶동주민센터
가 있고, 남쪽에 어선이 들락거리는 월곶포구가 자리한다.


▲  월곶해안로와 서해 갯벌
거대한 늪지대처럼 무시무시해 보이는 서해 갯벌 너머로 인천 영역인
에코메트로10~12단지가 바라보인다.


 

♠  옛 수인선(水仁線)의 아련한 흔적, 소래철교(蘇來鐵橋)

▲  갯벌에 다리를 담군 새 수인선 다리, 그 너머로 옛 소래철교가 보인다.

월곶에서 소래포구로 넘어가려면 소래의 오랜 명물인 소래철교를 건너야 된다. (수인선 전철을
이용해서 건너는 방법도 있음) 이 철교는 옛 수인선(수원~송도)의 몇 남지 않은 흔적이자 수인
선 협궤(狹軌)열차가 기적소리를 날리며 바퀴자국을 남겼던 다리로 인천 남동구와 시흥시의 경
계를 이루고 있다.

수인선은 1937년 여름에 개통되었는데, 건설비 절약을 위해 일반 궤도(1.435mm)의 절반 정도인
협궤선(0.765m)을 깔았다. 이 철로는 왜정(倭政)이 소래와 달월, 안산 지역에서 생산되는 소금
과 1972년에 없어진 옛 수려선(수원~여주)을 통해 이천과 여주의 쌀을 인천으로 수송하려는 목
적으로 신설되었다. (수려선도 협궤선임)
처음에는 왜인이 세운 경동철도가 운영을 했으나 해방 이후 국가 소유가 되었으며, 인천 송도(
松島)와 논현, 소래, 달월, 군자, 원곡, 사리, 어천, 수원(水原)을 이어주면서 수인선 주변 주
민들의 소중한 발이 되어주었다. 그들은 소금과 농산물, 수산물을 싸들고 인천과 수원으로 이
동하여 판매를 했는데, 송도역 앞에는 그들로 인해 조촐하게 시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허나 승객 감소와 협궤열차 유지의 어려움으로 운행 횟수가 야금야금 줄어들었고, 1992년 '송
도~소래' 구간을 자르고 '소래~수원' 구간만 다니다가 1994년 9월 나머지 구간마저 절단을 내
면서 이 땅에 유일하게 남은 협궤열차와 협궤선은 끄집어내기 어려운 추억의 저편으로 완전히
종적을 감추게 된다.
이후 버려진 수인선을 광역전철로 다시 단장하면서 지루한 공사 끝에 2012년 6월에 '송도~오이
도' 구간이 개통되어 옛 수인선의 뒤를 잇고 있다. <지금은 인천역까지 연장되어 '인천~송도~
원인재~오이도' 구간을 운행하고 있음, 나머지 수원역~한대앞역 구간은 2018년 말 개통 예정>


▲  장도포대지에서 바라본 소래철교

▲  댕구산(소래포구 서쪽이자 장도포대지 뒷산)에서 바라본 소래철교

수인선 열차가 신세를 졌던 소래철교는 1937년에 개통되었다. 철교의 길이는 126.5m, 폭 1.2m
로 수인선이 폐선되자 자연히 사람들의 통행 다리로 활용되었다. 소래포구와 1992년에 개발된
월곶을 바로 이어주는 다리가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철교에서 인도교(人道橋)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소래철교는 소래포구의 명물로 지금까지 변함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으나 인천과 시흥 경계에 자리한 탓에 말썽도 다소 있었다. 2010년 2월
한국철도시설공단에서 철교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내렸는데, 이때 시흥시는 통행 안
전을 이유로 부실 것을 외쳤지만 소래철교로 단단히 재미를 본 인천시는 철교 보존을 외치면서
서로 갈등이 생겼다. 다행히 국토해양부가 다리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철거를 면하게 되었고 철
교의 건강과 통행 안전을 위해 철교를 보수했다.

2011년 여름, 문화재청에서 '인천 소래철교'란 이름으로 등록문화재로 삼으려고 하자 이에 뿔
이 난 시흥시는 '소래철교'로 할 것을 요구하면서 다시 쓸데없는 갈등을 빚었다. 그래서 아직
까지 등록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 (이래서 우리나라는 지방자치제를 하면 안됨)
또한 다리 보강공사가 끝나자 인천시에서 소래포구 축제에 맞춰 철교를 다시 개방했으나 시흥
시에서 소래 관광객의 월곶포구 불법주차와 쓰레기 무단투기로 월곶동 주민들이 고통을 겪는다
며 다리 남쪽에 철조망을 치고 사람들의 통행을 막아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인천에게는 이
철교가 소래포구를 두툼하게 수식해주는 소중한 존재이지만 시흥시에게는 월곶의 관광/외식 수
요를 소래로 빨아들이고 소래의 뒷치닥거리나 하는 인천의 얄미운 빨대로 보았던 것이다.


▲  소래철교를 건너다

소래철교는 비록 철교에서 은퇴하긴 했지만 이 땅의 철도 교량 가운데 가장 폭이 좁다. 그래서
2명이 지나가면 좌우가 꽉 찬다. 협궤열차가 바퀴를 굴렸던 선로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철판
을 깔았다. 그 밑은 썰물 때는 검은 갯벌이, 밀물 때는 서해바다가 넝실거리며 고깃배가 들어
온다. 철교 좌우에는 난간을 둘러 사람들의 안전을 배려했다.

이 철교가 소래의 명물이 되다보니 온갖 이상한 말이 생겨닜다. 소래포구를 찾은 연인들이 손
을 잡고 이 다리를 건너면 헤어지지 않는다는 말부터 해서 다리를 건너면서 소원을 빌 때 포구
로 들어가는 배가 있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까지.. 무슨 불상이나 신앙 대상물도 아닌 철
도가 지나갔던 철교일 뿐인데, 다리의 인기가 높다보니 그런 허무맹랑한 말까지 생겨나 철교를
좀 무안하게 만든다.


▲  소래철교에서 바라본 갯벌과 소래포구 (재래어시장)

소래철교를 건너면 동쪽에 어선들이 정박한 소래포구와 재래어시장, 서쪽에는 근래 복원된 장
도포대지가 있다. (소래포구에는 재래어시장과 종합어시장 등 2개의 어시장이 있음)

소래포구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해안 포구이자 해안 어시장으로 인기가 자자하다. 섬을 제외
한 인천 본토의 거의 유일한 포구이자 서울 근교의 거의 유일한 재래 어항(漁港)으로 썰물 때
는 서해바다가 저멀리 줄행랑을 치면서 검은 갯벌이 고스란히 드러나 포구로써의 실감이 좀 떨
어지지만 밀물이 되면 포구 바로 앞까지 바다가 밀려와 제법 포구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이때 배들이 들어와 바다에서 건져온 것들을 풀어놓는다.

소래는 인천과 월곶을 이어주던 나룻터이자 포구로 주변에 경작지가 많아 제법 괜찮게 살던 어
촌이었다. 왜정 때 인근에 소래염전이 생기고 수인선이 개통되면서 소금 수탈의 현장이 되기도
했으며, 해방 이후 북쪽 실향민들이 모여들어 정착을 했다. 포구 사람들은 바다에 나가 새우와
물고기를 잡아 젓갈을 만들었고, 수인선 열차를 타고 서울과 인천, 수원 등을 오가며 새우젓을
팔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소래는 한산했던 포구였다.
그러다가 1974년 인천내항이 준공되어 새우잡이를 하던 조그만 어선의 출입이 어려워지자 인천
항에서 가까운 소래로 배들이 몰려들면서 졸지에 새우파시로 부상하게 된다. 이때부터 서울/인
천 근교의 대표적인 포구로 두각을 드러냈으며, 매년 500만 명이 넘는 관광객과 장꾼들이 몰려
와 인천의 소중한 관광 꿀단지가 되었다. 포구의 대표적인 특산물로는 젓갈과 새우, 꽃게, 소
라 등이 있다.

비록 포구는 작지만 10톤 미만의 어선 200척 정도를 보유하고 있으며, 어시장에는 300개 정도
의 점포와 식당, 선술집이 들어서 있다. 휴일은 물론 평일에도 이곳을 찾는 수요가 상당하며,
싱싱한 회와 생선찌개, 각종 어패류와 건어류, 생선튀김, 젓갈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생선을
취급하는 점포에서는 즉석에서 회를 쳐주는데, 어시장 남쪽 포구 쪽에 그런 집이 많다.

소래란 이름은 지형이 소라처럼 생겨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와 냇가에 숲이 많은 솔내에서 비
롯되었다는 설, 지형이 좁아서 생겼다는 설이 있으며, 660년에 신라와 당이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군을 이끌고 온 소정방(蘇定方)이 산동 내주(來州)를 출발해 이곳에 상륙하여 머물렀다
고 해서 소래(蘇來)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정답은 아니다.


▲  댕구산에서 바라본 소래포구 재래어시장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소래 지역은 소래포구와 어시장이 전부인 인천의 변두리 어촌이었다.
그러다가 개발의 칼춤이 포구 주변을 싹 뒤엎으면서 어시장과 포구, 말쑥하게 솟은 고층 아파
트와 온갖 빌딩이 어색한 조화를 이루는 현장이 되었다.


▲  소래포구 재래어시장 내부
우리는 어시장을 간단히 둘러보고 바로 이웃에 자리한 장도포대지로 이동했다.


 

♠  소래포구 서쪽에 자리한 장도포대지(獐島砲臺址)
- 인천 지방문화재자료 19호

▲  소래철교에서 바라본 장도포대지와 댕구산

소래포구 서쪽 해안가에는 장도포대지와 댕구산이 자리해 있다. 소래철교에서도 뻔히 바라보이
는 그들은 예전에는 잡초만 헝클어진 언덕이었으나 최근에 산뜻하게 손질을 하면서 소래포구를
한층 꾸며주는 해안공원이 되었다.

장도포대는 1879년 화도진(花島鎭) 소속 포대로 설치되었다. 1876년 2월, 강화도조약(江華島條
約) 이후 왜국(倭國)이 서해바다를 멋대로 측량하며 개항지를 물색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인천
을 개항지로 요구할 것으로 짐작하고 혹시나 모를 외세의 침략에 대비해 어영대장 신정희(御營
大將 申正熙)와 강화유수 이경하(江華留守 李景夏)에게 명해 동인천에 화도진을 설치했다. 이
때 인천과 부평(富平) 해안 요충지에 장도포대, 논현포대 등 여러 포대를 설치해 인천 바다를
지키게 했다.

허나 1894년 화도진이 철폐되자 이들 포대는 거의 철거되었으며, 장도포대도 이때 없어진 것으
로 여겨진다. 워낙에 별처럼 나타나 별처럼 사라진 탓에 생전의 모습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터만 아련히 남아있었는데, 1999년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화도진도(花島鎭圖)'를 살펴본 결
과 포좌(砲座) 2개는 바다를 향하고 있고, 1개는 동남쪽을 향하고 있어 총 3개의 포좌가 있었
음이 밝혀졌다. 이후 2001년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개발의 칼질 앞에서 그 터를 구제했으며 근
래에 화도진도를 바탕으로 흙으로 토성을 씌워 포대를 복원했다.

장도포대 바로 옆에는 댕구산이란 조그만 언덕이 소래포구와 서해바다를 말없이 굽어보고 있다.
높이는 고작 40m 정도에 불과하지만 소래 일대가 바다에 접한 낮은 지대다 보니 제법 돋보인다.
그는 원래 한반도와 분리된 소소한 섬으로 그 모습이 마치 노루처럼 생겨서 '장도(獐島)' 또는
'노루목', '노렴'이라 불렸다. 장도포대의 이름도 바로 이 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후 대자연
의 힘으로 한반도의 일원이 되었으며, 왜정이 수인선을 만들 때 언덕 동쪽을 죄다 밀어버려 지
금은 반쯤 남아있는 상태이다.

댕구산이란 이름은 이곳에 포대를 설치하면서 대완구(大碗口)란 대포를 설치했는데, 그 대완구
가 댕구로 통용되면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대포산이란 뜻이다.


▲  공원으로 변신한 장도포대지, 댕구산
소래역사관 건너편에 장도포대지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  복원된 장도포대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현재 장도포대는 2개의 포좌가 재현되어 있다. 돌로 포대를 쌓고 윗쪽과 바깥쪽에 흙을 덮어서
토성처럼 만들었는데, 포좌 2개는 바다 쪽으로 구멍을 내었다. 근래 복원된 탓에 고색의 내음
은 아직 여물지 않았으나 한겨울이라 포대에 기댄 잡초들이 누런색을 발산하고 있고 포대를 이
루고 있는 돌들도 색깔이 제각각이라 조금은 빛바래 보인다.


▲  서쪽에서 바라본 장도포대

▲  동쪽에서 바라본 장도포대와 수인선 전철

▲  바다를 향해 입을 연 장도포대 대포의 소소한 위엄

▲  장도포대에서 바라본 서해 갯벌
마치 석유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유전처럼 온통 검은색이다. 다가가면 크게
혼이 날 것 같은 무시무시한 모습이지만 차가운 겉모습과 달리
많은 생물들이 의지하며 살아가는 생물의 보고이다.


※ 소래포구, 장도포대지 찾아가기 (2017년 2월 기준)
* 수인선 소래포구역 2번 출구를 나와서 오른쪽 소래역로를 따라 8분 정도 가면 소래역사관이
  다.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가면 바로 오른쪽에 장도포대지 정문이 있고, 곧바로 가면 소래
  철교 입구와 소래어시장이다. (수인선은 인천역에서 1호선, 원인재역에서 인천1호선, 오이도
  역에서 4호선과 연결됨)
* 1호선 개봉역<1번 출구를 나와서 도보 3분>에서 1번 시내버스/ 7호선 광명4거리역<4번 출구>
  에서 1, 510번 시내버스/ 1호선 광명역(고속전철역) 동쪽 정류장에서 11-3번 시내버스를 타
  고 소래포구입구나 월곶해안로에서 하차, 소래철교를 건너 소래포구로 이동한다.
* 인천1호선 선학역(4번 출구), 문학경기장역(2번 출구)에서 754번 시내버스 이용

★ 소래포구, 장도포대지 관람정보
* 매년 10월에는 소래포구축제가 열린다. 꽃게 등의 수산물 시식회, 특산물 판매, 꽃게/전어낚
  시 체험, 소래습지생태공원 갯벌체험, 갈대축제 등이 있으며, 소래철교와 소래빛의거리에서
  는 아름다운 야경이 펼쳐진다. 소래포구축제 홈페이지는 아래 댕구산 정상 사진을 클릭한다.
  (문의 인천소래포구추진위원회 남동구 도시관리공단 ☎ 032-466-3811)
* 장도포대지와 댕구산 관람시간 : 9시~20시 <동절기(11~3월)는 18시까지, 입장료 없음>
* 소래포구 소재지 :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111외
* 장도포대지 소재지 :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111-13 (아암대로 1614)


▲  소래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댕구산 정상
정상에 오르면 소래포구와 어시장, 월곶포구, 소래 주변 아파트들이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호구포에 자리한 조선 후기 국방 유적 - 논현포대(論峴砲臺)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6호

소래포구 일대를 둘러보고 고가식으로 되어있는 수인선을 따라 서쪽으로 걸어갔다. 인천논현역
과 호구포역을 지나면 논현포대근린공원이 나오는데, 그곳에 이날 마지막 행선지인 논현포대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호구포(虎口浦) 남쪽에 자리한 논현포대는 앞서 장도포대와 같은 목적으로 1879년에 화도진 소
속 포대로 축조되었다. 지금이야 주변이 죄다 아파트(논현휴먼시아)와 공장(남동공단)으로 바
다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이곳까지 바다가 거침없이 넝실거렸다. 게다가 포좌 앞
에는 갯골수로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 수로를 타고 혹여 침투할지 모를 외래 선박을 막으려는
목적도 띄고 있었다.
이 포대는 1894년 화도진이 철폐되면서 문을 닫았으며, 장도포대와 달리 약간의 흔적만 전해오
다가 근래 말끔하게 정비되었다. 포대는 포좌 아랫쪽에 잡석을 깔고 중단과 상단에 장대석(長
臺石)을 쌓았으며, 그 위에 흙을 덮었다. 넓게 다진 포좌에는 이동식 중포 2문이 설치된 것으
로 여겨지며, 예전에는 호구포대라 불렸으나 논현포대로 이름이 갈렸다.

논현포대가 자리한 호구포는 명칭 그대로 호랑이 입이란 뜻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범아가리'
라 불렸는데, 호구포 뒷산인 오봉산(五峯山) 자락에 호랑이 입 모양을 한 커다란 호구암(虎口
岩)이 떡하니 자리해 있었다. 그 바위는 검은 피부를 지니고 있어 주변 바위와는 다소 색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며, 호구포 사람들은 그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기며 무척 애지중지했다.

호구포에는 참으로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세상 만물이란 늘 양면성을 띄고 있는 터
라 누군가에게는 꽤 소중한 존재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징그러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바로 호
구암이 그렇다.
이 바위는 대부도(大阜島)와 안산(安山)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안산에 무덤을 쓴 지
체 높은 세력가의 자손이 매우 귀하여 대를 잇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끙끙 앓던 차에
마침 집 앞을 지나던 승려가 '호구암이 산소를 향해 입을 크게 벌리며 마치 무덤을 삼킬 기세
라 자손이 귀한 것이오'
알려주었다. 
그래서 자손들은 호구암을 옮기기로 했으나, 바위가 워낙 집채보다 커서 옮기는 것이 불가능하
자 호랑이 입을 부시면 될 것이라 생각, 아예 호랑이 턱에 해당되는 부분을 도끼로 찍어 부셔
버렸다. 그랬더니만 이후부터 자손이 번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왜정 시절에 호구포에 염전
을 만들면서 바위가 강제로 매몰되어 없어지게 되었는데, 마을의 명물이자 수호신을 잃어버린
호구포 사람들은 곡소리를 냈지만 안산 지역에 조상묘를 둔 이들은 쾌재를 외쳤다고 한다.

그리고 안산의 일원이 된 대부도 역시 호구암의 눈치를 적지 않게 보고 있던 모양이다. 대부도
에서는 이상하게도 개의 번식이 잘되지 않았는데, 이유를 알고보니 호랑이를 상징하는 호구암
이 대부도를 뚫어지라 보고 있어 그 기운 때문에 개들이 금방 죽어 나갔다는 것이다. 개는 호
랑이의 밥이래나 뭐래나?
허나 왜정 때 바위가 사라지자 개의 무덤이던 대부도는 개의 낙원이 되었다고 한다. 호구암이
위엄을 부릴 때는 안산과 대부도 지역은 울상, 바위 인근 주민은 싱글벙글이었지만 바위가 사
라지니 안산과 대부도 지역은 싱글벙글, 바위 인근 주민은 울상이 되었다.


▲  동쪽에서 바라본 논현포대 - 포대의 모습은 장도포대와 비슷하다.

▲  서쪽에서 바라본 논현포대
흙으로 두툼하게 다진 포대 아랫도리에 대포가 마음껏 포탄을 뿜을 수 있는
조그만 창을 내었다.

▲  강화도 포대를 연상케하는 논현포대 포좌
대포는 어디로 마실 갔는지 보이지 않고 그의 빈 자리에는 겨울 제국을
원망하는 낙엽들로 가득하다.

▲  청동중포(靑銅中砲)와 청동대포(靑銅大砲)의 위엄
청동대포는 1854년, 청동중포는 1876년에 제작된 것으로 1994년에 복원했다.
쟁쟁한 후배 대포들에게 밀려 이제는 뒷전으로 밀려난 녹슨 신세이지만
왕년에 이양선들의 염통을 쫄깃하게 건드린 역전의 대포들로
그 정정함은 아직 잃지 않았다.

▲  논현포대에서 바라본 포대 서쪽 쉼터

▲  논현포대에서 바라본 호구포역

논현포대를 둘러보니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겨울의 한복판이라 햇님도 17시만 넘으면 꽁무니
를 빼기가 바쁘고 겨울을 등에 업은 땅꺼미가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칼바람이 몰아치니 더 이
상 돌아다니기도 고통스럽다. 그래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따로 없는 인천 논현동(論峴洞)을
뒤로 하며 얌전히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소래포구를 중심으로 한 새해 맞이 인천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논현포대 찾아가기 (2017년 2월 기준)
* 지하철 수인선 호구포역 2번 출구를 나와서 서쪽(원인재역 방향)으로 도보 6~7분, 논현포대
  근린공원 남쪽에 자리함 (관람시간은 제한 없음)
* 소재지 -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648-1 (호구포로 2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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